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철학계에 대한 두서 없는 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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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스미 시게히코


박이문

“하스미의 『표층 비평 선언』 문고판에 붙은 ‘자필 연보’에는 “1975년(39세). 『푸코 그리고/또는 들뢰즈』(번역)를 출판하여, 아직 무명이었던 아사다로부터 많은 오역을 지적받았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때 아사다는 ‘무명’이기는커녕 아직 열여덟 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아사다가 얼마나 조숙했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에피소드입니다만, 『구조와 힘』 이전에는 오직 하스미만이 일본에 들뢰즈를 소개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하스미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번역된 들뢰즈의 책 『마조흐와 사드』의 번역자이기도 합니다), 하스미로서는 어학력과 독해력을 겸비한 아사다 아키라라는 젊은 수재에게 바통을 넘겨줄 생각이었는지도 모릅니다(그래도 아사다는 들뢰즈의 책을 번역하지는 않았습니다).”1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여기서 ‘하스미’는 가라타니 고진과 함께 1980년대 이후 일본 비평계를 이끈 ‘하스미 시게히코’이고, ‘아사다’는 26살에 『구조와 힘』으로 일본 철학계의 판을 새로 짠 ‘아사다 아키라’이다. ‘현대 일본 사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 특이한 흐름은, 하스미 같은 유학파 출신들을 통해 일본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현대 프랑스 철학이, 아사다 같은 젊은 인재들을 통해 독창적으로 재해석됨에 따라 생겨났다.

참고로, 하스미 시게히코는 프랑스 유학 시절에 박이문 교수가 쓴 말라르메에 대한 박사 논문을 읽고서 박이문 교수를 동경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동양인도 이런 논문을 쓸 수 있구나.”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80년대 이후 일본 사상계는 아사다 아키라, 나카자와 신이치, 하스미 시게히코, 가라타니 고진 등을 거쳐 현재의 아즈마 히로키나 사사키 아타루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철학 생태계를 형성한 데 비해, 우리는 하스미가 극찬한 박이문 교수 같은 인물을 두고서도 이런 유의미한 흐름을 만드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하스미는 일본 비평계의 스타로 오랜 시간동안 일본 내에서 널리 읽혔는데도, 박이문 교수는 국내 철학 전공자들에게조차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다.

현대 일본 사상을 모방하여 우리도 ‘K-철학’ 따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솔직히, 나는 ‘K-XX’, ‘한국적인 것’, ‘우리 것’ 따위의 지향점들이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나는 소위 ‘한국철학’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원효, 정약용, 류영모, 함석헌에 대한 추종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의심스럽게 본다. 그런 인물들의 텍스트를 읽는 것이 ‘실재론/반실재론’, ‘합리성’, ‘언어적 실천’, ‘정당성’, ‘포스트휴먼’, ‘유물론’, ‘인류세’ 같은 우리 시대의 철학적 주제들을 다루기에 적절하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국내 연구자들이 출판하는 철학 단행본이나 논문의 수준이 결코 일본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데도, 국내에서는 학문이 누적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항상 아쉽다. 수많은 훌륭한 연구들이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한 채 KCI의 데이터 뭉치 속에서 잊혀지고 만다. 좋은 텍스트가 출판되어도 그 연구가 다른 후속 텍스트에 영향을 주지 못한 채 연구자 개인의 기억 한 켠에만 머무르게 된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연구자가 되는 사람은 없다. 연구자에게는 무엇보다 ‘권위’와 ‘인정’이 중요하다. 자신이 출판한 텍스트가 많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될 때, 연구자는 그 힘으로 더 좋은 연구를 계속해나가게 된다. ‘인정욕’이야 말로 연구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다. 좋은 텍스트들이 폭넓게 발굴되고, 논의되고, 인용되어야 연구자가 ‘학문 게임’에 참여할 의욕이 생긴다. 좋은 글을 쓰는 국내의 권위 있는 학자들이 인정을 받을 수 있어야 좋은 글을 생산하려는 열망이 생긴다. 현실적으로, 모든 좋은 연구가 다 인정받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좋은 연구가 인정받기 위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는 ‘희망’(혹은 최소한의 ‘환상’)이 있어야 학문의 발전이 가능하다.

적어도, 일본 사상계에서는 이 ‘희망’(혹은 ‘환상’)이 보장을 받는다. 즉, 일본인이, 일본에서 생산한, 일본 특유의 담론이, 일본과 그 인근 국가에서 중요하게 읽힐 수 있다는 믿음이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그래서 일본 사상계가 비록 영미권과 유럽권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갈라파고스적’이라고는 해도, 여기서는 최소한의 생태계가 자립하고는 있다. 자기네들만의 전통과 계보가 내려오고 있고, 자기네들이 쓴 담론이 일단 자기네들 내부에서는 충실하게 소비되고 있고, 또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극을 받아 새로운 담론이 계속 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국내의 철학계는 이 최소한의 희망을 보장하지 않는다. 합의된 권위도 없고, 지속되는 전통과 계보도 없고, 새로운 담론에 대한 자극도 없다. (당연히, 생계도 보장되지 않는다.) 국내에서 글을 써서는 학술적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보이지 않는다.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올이나 강신주처럼 학술적 수준을 포기한 채 상업적 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나면, 우리 사회에서 널리 화제를 불러 일으키는 철학 텍스트란 고작 ‘한남충 논문’ 따위 밖에 없다. 상황이 이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연구자들은 국내 학계를 더 소홀히 취급하고, 실력 있는 젊은 학생들은 국내 학계를 아예 떠나려 하고, 국내 학계에서 유통되는 담론은 더욱 파편화되는 악순환이 발생하고 만다.

  1. 사사키 아쓰시, 『현대 일본 사상: 아사다 아키라에서 아즈마 히로키까지』, 송태욱 옮김, 을유문화사, 2010, 117-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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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비슷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2가지를 지적하고 싶은데요.

  1. 인정을 받으려면 인정을 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텐데, 인정해주는 사람이 적다는 게 하나의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일반인을 중심으로 하는 광범위한 독서층이 될 수도 있고, 일종의 학문의 공동체(예를 들어 비엔나 써클처럼)가 될 수도 있겠죠. 특히 연구자 중에서 인정 받고 싶은 분은 많지만 인정해주는 연구자는 특히 적어보입니다. 저의 경험상, 학계에는 상대방의 연구가 지닌 가치에 대해서 진지하게 평가해주고 인정해주기 보다는 무시하는 행태가 팽배한 것 같습니다. 이제는 특정한 대가가 학계를 하드캐리하기 보다는 여러 연구자들이 협업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러한 상황에서는 협업을 기대하기 힘들죠. 악플보다 무서운 게 어쩌면 무플이라는 말이 실감됩니다. 한국사를 중심으로 역사학에서는 그래도 누적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유독 철학 분야에서는 유독 이런 문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네요.

  2. 우리나라 철학계는 외부의 이론을 수입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자'란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는데요. 제가 속해 있는 영역에서는 중국, 일본, 미국의 연구들을 수입하고 인용할 뿐 자체적으로 이론, 체계, 관점을 성립하는 것에 대하여 굉장히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지식을 잘 유통하고 소비하지만, 생산에 대하여 전향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가지기 힘든 풍조죠. 특히 텍스트에 대한 '오독'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똑같은 텍스트를 놓고서 다르게 독해할 수도 있는건데 말이죠. 여기서 1의 문제가 다시 나타납니다. 다르게 독해한 상대에 대하여 악플이나 무플로 대응하니까요.

저도 비슷한 한탄을 실제로 많이 하는데요. 그럴 때마다 저는 "당신의 이성을 용감하게 사용하라"는 칸트의 말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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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하신 두 부분 모두 공감이 정말 많이 되네요. 국내 연구자들이 자기 주변의 동료가 하는 작업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자꾸 철학사적인 '대가', '거장', '거인'만을 바라본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사실, 바로 옆에 있는 동료가 좋은 연구 성과를 출판하여 경쟁 관계에서 앞서 가게 될 때 정말 지적 자극을 많이 받을 수 있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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