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인식론 입문』, 4장 「인식적 정당성 개념」 요약

  • 인식적 정당성과 두 종류의 규범성

인식적 정당성이 규범적 개념이라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우리는 참된 믿음을 추구하고 거짓 믿음을 피한다는 인식적 목표에 비추어 정당화된 믿음을 선호하고 부당한 믿음을 배격한다. 이처럼 지식을 획득하려는 목표에 비추어 정당한 믿음을 선호한다는 것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규명하려는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뉜다.
먼저 의무론적 견해는 인식적 정당성을 의무, 책무, 비난, 면책 등 의무와 관련된 규범성으로 파악한다. 의무론적 견해는 믿음의 정당성이 인식적 의무를 충족함으로써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비의무론적 견해에 따르면 믿음의 정당성은 그 믿음이 적절하고 좋은 믿음이라는 점을 나타낼 뿐이다. 정당한 믿음이나 부당한 믿음은 목표에 적절하거나 부적절할 뿐, 의무로 부과되거나 위반 시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아니다.
올스턴(P. Alston)은 인식적 정당성을 비의무론적인 견지에서 다음처럼 정의한다.

S가 p를 믿는 것은 인식적으로 정당화된다 ↔ S가 p를 믿는 것은 p가 적합한 근거들을 바탕으로 하고 S가 p를 거부할 만한 충분한 이유를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식적 관점에서 좋은 것이다.

올스턴의 정의는 의무와 관련된 개념을 사용하지 않은 채 인식적 정당성을 규정한다. 이는 비의무론적인 연구 방식의 한 가지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살펴보기 전에 의무론적 연구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 의무론적 연구 방식

인식적 정당성에 대한 의무론적 견해는 데카르트와 로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카르트는 참인 믿음을 믿지 않고 거짓 믿음을 믿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지적 자유를 오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명석 판명하게 참으로 드러나는 것만을 믿는 것은 우리의 지적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라는 것이다. 로크 토한 거짓 믿음을 믿는 것은 이성적 피조물로서 분별력을 발휘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저버리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현대에서는 치솜(R. Chisholm)이 참된 명제를 믿는 것이 지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무라고 말한다.

  • 인식적 의무와 올바르게 믿는다는 목표

이들의 입장은 다음처럼 정리될 수 있다. 우리는 지적 존재로서 참된 것을 믿고 거짓된 것을 배제할 인식적 목표를 지닌다. 이 목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인식적 의무가 부여된다. 우리는 지적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인식적 의무를 이행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제, 이 인식적 의무란 정확히 무엇인가? 이는 단순히 참된 것을 믿고 거짓된 것을 믿지 않을 의무가 아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질 믿음이더라도 그 믿음을 지지할 증거가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거꾸로 나중에 참으로 밝혀질 믿음이더라도 해당 믿음에 반하는 증거가 있다면 그것을 믿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참을 믿고 거짓을 믿지 않는 것은 의무라기보다는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 목표를 정확히 규정하기 위해 치솜이 제기한 요구 조건을 이용해보자.

(E1) 내가 살펴보고 있는 각각의 모든 명제 p에 대하여, p가 참일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p를 승인한다.

그런데 이 목표가 적용되는 범위는 지나치게 좁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믿음들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믿음도 존재한다. 이를테면 밖을 쳐다보고 햇살이 좋다고 생각할 경우, 우연히 어제 만났던 사람의 이름이 기억날 경우 우리는 믿음을 형성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런 믿음들에 대해서도 참된 믿음만을 믿기로 목표한다. 따라서 E1을 일반화하여 다음처럼 수정하자.

(E2) 각각의 모든 명제 p에 대하여, p가 참일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p를 승인한다.

그런데 E2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에 존재하는 참인 명제 모두를 믿는 것을 목표로 한다. 거기에는 나와 전혀 상관없고 아무래도 좋을 참인 명제, “도쿄에 거주하는 오오타니 씨의 목 뒤에는 점이 있다”, “2021년 3월 6일 철수의 팬티 색깔은 하늘색이다” 등도 존재한다. 이런 명제들을 믿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고 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E2는 다시 정식화되어야 한다.

(E3) 나에게 문제가 되는 각각의 모든 명제 p에 대하여, p가 참일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p를 승인한다.

이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인식적 의무와 증거

데카르트는, 우리가 명석 판명한 것만을 믿어야 할 의무를 지닌다고 하였다. 로크는 이성에 따라 명제에 대한 믿음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의무라고 주장했고, 현대의 펠드먼(R. Feldman)은 우리의 증거에 의해 지지되는 것을 믿고 증거에 의해 지지되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일이 인식적 의무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이성’이나 ‘증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만 이 의무를 이해할 수 있다. 이성이나 증거가 무엇인지 알려줄 일반 원리를 기준 제시 분석 같은 철학적 분석을 통해 드러낼 수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그러한 일반 원리가 없더라도, 위에서 제시된 의무에 대한 제안들은 여전히 가치가 있다. 우리는 증거에 따라 믿고 이성에 따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적어도 별자리나 수정 구슬에 따라서 믿음을 형성하지 않는다.
펠드먼의 의무 개념을 받아들인다면, p를 증거에 따라 믿는다는 의무에 따를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 그런데 증거에 따라 믿는다는 의무가 무엇인지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이 의무는 p를 믿어야 할 의무일 수도 있고 p를 믿지 말아야 할 의무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전자는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말의 조건으로서는 지나치게 강하다. 따라서 후자를 채택하여 인식적 정당성 개념을 정의하자.

(D1) S가 p를 믿는 것은 인식적으로 정당화된다 ↔ S는 p를 믿으며, S가 p를 믿지 말아야 할 의무가 없다.

  • 인식적 의무와 믿음-비의지성

인식적 정당성을 의무론적으로 정의하는 작업은 후자의 소극적 의무를 채택하는 반면, 인식적 정당성의 쟁점을 인식적 의무에 의해 분석하는 작업은 전자의 적극적 의무를 택한다. 그런데 두 종류의 작업 모두에 문제가 되는 쟁점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믿을 수밖에 없게 되는 믿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비의지성(involuntariness)을 지니는 믿음에 대해서는 인식적 의무론자들의 주장처럼 의무를 지닐 수 없는 듯하다. 예컨대 내가 두통을 앓을 때 나는 “나는 머리가 아프다”라는 믿음을 의지에 의해 거부할 수 없다. 또 바로 앞에 푸른 나무를 보고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저기에 푸른 나무가 있다”라는 믿음을 형성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다음처럼 정의할 수 있는 비의지적인 믿음이 있다.

S는 p를 비의지적으로 믿는다 ↔ S는 p를 믿으며, S는 p를 믿지 않을 수 없다.

믿음 비의지성이 인식적 의무론에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의무를 지니기 위해서는 의지에 의해 의무를 이행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도덕적 의무론에 비추어봤을 때, 행위자에게 행위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를 부과하기 위해서는 그가 의지를 가지고 행위할 수 있어야 한다. 맟나가지로 믿음에 대한 의무를 인식 주체에 귀속시키기 위해서는 인식 주체가 자발적으로 믿음을 믿거나 믿지 않을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된다. 이때 다음의 의지성 원리가 성립한다.

S가 p를 믿는 것이 비의지적이라면, S는 p를 믿어야 할 의무나 p를 믿지 말아야 할 의무가 없다.

이 원리를 승인한다면, 적어도 내성과 지각에 의한 믿음에 대해서는 어떤 인식적 의무도 발생하지 않는다. 이는 인식적 의무론에 큰 장애물이 된다.
내성적 믿음과 지각적 믿음은 인식적 의무가 적용되는 믿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인식에 대한 의무론적 분석에 대한 반례가 된다. 그러나 이 믿음들은 정당화되는 믿음이라는 점에서 앞서 정의된 인식적 정당성 개념의 반례가 되지는 못한다. 인식적 정당성 개념의 반례는, S가 p를 믿거나 p를 믿지 말아야 할 의무가 없는데도 p가 정당화되지 않는 경우이다. 내성적 믿음과 지각적 믿음을 제외하더라도 해당 반례를 생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부모님이 여전히 살아계신다고 믿는 고아를 한 명 생각해보자. 그는 자신의 믿음을 의지에 의해 믿지 못하므로 인식적 의무를 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의 믿음은 정당화되지 않는다. 결국 인식적 정당성 개념도 문제에 부딪친다.

  • 펠드먼의 해결책

펠드먼은 의지성 원리를 거부함으로써 인식적 의무론을 변호한다. 펠드먼에 의하면, S가 p를 비의지적으로 믿더라도 S에게 의무가 귀속될 수 있다. 펠드먼이 보기에 인식적 의무의 이러한 성격은 법적 책임이나 자격 요건 등에 비추어 설명할 수 있다. 내가 지불 능력 이상의 빚을 졌다면 빚과 이자를 갚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의 채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믿는다고 해도 인식적 의무가 상실된다고 말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렇다면 앞서의 고아의 사례에서도 그가 인식적 의무를 진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으며, 해당 사례는 인식적 정당성 개념의 반례가 되지 못한다. 펠드먼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적극적인 인식적 의무와 관련해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내성적, 지각적 믿음이 비의지적이라고 해도 인식적 의무의 대상이 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대안의 해결책

그러나 의지성 원리가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면 펠드먼의 해결책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의지성 원리를 부정하지 않고 의무론적 연구 방식을 지속할 방법은 없는가? 인식적 정당성의 정의를 다음처럼 수정해보자.

(D2) S가 p를 믿는 것은 정당화된다 ↔ S는 의지적으로 p를 믿으며, S에게 p를 믿지 말아야 할 의무가 없다.

D2는 일상적인 정당성 개념이 의무론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여기에 의지성 원리를 함께 고려한다면, 정당화된 행위와 믿음은 의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D2는 정당화된 믿음을 의지적인 믿음으로 한정함으로써, 앞서의 고아의 믿음과 같은 예시가 반례로 작용하지 못하게 한다. 고아의 믿음은 비의지적이므로 정당화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며, 따라서 정당화되지 않은 믿음이다.
그러나 지각과 내성에 의한 믿음이 문제가 된다. 이들 믿음은 비의지적으로 형성되지만 정당화되는 믿음이다. D2는 이러한 믿음들을 정당화되지 않는 믿음으로 간주한다. 이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다. 이 점에서 D2는 불만족스럽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약한 비의지성과 강한 비의지성을 구별할 수 있다. 약한 비의지성으로 형성된 믿음은, 비록 내 의지와 상관없이 형성되었지만 증거 상황의 변화에 따라 나의 지적 능력에 의해 계속해서 믿거나 믿기를 그만둘 수 있다. 예컨대 내가 창밖을 보고 “나무가 있다”는 믿음을 형성했다고 하더라도, 내가 본 것이 나무가 아니었다거나 밖에 아무것도 없었다는 증거가 제시되면 나는 내 의지에 의해 그 믿음을 파기할 수 있다. 반면 강한 비의지성으로 형성된 믿음은 내 의지와 독립적으로 형성될 뿐만 아니라 나의 지적 통제를 벗어나 있다. 앞선 사례 속의 고아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증거들이 얼마나 제시되든 간에 계속해서 부모님이 살아계신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의지성 원리에 비추어볼 때, 우리는 강한 비의지적 믿음에 대한 의무가 없을지라도 약한 비의지적 믿음에 대한 의무는 여전히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약한 비의지적 믿음에 대해서는 지적 능력을 발휘하여 믿거나 믿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인식적 의무론과 진리 기여성

인식적 의무론에 대한 또 다른 반론은, 의무론적인 인식적 정당성 개념이 인식적 목표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참된 믿음을 추구하고 거짓 믿음을 피한다는 인식적 목표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인식적 정당화가 진리 기여적(truth-conducive)이어야 한다. 그런데 올스턴과 같은 비판자들이 보기에 의무론적인 인식적 정당성 개념은 진리 기여성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올스턴의 비판에 반하여 인식적 의무론을 옹호하고자 한다면,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믿음이 적합한 근거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Steup, 2008: 170)는 적합성 원리(adequacy principle)를 의무론적 관점에서 옹호할 수 있어야 한다. 믿음이 적합한 근거에 기초를 둔다는 것은, 근거가 믿음이 참일 개연성이 높다는 점을 충분히 보여준다는 것(진리 기여적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의무론자들은 의무론적 정당성이 진리 기여적임을 보여야 한다.

  • 두 유형의 개연성

믿음이 참일 개연성이 높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연성이 정확히 어떤 의미에서 쓰였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개연성에는 사실적 개연성과 인식적 개연성이 있다. 먼저 사실적 개연성은 실재 세계 내 사건들이 현실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을 말한다. 특히 한 사건이 다른 사건과 맺는 사실적인 인과관계가 사실적 개연성을 결정하는 요인이다. 예컨대 망치로 돌멩이를 내리쳤을 때 돌멩이가 깨지는 사건이 일어날 개연성은 망치에 의해 돌멩이에 가해진 힘이나 돌멩이의 강도에 영향을 받는다. 중요한 점은, 사실적 개연성은 인식 주체들이 그러한 요인들을 인식하고 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결정된다는 점이다. 위 사례에서 돌멩이가 깨질 개연성은 우리가 돌멩이의 강도나 돌멩이에 가해진 힘에 관해 우리가 얼마나 아는지와 독립적으로 결정된다.
한편 인식적 개연성은 주어진 증거 체계들이 명제 또는 믿음에 기여하는 정당성의 정도를 뜻한다. 예를 들어 내가 망치를 큰 힘으로 내려쳤다는 점을 알고 있을 경우 “망치로 내려친 돌멩이는 깨질 것이다”라는 믿음의 인식적 개연성은 높아진다. 반면 망치로 세게 내려쳤다는 점을 모른 채 돌멩이가 단단하다는 증거만을 갖고 있을 경우, 사실적으로는 돌멩이가 깨질 개연성이 높더라도 돌멩이가 깨질 인식적 개연성은 낮다.
올스턴의 비판에서 그가 의미하는 개연성은 사실적 개연성에 가깝다. 그의 개연성 개념은 세계 내의 사태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올스턴에 의하면 세계의 합법칙적 구조는 한 사태가 다른 사태를 개연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믿음이 참일 개연성은 인식 주체의 증거가 아니라 세계 내의 사실적 법칙이다. 이를테면 지각에 의한 믿음은 지각 작용과 믿음의 참 사이의 사실적 법칙에 의해 그 개연성을 획득한다는 것이다.

  • 정당성과 사실적 개연성

그러므로 올스턴의 적합성 원리는 다음처럼 재진술될 수 있다. 믿음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을 사실적으로 개연적으로 만드는 근거에 바탕해야 한다.
의무론자는 이 원리를 승인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의 예시를 고려해보자. 어떤 치명적인 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해야 하는 의사에게는 치료를 위한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A 약품을 사용해서 환자가 살 확률은 90%이지만, 5%의 확률로 치명적인 알레르기 반응이 발생한다. B 약품은 40%의 확률로 환자를 살릴 수 있지만, A 약품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환자들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약이다. 열악한 여건 때문에 환자가 A 약품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는데, 공교롭게도 사실 그 환자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유형이라고 하자.
사실적으로는 B 약품을 선택하는 쪽의 개연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의사의 입장에서는 B 약품이 적절한 처치 방법이라는 믿음을 지지할 어떤 증거도 없다. 오히려 B 약품을 선택할 경우 환자가 살지 못할 확률은 일반적으로 60%나 된다. 반면 일반적으로 A 약품을 썼을 경우 환자의 생존율은 90%이다. 따라서

(1) A 약품이 환자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
(2) B 약품이 환자의 생명을 구할 것이다.

중 의사의 입장에서는 (1)을 믿는 것이 정당하다. (2)가 (1)보다 사실적으로 개연적이더라도 (1)이 (2)보다 인식적으로 개연적이기 때문이다. 의무론적 입장에서, 의사가 (1)을 믿는 것은 비난받을 만한 일이 아니므로 정당화되는 믿음이다. 사실적 개연성과 인식적 개연성이 합치한다면 최상의 경우이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사실적 개연성이 어떠한지를 알 수는 없다. “우리가 명제 p를 믿는 일이 정당화되는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과 관련한 p의 개연성 또는 우리의 증거와 관련한 p의 개연성이다.”(Steup, 2008: 177)
올스턴은, (1)을 믿는 것이 인식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닐지라도 정당화되는 믿음은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1)이 사실적으로 개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1)과 관련된 자연적 사실들은 (1)을 정당화하는 적합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올스턴은 (1)이 알맞은 인식적 지위를 지니지 않는다고 볼 것이다.
의무론자는 (1)이 사실적 개연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이로부터 (1)이 알맞은 인식적 지위를 지니지 않는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를 거부한다. 나아가 (1)이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1)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이를 부인한다면, 올스턴은 거짓인 믿음에 대해서는 어떤 정당화도 가능하지 않다는 과도한 결론을 승인해야 한다. 사실적 개연성이 없는 믿음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올스턴의 입장을 의무론자는 이 점에서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 의무론적으로 정당화되는 믿음과 진리 기여성

의무론적 입장에서, 믿음은 사실적으로 개연적이지 않더라도 그것을 믿지 말아야 할 의무가 발생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의무론적 입장에서는 사실적 개연성이 없는 믿음도 정당화될 수 있다. 한편 인식적으로 개연적이지 않은 믿음에 대해서는 그 믿음을 믿지 말아야 할 의무가 귀속되며, 따라서 인식적 개연성이 있는 믿음이 그리고 오직 그러한 믿음만 정당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의무론적인 인식적 정당성 개념이 진리 기여적이지 않다는 비판은 어떤가? 의무론자는 사실적 진리 기여성과 인식적 진리 기여성을 구별해야 한다고 대답할 수 있다. 앞서 진리 기여성은 믿음이 참일 개연성을 충분히 뒷받침하는 근거와 관련하여 정의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개연성의 의미가 두 가지로 구별되었으므로, 그에 따라 진리 기여성의 의미도 두 가지로 구별되어야 한다. 의무론적 입장에서 사실적 진리 기여성은 믿음의 정당화에 관계하는 개념이 아니다. 의무론적으로 믿음의 정당화 조건이 되는 것은 인식적 진리 기여성, 즉 믿음이 참일 인식적 개연성을 뒷받침하는 근거의 유무이다.

  • 내재주의와 외재주의

의무론자와 올스턴 사이의 논쟁은 내재주의와 외재주의 사이의 논쟁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양자의 차이는 믿음의 정당화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 즉 J-요인에 어떤 조건을 부과하는가에 달려 있다. 내재주의자는 J-요인이 주체의 마음에 내재적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부과한다. 다르게 말하면 내재주의자는 J-요인이 주체의 반성을 통해 접근 가능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외재주의는 J-요인에 그러한 조건을 둘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즉 외재주의에 의하면 정당화 요인은 주체의 의식에 내재적이거나 반성적으로 접근 가능할 필요가 없다.
반성을 통한 접근 가능성은 주체의 마음에 내재적이라는 조건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J-요인의 예시로는 지각적 경험과 내성을 들 수 있다.
내재주의 이론의 두 가지 대표적인 예에는 토대론과 정합론이 있다. 토대론의 입장에서 J-요인은 자명한 인식적 원리, 믿음, 지각 경험, 내성 경험, 기억 외에 없으며, 정합론자에 의하면 J-요인은 자명한 인식적 원리, 믿음, 믿음들 간의 정합적 관계들이다. 상기의 J-요인들은 모두 반성을 통해 접근 가능한 것이다.
외재주의 이론의 대표적인 예로는 신빙론(reliabilism)이 있다. 신빙론은 신빙성 있는 믿음 형성 기전을 J-요인으로 간주한다. 신빙론자들이 관심을 갖는 사안은 예컨대 녹색 사물을 주체가 인지하고 “저것은 녹색이다”라는 믿음을 형성하기까지의 과정이 사실적, 인과적으로 참인 믿음을 잘 산출하는지의 여부이다. 이것을 판가름하기 위해서는 인지 과정에 대한 경험적 탐구가 필요하며, 주체가 이런 인지 과정을 자각하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식적 정당성에 관한 의무론은 내재주의적 이론이다. 의무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점에 착안한다. 무언가를 행할 도덕적 의무를 행위자에게 귀속시키기 위해서는 해당 의무와 그 의무를 성립시키는 요건에 대해 행위자가 알고 있어야 한다. 시계도 없고 창밖도 볼 수 없으며 칫솔도 치약도 없는 사람에게 매일 아침 8시 30분에 양치를 할 의무를 부과하고 이에 따른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하다. 의무론자들은 도덕적 의무와 마찬가지로 인식적 의무도 인식 주체가 자각할 수 있는 증거와 관련해서만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인식적 정당성을 결정하는 J-요인은 이 점에서 반성 가능한 것이어야 하고, 따라서 인식적 의무론은 내재주의적이다.
한편 올스턴이 제시한 진리 기여성 규준은 사실적 개연성에 바탕을 둔다는 점에서 외재주의적이다. 의무론자들이 거부했던 진리 기여성 규준의 성격이란 다르게 말하면 J-요인의 외재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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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과는 좀 거리가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저는 종교심리학에서 종종 언급되는 '사로잡히다(seize)'라는 개념에 관심이 있어요. 융이나 틸리히가 강조하는 개념인데, 우리 삶의 정말 근본적인 신념들은 우리가 의지적으로 믿으려 해서 믿는 게 아니라, '믿게 되는' 혹은 '믿어지는' 것이라는 주장이거든요. 이런 식의 종교심리학적 입장이 인식론에서는 믿음 비의지성을 강조하는 비의무론과 외재주의의 입장으로 해석될 수 있겠네요.

2개의 좋아요

저도 옛날에 인식론 수업에서 이 부분을 다룰 때 흥미가 동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었는데, 말씀을 들어보니 믿음 비의지성의 문제가 생각보다 확장성이 있는 주제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