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저는 철학 텍스트에 대한 세밀한 주석적 연구를 별로 선호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후설이나 하이데거의 텍스트를 읽는 것은, 결국 그 사람들의 텍스트를 바탕으로 우리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고민하기 위해서이지, 온갖 자료를 다 들춰내서 후설이나 하이데거가 정확히 무엇이라고 말했는지를 아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요. 출판된 텍스트는 그 자체로 자기 완결적이어서, 굳이 다른 외적 자료를 참고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고, 반드시 전문 연구자처럼 주석을 엄청나게 수행하지 않고서도 그에 대한 철학적 옹호나 비판이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지론입니다.
하지만, 저와 연구의 결은 조금 다르더라도, 꼼꼼한 주석가들의 작업물을 보면 어떤 때는 정말 경이롭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토마스 시한(Thomas Sheehan)과 리처드 E. 팔머(Richard E. Palmer)가 편집한 Psychological and Transcendental Phenomenology and the Confrontation with Heidegger를 읽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드네요. 후설과 하이데거 사이의 철학적 관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텍스트들을 수집해서 모아놓은 책인데, 후설과 하이데거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현상학' 항목을 편집하면서 주고 받은 편지들이나 원고에 표시해 놓은 메모들, 후설이 하이데거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쓴 편지들, 하이데거에 대한 후설의 비판적 관점을 포함하고 있는 강연들, 후설이 『존재와 시간』과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 대해 밑줄 친 구절들과 남긴 메모들을 한 권의 책에 망라해서 포함한 뒤, 그 텍스트들과 메모들이 쓰인 배경에 대해 해설한 책입니다.
시한과 팔머가 수많은 자잘한 자료를 포괄적으로 수집해서 모아두었다는 것도 놀랍고, 밀줄의 위치나 책 여백의 메모 하나하나까지 다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하는 수고로운 작업도 감내했다는 것도 놀랍네요. (덕분에, 저처럼 독일어에 그다지 능숙하지 못한 사람도 후설과 하이데거 사이에서 오고갔던 아주 세부적인 메모 조각 하나까지 편하게 찾아볼 수 있어서 무한 감사한 마음입니다.) 석사 초년생 시절에는 '굳이 내가 옛날 사람들 메모까지 들춰봐야 하나?'하고 이런 작업에 대해 다소 심드렁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들춰보면 꽤 재미있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