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에 출현한 헤겔의 신화

"정립-반정립-종합. 변증법의 논리적 구조를 일컫는 말이다. 변증법에 따라 철학적 논증을 수행한 인물로는 단연 헤겔이 거명된다. 변증법은 대등한 위상을 지니는 세 범주의 병렬이 아니라, 두 범주가 조화로운 통일을 이루어 가는 수렴적 상향성을 구조적 특징으로 한다." - 2021년 수능 국어 제시문

"정반합" 도식은 헤겔을 둘러싼 대표적인 신화이다.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모를 이 신화 덕분에 많은 사람들은 저 단조로운 3분도식을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원리라고 주장한 이상한 철학자로 헤겔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덧붙이며 헤겔을 조소한다.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되는 게 아냐." 실로 세상은 정반합 같은 간단한 원리 따위로는 설명될 수 없다. 나는 헤겔을 조소하는 일반인들이 지극히 올바른 견해를 가졌다고 본다. 저 3분도식을 헤겔한테 귀속시킨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헤겔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철학자들도 헤겔에게 '정반합' 3분도식 같은 것을 귀속시켜 그를 3분 즉석 조리 철학자로 둔갑시키는 행태에는 거부감을 느낀다. 이 신화에 대해 아도르노는 다소 짜증 섞인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청하건대 지금 이 시각부터 저 유명한 3단계 도식, 즉 통상적으로 말하는 정립, 반정립 그리고 종합을 염두에 두는 습관을 그만두십시오. 변증법 배울 때 학교에서 이런 식으로 피상적인 설명들을 해서 줄곧 들어온 그 도식 말입니다. 헤겔 자신도 말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체계 같은 무엇을, 체계로서 종합이 되려는 그런 것을 갖고 말았지만 애당초 이 3박자를 도식적인 의미에서 시종일관 고수할 생각이 절대 없었음은 물론, 심지어 그는 내가 앞에서 거론한 『정신현상학』 서설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3단계 도식에 대해 아주 무시하는 발언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Th. W. 아도르노, 『부정변증법 강의』, 이순예 역, 세창출판사, 2012, 13.)

아도르노가 말하는 저 "아주 무시하는 발언"이란 무엇일까? Jon Stewart가 편집한 Hegel Myths and Legends(Evanston, Illinois: Northwestern Universoty Press, 1996)에 실린 "The Hegel Legend of 'Thesis-Antithesis-Synthesis'"에서 구스타프 뮐러(Gustav Mueller)는 이 정반합 도식과 관련하여 다음의 구절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서문에서 정립-반정립-종합으로 이어지는 3단계 도식에 대해 언급한다. 그러나 그는 이 도식이 칸트로부터 나왔다는 점을 밝히고 나서는 다음처럼 말한다.

"지혜의 그런 요령은 쉬운 만큼 곧장 습득되어 사용할 수 있으나,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그 요령을 반복하는 일은 뻔히 들여다 보이는 마술의 눈속임을 반복하는 것만큼이나 견디기 힘들다. 이 단조로운 형식주의의 도구란, [...] 두 가지 색만 놓여 있는 화가의 팔레트만큼이나 다루기 어렵지 않은 것이다."(G. W. F. Hegel, Phänomenologie des Geistes, in: Werke in zwanzig Bänden, Bd. 3, Frankfurt: Suhrkamp, 1986, 50.)

그럼 도대체 이 정반합 신화는 왜 헤겔에게 귀속되고 만 것일까? 뮐러의 설명에 따르면, 1835년 겨울 칼리보이스(Heinrich Chalybäus) 교수는 드레스덴의 칸트주의 철학자들에게 칸트 이후 헤겔까지의 철학을 강의했고 이를 책으로 펴냈는데, 그는 여기에서 헤겔 철학의 방법론을 "정립-반정립-종합"의 3단계 법칙으로 설명했다. 이 책은 매우 유명한 철학 교재가 되었고, 여러 군데에서 이 교재를 읽고 토의했다. 그 중에는 마르크스가 속한 헤겔 클럽도 있었으며, 이후 정반합 도식은 마르크스의 저작에 의해 널리 퍼져나가 오늘날 헤겔을 정반합 철학자로 만들고 말았다.

자기가 이렇게 거뜬히 무시하고 넘어간 3분도식을 후대 사람들이 그에게 귀속시켜 이윽고 자신이 레토르트 3분카레 철학자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알면 헤겔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어쨌건 이제 학생들은 수능 준비를 위해 기출문제를 반복적으로 풀며 헤겔 변증법은 정반합이라는 틀에 박힌 도식적 설명도 같이 반복적으로 학습할 것이다. 헤겔 전공자들은 질색하는 그 삼분도식 말이다. 변증법이 정반합이라는 오래된 신화는 19세기에 등장해서는 2세기가 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이어져 왔고 앞으로도 죽 이어져나갈 것이다. 불쌍한 오뚜기 3분요리 철학자 헤겔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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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라도 일련의 글을 보시고 변증법에 대해 알고싶으신 분은 ‘안드레아스 아른트’의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칸트, 헤겔, 그리고 마르크스에 대한 논의-’ 라는 논문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제 생각에는 좋은 논문입니다. 논문 원저자는 세계적인 헤겔 권위자이며,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 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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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카드의 책를 읽는데 <서두>에서부터 말씀하신 <정립-반정립-종합>이라는 신화를 “일련의 광범위하고 게으른 해석”이라고 비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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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에 정리된 비문학 항목을 보니 정말 놀랍게도 헤겔은 단 두 번 등장했습니다.

2015학년도 국어 B형 연계 지문, 헤겔과 뒤르켐의 사회이론
그리고 2022학년도 국어 연계 지문, 헤겔의 절대정신

그 지문의 문제가 6문제인데 오답률 Top15에 네 문제가 들어가 있으니...

앞으로도 수험생들에게 정반합으로 기억될 헤겔에게 저도 위로를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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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철님이 언급하신 문제말고도 전 다른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그 문제는, 헤겔 자체가 수능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헤겔은 너무나도 어렵고 이해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수능처럼 주어진 시간 안에 단락을 이해해야하는 경우에는 헤겔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한 두 문장을 며칠, 혹은 몇달까지도 투자하며 생각해야하는데, 기껏해야 20-30분을 주고 헤겔에 대한 문제를 풀라니요. 물론 원전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짧습니다. 만일 이 단락을 20분만에 읽고 어떤 답에 자신있게 답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단락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 단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는 것 뿐입니다. 예전에 제가 헤겔 수업을 처음 들을 때 가르치셨던 교수님의 구절을 쓰자면, 헤겔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로 인해 철학을 하는 것이 아닌, Bullshit Summary Hegel을 하는 것 뿐입니다.

이게 문제가 되는 이유는 헤겔을 이해한 '척'을 하면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문제들을 맞은 학생은 자신이 이해하는 '척'을 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채 실제로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위험한 것이지요.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무지에 대해 무지한 것보다 낫지만, 이 경우에는 정확히 그 반대 방향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몇 달이 걸려도 이해하지 못할 개념들을 주고, 그 개념들을 아는 척을 하면 좋은 결과를 받고, 그러지 못한다면 -- 혹은 이 개념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한다면 -- 좋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존 설의 중국어방 예시를 잠깐 빌리겠습니다 (물론 주장하는 바는 다르겠지만요). 제가 중국어를 모른다고 하고 한 방에 갇혀서 중국어 문장을 받는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전 그 방 안에서 그 문장들의 문자들에 기반하여 다른 문장을 생성해내는 법칙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squiggle squiggle을 받으면 squoggle squoggle을 생성하게 말이죠. 그리고 이 법칙이 충분히 좋아서, 제가 생성한 문장이 제가 받은 문장에 적합한 답이 될 수 있다고 해봅시다. 이 경우에 저는 중국어 문장을 이해하지 않았지만 중국어를 아는 '척'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여금 제가 중국어를 잘한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지요). 이는 헤겔의 경우에도 적용가능하겠네요. 헤겔에 대한 단락을 읽고 20-30분 안에 답을 맞추라는 것은, 이 단락을 이해하지 않고 어떤 법칙을 사용하여 답을 찾아내라 라는 것과 같습니다. 즉, 수능은 헤겔에 대한 단락을 문제로 냄으로써, 학생들에게 이해와 멀어지고 아는 '척'을 하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게 제 헤겔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Bullshit Hegel로의 지름길이겠지요.

하지만 이런 문제를 내면 Bullshit Hegel 학자들을 만들어내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만들어냅니다. 그 문제는 학생들이 헤겔 뿐 아니라, 일반 학문에서도 아는 '척'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학문은 아는 척을 하게 되면, 당연하게도, 3류 학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대학 입장에서는 이런 수능 점수로 학생을 뽑게 되면 단락을 이해하려고 하는 학생 대신에 단락에 대해 아는 척을 하는 학생을 뽑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학교에서 좋은 시설, 좋은 교수를 두면 뭐합니까? 수능에서 뽑는 사람은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아닌 아는 척을 잘하는 학생인 걸요.

물론 한 가지 가능한 반박이 있습니다. 그 반박은: 이런 아는 척을 잘해야 이해를 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를 잘하는 것이 아는 척보다 어려운데, 아는 척을 못하는 사람은 이해도 못하지 않을까? -- 라는 것이 제가 생각한 반박입니다. 실제로 비슷한 반박을 듣기도 했고요. 하지만 이 반박은 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아는 척하는 능력과 이해를 잘하는 능력이 꼭 비례해야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아는 척을 잘하고 이해를 못할 수도 있고, 아는 척은 못하지만 이해를 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반박이 왜 꼭 성공해야하는지는 모르겠네요. 애초에 이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는 척을 잘해야 이해를 잘할 수 있다라는 전제를 주장해야하기 때문에 burden of proof는 저 반박을 하는 사람에게 넘겨가기도 하고요.

그리고 어찌저찌 반박에 성공하더라도, 결국 수능 문제에서 헤겔 단락이 아닌 다른 단락, 즉 학생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단락을 문제로 내면 무조건적으로 헤겔을 문제로 내는 것보다 좋습니다. 왜냐면 아는 척을 잘해야 이해도 잘한다고 주장을 한다면, 그 사람들은 확률에 의존해야합니다. 즉, 아는 척을 잘하는 사람이 이해도 잘할 확률이 높다고 주장을 해야하죠. 하지만 확률은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통계학 용어로는 소음 (noise)가 생기지요. 그렇다면 그냥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단락을 내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면 그럴 경우에 이해를 잘하는 학생을 통계학적 불확실성 없이도 뽑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헤겔은 수능 문제로 내지 않는 것이 맞다 -- 적어도 이게 제 생각입니다.

쓰다보니 길이 길어졌네요. 평소에 수능에 생각을 하는 편이라, 이런 저런 생각이 나온 것 같습니다. 어찌됐든 제 생각이니 걸러서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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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suvius 님과 제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말한 '아는 척'이라는 걸 조금 더 명료하게 말할 필요가 있네요. 제가 말한 '아는 척'이 바로

는 것입니다. 문단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주어진 법칙으로 답을 골라내는 것이니깐요. 말 그대로 중국어방에 갇혀서 그럴싸한 중국어 문장을 만들어내듯이 말이에요.

지적 호기심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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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는 대한민국 교육 자체의 문제로 양산된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답이 정해져 있으며 기계로 채점하는 그 방식이 불러온 문제 의도에 문제 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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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시험이 한국의 시험과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알고 있는데(논설문을 요구하는 문제도 있다는 점에서), 과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은 항상 있긴 있었습니다.

일단 평가해야 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줄세우기를 할 수밖에 없는데(점수제로 하든 등급제로 하든) 학업적 성취에 목매는 풍조가 있다면 평가 기준에 대한 공정성 그리고 객관성을 요구하게 되는데 프랑스의 교육계는 이 문제를 대체 어떻게 풀고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은 듭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해결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대학 입시의 벽을 낮추고, 졸업을 조금만 시키면 됩니다. 예를 들어 인원을 두 배로 늘리고 졸업은 반만 시키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입시과정에서 학생들을 줄 세울 부담이 훨씬 줄어들게 되겠죠. 일단 받고 보면 되는 거니깐요. 대신 학생들은 대학교에서 수능과 같은 pseudo 공부가 아닌 실제 공부를 하고, 수많은 수업들과 교수들에 의해 줄이 세워지겠지요. 한 마디로 제대로 된 내용에 관해서 제대로 된 방식으로 줄 세우기를 하게 된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또 이런 방식이 아주 뜬구름잡는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실제로 캐나다가 이와 비슷한 방식을 채택하고 있지요 (미국은 아닙니다. 미국의 줄세우기는 너무 심합니다. 물론 줄세우기의 기준이 수능보다 낫기야하지만, 많이 낫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 캐나다 대학들을 보면 합격률은 50프로를 상회하며 졸업률이 60프로밖에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도 사례가 있고, 잘 돌아가고 있으니, 벤치마킹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아주 말도 안 되는 제안도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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