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옥스퍼드 Very Short Introduction 시리즈 중 <홉스>에 대한 번역서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를 꽤 신뢰하는 편입니다. 다만 이 시리즈의 타겟 독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저자들마다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 보였습니다.
예컨대, <불교> 같은 경우는 학부 1학년 입문서에서 해당할만큼 개략적이고 대충인 정보들이 담겨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인류학>도 (<불교>보다는 낫지만) 학부 1, 2학년 정도가 대상인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 <문학 이론>은 학부생 대상인 것 같은데, 대학원생이 복습 겸 읽어도 나쁘지 않을정도로 충실히 적혀있는 책입니다.
이제 이 <홉스>는 어디에 속하냐. 홉스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홉스가 가진 지성사적 맥락, 그에 대한 반응으로 홉스가 어떤 주장을 했는지, 홉스의 영향과 오늘날 홉스 학계의 주요 해석에 대한 나열까지. 완벽합니다.
특히 리처드 턱이 제 기억으로는 퀜틴 스키너류의 "지성사"쪽에 속해있어서 그런지 (예전에 제가 짧게 소개한 리처드 왓모어 책에 나오는 부류들) 이런 것에 민감하더라고요.
(1) 간단한 배경
; 이제 중세 스콜라 철학이 지고, 르네상스로 인해 고전 학문의 부흥이 시작됩니다. 명심할 점은 아직 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이 곧 "철학자"들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들을 부활시키고, 오늘날에 적용한다는 점에서 "철학자"와도 겹치지만, 키케로나 투키디데스 같은 사학/정치학적 연구나 고대 비극/운문에 대한 문학적 연구 등도 자유롭게 했습니다.
(이제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학자들로는 에라스무스나 마키아벨리 등이 있죠.)
이 과정에서 고대부터 잊혀졌던 두 가지 문헌이 튀어나오면서 판도가 크게 바뀝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와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피론주의 개요>입니다. 이 두 문헌을 통해서 기존의 스콜라 철학/혹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한 확실성이 크게 공격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회의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하죠. (이 시기를 대표하는 학자로는 몽테뉴가 있습니다.)
이 순간 이제 홉스와 데카르트 등, 최초의 속칭 "근대 철학자"들이 회의주의 문제를 다루면서 부상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회의주의에 대한 대응으로 최소한 무언가 확실한 건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아마 이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건, 갈릴레이 - 뉴턴 - 보일에 이르는 "근대 자연 과학"이 무언가 설득력 있고 의미있는 지식 체계를 만들었다는 점에 있을 겁니다. (아직 이때는 이들 자연과학이 "자연 철학"으로 불렸다는 점을 상기하길 바랍니다.)
(2) 홉스의 세 가지 회의주의
(2-1) 인식론적 회의주의
홉스 역시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인식론적 회의주의에 반응합니다. 그는 데카르트의 '악마'처럼 모든 외부 자극이 환영이고 가짜일 가능성을 수용합니다. 허나 데카르트의 "코기토", 즉 생각하는 자아와는 다른 결론에 도달합니다.
홉스가 보기에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외부 대상을 정확히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저 외부 대상에서 주어진 자극/표상만이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홉스는 이 표상을 인식하는 "코기토"의 확실성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홉스에게 이 표상을 인식하는 자아 역시 하나의 표상? 흐름일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흄적인 자아 다발이나 불교의 오온과도 비슷한 생각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홉스에게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어떤 "표상"(이게 외부 대상이든 이걸 인식하는 코기토이든 간에)이 주어진다는 점이고, 이 "표상"이 지속적으로 변한다는 점입니다. 홉스는 자연과학을 받아들여서, 이러한 변화를 위해서는 외부 대상의 지속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즉, 홉스에게 확실한 것은 데카르트 같은 "자아"가 아니라,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인과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변하고 있는 외부 세계입니다. (홉스가 정확히 인과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주장을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무언가가 변하기 위해서는 어떤 원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인거죠.)
이 외부 세계에 대한 생각은 "신"에 대한 데카르트와는 굉장히 다른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이는 (2-3) 종교적 회의주의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2-2) 정치적/윤리적 회의주의
몽테뉴부터 시작된 회의주의 전통은 마찬가지로 윤리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습니다. 세상에 이토록 많은 윤리적인 주장과 규범들이 있는데 어떻게 하나의 규범만이 옳은 것일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처음으로 윤리의 가능성을 옹호한 것은 그로티우스와 자연법 전통입니다.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i)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보존/생존하게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깁니다. (ii) 이를 위해서는 서로 공격을 하지 않아야하는데, 인간들 각자는 (i)의 자기 보존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공격하지 않도록 하는 합의가 가능하고, 이를 통해서 윤리가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홉스는 큰 줄기에서 이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다만 홉스는 그로티우스의 주장에서 한 가지 반론을 제기합니다. 과연 사람들은 "어디까지가 공격이고 어디까지가 생존을 위한 것인지 합의가 되는가?"
(2-1)에서 보았듯, 홉스에게 인식론적으로 확실한 것은 표상들이 지속적으로 변하고, 이를 변하게 하는 외부 세계의 운동이 있다는 점뿐입니다. 그렇다면 이 표상들을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드리는지는 사람들마다 어떠한 일관된 기준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단순히 기지개를 켜기 위해 손을 올리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위협을 위한 행동으로 받아드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그로티우스의 자연법에서 (i) 인간 모두가 가지는 자기 보존의 욕구와 (ii) 이를 통한 윤리의 확립을 수용할지라도, 여전히 세상은 그 "윤리"의 정확한 범위를 알 수 없기에 혼돈으로 치닫습니다.
그래서 이제 홉스는 "리바이어던"을 주장하는 겁니다. 이제 이 윤리의 범위를 정해주는 "주권자"가 필요하고, 이 주권자가 정한 "기준"은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기준의 문제이므로)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자연법에 따른 윤리를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2-2-1) 리바이어던에 대한 몇 가지 오해와 문제들
a) 주권자는 "자연법"에 대한 기준을 정해주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굉장히 제한적인 역할만을 합니다. 즉, 사람들이 모두 "적절히 생존할 수 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기준만을 정하는 것이죠. (다만 이 생존이 무엇이고, 이를 위한 역할이 무엇인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굉장히 많은 것을 하는 주권자일 수도 있습니다.)
b) 리바이어던 내에 있는 문제는 바로 저항권의 문제입니다. 기본적으로 리바이어던이 생긴 이유는 "자연법"의 기준을 정하기 위한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주권자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명령을 내린다고 합시다. 이 경우 소수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홉스의 책에서는 분면 개인들은 주권자가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경우 이에 대해 저항할 수 있다고 기술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사형을 당하기 위해 끌려가는 범죄자는 이에 대해 저항할 수 있습니다.) 다만 홉스는 이 내용을 본격적인 "저항권" 혹은 불복종을 통해 주권자를 끓어내리는 문제로까지는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홉스 체계가 가진 어려움 중 하나입니다.
(2-3) 종교적 회의주의
(2-1)에서 보았듯, 홉스에게 인식론적으로 확실한 것은 지속적으로 변하는 외부 세계뿐입니다. 그렇기에 홉스는 데카르트류의 "우리들의 인식의 확실성을 보증하는 선한 신"이라는 개념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다만 홉스는 신을 믿었는데, 이 신은 "최초의 원인"에 가깝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홉스는 (무신론자라고 공격당했지만) 기독교의 신을 안 믿었을뿐, 신 자체는 믿은 이신론자에 가깝습니다.
이제 홉스는 이 "최초의 원인"에 대한 믿음, 경외에 기반한 자연 종교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았죠.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본성에 기반한 "자연법"은 이 "최초의 원인"에 의해 보증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홉스는 무신론 자체는 무식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람들이 믿는 "자연 종교"가 굳이 "기독교"라는 형태를 가져야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홉스의 <리바이어던>에서 굉장히 길게 주장하고 논의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당대의 신학적 주장들 몇 개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기존 세대에 속하는 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이 있습니다. (파리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아베로에스주의자들, 토미즘을 모두 포괄해서) 이들은 이성을 통해서 온전한 신을 알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허나 이미 이 주장은 1640년대에는 신앙인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회의론을 통해서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지점을 만들고, 이 지점에 믿음/신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신의 영역을 만들어두었죠. (이를 "신앙주의"[fideism]이라 합니다.)
여기서 크게 3가지 입장이 생깁니다. 첫째 입장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은 신이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나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걸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 가지면 무엇을 믿든, 어떻게 행동하든 그렇게 큰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당연히 일종의 종교 다원주의로 귀결되고 말았죠. 게다가 이 입장에 따르면 특별히 기독교를 믿을 이유도 없고, 종교 일반을 믿을 이유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번째 입장이 나옵니다. 샤롱-파스칼의 접근입니다. (프랑스에서 주류였음.) 이들은 종교적 믿음이, 개인의 행복 - 생존을 향상시킨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톨릭 국가에서는 가톨릭을 믿는 것이 좋습니다. 이 입장도 문제에 봉착합니다. 여기에는 각자 종교를 믿을 이유는 충분하지만, 굳이 그 종교가 기독교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지금 사회에서 대세인 종교를 따르면 그만이니깐요. 또한 종교가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굳이 믿을 필요도 없어집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로마처럼 기독교의 영향이 적었던 시기에는 굳이 기독교를 믿지 않았을 겁니다.
이제 여기서 마지막 입장이 나옵니다. 영국에서 주류였던 입장으로 칠링워스 등이 주장합니다. 바로 우리가 오직 전해지는 자료로만 알 수 있는 역사처럼, 기독교 역시 "우리가 믿을만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홉스 역시 이에 동의합니다. 그가 보기에 우리는 "최초의 원인"에 대한 경배를 기반으로 한 "자연 종교"를 가질 수 밖에 없고, 기독교는 이렇게 성립한 "자연 종교" 중에서 가장 "믿을만한" 역사적 기반/자료를 가진 종교라는 것입니다.
(2-3-2) 홉스의 노력 ; 역사적 기독교 신앙주의와 철학의 조화
당연히 이 "믿을만함"은 이성의 영역이고, 그렇기에 홉스 자신의 철학과 조화를 이루어야할 겁니다. 이를 위해 홉스는 크게 세 가지 반론에 대해 세 가지 답을 내놓습니다.
a) 홉스의 형이상학과 영혼을 주장하는 기독교의 내용이 통합될 수 있는가? 홉스는 이를 성경이 영혼을 주장하지만, 어디에도 이 영혼이 비물질이라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영혼을 물질적 - 인과론적 대상으로 취급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을 보존할 수 있는 겁니다.
b) 그렇다면 온갖 기독교에 기반한 주장 중에서 무엇이 "믿을만한" 가장 핵심이 되는 기독교의 교리인가? 바로 예수가 메시아이고, 그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점입니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최선을 다해 옹호하고자 했던 내용은 이 영생과 자신의 유물론과의 조화였다고 리처드 턱을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점에서 아마 턱은 이게 삽질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c) 마자막으로 교리를 누가 결정하는가? 이게 홉스의 전기 입장과 후기 입장이 크게 달라지는 부분입니다. 홉스는 초창기에는 교회에 어느정도 권한을 부여했지만, <리바이어던>에서는 교회의 권한을 부정하고, 이 권리는 주권자에게 넘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