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이 현상학이다?!

리쾨르가 쓴 "Kant and Husserl"에서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종의 '판단중지'로 해석한 내용을 읽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일상적 상식을 잠깐 중단시키고서 과학적 탐구를 진행하려 했던 것처럼, 칸트도 대상이 인식에 우선한다는 일상적 상식을 잠깐 중단시키고서 철학적 탐구를 진행하려고 했고, 후설의 현상학에서는 이렇게 일상적 상식을 중단시킨 채 초월론적 태도에서 '사태 자체'를 보려고 하는 노력을 '판단중지'라고 부른다는 것이죠.

The Copernican Revolution, disengaged from the epistemological hypothesis, is nothing other than the phenomenological epoche. It constitutes a vast reduction which moves not merely from the constituted sciences, from successful knowledge, to their conditions of legitimacy; it also moves from the totality of appearing to its conditions of constitution. This descriptive design, usually overshadowed by the justificatory intention of the Critique, appears every time Kant renounces dependence on a constituted science and directly defines what he calls receptivity, spontaneity, synthesis, subsumption, production, reproduction, etc. These embryonic descriptions, quite often masked in definitions, are necessary to the epistemological enterprise itself, for the a priori which constitutes the formal determinations of all knowledge is itself rooted in the acts, operations, or functions whose description by and large gets beyond the strict domain of the sciences. (P. Ricoeur, "Kant and Husserl", Husserl: An Analysis of His Phenomenology, E. G. Ballard and L. E. Embree (trans.),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967, p. 180.)

어찌보면 당연한 해석이지만, 그래도 저에게는 꽤나 참신한 해석이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종종 다른 철학 분야를 전공하는 분들에게서 '현상학'이 무엇인지를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데, 그때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좀 난감할 때가 있었거든요.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 현상학은 일종의 '기술적(descriptive)'인 사유라서, 특정한 주제에 대한 현상학적 기술을 따라가는 방식으로만 현상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가능해서요. 현상학을 실제로 수행하지 않고서는, 현상학이 무엇인지 파악하기가 힘든 것이죠. 그런데 리쾨르의 글을 읽다 보니, "칸트가 했던 작업이 일종의 현상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겠더라고요.

물론, 칸트는 '현상학'이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도 않았죠. 더군다나, 칸트는 자신의 작업을 일종의 '연역 논증'이라는 추론적 방법으로 표현하려 하였다는 점에서 기술적 방법을 지향하는 현상학과는 다소 거리가 있기도 하고요. (실제로, 리쾨르의 논문 자체도 후설과 칸트의 '차이'를 좀 더 강조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칸트가 자신의 탐구에서 이후에 현상학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는 '판단중지'와 같은 사유들을 미리 선취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여요. 특별히, 후설 자신이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 그러한 전환 일반의 의미」나 「칸트와 초월론적 철학의 이념」 같은 논문에서 칸트를 현상학의 선구자로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이데거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현상학적 해석』이나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칸트의 작업을 '현상학'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고 강조한다는 점에서도, 칸트의 작업은 '판단중지' 이후에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에 대한 일종의 (원초적 형태의) '현상학적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요.

물론,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면, 칸트도 현상학자이고, 헤겔도 현상학자이고, 키에르케고어도 현상학자이고, 니체도 현상학자이겠습니다만… 아무렴 어떨까요? "온 세상이 현상학이다!"라고, 메를로퐁티도 이렇게 말했는 걸요.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현상학이라는] 이 신화의 위신과 유행의 기원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책임 있는 철학자는 이러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할 것이다. 즉, 현상학은 하나의 방식이나 스타일로서 실천되고 인식될 수 있으며, 완전한 철학적 자각에 이르기 이전부터 하나의 운동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상학은 오랜 시간 동안 여정을 이어왔으며, 그 제자들은 그것을 헤겔과 키에르케고르에게서—물론—발견할 뿐 아니라, 마르크스, 니체, 그리고 프로이트에게서도 도처에서 발견한다.

(ChatGPT 번역 후 인용자 수정)

Even if this were the case, it would remain for us to understand the prestige of this myth and the origin of this fad [of phenomenology], and the responsible philosopher will interpret this situation by saying that phenomenology allows itself to be practiced and recognized as a manner or as a style, or that it exists as a movement, prior to having reached a full philosophical consciousness. It has been en route for a long time, and its disciples find it everywhere, in Hegel and in Kierkegaard of course, but also in Marx, Nietzsche, and Freud. (M. Merleau-Ponty, Phenomenology of Perception, D. A. Landes (trans.), Abingdon, Oxon: Routledge, 2012, .p. lxx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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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과 관련된 질문을 예전에 올빼미에 올렸었습니다. 인지주의와 현상학적 접근 관련 질문드립니다

다만 여전히 현상학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일상적인 상식에 빗대어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본질을 꿰뚫으려는 시도가 현상학이라면, 모든 철학이 현상학인듯합니다. 그렇다면 인용하신 메를로퐁티처럼

인 셈인데, 현상학이라는 전문 용어가 굳이 사용되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지 의문입니다. 모든 철학이 현상학이라면 굳이 현상학이라는 전문 용어보다 철학적 접근이라는 용어를 쓰면 되지 않을까요?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설명이 옳다면, 현상학이라는 개념이 내포하는 바가 너무 넓어서 저로써는 더욱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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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론(inference)'과 대비되는 '기술(description)'의 방법을 사용한다는 점이 현상학의 가장 특징적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전제에서 결론을 도출해내어서 주장을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간과하고 있거나 무시하고 있는 요소들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죠. 가령,

전제1: 모든 사람은 죽는다.
전제2: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결론: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라는 식으로 전개되는 논의는 현상학이라고 보기 어렵죠. 그렇지만,

죽음을 앞둔 소크라테스는 의연했다. 그의 손에는 독약이 든 잔이 있었다. 주변에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친구들을 향해 미소를 지었고, 담담히 독약을 마셨으며, 천천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의 영혼이 몸을 떠나는 순간, 나는 소크라테스라는 사람이 진정으로 누구였는지를 깨달았다.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만으로 그를 못생기고 하찮은 인간이라 폄하하였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라고 한다면 '일종의' 현상학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그림 그리듯이 제시하면서, 사람들이 흔히 보지 못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라는 인간의 아주 결정적이고 중요한 측면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려 하니까요. (말하자면, 이 기술에서는 "그는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고귀한 정신의 소유자였다."라는 것이 일종의 본질직관을 통해 얻어진 소크라테스의 진정한 면모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사회현상학, 종교현상학, 예술현상학 같은 '형상과학'으로서의 현상학은 실제로 위와 유사한 방식의 작업을 수행해요. 가령, 후설이 극찬했던 루돌프 오토라는 종교현상학자의 『성스러움의 의미』라는 작품은, 다양한 종교 텍스트와 종교 상징을 제시하면서 "종교적 체험 혹은 성스러움의 본질이란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이다."라고 이야기하죠. 오토 이전까지는 종교 현상에 '무시무시함', '공포', '떨림' 같은 요소가 항상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잘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래서 칸트주의 철학자들은 종교를 순수하게 '도덕'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선입견을 가지고서 종교를 분석했는데,) 오토는 다양한 형태의 종교 현상에서 두려움의 요소가 언제나 발견된다는 것을 날카롭게 짚어낸 거죠. 말하자면, 언제나 종교 현상에 나타나 있었지만 그런데도 사람들이 제대로 주목하지 못하던 '두려움'이라는 요소야말로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을 오토가 비로소 분명하게 보여준 거죠.

그런데 우리가 '철학과'에서 배우는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의 현상학은 형상과학으로서의 현상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고 하는 '초월론적 현상학'이다 보니, 저런 구체적인 기술이 나타나지 않아서 더 어렵게 느껴지죠. 초월론적 현상학은 사회, 종교, 예술 같은 특정한 영역을 기술하려 하기보다는, 그 영역들을 성립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지평으로서 '순수 의식'이나 '현존재' 같은 주제를 기술하려 하니까요. "의식의 태도에 따라 대상 영역이 서로 다른 의미로 주어진다."라거나, "세계는 초월론적 자아의 구성물이다."와 같은 것이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이죠.

가장 좋은 것은 실제 현상학의 텍스트를 따라가면서, 현상학자들이 어떤 식으로 기술을 진행하는지 살펴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저는 루돌프 오토나 미르치아 엘리아데 같은 종교현상학자들을 통해 현상학이 구체적 영역에 적용되는 실례들을 확인한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종교현상학 이외에도, 알프레드 슐츠, 피터 버거, 토마스 루크만 등 '현상학적 사회학'이나, 로만 인가르덴이나 미켈 뒤프렌의 '예술작품의 현상학' 등을 참조해 보신다면 현상학적 기술 방법이 어떻게 각각의 주제에 통찰력을 제시하는지 이해하시는 데 도움이 되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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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학’이라는 개념의 외연을 지나치게 넓혀선 안 된다는 @sophisten 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동시에 (의식에 주어진 사태 자체에 대한) 기술을 통한 형상의 직관이 곧 현상학의 핵심을 이루며, 그런 뜻에서 반드시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수행하는 작업만이 현상학의 의미를 고갈하지는 않는다는 @YOUN 님 댓글의 함의에도 공감합니다.

다만 적어도 근대 이후의 어떤 철학적 작업을 현상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으려면 (단순히 기술이라는 방법론 이외에) 조건 하나가 추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과학만능주의나 안일한 객관주의가 놓치는 진실이 있으며, 그 진실이 우리네 실존을 위해 퍽 중요하다’는 입장에 대한 커미트먼트입니다. 여기서 저는 ‘객관주의’를 인격의 구조나 작동 원리를 해당 인격이 통과하는 체험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그 외부에서 관찰, 실험, 조작 또는 수량화 등의 방법론을 동원해 탐구하는 접근법으로, 나아가 ‘안일한 객관주의’는 그와 같은 자연과학적 접근법이 인격의 탐구를 위한 유일하게 올바른 (적어도 가장 정확한) 접근법이라는 믿음으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판단중지의 방법론 자체는 철학사에서 그리고 철학과 무관한 삶을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유효하겠지만, (1) (다른 무엇이 아닌) 체험을 통한 사태의 접근과 (2) 안일한 과학주의에 대한 이의라는 태도가 전제되지 않는다면 적어도 후설이 창시한 것으로서의 현대적인 현상학과 동질적인 것이라 보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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