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죽음에 대해 이해한 것이 이게 맞을까요?

이번 시험범위에 2024 고1 9월 국어 포함되는데

그 중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에 대한 지문이 있었습니다.

일단...반가웠습니다.

그런데 그 지문을 읽던 도중에, 죽음이 고유적인 사건이라는 대목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죽음(삶의 끝)이라는 사건 자체는 매우 필연적이고, 이에 따라 매우 보편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또한 죽음이 고유하다면 모든 개별사건 역시 고유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구글에도 검색해 보고 GPT에게도 물어보며 나름의 이해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 자의적인 해석들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고 이게 하이데거의 이론에 대해서 올바른 내용인지, 그 내용 자체로는 올바른 이야기인지 두 가지 각도에서 평가해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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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모든 것들에, 모든 순간에 내제된 것이며

그것의 의미는 삶 전체에 종속된다.

또한 개별적 사건들은 같을 수 있고 공유되기도 하지만

그 모든 개별적 사건의 총제인 삶, 그 삶의 모든 것들의 끝이자 그 모든 삶이라는 총제에 그 의미가 종속되는 죽음이란 고유할 수밖에 없다.

모든 이야기는 밥을 먹는 사건이나 우물에서 물을 뜨는 개별 사건을 공유할 수 있지만

이야기에 있어서 그 종막과 마지막, 엔딩이라는 것은 그 이전에 실제했던 모든 개별사건의 총제-삶-에 따라 그 의미가 모두 달라지기에

모든 엔딩은 고유하다.

적합한 비유는 아니지만, 모든 소설과 영화, 서사시들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한 평가는

그 모든 이야기에 대한 평가이고, 그 모든 이야기의 종막-전체-를 본 이후 내려진다.

그렇기에 그 평가는 전체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으며, 죽음 또한 선행하는 모든 개별사건의 총제에 그 의미가 종속되는 개별사건으로서 특수성과 고유성을 가진다.

고로, 죽음의 고유성과 특수성이 성립하며 시점에 따른 경험해석과 체감 차이에 따라서도 그 고유성이 성립된다. 피상적 이해이고 문자적 해석인지는 모르겠으나, 소피스트 상대주의와도 연관될 수 있어 보인다.

그것은 가장 필연적이고 가장 특수한 사건이며 모든 개별사건에 대한 특수한 메타적 의미의 개별사건이다.

자신의 죽음은 자신만이 겪을 수 있고
그 이야기의 엔딩은 그 이야기만이 가질 수 있다.

또한 죽음은 그 자체로 이미 이야기에 영향을 끼치며
구조화하는 동시에 구조화되는 대상이다.

죽음은 그 사건 자체로 중요하지만, 그것을 인지함으로서 본래성을 가지고 어떤 방향성을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1. 죽음은 모든 일들에 대한 일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2. 죽음은 그 존재를 인지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로도 삶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을 받아 바뀌는 삶은 동시에 죽음의 의미에도 영향을 준다.
  3. 죽음은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서 가지게 되는 본래성과 방향성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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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하이데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나머지는 다른 분들이 보충하거나 정정해 주시리라 생각하고 제 생각을 적어볼까 합니다.
먼저, 질문자님께서 하이데거의 '고유성'을 잘못 이해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자님은 쓰신 글에서 고유함을 개별적 존재의 특수한 삶의 모습과 비슷한 뜻으로 이해하고 계신 듯하며, 이를 통해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고유성은 우선 이 사람의 삶과 저 사람의 삶에서 죽음이 각각 다른 의미라는 뜻이 아니라, 먼저 인간 즉 현존재에게 있어서 죽음이 고유한 사건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이는 다른 동물이 죽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해 태도를 취하고 거기에 직면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인간 현존재만의 특수한 존재 방식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는 매우 필연적이고, 이에 따라 매우 보편적인 사건"이라는 질문자님의 견해는 하이데거의 생각과도 부합합니다. 물론 하이데거가 질문자님이 제기하신 죽음의 저마다의 특수성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의 고유성은 나의 죽음과 당신의 죽음이 삶의 지나온 길 때문에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당신과 다른 사람들이 모두 현존재로서 실존적 죽음에 태도를 취하며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하이데거는 소피스트적 상대주의처럼 존재와 죽음의 일반적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에, 하이게거에게 죽음의 특수성은 먼저 현존재의 죽음의 고유성이라는 일반성의 층위에서 기초지어져 있다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적으신 "죽음은 그 존재를 인지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로도 삶에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을 받아 바뀌는 삶은 동시에 죽음의 의미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과 "죽음은 사건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로서 가지게 되는 본래성과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이해는 하이데거의 핵심적인 생각으로서, 적절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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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죽음의 고유성이라는 개념이 개인적 의미에서의 고유성, 특별함인 줄 알았는데 @fuersichsein 님이 하신 말씀을 보니 제가 오독을 한 것 같습니다. 그냥 죽음이라는 사건에 대한 인지, 직시가 그러한 방향성과 본래성을 되찾도록 하는 사건(가능성의 인지)이기에 특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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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대답부터 말씀드리자면,

(a) @SmallThings 님이 쓰신 내용은 엄밀한 의미에서 『존재와 시간』에 제시된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이라 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이데거는 단순히 '종막', '마지막', '엔딩'이라는 의미로 죽음 개념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서요.

다만, (b) "모든 소설과 영화, 서사시들에 대한 평가는 그 모든 이야기에 대한 평가이고, 그 모든 이야기의 종막-전체-를 본 이후 내려진다."라는 주장 자체는 매우 흥미로운 주장이고, 실제로 이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독일의 현대신학자인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가 바로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독교 종말론의 의의에 대해 강조하기도 하죠.

(a) 하이데거에게 '죽음'이란 무엇이고 무엇이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면 『존재와 시간』의 제48절 '미완, 종말, 전체성' 부분을 주의깊게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자신이 말하는 '죽음(Sterben)'이라는 현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생명 활동의 마지막에 벌어질 사건(심장박동의 정지나 사고기능의 영구적 정지)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을 구체적인 예시를 통해 드러냅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 자신이 언제나 '미완성'의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인데, 이때의 '미완(Ausstand, 미지불)' 혹은 '아직 아님(Noch-nicht)'이란 어느 순간 완성되어서 끝날 수 있는 잠정적이고 일시적인 미완 상태가 아니라 영구적인 미완 상태를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영원히 '되어가고' 있는 상태에 놓여 있을 뿐, 어느 순간 '성인'이나 '군자'나 '부처' 같은 특정한 목표에 도달해서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죠.

하이데거가 실제로 사용하는 예시를 들자면, 빚을 완전히 다 상환한 상태나, 달이 다 차올라서 만월이 된 상태나, 열매가 무르익어서 완전히 먹기좋게 된 상태 등은 엄밀하게 말해서 현존재의 '아직 아님'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당연하게도, 하이데거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죽음도 그렇게 무엇인가가 완전히 이루어져서 종결된 특정한 상태 따위가 아닌 것이죠. 오히려 (a) 현존재는 영원히 미완성으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그리고 (b) 영원히 미완성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야말로 현존재의 존재 방식 그 자체라는 사실, 그래서 (c) '현존재의 존재 방식'에 대한 완전하거나 완성된 기술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기술은 바로 "현존재는 영원히 미완성으로 존재한다."라는 기술일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사실이, 하이데거가 '죽음을 향한 존재'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렇게 말하죠.

현존재는 그가 존재하고 있는 한 이미 자신의 아직-아님으로 존재하듯이, 그는 또한 언제나 이미 그의 종말로 존재한다. 죽음으로 의미되고 있는 끝남은 현존재의 끝에-와-있음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라는 이 존재자의 종말을 향한 존재인 것이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현존재가 떠맡는 그런 존재함의 한 방식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1998, 329쪽.)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현존재가 언제나 '아직 아님'으로 존재한다는 점, 그래서 '아직 아님'이라는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 방식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현존재의 '끝'이나 '종말'이나 '완성'이나 '전체 구조'라고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이라는 것은 단순히 '끝에-와-있음(Zu-Ende-sein)'이 아닌 것이죠. 죽음이란 것은 기다리다보면 나중에 찾아오는 그런 종류의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가 '아직 아님'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살아 있는 매 순간 아직 아닌 상태로 '끝나 있는' 것이고, 매 순간 (여전히 다른 무엇인가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는) '미완성' 상태인 동시에 (완성되어야 할 다른 본질이나 목표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이미 '완성' 상태인 것이고, 매 순간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존재(Sein)' 자체 속에 '무(Nichts)'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단적으로 말해, 생의 마지막에서 일어나는 숨이 다하는 사건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제49절 '죽음의 실존론적 분석과 이 현상에 대한 가능한 다른 해석과의 제한구별'에서 자신이 말하는 '죽음'이 생물학이나, 심리학이나, 신학에서 말하는 죽음과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죠. 또 제51절 '죽음을 향한 존재와 현존재의 일상성'에서도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망사건(Todesfall)'은 하이데거 본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죽음이 아니라고 지적하고요. 이 점은 윌리엄 블래트너 같은 다른 저명한 하이데거 연구자들도 강조하는 사실입니다.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에 대한 블래트너의 논문 "The concept of death in Being and Time "에서 블래트너는 이렇게 지적하죠.

https://philpapers.org/rec/BLATCO-7

우리는 하이데거의 의미에서 죽음이 현존재의 생 마지막에 일어날지도 모를 (혹은 확실하게 혹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어떤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런 사건을 "삶을 다함"(Ableben)이라고 부른다.

We have seen that death in Heidegger's sense is not some event that might (or certainly or necessarily will) occur at the end of Dasein's life. He calls that event "demise" (Ableben). (p. 53)

(b) '사후성(Nachträglichkeit)'은 어떠한 철학적 의의를 지니는가?

그런데 하이데거와는 별개로, @SmallThings 님이 쓰신 내용 자체는 철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특정한 사건의 의미를 나중에 모든 일이 다 끝난 다음에야 자각하게 된다는 것은 현대철학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사후성'이라는 명칭으로 주목하는 주제이기도 하거든요. (여기서 '사후'란 '죽음 이후死後'라는 뜻이 아니라 '일이 끝난 이후事後'라는 뜻입니다.)

가령, '사후성'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서 꿈이나 트라우마에 대한 분석을 수행할 때 고려하는 중요한 사항입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일이 그 당시에는 환자에게 의미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그 뒤에 벌어진 다른 일과 관계가 되면서 사후적으로 의미가 재해석되어 트라우마를 낳는 경우들이 있어서요. 또한 레비나스의 '흔적' 개념이나 데리다의 '차연' 개념도 사후성의 모티브에서 파생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죠. 의미라는 것은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현전하는 대상 따위가 아니라, 나중에서야 발견된다는 것이 그 두 철학자들이 소위 '현전의 형이상학'에 반대하여 내세우는 논의들입니다.

특별히, 이 주제는 현대신학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20세기 후반의 위대한 개신교 신학자들인 판넨베르크의 '보편사 신학'이나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이 사후성이라는 테마를 맴돌고 있어서요. 그 두 사람은 모두 '종말론'이라는 기독교 신학의 주제에 대해 매우 강조하는데, 이들의 강조점도 역사의 의미는 마지막에 가서야 발견된다는 생각에 기초를 두고 있어요. 기독교의 종말론은 단순히 "예수재림 때되면 아마겟돈 전쟁 나고, 사람들이 666 베리칩 심다가, 불신자들 다 지옥 갈 거임ㅇㅇ" 같은 수준의 음모론이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이라는 관점에서 사회 전체를 재성찰하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기존의 제도와 규범에 대한 급진적 비판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신학자들이 강조하는 내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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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해한 바가 맞으면

"우리는 영원히 미완인 존재이기에 미완이며, 영원히 미완인 존재라는 것으로서 완성된 존재이다. 우리는 이미 완성되지 않음, 완성되어감이라는 완성을 이룬 존재이다. 우리는 Done의 완성(B)이 아닌 Doing의 완성(A)을 이루었으며, B에 대한 미완과, A에 대한 완성을 가진 이미 끝난(A), [죽은(A)] 존재이다."

인 것 같은데, 이 이해가 맞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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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씀하신 바로 그 내용이 하이데거가 '죽음'과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표현으로 묘사한 우리 자신의 존재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게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가 '죽음'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아직 아님' 혹은 '무'의 요소를 항상 지닌 채 언제나 되어가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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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이게 그 모의고사 지문인데
제가 보기에는 여기서도 "되어감으로서의 완성" 을 다루기는 하지만 "사망사건"으로서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아서 질문드립니다. 이 지문의 내용이, @YOUN 님이 보시기에는 어떤 것 같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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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는 인간을 자신의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을 제기할
수 있는 ‘현존재’라고 정의하고 삶의 실존적 의미를 탐구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존재는 정해진 운명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 계속해서 무언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그런데 현존재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요구하는 체제에 따라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본래적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게 되곤 한다. 하이데거는 이
를 현존재가 익명의 타인들인 ㉠ ‘세인(世人)’으로서 존재하며
비본래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았다. 세인은 특정한 누
군가가 아닌 익명성을 지닌 모든 타인이기에, 세인의 일원이
된 현존재는 자신의 고유성을 잃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본래적 삶에서 해방되어 본래적 삶으로 나아가려
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삶이 유한하다는
인식, 즉 죽음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하이데거
에게 죽음은 현존재가 반드시 맞이하게 된다는 점에서 확실성
을 가지며, 삶의 일부분으로서 ‘아직 오지 않음’의 상태로 존재
한다. 다시 말해, 죽음은 현존재 외부에 있는 사건이 아니라 현
존재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또한 죽음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없는, 나 스스로만이 경험할 수 있는 고유한 것이
기에 대체불가능성을 지닌다. 따라서 죽음이야말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이며, 나의 죽음을 적극적으
로 대면할 때 자신의 진정한 개인적 삶을 인식하고 본래적 삶
을 살아가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을 적극적으로 대면하지 않고 단순히 내가 죽는
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칠 때는 본래적 삶을 살아갈 수 없
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현존재는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세인으로 전락시켜 자
신의 죽음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타인의 죽음을 보면
서도 자신의 고유한 죽음에 대해서는 잘 실감하지 못하고, 오
히려 죽음이 자신과는 무관한 사건이라고 외면하며 죽음의 확
실성을 부정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이러한 회피와
무관심이 현존재를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
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이데거는 삶의 변화를 위해, 죽음이 주는 불안으로
부터 달아나지 않고 죽음을 대면하여 선취할 것을 요구하였다. 죽음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죽음이라는 가능성 앞에 미리 자
신을 세워봄으로써 과거의 비본래적 삶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
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관점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스스로
결정하며 살아가겠다는 새로운 결단을 통한 실존적 삶을 제시
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여기서

"죽음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하이데거
에게 죽음은 현존재가 반드시 맞이하게 된다는 점에서 확실성
을 가지며, 삶의 일부분으로서 ‘아직 오지 않음’의 상태로 존재
한다. 다시 말해, 죽음은 현존재 외부에 있는 사건이 아니라 현
존재 자체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

인 대목에서는 "되어감의 죽음"을 말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현존재는 불안을 느끼게
되고,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를 세인으로 전락시켜 자
신의 죽음을 은폐하기 때문이다."

라는 부분에서는 사망사건을 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되어감의 완성(죽음A)가 아닌 사망사건(죽음B)를 말하는 것 같아요. 제 생각이 맞을까요?

이 내용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오히려 메멘토모리 카르페디엠같은 교훈적인 내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가 영원히 되어가는 존재로서 이미 죽음A를 맞은 상태가 아닌, 어떤 다가올 사건인 죽음B를 앎으로서 삶을 반성한다...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여기서 죽음A와 죽음B는 같은 문자지만 전혀 다른 의미인 것 같습니다.

동음이의어를 같이 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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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적어도 제가 보기에, 이 모의고사 지문은 하이데거의 철학을 매우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죽음' 개념뿐만 아니라 '실존적'과 '실존론적'이라는 두 가지 핵심 개념들에 대한 구별도 놓치고 있네요.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에 대한 이런 피상적인 이해가 하이데거 비전공자들에게는 매우 널리 퍼져 있어서 저는 항상 답답하게 생각합니다. (실제로, 몇 년 전에 이 사이트에서도 하이데거의 죽음 개념에 대해 저와 다른 분 사이에서 한바탕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고, 다른 전공자분들도 이 논쟁에 많이 참전해 주셨습니다. 그때 글들이 많이 남아 있으니 한번 찾아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모의고사 지문에 나온 내용을 너무 신뢰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특히, 헤겔이나 하이데거 관련 지문들은 전문성이 떨어지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예전에 이 사이트에서 헤겔 전공자분들이 실제 모의고사 지문의 오류에 대해 지적하신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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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신비롭군요... 정성스러운 답변 너무 감사드립니다.

모의고사 안 믿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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