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서 학벌은 어느정도로 중요한가

안녕하세요. 몇 주 전 철학과에 합격했다는 글을 올렸는데요, 그 대학에서 탈출해야 하나 고민이 드는 하루입니다.

서강올빼미는 계정 생성 전에도 간간이 눈팅을 해왔습니다. 고학벌자분들이 상당히 많이 계시더군요. 제가 합격한 대학교도 저명성이 꽤 있는 곳이지만 무언가 그런 고高학벌을 뭐니 그곳에 도달하고픈 동물적인 욕망이 드는 것을 부정하기 힘들었습니다.

수험 생활 동안 정시의 힘듦을 느껴, 한다면야 논술이나 편입을 생각 중에 있습니다.

다만 이것은 아직 입학조차 하지 않은 새내기가 쾌락적인 학벌 욕동에 빠져 수놓는 몽상에 불과하다는 것

제 자신이 잘 알고 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여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학벌이 철학함에 있어 얼만큼 유용한지, 왜 유용하며 학벌이 철학함에 무슨 이점을 가져다 줄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해 어디 라인 이상을 가면 소위 학계에서 인정받고, 어디 라인 이하라면 터부시되는지 역시 대학원생이 많은 서강올빼미의 회원분들에게 실례를 무릎쓰고 여쭈어보고자 합니다.

또, 각 대학마다 철학 커리큘럼이 많이 상이한지 궁금합니다.

이 우문의 현명한 답변을 보고 들으며 제 동기를 가다듬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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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시간에 감사드립니다. 졸리신 않으신지요..

달라요. 각 대학의 커리큘럼은 소속 교수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철학사 수업과 같이 수업 내용이 어쩔 수 없이 정해져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똑같은 이름의 과목이라도 수업을 가르치는 교/강사의 전공과 성향 등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형이상학"이라는 학부 수업에서 흔히 말하는 "분석 형이상학"이 아닌 데카르트-칸트-니체-베르그손의 계보를 따르는 "대륙 철학 전통에서의 형이상학에 관한 담론"을 배웠습니다. 정치사회철학 학부 수업에서는 홉스부터 마르크스를 거쳐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이어지는 대륙철학 전통에 기반한 사회철학 이론을 배웠습니다. 전자 교수님은 프랑스에서 유학하신 분이고, 후자 교수님은 독일에서 유학하신 배경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학교에 소속된 교/강사마다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것들이 다르다보니, 가능한 한 많은 수의 교/강사를 확보하여 다양한 주제를 접할 수 있도록 해주는 학교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앞서 언급한 이유로 형이상학은 배웠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분석 형이상학"에 대해 학부-석사 때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습니다. (분석철학 담당 교수님이 계셨지만, 주전공은 심리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학벌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느 학교가 명문대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교/강사의 풀이 넓어서 철학의 다양한 주제를 해당 분야의 전공자로부터 배울 기회를 많이 제공하는 학교가 좋은 학교라고는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저는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이런 이유에서 서울대가 가장 좋은 학교이고, 그 외에 연대, 고대, 서강대, 시립대 등도 좋은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소위 서울의 좋은 대학과 지방국립대를 제외하면, 심지어는 서울의 좋은 대학들조차도, 교수진의 수가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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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sten 정성스럽고 좋은 조언 감사드립니다. 한 가지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 댓글을 답니다. 교수진의 수가 적은 대학에 진학했을 경우, 필요하거나 다른 궁금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독학을 통해 강의를 대체하여 얻을 수 있을까요? 교수님들의 강의를 직접 듣지 않더라도 그만한 지식을 독학으로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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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 노력 여하에 달리지 않았을까요? 다만 저는 학부 교수님들이 열정적으로 잘 가르쳐주신 경험이 있어서, 소속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대안 플랫폼도 많이 생겨서, 학부 수준의 배움은 대학 외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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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거나 신뢰를 받거나 다시 검토를 받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저 같은 경우에는 단순히 지식을 탐구하려는 목적이라면 독학을 해도 상관이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반응을 얻거나 신뢰나 논의를 받기 위해서는 학벌의 여부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이곳 사이트에서도 누군가 독학으로 얻은 지식들에 대해서는 근거가 없다고 신뢰하지 않는 분위기가 많이 있는 편이구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철학에서 학벌 여부가 일종의 ‘자격증’처럼 작동한다고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가령 분석형이상학을 대학에서 전혀 배우지 않았고 실제로는 현대 인식론을 전공했더라도, 철학과 석, 박사 학위가 있는 사람이 분석형이상학 세미나를 연다고 하면 사람들은 더 신뢰하는 것 같은게 있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철학’이라는 분야가 그냥 겉으로 보기에는 다소 두루뭉술한 면이 있어서, 이런 요소가 더 크게 작동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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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다른 선생님들 논문을 찾아보면서 그분들이 어디 학교에서 무슨 과정을 마쳤는지 굳이 찾아보진 않습니다. 어쩌다 출판사 저자 소개란이나, 인터넷에서나, 학회에서 우연히 주워듣는 경우로 알게되는 것 같아요.

다만 제가 주로 공부하는 분야들의 선행 연구자들의 경우엔 석/박사를 어디서 어떤 공부를 했는지 학위논문을 찾아보긴 해서, 석박사를 어디서 취득하셨는지 보게 되긴 하는데, 그게 그 연구자의 역량을 파악하는 척도가 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외국인 유학생의 입학 자체가 상당히 어려운 해외 특정 기관들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 석박사 합 4개가량 보유하시는 몇몇 학위부자 선생님들의 경우도 예외가 될 수 있겠네요.)
학부를 어디 나왔는지는 찾아볼 필요도 없고, 밝히지 않더라도 크게 궁금하진 않더라고요.

다만 이건 그들의 주장이나 성과를 받아들이는 때의 문제고, 취업이나 장학, 커뮤니티 형성은 별개로 작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나마 최근~앞으로는 조금 덜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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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교원의 수가 적더라도 강사 선생님들의 수업이 많이, 잘 열린다면 괜찮습니다.
저도 강사 선생님들 수업을 많이 들었고, 또 그분들 수업에 더 혹해서 공부 분야를 넓히거나 바꿔본 경험이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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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은 정말 추천하지 않습니다. 독단에 빠지기가 너무나도 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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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철학전공자도 아니고 국내의 범주를 다루는 학문을 잠깐 발만 담궈봤기 때문에 제가 하는 얘기는 참고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 이미 학부 입시를 마치신 분이긴 하지만 입시를 준비할 때에는 학벌에 대해 동물적인 욕망을 원동력으로 삼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신 입시가 끝난 후에도 계속 학벌에 취해 자만하거나 혹은 반대로 학벌에 움츠러들고 불성실하게 임하는 자세를 경계해야겠죠.
  2. 질문자님 시기의 저를 되돌아보니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는데요, 아마 열정이 넘치고 새로운 시작을 앞둔 채 입학까지 텀도 길어서 조바심이 나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질문자의 내면이 저와 꼭 같진 않겠지만요.
    일단 대학을 다니며 강의를 들으시면서 본인이 관심있는 분야 또는 관련 분야의 교수님들을 찾아뵈며 조언을 들어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마 교수님들이 어느 쪽 대학원을 가라 정도는 충분히 조언해주실거에요. 하지만 교수님의 말씀을 꼭 들을 필요는 없고 결국 결정은 본인의 몫입니다.(마음에 들지 않는 교수님의 제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그대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학생들을 꽤 봐서..)
  3. 어느 분야에 관심이 많으신지는 모르겠지만(사실 공부하다보면 관심분야가 바뀌는 경우가 많기도 하구요) 서강 올빼미 글들만 봐도 해외 유학을 염두하는 경우 국내 학부나 대학원 학벌은 아무 영향이 없다고 하는 것 같더라구요. 한국철학 전공을 염두하시는게 아니라면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설사 지역적으로 한국이 주제인 학계조차 한국 사회에 깔린 학벌에 따른 수직적인 신분차이 같은 분위기는 없습니다. 대학마다 학풍이 다르고 각 학풍이 가지고 있는 입김이 있긴 하다고 할 수 있는 정도? 조금 두루뭉술한데 더 정확한 묘사가 안떠오르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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