박이문, ⟪현상학과 분석철학⟫, 지와 사랑, 2007.
1970년대에 쓰인 입문서의 개정판이다. 저자 박이문은 현상학과 분석철학을 ①20세기 초에 과학적 지식의 발달을 계기로 ②기존의 철학적 흐름, 정확히 말해 "철학적 지식의 본질"(21)이 무엇인가에 대한 전통적 견해를 전복하면서 나타난 ③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흔히 현상학에 그리고 분석철학에 각각 연결되는 '실존주의'와 '언어철학'은 철학적 방법론을 기준으로가 아니라 철학적 탐구 대상의 종류를 기준으로 확립된 이름이다. 이에 따라 저자는 비현상학적 실존주의, 비분석철학적 언어철학이 가능하다고 말하며 나 또한 이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짧지 않은 책이지만 주요한 해석적 테제들을 모아 한 문단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현상학은 경험과학자들이 소박하게 또는 안일하게 전제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 가능성--의식을 초월하는 것에 대한 의식이라는 "수수께끼(Hua II, 32)"--을 엄밀하게 해명하고, 궁극적으로는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앎을 추구한다. 한편 분석철학은 기존의 철학적 문제들 그리고 그에 대한 심오하고 난해한 답변들이 그저 언어의 문법적 구조나 기능, 한계 등에 대한 몰이해에서 기인한 것으로 진단하고 철학의 소임을 언어에 대한 혼동 없는 해명으로 제한한다. 그러나 두 사조는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이해라는 공동의 목표에서 만난다. 예컨대 '생활세계[Lebenswelt]' 탐구에 집중한 후기 후설과 실존의 본질로서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를 내세운 하이데거, 의식과 대상의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경계 및 형이상학적 교차를 '살[chair]'이라는 개념으로 잡아낸 메를로-퐁티는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를 끝까지 밀어붙인 결과로 모든 앎은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 뿌리박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른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상식에 반하는 철학적 주장에 대한 무어의 반발, 자연언어의 논리적 번역 가능성을 신뢰하며 기호논리학을 정비한 러셀의 희망, 모든 언어적 혼동을 중단시키고 철학에 물리학처럼 정밀한 앎을 선물해줄 이상언어(ideal language)를 꿈꾼 카르납의 야욕을 초기에는 수용한 듯 보이나 후기에 가서는 언어의 의미란 언어가 그림처럼 반영하고 지시하는 대상 또는 사태의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사용되는 구체적인 삶의 맥락에 의해, 맥락마다 달라지는 일종의 놀이(game)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라는 수정된 주장을 내놓는다.
위 문단을 통해 알 수 있듯 이 책은 270쪽 남짓의 짧은 지면에 현상학과 분석철학이라는 거대한 두 철학 사조를 비교, 분석할 뿐 아니라 각 사조를 대표하는 철학자들의 주요 테제들까지 소개하고자 분투한 야심작이다. 비전공자마저 이해하기 쉬운 수려한 한국어로 쓰여있을 뿐 아니라, 각 철학자들의 견해를 단순히 요약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예시를 새로이 제공하거나 저자만의 비판적인 시각까지 반영함으로써 독자가 주어진 내용과 어느 정도의 사유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무려 50년 전에 한국에서 이런 철학서가 나왔다는 사실이 감탄스럽다.
그러나 워낙 오래된 책이라 최신의 연구 성과들을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평생을 전공해도 정확한 이해와 비판에 성공하기 어려운 학자들을 무려 8명이나 소개하겠다는 거대한 기획 때문인지, 저자의 단언적인 어조가 무색하게 납득하기 어려운 해석 및 주장들이 가끔 나타났다.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 그리고 분석철학자들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러려니 읽고 넘어갔지만, 후설과 하이데거에 대해서만큼은 저자의 해석에 대한 반박을 감히 내놓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나의 해석 또한 결코 절대적이지 않을 것이므로 아래의 반박에 대한 재비판을 열렬히 환영한다. 비판받는 만큼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① "[...] 후설이 말하는 현상은 [...] 의식이라고 부르는 내부에 나타나는 존재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과학에서 말하는 현상과 현상학에서 말하는 현상은 다른 내용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은 다같이 어떤 존재, 즉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킨다."(27, 강조는 필자)
<표현이 남길 수 있는 오해와 관련된 비판> 후설은 의식에 내실적인[reell], 즉 의식 내부적인 코기타치오네스로서의 노에시스와 내실적으로 초재하는, 즉 의식에 내재하지 않는 노에마를 구분한다. 후설의 '현상'은 노에시스뿐 아니라 노에마 역시 포함하는 개념이므로 이것을 "의식 내부에 나타나는 존재"라고 표현한다면 노에마 또한 의식 내부에 내재하는 표상과 비슷한 것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남길 수 있다. 노에마는 그것이 의미적으로 해석되든(푈레스달, 스미스, 맥킨타이어 등의 서부 연안학파 등의 주장) 대상적으로 해석되든(드러몬드 등의 동부 연안학파 및 자하비 등의 주장), 다시 말해 노에마가 '의미'라는 이념적 대상이든 우리 주변의 사물과 같은 구체적인 대상 자체이든지 간에 의식에 초월적인 초재자이다. 의식은 이 초재자들과 지향적 관계를 맺을 뿐, 자신의 내부로 그것들을 흡수시키지 않는다. 후설의 환원이 대상을 관념화시킨다는 저자의 표현(109-110 등지) 또한 같은 이유에서 문제적이다. 후설이 취급하는 대상들은 소위 실재론이 취급하는 대상들과 동일한 대상들이며, 다만 지향성이라는 틀 안에서 의미 부여된 노에마로서 탐구될 뿐이다. (최근 들어서는 후설이 심적 내용에 대한 외재주의(Mental content externalism)의 직관들을 포섭할 수 있다는 견지에서, 후설에게는 의식의 '내부'와 '외부'라는 구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연구들도 나오고 있다. 학술지 'Synthese'는 2008년에 발간된 한 호를 아예 이 주제에 할애해 취급했다.)
나아가 노에시스와 노에마가 "우주 안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라는 표현 또한 초월론적[초월구성적] 환원의 의미를 왜곡할 가능성이 있다. 초월론적 환원은 우주를--사실 저자가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우주'라는 표현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우주적 시공을 의미한다면---초월하는 초월론적 자아[transzendentale Ego]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저자가 '초험적 자아'라고 번역한 초월론적 자아는 우주적 시공을 비로소 구성하는 주체로서, 설령 우주 내부의 생활세계에 뿌리박혀있다 할지라도 우주적 시공의 문자 그대로 '일부분'인 심리학적 자아와는 구분돼야 한다. 그러므로 초월론적 자아가 작용시키거나 의식하는 노에시스와 노에마를 포괄하는 '현상'은 그것을 통해 우주적 시공이 구성되는 무엇이지, 우주적 시공의 존재를 선행해서 전제한 후에 비로소 이야기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이어지는 인용문을 보면 저자가 이 부분을 간과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상술한 인용문에서의 '우주 안에서'라는 표현이 부적절하다고 느껴져 가혹하지만 굳이 지적한다.)
② "이러한 의식의 [초험적/초월론적] 차원은 감각, 감성과 같은 의식과는 달리 순수한 것으로서 시간이나 공간을 초월해서, 그리고 어릴 때의 나와 늙었을 때의 나와의 차이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순수한 지적 의식 혹은 지적 자아를 가리키는 것이다."(30, 강조는 필자)
<망각된 바에 대한 보충> 후설의 초월론적 자아가 근본적으로 지적인 자아라는 저자의 지적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우선 초중기 후설의 경우 대상을 객관화하는 지적 작용이 대상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감정적 작용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의지적 작용에 논리적으로 선행한다고 일관적으로 주장한다(제 5논리연구 41절, ⟪이념들⟫ 1권 116-117절 등지). 무언가를 사랑하거나 소망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그 무언가가 객관화되어야, 즉 대상으로서 먼저 정립돼야 하지 않겠냐는 취지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지/정/의의 구분 가운데서 지의 우선성 또는 근원성을 말하는 주장이지 자아에게서 정과 의를 박탈하는 주장이 아니다. 다른 한편 후기 후설은 모든 비객관화적 작용이 객관화적 작용에 의해 정초되어야 한다는 초중기의 주장을 수정하며 비지성적 본능이 지적 객관화보다도 근본적이고 수동적인 차원에서 작동한다고 말한다(N.I. Lee (2003), Phenomenology of Feeling in Husserl and Levinas, 인문논총 제49집, p.105 등지 참고.) 요컨대 어느 시기의 후설 사상을 살펴보아도 초월론적 자아가 '순수하게' 지적인 자아라는 표현에는 문제가 있다. 후설의 초월론적 자아는 감정적이고 실천적인 자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후설이 "초험적[초월론적] 차원, 순수한 지적 차원에서의 인식을 가려내고 있지만, 하이데거나 메를로-퐁티[...]의 철학에서는 각기 다자인과 지각이 지성을 포함한 모든 의식의 바탕이 되는데, 다자인이나 지각은 순수한 의식과 대상과의 지적 관계이기 전에 육체와 감성과 욕망을 가진 구체적인 인간과 대상과의 관계로서 그것은 이른바 실존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71)이라는 저자의 대비에도 문제가 있다. 첫째, 하이데거가 후설보다 현존재의 실천적 차원을 훨씬 부각한 것은 사실이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제 1편 15-16절 등지에서 인간이 도구와 맺는 관계를 분석하며 우리가 망치를 지적으로 분석하게 되는 것은 망치가 고장나 더 이상 망치를 통한 구체적인 행위의 실천이 불가능할 때뿐이라며, 평소에 인간은 언제나 이미 목표-수단의 실천적인 관계망 안에서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후설이 자아의 실천적 차원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설정한 '지적 차원'이 하이데거가 암시하고 저자 박이문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까지' 지적인 것인지는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망치를 고치기 위해 그것의 구조를 이론적으로 파악하고자 할 때뿐만 아니라, 특별히 지성적인 사고가 선행함 없이 그저 망치를 그 용도에 몰입하는 채 사용할 때조차 망치는 객관화되어있어야 한다. 망치를 존재하는 것으로 정립하면서 대상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특정한 욕망의 실현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단 말인가? 쉽게 말해 망치를 쥔다는 촉각적 경험에서 이미 망치의 존재는 정립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둘째, 메를로-퐁티가 후설보다 육체의 차원을 중시한 것 역시 사실이다. 그리고 후설이 이따금 신체를 그 비존재가 상상 가능한, 환원의 대상으로 삼으며 다른 사물과 유사하게 취급하는 데카르트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후설 역시 메를로-퐁티 못지 않게 지각에 있어서 육체의 역할을 높이 사고 있다. 예컨대 ⟪사물과 공간⟫ 8, 9, 10장에서 후설은 운동감각에 해당하는 키네스테제 감각을 심도 있게 분석하면서 '자아의 담지자'인 육체의 운동이 어떻게 시각장의 변동을 가져오고 가능한 지각의 범위를 제한 또는 확장하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사물 구성에 기여하는지 세세하게 탐구하고 있다. 후설에게 육체는, 정확히 말해 환원 이후에도 경험되는 말하자면 살아있는 육체는 지각의 준거점이자 필수불가결한 가능조건이다. 요컨대 후설이 파헤치는 의식과 대상 사이의 지향적 관계 또한 "육체와 감성과 욕망"의 차원을 무리 없이 포섭한다.
③ "[언어보다] 경험에 초점을 두는 현상학과 언어에 초점을 두는 분석철학적 방법은 언어와 앎의 관계에 대한 각기 다른 견해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언어 이전의 앎이 있다고 믿을 때 현상학의 철학적 방법에 대한 주장이 가능하고, 언어로 표현되었을 때 비로소 앎이 가능하다고 믿을 때 분석철학의 철학적 방법에 대한 주장이 있을 수 있다."(41)
<망각된 바에 대한 보충> 후설이 선술어적 경험, 즉 저자가 "언어 이전의 앎"이라고 표현한 것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그와 같은 경험을 술어화하고자 할 때만 비로소 표현과 언어의 문제를 취급하는 것처럼 읽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후설이 언어보다 경험을 더 중시했다고 단적으로 확언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후설 또한 분석철학자들 못지 않게, 다만 다른 방식으로 언어에 날카로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를 들어 후설은 ⟪이념들⟫ 1권 3부 4장에서 (중립화 변양이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경험이 동반하는 존재의 정립[Setzung]이 정립의 결과로서 근원의견[Urdoxa]--무엇이 존재한다는 데 대한 확실한 믿음--을 형성하거나 근원의견의 의견적 양상적 변양태들[doxische Modalitäten]을 형성함으로써 (지적 판단, 감정적 표현, 의지적 표현 모두를 포괄하는) 문장[Satz]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경로를 세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여기서 후설이 중요하게 생각한 철학적 기획들 중 하나가 논리학을 현상학적으로 정초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도 좋을 것 같다. ⟪논리연구⟫ 중 제5, 6논리연구의 상당부분이 바로 술어적, 범주적 판단의 구조 및 가능성을 해명하는 데 할애되어있다. 요컨대 언어의 구조 및 기능 그리고 특히 '경험의 언어화'는 후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철학적 탐구 주제 중 하나였다. 현상학이 놓쳤다고 저자가 비판한 "존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한 앎"(96)을 현상학은 놓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후설에게뿐만 아니라 하이데거에게서도 마찬가지다. 후기 하이데거 사상의 경우 그 목표 자체가 존재와 언어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데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⑤ "현상학의 방법은 경험서술이며 분석철학의 방법은 언어의 분석이다. [...] 서술은 반드시 어떤 대상을 전제로 한다. [...] 그러나 대상은 구체적인 대상과 관념적 혹은 개념적인 대상으로 구별된다. 책상 위에 있는 잉크병은 구체적인 대상의 예가 되고 3이라는 수적 개념, 금송아지 같은 것은 관념적 혹은 개념적 대상의 예가 된다. 서술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전자에 속하는 것들, 즉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대상일 뿐이다."(45)
<비판> 현상학적 서술이 오직 구체적인 대상에 대해서만 가능하다는 상술된 주장은 옳지 않다. 후설은 이념적 대상인 본질에 대한 직관 및 서술을 가능한 것을 넘어 현상학의 목표로 삼고 있으며, 상상작용에 대해서도 상세한 분석을 가하고 있으므로 '금송아지' 또한 현상학적으로 서술 가능한 대상에 포함된다. 수에 대해서 역시 마찬가지로 후설은 '2x2=4'와 같은 수학적 진술의 구조를 여러 곳에서 분석하고 있다. 구체적인 예시로 제6논리연구의 18절은 충족[Adäquation]의 개념을 설명하는 가운데 '5의 3승의 4승'이라는 복잡한 수를 명료화하는 방법을 추적한다. 저자가 현상학이 본질학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서술을 감행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 현상학적 서술과 본질 직관이 서로 다른 방법론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 같은데, 본질 직관이 결국 본질에 대한 현상학적 서술로 이어지는 것이며, 비구체적 이념적 대상 일반과 본질 자체는 당연히 개념적으로 구분돼야 함을 생각하면 여전히 해당 인용문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⑥ "이렇게 해서 [초월론적 환원을 통해] 현상학은 초험적[초월론적] 자아라는 의식으로서의 주체와, 에이도스라고 부르는 대상인 객체라는 인식의 양극을 관념적[이념적] 차원에서 찾아내기에 이른다. 후설은 주체자인 위와 같은 의식과 그 대상을 현상학적인 용어로 각기 노에시스, 그리고 노에마라고 이름짓는다."(52)
<비판> 노에마는 에이도스에 한정되지 않는다. 내가 지금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구체적 의미대상[Sinnobjekt]인 노트북 또한 노에마가 될 수 있다. 의식 작용의 모든 상관자가 노에마가 될 자격을 가진다.
⑦ "그러나 후설의 현상학은 몇 가지 근본적인 내재적 문제를 안고 있다. 첫째, 인식대상으로서의 '의미대상'의 문제이다. 의미대상은 에포케와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작업 뒤에 드러난 대상으로서 그것은 객관적으로 의식에 그냥 주어진 것으로 지적 직관에 의해서 파악된 존재이다. 이와 같이 해석에 의해서만 인식대상의 객관성과 아울러 인식의 객관성이 설명된다. 그러나 또 한편 의식은 정체,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다이내믹한 역학을 갖고 있어서 그 대상을 지향한다고 주장되고, 그럼으로써 대상은 그냥 수동적으로 의식에 반영되지 않고 **의식, 더 정확히 말해서 초험적[초월론적] 자아에 의해서 '구성'**되었다고 주장된다. 그러나 위와 같은 두 가지 설명은 양립하기 어렵다. (i)만약 전자의 주장이 옳으면 인식의 객관성은 설명될 수 [있]지만, 의식의 지향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ii)거꾸로 의식의 지향성을 고수하면 한 대상이 구체적인 여러 가지 지각을 통해서 하나의 통일된 '의미대상'으로 파악되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111, 강조와 넘버링은 필자)
<비판> 인식 대상이 객관적이라는 사실과 지향적 구성의 산물이라는 사실은 결코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태의 양면일 뿐이다. (i)은 후설에게 '객관성(또는 '대상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오해한 결과로 보인다. 후설이 말하는 파악 또는 해석[Auffassung, Deutung, Interpretation 등]이 적용되는 대상은 아직 완전한 의미에서의 객체가 아니다. 저자가 아닌 후설이 "그냥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물론 논란이 많은 개념이기는 하지만--비지향적 감각내용 또는 휠레에 불과하며, 그 휠레는 주체의 지향적 파악 또는 해석을 거쳐 비로소 객관화된다. 따라서 대상의 객관적 주어짐이 고정된 것으로서 성립한 후 (알 수 없는 이유로 의식의 지향성과 양립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해석이 그에 따른다는 취지의 (i)은 폐기돼야 할 주장이다. 한편 (ii)는 후설이 주구장창, 솔직히 말하면 지겨울 정도로 주장하는 다자에서의 일자에로의 통일 즉 '동일화 종합'이라는 지향적 체험을 망각한 결과다. 여러 지각의 다양체들[Mannigfaltigkeiten]을 통일시켜 그것을 종합해내 하나의 대상으로 객관화시키는 과정이 곧 동일화 종합에 해당하며, 이 과정은 지각에 대한 후설의 거의 모든 현상학적 서술들 가운데서 지각의 불충전성만큼이나 자주 분석된다.
⑧ "그래서 후설이 말하는 '상호주관성' 혹은 공동체적 자아는 어떤 특수한 자아 혹은 주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각 개개의 자아 혹은 주체 간의 합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어떤 대상 X가 상호주관성에 의해서 소나무라고 결정된다는 말은 개개인의 주관 위에 덮쳐 있는 별개의 주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이 아니라, 한 공동체에 살고 있는 개개인이 다같이 X를 소나무로 인식하는 데 합의했다는 말이 되겠다. 그러나 삶의 '상호주관성'을 인정하게 되면 우리는 앎의 상대성 혹은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 이 뜻을 돌려 설명하자면, 만약 우리가 마치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 나타나는 주인공 잠자처럼 하루 아침에 우리 모두가 갑충으로 변신하게 되면, 우리는 X를 쓰레기로 다같이 상호주관성에 의해서 인식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115, 강조는 필자)
<비판> 명증이 상호주관적으로 구성된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반드시 객관적 진리의 존재가 소거되는 것은 아니다. 후설에게 객관적 진리는 항상 이념[Idee]으로서 잔존하며, 다만 그것을 향해 다수의 주관들이 서로의 사적 명증들을 비교하고 그와 관련한 토론을 벌이며 다가갈 뿐이다. 제시된 예시에서 갑충들이 다 함께 X를 쓰레기로 인식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인식이 객관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설령 저 인식이 객관적 진리에 해당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실 자체가 후설에게의 참됨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는 것 같다. 같은 대상이 사람에게는 소나무로, 갑충에게는 쓰레기로 인식되는 상황은 '사람은 X를 소나무로 인식한다'와 '갑충은 X를 쓰레기로 인식한다'는 양립 가능한 참된 명제들만을 낳을 뿐 'X가 객관적으로 무엇인지는 어떤 단체가 그것을 인식하느냐에 의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는 결론을 낳지 않는다.
단호한 비판들을 많이 감행했으나 앞서도 말했듯이 전반적으로 즐거운 독서경험이었다. 특히 현상학이 어째서 실존주의와 친화력을 가지는지, 사르트르의 '자기기만'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비트겐슈타인의 '용도의미론(use theory of meaning)'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에 대한 서술은 정말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나 또한 서로 다른 현상학자들을 비교하는 좋은 학술서적을 쓰는 것이 삶의 중대한 목표 중 하나인 만큼 배울 점이 많았다. 다만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인권감수성이 현저히 부족한 예시들--여성은 남성과 달리 "돈 많은 사장에게 시집가서 팔자를 고칠 자유"가 있다든지 ("그러나 나는 한국 남자로서 정치가가 될 수도 있고 작가가 될 수도 있"(130)다든지) 예술언어의 역량을 설명한다는 명목 하에 사람을 '말라붙은 메주덩이'나 '말하는 돼지'라고 비유한(181) 대목들--이 종종 튀어나와 좌절스러웠음을 고백한다. 내가 책을 쓸 수 있을 만큼 성장했을 때는 특정한 집단의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예시만을 사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원문은 개인 블로그 박이문, <현상학과 분석철학>에 대한 비판적 단상 에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