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대답부터 말씀드리자면,
(a) @SmallThings 님이 쓰신 내용은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와 시간』에 제시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이데거는 단순히 '종막', '마지막', '엔딩'이라는 의미로 죽음 개념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서요.
다만, (b) "모든 소설과 영화, 서사시들에 대한 평가는 그 모든 이야기에 대한 평가이고, 그 모든 이야기의 종막-전체-를 본 이후 내려진다."라는 주장 자체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고, 실제로 이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독일의 현대신학자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 종말론의 의의에 대해 강조하기도 하죠.
(a) 하이데거에게 '죽음'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면 『존재와 시간』의 제48절 '미완, 종말, 전체성' 부분을 주의깊게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자신이 말하는 '죽음(Sterben)'이라는 현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생명 활동의 마지막에 벌어질 사건(심장박동의 정지나 사고기능의 영구적 정지)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을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드러냅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 자신이 언제나 '미완성'의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때의 '미완(Ausstand, 미지불)' 혹은 '아직 아님(Noch-nicht)'이란 어느 순간 완성되어서 끝날 수 있는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미완 상태가 아니라 영구적인 미완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원히 '되어가고' 있는 상태에 놓여 있을 뿐, 어느 순간 '성인'이나 '군자'나 '부처' 같은 특정한 목표에 도달해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죠.
하이데거가 실제로 사용하는 예시를 들자면, 빚을 완전히 다 상환한 상태나, 달이 다 차올라서 만월이 된 상태나, 열매가 무르익어서 완전히 먹기좋게 된 상태 등은 엄밀하게 말해서 현존재의 '아직 아님'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하게도, 하이데거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죽음도 그렇게 무엇인가가 완전히 이루어져서 종결된 특정한 상태 따위가 아닌 것이죠. 오히려 (a) 현존재는 영원히 미완성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b) 영원히 미완성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야말로 현존재의 존재 방식 그 자체라는 사실, 그래서 (c) '현존재의 존재 방식'에 대한 완전하거나 완성된 기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기술은 바로 "현존재는 영원히 미완성으로 존재한다."라는 기술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사실이, 하이데거가 '죽음을 향한 존재'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하죠.
현존재는 그가 존재하고 있는 한 이미 자신의 아직-아님으로 존재하듯이, 그는 또한 언제나 이미 그의 종말로 존재한다. 죽음으로 의미되고 있는 끝남은 현존재의 끝에-와-있음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라는 이 존재자의 종말을 향한 존재인 것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현존재가 떠맡는 그런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329쪽.)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존재가 언제나 '아직 아님'으로 존재한다는 점, 그래서 '아직 아님'이라는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 방식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현존재의 '끝'이나 '종말'이나 '완성'이나 '전체 구조'라고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끝에-와-있음(Zu-Ende-sein)'이 아닌 것이죠. 죽음이란 것은 기다리다보면 나중에 찾아오는 그런 종류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가 '아직 아님'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매 순간 아직 아닌 상태로 '끝나 있는' 것이고, 매 순간 (여전히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미완성' 상태인 동시에 (완성되어야 할 다른 본질이나 목표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이미 '완성' 상태인 것이고, 매 순간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존재(Sein)' 자체 속에 '무(Nichts)'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단적으로 말해, 생의 마지막에서 일어나는 숨이 다하는 사건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제49절 '죽음의 실존론적 분석과 이 현상에 대한 가능한 다른 해석과의 제한구별'에서 자신이 말하는 '죽음'이 생물학이나, 심리학이나, 신학에서 말하는 죽음과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죠. 또 제51절 '죽음을 향한 존재와 현존재의 일상성'에서도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망사건(Todesfall)'은 하이데거 본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죽음이 아니라고 지적하고요. 이 점은 윌리엄 블래트너 같은 다른 저명한 하이데거 연구자들도 강조하는 사실입니다.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에 대한 블래트너의 논문 "The concept of death in Being and Time "에서 블래트너는 이렇게 지적하죠.
https://philpapers.org/rec/BLATCO-7
우리는 하이데거의 의미에서 죽음이 현존재의 생 마지막에 일어날지도 모를 (혹은 확실하게 혹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어떤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런 사건을 "삶을 다함"(Ableben)이라고 부른다.
We have seen that death in Heidegger's sense is not some event that might (or certainly or necessarily will) occur at the end of Dasein's life. He calls that event "demise" (Ableben). (p. 53)
(b) '사후성(Nachträglichkeit)'은 어떠한 철학적 의의를 지니는가?
그런데 하이데거와는 별개로, @SmallThings 님이 쓰신 내용 자체는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특정한 사건의 의미를 나중에 모든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자각하게 된다는 것은 현대철학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사후성'이라는 명칭으로 주목하는 주제이기도 하거든요. (여기서 '사후'란 '죽음 이후死後'라는 뜻이 아니라 '일이 끝난 이후事後'라는 뜻입니다.)
가령, '사후성'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꿈이나 트라우마에 대한 분석을 수행할 때 고려하는 중요한 사항입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일이 그 당시에는 환자에게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그 뒤에 벌어진 다른 일과 관계가 되면서 사후적으로 의미가 재해석되어 트라우마를 낳는 경우들이 있어서요. 또한 레비나스의 '흔적' 개념이나 데리다의 '차연' 개념도 사후성의 모티브에서 파생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죠. 의미라는 것은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현전하는 대상 따위가 아니라, 나중에서야 발견된다는 것이 그 두 철학자들이 소위 '현전의 형이상학'에 반대하여 내세우는 논의들입니다.
특별히, 이 주제는 현대신학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20세기 후반의 위대한 개신교 신학자들인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이나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사후성이라는 테마를 맴돌고 있어서요. 그 두 사람은 모두 '종말론'이라는 기독교 신학의 주제에 대해 매우 강조하는데, 이들의 강조점도 역사의 의미는 마지막에 가서야 발견된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어요. 기독교의 종말론은 단순히 "예수재림 때되면 아마겟돈 전쟁 나고, 사람들이 666 베리칩 심다가, 불신자들 다 지옥 갈 거임ㅇㅇ" 같은 수준의 음모론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이라는 관점에서 사회 전체를 재성찰하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기존의 제도와 규범에 대한 급진적 비판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신학자들이 강조하는 내용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