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단락은 첫 문장만 제외하고 모두 옳지 않다

테리 핀카드가 쓴 『헤겔』이라는 책은 도입부가 굉장히 인상적인 걸로 유명하죠.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다가 여기에도 인용해 봅니다. 책 서문 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 페이지의 내용입니다.

헤겔은 일반 교육을 받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는 안다고 믿는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철학은 마르크스 역사 이론의 선조이지만 유물론자인 카를 마르크스와는 달리, 실재는 궁극적으로 정신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립/반정립/종합의 과정에 따라 실재가 발전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는 관념론자였다. 또한 그는 프로이센 국가 체제를 찬양하여, 그것이 신의 작품이며 완벽하고 인류 역사 전체의 절정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센의 모든 국민은 무조건 국가에 충성할 의무가 있으며, 국가는 국민을 원하는대로 취급할 수 있다. 절대자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린 무언가를 찬양함으로써 헤겔은 독일 민족주의, 권위주의, 군국주의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

위 단락은 첫 문장만 제외하고 모두 옳지 않다.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위의 내용이 명백한 오류라는 것이 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정설로 굳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간략한 철학사 서술과 백과사전의 설명에 여전히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헤겔은 도대체 누구였는가? 그리고 그는 왜 이토록 지독하게 오해되고 말았는가?

(테리 핀카드, 『헤겔』, 전대호·태경섭 옮김, 길, 2015, 9쪽, 인용자 강조.)

그런데 제 생각에는 첫 문장도 거짓이 아닐까 싶네요. 철학 전공자들 중에서도 "내가 헤겔을 어느 정도는 알지!"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 같은데, "일반 교육을 받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헤겔을] 어느 정도는 안다고" 믿을리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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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수능에 헤겔 지문 나온 것이 떠오르네요. 헤겔에 화끈하게 데인 재수생들은 "헤겔만큼은 어느 정도 안다!" 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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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정/반/합이야 말로 헤겔을 설명하기에는 가장 부적절한 도식 중 하나인데, 이게 수능 때문에 이제 전국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헤겔의 핵심 개념인 것처럼 퍼져버렸네요;;; 정작 헤겔은 그런 도식 언급도 안할 뿐더러, 아주 간혹 언급을 하더라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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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빼고 다 알고있었네 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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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책이 헤겔 철학 해설서라기보다는 헤겔의 일생에 대해 다룬 평전이라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한 정확한 근거를 저 책 속에서 직접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저도 저 두꺼운 책을 다 읽어본 건 아니고, 제가 관심 가지는 몇몇 부분만 골라 읽었을 뿐이라서요;;) 다만, 제 생각에, 핀카드는 헤겔이 관념론자라는 견해를 문제 삼은 것 같아요. 핀카드의 헤겔 해석은 피핀의 해석과 더불어서 ‘비형이상학적 헤겔’이라고 종종 불리는데, 이 입장은 헤겔의 정신 개념이 결코 ‘유사-신적 지성(quasi-divine intelligence)’이 아니라고 강조하거든요. 오히려 정신 개념을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일종의 사회-역사적 규범(socio-historical norms)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핀카드식의 헤겔 해석에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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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 책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저자를 옹호해보자면 이러한 논리를 펼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헤겔과 맑스 둘 다 찍먹해봤을 뿐이라 미숙합니다.) 해당 구절의 앞 부분 '그의 철학은 마르크스 역사 이론의 선조이지만 유물론자인 카를 마르크스와는 달리'을 전제하여 문제가 되는 부분을 세밀화하자면 다음과 같아보입니다.
(1) (현실적 전제들을 추상하지 않는) 유물론자인 맑스와 달리 (그것을 추상하는) 헤겔에게 실재는 궁극적으로 정신이다.
(2) 정립/반정립/종합 과정에 따라 실재가 발전한다
(3) (1)과 (2)를 근거로 하여 헤겔은 관념론자이다.

이 중 문제삼으시는 부분은 (1)과 (3)인듯한데, (1)에만 집중해보겠습니다. (1)에서 쟁점은 헤겔이 ①현실적 전제들을 추상했느냐/하지 않았느냐 와 ②그에게 실재가 '궁극적으로' 정신이냐/아니냐 일듯합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② 또한 ①에 종속하는 문제인것 같고, 핵심적인 문제는 '헤겔이 현실적 전제들을 추상했느냐/하지 않았느냐', 즉, '헤겔적인 개념은 외적인 재료 없이 자신을 스스로 객관화시킬 준비가 되어있다'가 참이냐 거짓이냐 인듯합니다.(Das Kapital. Urauagabe, hg. v. Fred E.Schrader, Hildesheim 1980, S. 18)

이 문제를 헤겔의 자유개념을 통해본다면 잘 파악할 수 있을 듯합니다. 헤겔은 자유를 부정적 자유와 긍정적 자유(참된 자유) 두가지로 나눕니다. 그리고 그에게 긍정적으로 자유로운 자는 "자신을 공허한 고독 속에 유폐시키지 않고 다채로운 관계들의 현실로 거침없이 나서지만 또한 이 유한성 속에서도 꿋꿋하게 보편적 자기 동일성을 관철시키면서 유한한 규정들을 오히려 자기 자신의 풍요로운 현존재로 만드는 총체적인 자아"입니다. (김준수, 헤겔의 자유 개념의 구조와 의미) 즉, 헤겔에게 있어 참된 자유는 현실을 추상하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사회 관계 속에서 노동을 통해 자기 실현을 성취하는 유물론자 맑스와 달리, 현실(감각과 물질)을 떠나 정신의 세계 속에서 자유를 찾는다는 의미에서 헤겔을 관념론자로 내세우고 비판한다는 것은 잘못된 비판입니다. 왜냐하면 헤겔에게 있어 그의 철학 체계의 기반이자 정수인 자유의 참된 형태는 그저 정신 세계 속에서만 운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헤겔 철학의 목표가 칸트 철학의 공허함을 극복하고 철학을 통한 이성과 현실의 화해인 점을 상기하면 '헤겔이 현실적 전제들을 추상했다'는 것을 근거로 헤겔을 비판하는 것은 허수아비 때리기 논증인듯합니다.

덧붙여, 이와 관련된 논문으로 김준수 선생님의 '헤겔에게서 이성과 현실'을 읽어본적이 있는데 도움이 될듯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포이어바흐의 헤겔 비판을 재비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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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약간 비슷한 생각인데, 일단 핀카드가 이야기한 내용 중에서

(1) 헤겔의 철학이 마르크스 역사 이론의 선조이다.

이 점 자체는 영향사적으로 크게 부정할 이유가 없다고 봐요. 그런데 문제는

(2) 유물론자인 카를 마르크스와는 달리, 실재는 궁극적으로 정신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이 부분인데, '마르크스 vs. 헤겔'이라는 구도를 '유물론 vs. 관념론'으로 대비시킨다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게 핀카드의 입장이 아닐까 싶네요. 정신 개념에 대한 핀카드식의 비형이상학적 해석대로라면, 헤겔이 이야기하는 '정신'은 결코 물질과 이원론적으로 구별되는 추상체 따위가 아니니까요. (저는 이쪽 진영의 해석이 상당히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도, 영어권에서는 널리 퍼진 해석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3) 헤겔은 관념론자였다.

이 주장도 적절하지 못한 거죠. 물론, '관념론'을 어떤 의미로 이해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이긴 하지만, 적어도 유물론과 대립되는 의미의 관념론을 상정하고 있다면(세계의 형이상학적 실재성이 물질과는 구별되는 추상체에 있다는 의미로 관념론을 말하고 있다면), 이런 식의 관념론은 헤겔하고는 전혀 맞지 않게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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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마 저자가 이것을 부정하진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이를 부정하기 쉽지도 않고, 해당 부분을 T로 여긴다고 하더라도 문장 내에서 후술되는 것들이 모두 F라고 여긴다면 전체 문장은 F가 되고, 결국 "첫 문장만 제외하고 모두 옳지 않다."는 저자의 언명은 T가 되니까요.

저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헤겔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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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