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학자들의 제일 문제가 뭐냐면…"

종교학과에 진학하신 분의 아래 질문에 답변을 드리다 보니, 갑자기 예전에 보았던 길희성 교수님의 강의 영상이 생각 나서 여기도 올려 봅니다.

길희성 교수님은 서울대 철학과 학부를 졸업하시고 예일대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하버드대학교에서 비교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박사학위 과정에서는 주로 불교를 공부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울대에서 철학과 교수를 하시다가, 이후에 서강대에서 오랫동안 종교학과 교수를 하시면서, 한국 종교학계에 커다란 기여를 하셨죠. 아쉽게도, 제가 서강대에 입학하였을 때는 이미 은퇴하신 뒤라 저는 직접 수업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이분이 번역하신 루돌프 오토의 『성스러움의 의미』에 정말 엄청난 감명을 받았던 터라 개인적으로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 돌아가시기 직전에 남기신 종교학 강의 영상들도 종종 찾아보고 있고요. 그런데 그 중 몇몇 강의에서 길희성 교수님이 아주 재미 있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한국의 철학하는 사람들, (난 철학하는 사람들 좀 알잖아요? 내 친구들.) 한국 철학자들의 제일 문제가 뭐냐면, 기독교를 모른다는 거예요. 모르는 게 아니라, 아주 반기독교적인 편견으로 꽉 차가지고, 싫든 좋든 기독교가 2000년 동안 서구 문명을 어떻게 했다는 것을 좀 알아야 하는데, 도통 무식해! 정말, 경멸할 정도로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그런데 이건 잘못된 거예요. (6:58-7:30)

제가 전남대학교 불자교수회에 한번 강사로 초청돼서 갔는데, […] 전남대학교 교수들 한 20명이 있더라고. 이 사람들이 하나같이 불교 얘기는 안 하고, 기독교 성토하는 거야? 근데, 나는 나 혼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들었지. 근데 그 사람들의 기독교 수준이라는 게, (철학을 했던 사람이건 뭐건 상관 없어,) 내가 언제 한번 이야기했지만, 주일 학교 수준이에요. 한 번도 어거스틴이니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기라성 같은 사상가들을 읽어본 적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주일 학교 수준의 기독교를 성토하는 거지. 아니, 불교를 난 좀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는데, 기독교 성토하는 거야! 열등감이에요, 완전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1차 원인 제공은 기독교가 했지, 물론. (15:57-16:58)

신에 대한 문제는 모든 사람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문젠데, 신이 뭐냐 하는 것을 이야기 안 하고 신의 존재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자기 마음대로 신이 어떤 존재라고 상정해 놓고 그런 신을 부정하면 안 되는 것 아니겠어요? 우리가 흔히 그렇게 하기 쉬운데… 보통은 기독교 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국민학교 수준이지. 그거 가지고 2000년 역사를… 어림도 없어요. 그 기라성 같은 사상가들이 있었거든. 토마스 아퀴나스라든지, 어거스틴이라든지, 루터, 칼빈, 그 책을 진짜 읽어보면, 그렇지 않아요. (40:37-41:30)

물론, 길희성 교수님이 종교학자이시고 (비정통적이긴 하지만) 기독교인이시다 보니, 기독교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신 것도 있겠지만, 저는 그래도 이 이야기들에 상당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특히, 서양철학을 공부하면서 기독교적 배경에 전혀 무관심하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어학이나 논리학이나 철학사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것만큼이나 굉장히 치명적인 약점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기독교를 모른 채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일단 중세 1000년을 그냥 무시하겠다는 것이고(실제로, 종종 어떤 수업들에서는 교수님들이 너무 손쉽게 "중세는 무시하자"라는 말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실 때가 있어서 저로서는 놀랐던 적도 있습니다.), 근대나 현대에 전개된 철학적 논의들의 지향점도 상당 부분 놓치게 되는 셈이니까요. 당장 칸트가 "나는 신앙을 위한 자리를 얻기 위해서 지식을 폐기해야 했다."(KrV, BXXX)라는 유명한 말로 자신의 순수이성비판의 작업을 요약한다는 점이나, 헤겔이 성육신과 삼위일체를 자기 철학의 핵심 아이디어로 도입한다는 점만 보더라도, 기독교를 배제하거나 무시한 채 그러한 철학적 체계들의 함의를 설명한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의문이 들어요.

물론, 반드시 기독교적 측면을 부각시키지 않고서도 칸트나 헤겔 같은 인물들의 사유에서 오늘날 주목할 만한 점을 뽑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까지 제가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접근에 굉장히 자의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만큼은 부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한편으로는, 분명히 기독교 문화의 배경에서 철학을 전개한 인물들에게서 유독 '기독교'라는 요소만 탈색시키려고 하는 것은 자의적일 수밖에 없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유독 '기독교'라는 요소만 의미 있는 철학적 사유의 주제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평가하는 것도 자의적일 수밖에 없고요. 뭐, 요즘에는 예전처럼 기독교에 대해 무턱대고 반감을 품은 분은 철학과에 많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도 종종 철학에서 기독교나 신에 대한 담론이 등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좀 아쉬운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기독교나 신에 대한 담론 자체를 완전히 무관심해도 좋은 주제로 생각하는 경향이나, 너무 초보적인 수준의 기독교나 신 담론에 머물러 있는 경향은 아직도 철학과에 꽤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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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사적인 이야기지만, 저는 철학과에 입학한 주변 친구들 중에서 꽤 많은 친구들이 학술적 철학에 실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삶의 의미나 가치 같은 주제들을 철학과에서 배울 줄 알고 기대하였는데, 실제 철학과에서는 완전히 다른 주제들을 놓고서 고민하고 있었다는 거죠. 그런데 사실, 기독교인으로서 제 경험을 이야기해 보자면, 기독교적 배경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서양철학의 모든 주제가 실존적 주제일 수밖에 없더라고요. 가령, 기독교 신앙이 왜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를 이해한다면, 왜 철학자들이 신의 존재에 대해 그토록 증명하려 하고 신의 선함에 대해 그토록 정당화하려 했는지에 공감이 될 수밖에 없죠. 반대로, 기독교 신앙이 왜 근현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토록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는지를 이해한다면, 왜 철학자들이 그토록 종교 비판을 열렬하게 수행하려 했는지에도 공감이 될 수밖에 없고요. 그래서 어느 방향으로든지, 그 논의들에서 파생되는 모든 형이상학, 인식론, 윤리학의 이론들은, 기독교와 결부되는 순간, 단순한 '이론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실존적' 차원의 문제로 다가오더라고요. 어떠한 이론을 취하는지에 따라 기독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가 결정되고, 그에 따라 곧바로 삶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관점도 달라지니까요. 적어도, 저에게는 이런 점이 학술적 철학의 담론을 훨씬 더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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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독일 철학에서 기독교를 배제하면서 이해하는데는 큰 제약이 있다는 것에 크게 동의를 합니다. 안 그래도 최근 헤겔 공부를 하다가 기독교를 잘 몰라서 어려움을 겪고 있거든요. 다만 헤겔을 공부하면서 기독교를 잘 모르는 제가 나름대로의 변호를 하자면, 헤겔을 공부할 때 모든 것을 다하기는 참 힘들다는 생각을 합니다. 헤겔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현대 논리학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선행돼야하며, 근대 논리학에 대한 이해도 어느 정도 하고 있어야하며, 고대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하며, 스피노자와 로크 같은 초기 근대 철학도 이해를 하고 있어야하며, 칸트, 피히테, 쉘링 같은 독일 철학을 깊게 이해하고 있어야하며, 또 현대 독자의 입장에서 헤겔의 철학이 왜 아직도 relevant한지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현대 철학을 어느 정도는 간파를 하고 있어야합니다. 여기에 더해서 헤겔이 다루는 미술 작품, 연극, 문학 등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헤겔의 미학을 제대로 읽을 수 있고, 역사적인 배경도 어느 정도 알아야 역사 철학을 이해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에 더해서 기독교까지 이해를 해야 헤겔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모든 것을 다 할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널리 알려진 헤겔 학자들도 이것들을 다 충분히 알고 있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는 헤겔 뿐 아니라 모든 철학에게 전반적으로 다 적용이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현대 형이상학도 참 할 게 많습니다. 형이상학이란 분야가 크기도 하지만, 현대 형이상학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윤리학, 물리학, 논리학, 수학 등의 이해가 선행돼야하지만 이를 다 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현대 형이상학자들이 물리학을 모른다고 그렇게 욕을 먹는 걸 생각하면 더 그렇지요.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철학 (아마 철학사) 에 중요하다는 말에는 동의는 하지만,

이와 같은 태도는 조금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말 그대로 다 하기는 너무 어려우니깐요.

또 제 생각에 "기독교는 중요하다!"라고 claim한다고 해서 딱히 상황을 더 좋게 만드는 것 같진 않습니다. 애초에 할 것도 너무 많고, "기독교"라는 것 자체가 워낙 방대하니깐요. 그리고 본인 딴에 "기독교는 중요하다!"라는 말을 듣고 나름대로의 공부를 했는데 주일학교니 국민학교니와 같은 말을 들으면 기독교가 더 discouraging 하겠지요 (철학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철학사는 중요하다!" 라고 앵무새처럼 반복하지만, 정작 그 중요성은 보이지 못하며, 사람들이 철학사를 공부해오면 그 사람들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하기 바쁩니다. 철학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써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많이 노력을 합니다.). 그렇다면 제 생각에 더 건강한 접근은 기독교의 "액기스"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중요하다!" 혹은 "기독교를 알아라!" 와 같은 말만 반복한다기보다는, 현대 학계에서 제기되는 의문들을 논하고, 그 의문들이 기독교의 무지에서 비롯됐으며, 기독교에 대한 이런 지식들을 장착하면 이런 의문들에 대한 satisfactory한 답을 낼 수 있다고 말을 하면 사람들은 방대한 기독교를 다 공부할 필요 없이 (그러면서 주일학교니 국민학교니와 같은 말을 들을 필요없이) 꼭 필요한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겠지요. 더 나아가, 본인의 철학과 관련해서 문제 의식을 갖고 기독교를 접근하게 되니 기독교가 훨씬 흥미롭고, 기독교를 공부하는데 있어서 더 concrete한 가이드라인이 생길 것 같습니다.

+)

이건 저와 완전히 반대되는 얘기네요. :joy: 전 철학과가 인생에 대해서 논한다고 생각해서 거리를 두다가 학술적 철학에 매료됐거든요. 다만 제가 흔한 케이스는 아닐 것 같긴 합니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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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자로서 제가 신자가 아닌 사람보다 서양 근대 철학 연구에 있어 아주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은 가끔 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당연한 듯 성경에 나온 에피소드 읊으면서 일종의 유비로 써먹는 걸 저만 알아들을 때 약간 어깨가 위로 솟는다고 해야할까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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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비기독교인이고 성서를 진지하게 통독해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제가 헤겔을 공부할 때 헤겔 철학의 상당 부분들을 놓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이 좀 불편하지만, 철학책에 종종 등장하는 성서 관련 레퍼런스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브라우저에 대한성서공회 성경과 가톨릭 신약성서 사이트를 저 스스로 즐겨찾기 해놓았다는 점을 새삼 깨닫고는 글의 논지를 인정할 수밖에 없네요.

제 생각에는 신앙으로서의 기독교를 부각하는 일과 매력적인 지적 전통으로서의 기독교를 부각하는 일은 (서로 연관되어 있겠지만) 구별되는 사안 같은데, YOUN님의 바람이 충족되기 위해서 부각되어야 하는 부분은 지적 전통으로서의 기독교인 듯 보입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우리는 신앙이 아닌 유구한 지적 전통으로서의 기독교를 접하기가 좀 힘들어 보입니다. 일례로 (철학 텍스트에 대한 해석만큼이나) 다양하고 풍부한 성서 해석들이 존재한다는 점, 이 해석들이 각기 독특한 역사적 배경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출발했다는 점은 지적인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지점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데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이처럼 성서 해석의 역사적 다양성과 풍부성, 신학적 논쟁 속에서 탄생한 여러 아이디어들을 매력적인 지점으로 부각하는 분들은 크게 많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YOUN님 및 몇몇 분들로 말미암아 기독교 신학 내에 그런 풍부한 세계가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지만, 슬프게도 그 이전이나 이후로는 그런 분들을 더 이상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유독 운이 나빠서, 도리어 그런 신학적 해석들의 다양함을 안 좋게 보거나 이단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이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불교나 힌두교 등의 경전들은 상대적으로 고전적인 지적 유산으로서 부각되는 일이 많다고 느끼는데, 개인적으로는 기독교도 지적 전통으로서의 측면들이 좀더 많이 부각되고 홍보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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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동의합니다.

동양철학, 한국철학의 베이스에 유교 불교가 자리잡고 있듯이 서양철학의 근본질문과 그에 대한 서구 철학자들의 대답의 방식과 관점에는 기독교적 베이스가 깊게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관점에서 뿐 아니라 서구세계가 근 2천년간 기독교 세계였기에 그 짙은 문화적 관점으로서의 지식은 철학 연구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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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합니다. 학자들도 학자들인데 대중들도 인기 철학자가 니체이다보니 기독교나 중세철학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갖게되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기독교인들의 노력 덕에 그나마 찾으려 들면 국내에도 소개된 읽을거리가 꽤 많은데, 신비주의 쪽은 나름 중요함에도 국내에는 변호해주고 소개해줄 의지처마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동양철학에서 성리학이나 불교철학만 하더라도 이들을 이해하려면 도교나 힌두교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들이 참고할 지적 전통으로는 종종 언급이 되어도 막상 소개와 번역은 기초단계에 가깝다고 봅니다. 마하바라타도 판본문제는 둘째치고라도 진행중인 번역도 완료가 안되었고, 그 외에 다른 기초적 텍스트들도 번역은 커녕 소개도 제대로 안 된 것들이 많아요. 도교도 상황이 안 좋아서 문헌의 번역이나 소개가 빈약하고 중일 연구에 의존하는게 커요. 도교계 종교들을 사이비라고 눌러버려서 그런 것도 있겠지 싶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기독교는 충분하진 않아도 중요하다는 인식들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편이라고 봅니다. 사실 이런 문제에서 항상 반복되는 일이기도 한데, 언급이라도 되는 경우면 그래도 상황이 좋은 편인 것이고 진짜 소외받는 자들은 얘기도 안나오는 상황에 처한 자들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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