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와 내가 현상학일세"

후설이 20세기에 현상학을 본격적으로 정립하고 난 이후로, 그의 영향을 받아 대륙철학에서 현상학이 빠르게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겁니다. 오늘날에는 거의 잊혀졌지만, 후설 당시만 해도 '괴팅겐 학파'나 '뮌헨 학파' 같은 현상학 학파들이 존재하였고, 거기서 알렉산더 팬더, 아돌프 라이나흐, 모리츠 가이거, 로만 잉가르덴 같은 수많은 현상학자들이 철학사의 떠오르는 별들로 이름을 날렸죠.

그런데 흥미롭게도, 후설 자신이 그 수많은 인물들 중에서 진정으로 현상학의 '적통'으로 인정한 인물은 마르틴 하이데거 단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와 관련된 아주 흥미로운 증언이 있는데요, 버전에 따라 약간씩 표현이 다르긴 하지만, 후설은 하이데거에게 종종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자네와 내가 현상학이네(You and I are die Phänomenologie)."

"현상학, 그것은 나와 하이데거이고, 그 이외에는 아무도 아니다(Die Phänomenologie, das sind ich und Heidegger, sonst niemand.)"

첫 번째 구절은 허버트 스피겔버그의 Phenomenological Movement (3rd Edition,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4), 412쪽에 등장합니다. 스피겔버그 자신은 이 말을 도리안 케언즈의 Conversations with Husserl and Fink (Martinus Nijhoff, 1976), 9쪽에서 인용하고 있네요. (스피겔버그의 책이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는데, 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자네와 나는 현상학자일세"로 의역되어 있어서 "너랑 내가 곧 현상학이다."라는 원문의 강한 뉘앙스가 다소 감소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두 번째 구절은 가다머의 "Die phänomenologische Bewegung" (Neuere Philosophie I, J. C. B. Mohr (Paul Siebeck)), 116쪽에 등장하는데, 가다머는 스피겔버그에게서 이 말을 인용하고 있으면서도 약간 구절을 바꾸었네요.

여하튼, 후설이 하이데거를 얼마나 신뢰하고 자랑스러워하였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구절이라 눈길이 갔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이런 평가에 대해 하이데거가 뒤에서 은밀하게 보인 반응을 떠올려 보면, 참, 제3자의 관점에서도 마음이 아픈 점들이 많은데요. 하이데거는 공적으로는 후설을 굉장히 높이 평가하면서도 사적으로는 후설을 대놓고 비난하고 조롱하거든요. 가령, 뢰비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래 편지들은 시한과 팔머가 편집한 Psychological and Transcendental Phenomenology and the Confrontation with Heidegger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세미나의 마지막 시간에 나는 『이념들』을 공개적으로 불태워 파기하다시피 했으며, 감히 말하건대 그 결과 이제 내 작업 전체의 본질적 토대가 분명하게 정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논리연구』를 되돌아보면, 나는 이제 후설이 그의 생애에서 단 한 순간도 철학자였던 적이 없었다는 확신에 이르렀다. 그는 점점 더 우스꽝스러워지고 있다.

이제 나는 완전히 내 힘으로 서 있다. … (후설의 도움으로) 임명을 받을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리고 내가 출판을 마치고 나면, 나의 전망은 끝장날 것이다. 그 늙은이는 그때 내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의 후계자가 되는 문제는 완전히 물 건너가게 된다. 그러나 나는 어쩔 수가 없다.

또 야스퍼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렇게 쓰죠

후설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 애초에 그가 ‘제대로 붙어’ 있기라도 했다면 말이지만, 요즘 나는 그 점조차 점점 더 의심하게 된다. 그는 이리저리 갈팡질팡하며, 듣는 이를 울게 만들 만큼 진부한 말들만 늘어놓는다. 그는 ‘현상학의 창시자’라는 자신의 사명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걸 보면, 철학을 떠나서, 후설과 하이데거 사이의 인간관계가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쪽은 그렇게나 지지와 격려를 보냈는데, 다른 쪽은 완전히 상대를 위선적으로 대했으니까요. 나중에 하이데거가 후설을 대학에서 쫓아내는 데 서명했다는 사실까지 고려해 보면 더 하죠.

17개의 좋아요

말이 나온 김에 하이데거의 인간성을 보여주는 다른 일화들도 다시 올려봅니다.

3개의 좋아요

적통이자 적토마 같았던 하이데거..

2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