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인간성

하이데거의 인간성이 더러웠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러웠다는 걸 알게 되어서 여기도 올려봅니다;;

아렌트를 버린 하이데거

1928년 초반, 하이데거는 '그의' 결심을 굳혔다. 4월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이루어진 만남에서 하이데거는 아렌트에게 더 이상 연인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해 초, 하이데거의 옛 스승이자 변치 않는 지지자였던 에드먼드 후설은 오랜 협의를 거치고 자신이 적극적으로 추천한 결과, 하이데거가 후설의 빈 자리를 대신해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고 은밀하게 알려주었다. 서른아홉 나이에 『존재와 시간』을 갓 출간한 하이데거는 이제 경력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아마도 그는 아렌트와의 관계가 발각될 경우 개인적으로 너무 큰 위험에 직면할 거라고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품안에는 이미 또 다른 여성이 있었다. 하이데거가 "사랑하는 리시(liebe Lisi)라고 부른 엘리자베스 브로흐만(Elisabeth Blochmann)은 양친 중 한 사람이 유대인이었고 아내의 학교 친구이기도 했다. 브로흐만은 아렌트보다 열네 살 연상이었고 학자로서의 경력을 추구하고 있었다. 1927년에 하이데거는 "베를린에서의 아름다웠던 날들"에 대해 그녀에게 애정 어린 감사 편지를 보냈다. 1928년에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했고, 삼 년 전에 아렌트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우구스티누스의 "volo ut sis"(나는 당신이 존재하기를 원한다)를 인용하여 편지를 보냈다.

(엘즈비에타 에팅거,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황은덕 옮김, 산지니, 2013, 53-54.

결국 (1) 하이데거는 아렌트와 비밀 연애를 하면서 자기 아내를 배신했고, (2) 자기 경력에 상처가 나는 게 걱정되어서 아렌트도 배신했고, (3) 그러면서 또 다른 여자랑 '양다리'도 아닌 '삼다리'를 걸쳤는데, (4) 심지어 그 여자는 자기 아내의 학교 친구였다는 거네요.

후설을 버린 하이데거

1923년, 하이데거는 야스퍼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후설이 베를린 대학의 직위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는 강사보다도 더 못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완전히 뒤죽박죽인 사람입니다—그가 한 번이라도 그렇지 않았던 적이 있나요—최근 들어 그는 점점 더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랬다저랬다 하는 일이 많고, 사소한 것들을 발표해서 연민만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는 '현상학의 창시자'라는 목표를 위해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야스퍼스는 막 교제를 시작한 후배 철학자 하이데거와의 우정을 간절히 원했으므로, 너무나 무비판적이게도, 신의를 저버린 하이데거의 이 무례한 행위를 아무런 언급 없이 그대로 덮어버렸다. 10년 후, 하이데거는 후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야스퍼스를 향해서도 신의를 저버린 행동을 하게 된다.

한편, 1929년 후설의 70번째 생일 기념행사에서 하이데거는 자신의 스승이 새로운 철학과 새로운 사고의 방법론을 창조했고, 서양철학의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따고 과장된 찬양을 늘어놓았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33년, 후설은 학장으로 취임한 하이데거가 서명한 회보를 받았는데, 대학 구내 출입을 금한다는 통보가 담겨 있었다.

(엘즈비에타 에팅거,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78-79)

인성 쓰레기 하이데거는 (1) 야스퍼스한테 후설 뒷담화를 하다가, (2) 후설 생일 기념행사에서는 입발린 후설 찬양을 늘어 놓았다가, (3) 결국에는 총장에 취임해서 후설이 대학에 출입도 못하게 금지했네요. (4) 그리고 야스퍼스도 배반해버렸고요.


욕심이 그득한 하이데거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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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아니랄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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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 서간」에서 자기 철학이랑 휴머니즘이랑 선 그은 기질적인 이유가 있었네요 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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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이쪽 계통의 스토리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무엇에 빠졌었고, 말씀하신 배신을 당한 후에는 어떤 입장이었나요? 그리고 이러한 삶의 경험이 아렌트 철학에 묻어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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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YOUN선생님 만큼 하이데거를 잘 알진 못하지만,
뤼디거 자프란스키의 하이데거 평전을 읽었을 때, 아렌트는 학생 때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총명하기로 이름났다고 하더라구요! 원래 아렌트는 헤르만 코헨의 세미나에 참석하려 했고, 일정 정도 코헨에게서 철학을 배웠던 것 같지만, 하이데거가 아렌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자기 밑에서 공부를 계속하도록 유도(혹은 가스라이팅?!)했다고 하더라구요.

하이데거는 프라이부르크 사강사를 했던 때부터 학생들에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여전히 현재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철학자들로 생동감 넘치게 소개하는 것으로 저명했다고 합니다. 아렌트는 아마 하이데거가 가지고 있는 고전철학들에 대한 탁월한 해석능력에 끌린 것으로 보여요. 아렌트는 실제로 하이데거의 사유를 만났을 때, 그가 가지고 온 사유의 폭풍이 마치 플라톤의 그것과 같았다고 표현하기도 했구요.

저는 아렌트의 삶에 하이데거와의 관계가 미친 영향력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렌트의 박사학위논문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랑 개념이었던 것을 떠올릴 때마다, 과연 그녀가 야스퍼스에게 절반은 자율적이고 절반은 타율적으로 옮겨가서 사랑에 대한 학위논문을 작성하면서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해보곤 합니다. 아마 참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 같아요 ㅎㅎ.

제가 말씀드린 것들의 출처는 전부 자프란스키의 하이데거 평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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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아렌트가 굉장히 총명한 학생이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은 에팅거의 책에서는 하이데거가 의외로 아렌트의 학문적 수행 능력을 그다지 높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아렌트가 마부르크 대학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아렌트에 대한 하이데거의 평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마부르크를 떠나도록 압박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마부르크 대학에서 연구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고, 그녀가 대학에서 자리를 잡는 데 실패했으며 적응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어울리지 않는 학교를 그만둘 용기가 없는 젊은이는 모자란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학교에 계속 머물러 있기를 고집한다면 그 젊은이는 성장의 기회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또한 하이데거는 "하이데거의 학생"으로 간주되는 것이 특별한 혜택이 아니라고 말했다—독일 내에서는 필적할 만한 사람이 없었던 철학자로서는 기묘한 발언인 셈이다.

마부르크에서 가장 뛰어난 정신을 가진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아렌트의 평판을 고려할 때, 그녀의 학문적 위치에 관한 하이데거의 평가는 믿기 힘들 정도이다. 일 년 내내 그녀만을 칭찬했고, 자신의 작업을 함께 논의했으며, 둘 사이의 정신적 친밀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던 스승이 학문적 수행능력과는 상관없는 이유로 그녀를 배신한 것이었다.

(엘즈비에타 에팅거,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42-43)

하이데거 같은 최상급 철학자가, 아렌트 같은 최상급 철학자의 학문적 자질을 의심했다는 걸 보면, 참 기묘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도대체 '철학적 자질'이나 '학문적 수행능력'이란 무슨 기준으로 평가받는 걸까 해서요. (비슷한 예로, 아도르노가 하버마스의 자질을 알아보지 못했다가, 나중에 가서야 후회했던 일도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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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글에서 처음으로 하버마스의 교수 자격 논문 심사 이야기를 보았어요.

이 글 내용 중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어서 아도르노와 하버마스가 서로 갈등했다고 생각했네요.

1954년, 그는 비판 이론의 본고장인 프랑크푸르트 사회 연구소의 연구 조교로 취직했다. 하버마스가 비판 이론의 제2세대 거장으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수년 동안 교수 자격 논문을 준비하여, 1961년에 <공론(公論)의 구조 변환>이라는 제목으로 아도르노에게 제출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뛰어난 글은 심사에서 탈락되고 말았다.

아도르노에게 버림받은 하버마스는 마르부르크 대학에 가서야 비로소 교수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그보다 앞선 1961년, 가다머는 그때까지 교수 자격 논문도 통과 못한 서른두 살의 그를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초빙해 갔다. 가다머나 하버마스 모두 열린 마음으로 유명한 철학자들이다. 역시 대가는 대가를 알아보는 법이다. 가다머는 그를 초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한 학파의 견해가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했단다. 과연 그다운 발상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만약 교수 자격 논문 심사 탈락 이유가 아도르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호르크하이머에게 있는 것이라면, 아도르노-하버마스의 관계가 제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라질 수도 있겠네요.

아도르노가 뒤늦게 하버마스의 논문을 탙락시킨 걸 후회했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제가 본 텍스트가 무엇이었는지 다시 찾을 수가 없네요;; (아마도 어떤 책의 앞부분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 그건 그렇고

하이데거가 아렌트에게 마부르크를 떠나도록 압박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이데거는 아렌트가 마부르크 대학에서 연구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가, 하고 의문을 제기했고, 그녀가 대학에서 자리를 잡는 데 실패했으며 적응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 마부르크에서 가장 뛰어난 정신을 가진 사람들 중 한 명이라는 아렌트의 평판을 고려할 때, 그녀의 학문적 위치에 관한 하이데거의 평가는 믿기 힘들 정도이다. 일 년 내내 그녀만을 칭찬했고, 자신의 작업을 함께 논의했으며, 둘 사이의 정신적 친밀성을 반복해서 강조했던 스승이 학문적 수행능력과는 상관없는 이유로 그녀를 배신한 것이었다.(엘즈비에타 에팅거,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42-43)

이 부분을 다시 보니, 하이데거가 아렌트의 학문적 수행능력을 의심했다기보다는, 아렌트의 학문적 수행능력을 충분히 알면서도, 자신의 지위를 위해 그녀의 자질을 괜히 비방해서 다른 학교로 보냈다는 이야기로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즉, (1) 하이데거는 아렌트에게 마르부르크 대학을 떠나도록 압박했다. (2) 그는 아렌트가 학문적 수행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3) 하지만 이러한 그의 평가는 믿기 힘들다. (4) 평소에 하이데거가 자신과 아렌트 사이의 정신적 친밀성을 주장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는 아렌트를 학문적 수행능력과 상관 없는 이유로 배신한 것처럼 보인다. 이런 스토리를 저자가 말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기 논지를 뚜렷하게 쓰지 않아서 다소 불분명하긴 하지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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