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도 자식으로써의 효행일까요?

안녕하세요. 참 오랜만에 들어와봅니다.
2년 전에 저희 할머니가 넘어지시고 요양병원에 몇달 계시다가 작년 5월쯤에 돌아가셨습니다. 간간히 어머니와 연명치료 내지는 병상에서 노인의 치료에 관한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소위 콧줄이라 불리는 비위관을 저희 가족은 하기 원칠 않았는데 다행히도(?) 병원 측에서 받아들여주더군요.
근데 대부분의 요양병원은 그러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모를 굶겨 죽일거냐면서 말이죠. 근데 이 비위관이 비수면 내시경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식도의 구토반사를 계속 유발하는데다가 한 번 삽관하면 의사가 아닌 이상 뺄 수도 없다고 합니다. 당연히 불편할 수 밖에 없어 억지로 빼려고 하는 시도가 있는데 식도 손상의 우려가 있어 이걸 막으려고 손발도 결박시킨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히려 이렇게 사람답게 살지 못하도록 부모를 놔두는 것이 불효 아니냐라고 되묻고 싶은 것이죠.
앞으로도 계속 논쟁이 될 주제겠지만 노인의 연명치료, 더 나아가서 의식은 있지만 회복 가능성이 없음에도 치료를 계속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현재는 어떻게 논의가 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특히 동양철학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 궁금하네요. 기존에 제가 접한 자료는 인권이나 존엄성 등의 내용뿐이었던지라 효 개념과 연관지어 설명한 사례가 있는지 추가적으로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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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동양철학은 거의 알지 못하지만, 유교에서 말하는 '예'나 '효'에도 어느 정도의 융통성은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가령, 맹자와 순우곤의 논쟁이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하는데요. 순우곤이 “남자와 여자가 물건을 주고 받는 것을 직접 하지 않는 것이 예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맹자는 "그렇다"라고 답합니다. 그런데 순우곤이 “그러면 형수가 물에 빠진 경우라면 손으로 끌어 당겨줘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였을 때 맹자가 제시하는 대답이 흥미로운데요. 맹자는 '예'가 단순히 규범주의적이고 의무론적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도 손으로 끌어 당겨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승냥이 같은 짓이오. 남녀가 물건을 주고받는 것을 직접 하지 않는 것은 예이고, 형수가 물에 빠진 경우 손으로 끌어 당겨주는 것은 권도입니다.”(이루 상 7-17)

'효'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어떤 정해진 법칙을 엄격하게 따르는 것이 효라기보다는, 맥락과 상황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이 유교 전통에서 자주 제시되던 논의였던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예전에 리쩌허우의 『논어금독』이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논어』가 일종의 '정서'에 기반한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는 주장을 전개하는 책인데, 『논어』의 논리가 '정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보니, 그 논리가 단순히 일관적이고 체계적인 윤리 규범과는 거리가 있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또 유교를 비트겐슈타인적 언어게임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유명한 연구자로 허버트 핑가레트(Herbert Fingarette)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핑가레트의 책은 오래 전부터 읽어보아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실제로 읽어보지는 못해서 제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위의 논의와 비슷한 맥락에서 유교가 말하는 '예'가 단순히 경직된 체계가 아니라고 강조하는 내용인 것으로 들었습니다.

또 유사한 논의를 전개하는 분이 국내의 이승종 교수님이신데요. 이승종 교수님의 『동아시아 사유로부터』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와 도가 사상이 모두 공통적으로 특정한 '틀'에 얽매이지 않는 2인칭적 사유라고 강조합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예전에 서평을 쓴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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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드립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명쾌하진 않은거 같습니다. 누군가는 연명 치료를 계속 하는 것을 효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그렇지 않은 것을 효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맥락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은 반대로 보면 옳고 그름이 해석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단거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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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약간 생각이 다른데요. 연명 치료를 선택한 사람이나 치료 중단을 선택한 사람 중 반드시 어느 한쪽만 '효자'이고 나머지 한쪽은 '불효자'라고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 선택이 각자의 도덕적 양심에 따른 고민의 결과인 이상, 두 입장 모두 나름의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가령, 영화 <남한산성>에서 청과의 화친을 주장한 최명길과 전쟁을 주장한 김상헌이 결국 모두 충신이었듯이, 삶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문제를 단순히 '옳고/그름'이라는 기준으로 나누기는 어렵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모든 문제가 '옳고/그름'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야말로 답이 없는 문제에 억지로 답을 내려버리려 하는 흑백논리가 아닐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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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감사합니다. 생과 사는 너무 명백한 흑백문제이다 보니 거기에 매몰되서 생과 사 중 선택에 따른 이분법적 사고로 문제를 바라봤던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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