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동양철학은 거의 알지 못하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예'나 '효'에도 어느 정도의 융통성은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가령, 맹자와 순우곤의 논쟁이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요. 순우곤이 “남자와 여자가 물건을 주고 받는 것을 직접 하지 않는 것이 예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맹자는 "그렇다"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순우곤이 “그러면 형수가 물에 빠진 경우라면 손으로 끌어 당겨줘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맹자가 제시하는 대답이 흥미로운데요. 맹자는 '예'가 단순히 규범주의적이고 의무론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도 손으로 끌어 당겨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승냥이 같은 짓이오. 남녀가 물건을 주고받는 것을 직접 하지 않는 것은 예이고, 형수가 물에 빠진 경우 손으로 끌어 당겨주는 것은 권도입니다.”(이루 상 7-17)
'효'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떤 정해진 법칙을 엄격하게 따르는 것이 효라기보다는, 맥락과 상황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이 유교 전통에서 자주 제시되던 논의였던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전에 리쩌허우의 『논어금독』이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논어』가 일종의 '정서'에 기반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주장을 전개하는 책인데, 『논어』의 논리가 '정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니, 그 논리가 단순히 일관적이고 체계적인 윤리 규범과는 거리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또 유교를 비트겐슈타인적 언어게임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유명한 연구자로 허버트 핑가레트(Herbert Fingarette)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핑가레트의 책은 오래 전부터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실제로 읽어보지는 못해서 제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위의 논의와 비슷한 맥락에서 유교가 말하는 '예'가 단순히 경직된 체계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내용인 것으로 들었습니다.
또 유사한 논의를 전개하는 분이 국내의 이승종 교수님이신데요. 이승종 교수님의 『동아시아 사유로부터』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가 사상이 모두 공통적으로 특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2인칭적 사유라고 강조합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예전에 서평을 쓴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