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철학에 관심을 가진지 고작 일주일 채 되지 않은 고등학생입니다 학교에서도 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을 선택하지도 않아 철학에는 정말 문외한이에요
며칠 전 비트겐슈타인을 우연히 접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책들을 설명하는 글들이나 영상을 보고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어요
사람들은 비트겐슈타인을 전기와 후기로 철저히 구분하잖아요 전기는 그림 이론 후기는 언어 게임 이론 이렇게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전기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은 언어는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기에 윤리나 미, 종교와 같은 것은 말할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면 오히려 혼란에 빠지고 문제를 야기하니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라였고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맥락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기에 만일 윤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던지지 말고 윤리는 ~이다라는 식으로 언어의 틀 속에 가두려 하지 말고 윤리라는 말이 실제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삶 속에서 직접 느껴라라는 뜻으로 저는 이해를 했습니다 단순 영어단어를 외울 때 예문과 같이 보세요와 같이 언어 그 자체를 얘기하고자 했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해요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고 했는데 그건 ”나란 무엇인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들은 쓸데없다는 거잖아요 그럼 결국 전기와 후기는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이지 않나요?
전기에선 말로는 표현될 수 없기에 침묵하고 직접 느껴라 후기에서는 맥락 속에서 파악하라 결국 전기와 후기는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왜 학자들이 비트겐슈타인을 왜 그렇게 철저하게 나누고 후기 철학은 전기 철학에 대한 전면부정이다라고 말하는지가 이해가 안 가요
또 논리철학논고의 첫번째 명제 “세계는 사물이 아닌 사실들의 총체다”라는 문장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인 것들을 표현하는 걸 거부했잖아요 그런데 저한텐 저 문장 또한 그러한 종류의 문장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단순히 언어놀음을 하고자 했던 건 아니라는 생각에 의문이 들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철학은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은 언어학자의 일이잖아요 그렇다면 전기 비트겐슈타인에게 언어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니 있는 그대로의 세상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이 철학이라고도 볼 수 있죠
또 세상은 사물이 아닌 사실의 총체이기에 그에게 있어서 철학은 결국 세상을 구성하는 사실들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단순 사물 즉 윤리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게 아닌 윤리가 세상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그 관계를 파악하는 게 철학이에요 그렇다면 이건 후기의 언어게임이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됩니다 즉 전기와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완전히 다른 이론을 펼치는 게 아닐 수 있다는 거예요
철학적 탐구의 서문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생각은 변했지만 가지고 있는 문제 의식은 아직 남아 있다라고 말했어요 저는 그 문제 의식, 즉 그가 정말로 말하고자 했던 바는 ”책상에서 좀 일어나서 자신의 삶을 살아라!“였다고 생각해요 책상 위에서 삶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을 던지는 건 의미가 없어요 그건 실제 세상에 있는데 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걸 언어에서 찾아요?
제 해석은 그의 삶이 뒷받침해요 왜 그는 철학을 그만두고 시골로 가서 초등교사를 하고 정원사를 했을까 왜 자진해서 군대를 갔을까 그의 삶에 대한 태도가 그의 철학을 나타낸다고 생각해요
논리철학논고에서 가장 논란이 되는 사다리 비유도 언어의 감옥에서 벗어나 삶으로 나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라고 봐요 그의 명제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사다리였어요 명제를 통해 이해하고 그 사실을 이해했다면 사다리를 타고 삶으로 나아가야죠 왜냐면 그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기존 해석들은 그 사다리의 각도를 재고 무슨 목재가 쓰였는지 살핍니다 그건 깨달았다면 버렸어야 하는 것들인데 학자들은 끝없이 사다리만을 분석해요 그건 언어의 감옥에서 사람들을 꺼내주려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도리어 새로운 감옥으로 만들고 그를 언어의 감옥으로 가두는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이 쓴 논리철학논고의 서문을 보고 러셀은 자신을 완전히 오해했다고 했고 심지어 출판을 거부하기까지 했어요 그런데 러셀의 관점에서의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석이 왜 아직까지도 주류인지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저는 앞서 말했듯 철학을 몰라요 무슨 대단한 논증을 하지도 못하고요 그렇지만 그냥 제 직관에 따라 이 해석이 너무 타당한 것 같다고 느껴요 제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의 주류 해석들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고 사다리를 분석하는 기존 연구들이 무의미하다고 말해요 제 해석이 맞다고 우긴다면 오만일 수 있죠 그럼에도 제가 이런 각도로 비트겐슈타인을 바라보게 된 이후에 비트겐슈타인이 며칠째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아 전문가분들께 제 해석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 올려봅니다
차근차근 그의 책들을 다 읽고 생각을 더 정리한 뒤에 올렸다면 좋았겠지만 제가 시험이 이번주에 있는데 책을 읽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 의문을 해결하지 않으면 못 버티겠어서 도움이 필요해요
다시 말하지만 철학을 전혀!! 모르고 똑똑하지도 않기 때문에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풀어야 할 몇 가지 내용들이 섞여 있습니다. 하나씩 주제를 나누어서 접근하면 좋을 것 같아요.
1.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에 대한 사유를 쓸데 없는 것으로 보았다?
아닙니다. 오히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윤리나 신비에 대한 사유를 대단히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 점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논리실증주의(슐리크나 카르납 등의 철학)를 구분짓는 결정적인 지점으로 자주 이야기될 정도로요.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앨런 재닉과 스티븐 툴민은 『비트겐슈타인과 세기 말 빈』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윤리학을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주의와 긴밀하게 연결짓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는 자연과학으로 탐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적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 키에르케고어의 실존주의이고,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그 주장을 받아들여서 '(자연과학적) 세계의 한계' 바깥에 윤리와 신비를 놓았다는 것이죠. (가령, 의사에게 아무리 많은 의료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객관적 지식이 '암 환자의 심적 안정을 위해 환자에게 하얀 거짓말을 해도 좋은가?'라는 의료 윤리 문제에 대해 대답을 주지는 못하는 것처럼요. 윤리의 문제는 객관적 지식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에게는 윤리와 신비야말로 정말로 중요한 철학적 사유의 주제입니다. 바로 그 주제를 위해 (자연과학적) 세계의 한계를 긋고자 하는 작업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어디까지 자연과학을 통해 유의미하게 말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우리가 어디부터 자연과학으로는 유의미하게 말할 수 없는지도 알 수 있고, 그렇게 자연과학의 말이 멈추는 지점부터 윤리와 신비의 영역이 시작되는 것이죠.
2.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윤리에 대한 사유를 쓸데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 부분은 다소 애매합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이나 후기 비트겐슈타인이나, 윤리에 대한 '이론'을 구성하는 작업을 무의미하다고 보긴 하였을 것입니다. 윤리가 실존적 결단의 문제라면, 무엇이 객관적으로 옳고 그른지를 (마치 자연과학처럼) '이론'으로 따질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니까요. 사람마다 각자의 삶의 결단이 있을 뿐, 객관적 옳음이나 그름은 없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트겐슈타인이 저 질문들을 결코 '쓸데 없다'고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저 질문들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는 가장 진지한 철학적 자세였을 거예요. 즉, 윤리에 대한 '객관적' 대답이란 존재할 수 없겠지만, 그에 대해 각자의 삶에서의 '주체적' 대답이란 반드시 제시되어야 하는 거죠.
3.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나누어지지 않는다?
전기 비트겐슈타인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나누는 기준은 '철학적 방법론'에 있습니다.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적 통사론(logical syntax)'이라는 단일한 기준을 바탕으로 유의미한 언어와 무의미한 언어를 구분하고자 하였고,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문법(grammar)'이라는 다양한 기준을 바탕으로 유의미한 언어와 무의미한 언어를 구분하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논리적 통사론'과 '문법'이 무엇인지에 대해 세세한 설명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언어를 해명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단원적인 규칙이나 구조가 존재한다고 볼 것인지, 아니면 상대적이고 다원적인 규칙들이나 구조들이 존재한다고 볼 것인지로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과 후기철학이 구분된다고 보시면 대략 맞습니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이 어떠한 관계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꽤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합니다. 모든 학자들이 "후기 철학은 전기 철학에 대한 전면부정이다"와 같은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표준적인 견해는 '논리적 통사론' 개념과 '문법' 개념 사이에 긴밀한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보고, 단지 그 두 가지가 '단원적 규칙'인지 '다원적 규칙'인지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죠. 또 몇몇 소수의 학자들은 (wlqqns님이 의문을 제기하신 것과 유사하게)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이 완전히 동일한 방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4.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이다?
'형이상학적인 것'을 어떻게 규정하는지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세계의 구조에 대한 모든 탐구를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저 명제도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 경우에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너무 넓어서, 자연과학 같은 분야들까지도 형이상학에 포함되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죠.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아주 엄격하게, 논리학적 관계(소위 '진리함수')와 검증 가능한 기초적 명제들(소위 '요소명제')만으로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논고』에서 비트겐슈타인이 그려내는 세계는, 단적으로 말해, 논리학과 자연과학만으로 완벽하게 설명되는 세계라고 할 수 있어요. 전통적인 형이상학의 '이데아', '본질', '사물 자체', '정신' 따위가 전혀 개입하지 않는 세계인 것이죠. 이런 의미에서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철학을 전개했다고 할 수 있고, 그의 철학이 실제로도 논리실증주의라는 사조에도 영향을 준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윤리와 신비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강조점 때문에 놓치고 있는 것이지만,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분명히 "하나의 명제의 뜻은 그 명제의 검증 방법이다."라고 지적하면서 실증적 철학을 옹호했어요. 단지 그는 실증적으로만 환원되지 않는 세계 바깥의 영역을 지향한 것일 뿐, 세계 내의 모든 것들은 실증적으로 환원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죠.)
5. 언어철학은 언어학이다?
언어철학과 언어학에서 겹치는 부분이 종종 있기도 하지만, 그 둘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릅니다. 특별히, 초기 분석철학은 언어 자체에 관심을 가졌다기보다는 '유의미한' 명제와 '무의미한' 명제의 구분에, '참인' 명제와 '거짓인' 명제의 구분에 관심을 가졌죠. 세상의 모든 말들을 "그 말이 도대체 의미가 있는가?"라는 기준과 "그 말이 진짜 참인가?"라는 기준으로 분류해서, 헛소리들을 제거하고 순수하게 참인 철학 이론을 세우고자 하였던 것이 언어철학의 목표였죠. 언어학이 언어의 어원이나 용례나 문장 구조에 관심을 가지는 반면, 언어철학은 그런 자잘하고 잡다한 사항보다는 '의미'가 무엇이고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는 거죠.
6. 러셀의 『논고』 해석이 주류이다?
여러 가지 논의가 얽혀 있는 질문입니다. 일단, 러셀의 해석이 주류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령, 테크니컬한 지점에서 '사태(Sachverhalt)'와 '사실(Tatsache)' 개념에 대한 러셀의 고전적 해석보다는, 오늘날에는 에릭 스테니우스 등이 제시한 해석이 표준적 해석으로 자리잡고 있고, 그 밖의 몇몇 대안적 해석들이 제시되죠.
좀 더 넓은 지평에서 보자면,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자연과학적) 세계의 한계를 명확하게 그어서 그 바깥의 윤리와 신비에 대해 사유하고 싶어하였는데, 정작 러셀을 비롯한 그 당시의 다른 사람들은 윤리와 신비를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는 윤리와 신비를 무가치하게 취급한 상태에서 자연과학적 세계의 구조만을 강조하고자 하는 입장들은 자신의 책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다 놓치고 있는 것으로 보였겠죠. (그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실증주의자들의 모임에서 발표를 요청받았을 때 타고르의 시 한 편을 낭송하고 나왔다는 점은 의미심장하죠.)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윤리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사유가 쓸데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키에르케고어니 뭐니 저는 그런 거 잘 모르지만 저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삶에 대한 태도'로 여겼다고 생각해요 제가 말하는 건 어디까지나 비트겐슈타인이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덧없고 의미없다고 여겼다는 거예요 그저 책속에 파묻혀서 윤리에 대해서 논하지 말고 실제 삶에서 윤리를 관찰하라고요 꼭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니라도 사유는 가능합니다 저도 본문에 그 내용을 적었어요 삶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가치들을 느끼고 찾아라라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했다고요 그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했던 태도로서의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도 똑같습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을 또 사유를 부정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YOUN님이 말하신 부분, "삶에서 저 질문들을 던지고 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는 가장 진지한 철학적 자세였을 거예요. 즉, 윤리에 대한 '객관적' 대답이란 존재할 수 없겠지만, 그에 대해 각자의 삶에서의 '주체적' 대답이란 반드시 제시되어야 하는 거죠." 이 말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책상에서 일어나서 삶을 살고 그 답을 삶에서 찾아라라고 말하고 싶어했다 했지 사유자체를 부정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트겐슈타인 자신이 기존의 생각들이 바뀌었다 했으니 저도 전기와 후기를 완전히 동일하다고 보는 건 아니에요 그렇지만 제가 읽은 글들은 대부분 비트겐슈타인은 이전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고 갑자기 새사람이 되었다 이런식으로만 말하니까 제가 보기엔 그가 결국 말하고자 했던 건 같고 그저 도구적인 사다리만 다를 뿐인데 다름만 강조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을 왜곡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상대적이고 다원적인 규칙들이나 구조가 있을때, 그것들이 너무 달라서 서로 비교가능한 기준을 찾을수가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니까 데이비슨이 통약불가능성에 대해 말할 때, 그 논의를 비트겐슈타인의 ‘이론 거부’ 입장과 함께 놓고 보면, 비트겐슈타인은 두 가지 중 하나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서로 다른 규칙이나 구조들이 더 포괄적이고 큰 문법적 틀 안에서 비교 가능하다고 보는 일종의 화용론적 입장이거나, 다른 하나는 그런 비교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회의적 입장이죠.
혹시 표준 해석은 이런 식으로 논리를 밀어붙였을 때 드러나는 이런 극단적인 구도—즉,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 사실상 회의주의나 메타이론 거부로 귀결될 수 있다는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나요?
재미있는 의문이네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릴 것 같은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담론 사이의 통약불가능성을 옹호하는 파이어아벤트나 리오타르도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담론 사이의 통약불가능성을 거부하는 데이빗슨이나, 퍼트남이나, 로티도 비트겐슈타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개인적으로, 저는 비트겐슈타인이 담론 사이의 통약불가능성에 대해 거부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holahola2님이 제시하신 것과 같은 '화용론적 입장'과 '회의적 입장'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로 넣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적어주신 내용만으로는 그 선택지들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저로서는 충분히 파악할 수 없어서요. (적어주신 내용에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다소 애매한 용어들이 있다 보니, holahola2님이 어떤 의미에서 그 용어를 사용하신 것인지 제가 알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어서요.)
데이빗슨이 잘 지적한 것처럼, 통약불가능성은 '도식/내용'의 이분법을 전제하고서 성립합니다. 우리의 개념적 도식 바깥에 '감각자료'나 '소여'처럼 해석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해석되지 않은 무엇인가"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개념적 도식들을 비교할 수 있다는 개념 상대주의를 허용하게 되죠. 또 그 개념 상대주의를 극단까지 전개하게 되면, 개념적 도식들이 서로 소통되지 않는다는 통약불가능성 논제를 허용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애초에 '도식/내용'의 이분법이나 '해석되지 않은 무엇인가' 따위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사적 언어 논증'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유명한 심리철학적 논증이 정확히 이 문제를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자주 해석되거든요. '마음'이나 '의식'을 완전히 사적인 영역으로서 상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고, 그 마음이나 의식에 '사적 감각' 같은 내용이 주어진다고 상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인데, 이런 입장은 정확히 데이빗슨이 '도식'과 '내용'이라는 이분법에 대해 거부했던 것과 일치하죠. (물론, 데이빗슨은 타르스키의 '규약 T'를 전제로 그 이분법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비트겐슈타인과 결이 좀 다르기는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론'을 제시하는 것을 싫어하는데, 데이빗슨은 규약 T를 바탕으로 '형식적 의미론'을 구축하려고 하거든요.)
그밖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라는 주제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통약불가능성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 이유가, (또한 크립키 식의 규칙 회의주의가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가 이미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를 성취하고 있어서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중요한 논점 중 하나죠. 철학자들은 자꾸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완전히 단절되어 있을 경우를 가정하면서 논의를 전개하다 보니 '사적 언어'의 문제나 '통약불가능성'의 문제에 빠지지만, 그런 문제에 숨어 있는 가정을 비판하고 나면, 애초에 우리에게 '일치'가 먼저 주어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논점입니다. 여기서 '삶의 형식'이란 우리가 '사람'으로서 따르고 있는 기본적인 행위 형식, 혹은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기본적인 행위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각각의 '문법들'을 성립시키는 일종의 '인류학적' 혹은 '자연사적' 층위가 삶의 형식이죠.
그래서 질문하신 논의에 대한 대답은 다층적인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a) "다원적 규칙들이 '너무 달라서 서로 비교가능한 기준을 찾을수가 없으면' 어떻게 하나?"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이라면 그런 통약불가능성에 대한 염려가 허구적이라고 지적할 것입니다.
(b) "비트겐슈타인은 통약불가능성을 거부하기 위해 '화용론적' 입장을 취하나?" 글쎄요, 비트겐슈타인이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를 강조하면서 통약불가능성을 거부하기는 하지만, 이런 입장을 '화용론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화용론은 오스틴이나 설이나 그라이스처럼, 언어 사용에 대한 '이론'을 제시하려는 입장인데, 비트겐슈타인은 그런 이론을 제시하기 위해 '삶의 형식'을 말한 것은 아니라서요. 오히려 "통약불가능성과 같은 가정은 허구적이다. 이 가정이 어디에서 잘못됐는지 파악하고 나면, 한 사람과 다른 사람이 이미 삶의 형식에서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자각할 수 있다."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려고 한 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c) "비트겐슈타인은 통약불가능성을 거부하기 위해 '회의적' 입장을 취하나?" 글쎄요, 적어도 비트겐슈타인 자신은 '회의적'이나 '회의주의적' 같은 수식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 개념적 도식과 다른 개념적 도식을 중립적 관점에서 비교할 수 있다는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강조점인 것은 맞지만, 이런 강조점을 '회의적'이나 '회의주의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다소 오해의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데이빗슨이 잘 지적한 것처럼, 통약불가능성은 '도식/내용'의 이분법을 전제하고서 성립합니다. 우리의 개념적 도식 바깥에 '감각자료'나 '소여'처럼 해석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해석되지 않은 무엇인가"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개념적 도식들을 비교할 수 있다는 개념 상대주의를 허용하게 되죠. 또 그 개념 상대주의를 극단까지 전개하게 되면, 개념적 도식들이 서로 소통되지 않는다는 통약불가능성 논제를 허용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밖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라는 주제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통약불가능성이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 이유가, (또한 크립키 식의 규칙 회의주의가 애초에 발생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가 이미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를 성취하고 있어서라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중요한 논점 중 하나죠.
저 혹시 주제에서 벗어난 질문이기는 한데요. YOUN님께서 말씀하신데로 ‘통약불가능성’이 인간 고유의 인지‧언어 체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주장하듯 '삶의 형식에 있어서의 일치' 가 있어서 그것이 크게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인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모델링하고 학습하는 인공지능들―예컨대 서로 다른 데이터·학습 구조를 가진 두 AI 시스템―사이에서도 (따지자면 전자회로 시스템이라는 형식의 일치가 있죠.) ‘패러다임 간 통약불가능성’ 같은게 YOUN님께서는 혹시 성립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글쎄요, 일단 비트겐슈타인은 '통약불가능성'이라는 것 자체가 허구이고, 그래서 이런 가능성은 성립조차 하지 않는다고 보는 입장에 가깝습니다. 그러다 보니, AI와 AI 사이의 '통약불가능성'이나 AI와 사람 사이의 '통약불가능성'에 대한 상상도 허구라고 할 수 있겠죠.
가령,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다니는 소리를 듣는 상황을 상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듣고서 "저건 언어가 아니라 그냥 옥구슬 소리이다."라고 할 뿐, "옥구슬은 사실 언어를 말하고 있지만, 옥구슬의 언어와 우리의 언어는 통약불가능해서 우리가 이해를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이런 상황처럼, 완전히 '통약불가능한 언어'가 존재한다는 주장이란 사실 그 언어가 애초에 아무런 언어도 아니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죠. (로티의 지적대로, '통약불가능한 언어'란 '보이지 않는 색깔'이나 '둥근 사각형'처럼 일종의 형용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챗지피티 같은 오늘날 AI의 기반이 되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기본적으로 인간 언어의 패턴을 모방하고 있지 않나요? AI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지만, 적어도 인간은 AI의 응답을 '인간의 언어'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응답을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죠. 그러니까, 현재 AI의 개발 방향이 '인간의 언어'로 해석될 수 있는 응답을 생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래서 인간도 그 응답을 '인간의 언어'로 해석할 수 있는 한, AI와 인간 사이에, 혹은 AI와 AI 사이의 통약불가능성이란 (애초에 이론적으로도 성립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답변 감사합니다. Youn님 덕분에 제 질문의 배경과 의도를 더 명확하게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제 표현 중에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용어들이 있었다고 지적해주셨는데, 혹시 어떤 부분이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우셨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의도했던 바를 더 적절하게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토론은 명확한 이해에서 시작되니까요. 질문에 언제든 열려있습니다.
1.
Youn님께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도식/내용' 이분법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데이비드슨과 같지만, 데이비드슨이 '규약 T'에 기반한 형식적 의미론을 구축하려 했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바로 이 '결의 차이'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표준 해석이 직면한 근본적인 딜레마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제 질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슨처럼 거대한 이론적 장치 없이도, 통약불가능성이 허구라고 성공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가?"
데이비드슨의 비판은 '진리'와 '합리성'이라는 보편적 개념을 축으로 하는 강력한 이론적 논증 입니다. 반면, Youn님께서 설명하신 표준 해석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이나 '철학적 치료'라는 비(非)이론적, 실천적 방식을 택합니다.
2.
바로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표준 해석은 데이비드슨이 Problems of Rationality의 논문 중 하나인 「Paradoxes of Irrationality」에서 제시한 역설과 정확히 동일한 구조에 갇히게 됩니다. (p.181)
비합리성의 근본적인 역설, 그리고 어떤 이론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역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비합리성을 너무 잘 설명하면, 그것은 숨겨진 형태의 합리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반대로, 너무 쉽게 일관성 결여로 치부해버리면, 비합리성을 진단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훼손하게 됩니다. 이는 어떤 진단이든 정당화하려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합리성의 배경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입니다.
“The underlying paradox of irrationality, from which no theory can entirely escape, is this:
if we explain it too well, we turn it into a concealed form of rationality;
while if we assign incoherence too glibly, we merely compromise our ability to diagnose irrationality by withdrawing the background of rationality needed to justify any diagnosis at all.
이 틀을 '통약불가능성'이라는 철학적 혼란을 비판하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비판을 너무 잘 설명하는 경우 (새로운 토대주의):
만약 표준 해석이 '삶의 형식'이라는 공통의 합리적 기반 에 호소하여 통약불가능성이 왜 틀렸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면, 상대주의자의 오류는 이 공통 기반 안에서 벌어진 '실수', 즉 '숨겨진 형태의 합리성'이 됩니다. 이 경우, 비판의 근거가 된 '삶의 형식'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새로운 토대주의 이론 이 되며,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이론 거부' 입장과는 상충됩니다. 이것이 제가 처음 제시했던 '화용론적 입장' 입니다.
비판을 너무 가볍게 부여하는 경우 (회의주의):
반대로 표준 해석이 상대주의자의 주장에 대해 "그건 그냥 무의미한 소리다"라고 너무 가볍게 선언한다면, 그들은 왜 그것이 '무의미'한지를 정당화할 공통의 배경을 스스로 제거 해버립니다. 비판은 힘을 잃고, 진단할 능력 자체를 손상시키게 됩니다. 이는 결국 비판의 힘을 잃은 회의주의적 입장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통약불가능성을 어느정도 받아들이기 위한 '회의적' 입장입니다. (Youn님은 두 입장을 둘 다 통약불가능성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이해하셨지만, 그렇다면 굳이 딜레마에 대해 논의할 이유는 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3.
그래서 저는 이 딜레마를 피하기 위한 대안으로, 소수 의견인 코라 다이아몬드나 제임스 코넌트의 '결연한 독해(Resolute Reading)'가 더 설득력 있는 길을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논리적 통사론'을, 이론적 토대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문학적/치료적 장치 로 사용했다고 봅니다. 저는 이걸 후기 해석에도 연장해서, '문법'이라는 개념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첫 질문자이신 @wlqqns님의 "사다리를 분석하지 말고 버려라"는 직관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비트겐슈타인은 외부의 상대주의자를 직접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철학적 혼란이라는 '허수아비'를 스스로 만들어 스스로 때려 부수는 과정 을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자신의 혼란을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문학적 아이러니 를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의 '이론 거부'를 일관되게 지켜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 역시 명백한 한계를 가집니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이 오직 '자기-치료'의 과정이라면, 그의 철학이 어떻게 우리와 다른 외부의 입장(예: 과학주의, 상대주의)을 비판 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지, 그 정당화 측면 에서는 굉장히 곤란해지는 듯합니다.
결국 표준 해석은 딜레마에 빠지고, '결연한 독해'는 비판의 힘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Youn님께서는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비(非)이론적 접근이 어떻게 이론적 토대 없이도 상대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 으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 질문의 내용이 지금 제 박사 학위 논문의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보니;; 간략한 답변으로 다루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몇 가지 요점을 짚어볼 수는 있겠네요!
(1) '화용론적' 입장과 '회의적' 입장
사용하신 '화용론적'과 '회의적'이라는 표현이 다소 애매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어디에 들어가는지가 논의된다면, 저는 그 표현들이 비트겐슈타인을 수식하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틴이나 설과 달리) '화용론'이라는 이론을 구성하는 것을 거부하였고 (크립키와 달리) '회의주의'를 지지하지도 않았으니까요.
물론, '삶의 형식'이라는 비트겐슈타인의 개념이나 '사적 언어 논증' 같은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 종종 화용론이나 회의주의와 유사한 논점이 들어가기는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화용론과 유사하게) 사람들이 공유하는 실천적 지평을 강조하고, (회의주의와 유사하게) '초사실' 같은 대상의 존재를 부정하니까요. 다만, 비트겐슈타인의 결론적 주장이 그 두 입장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화용론적' 입장과 '회의적' 입장이라는 표현으로 비트겐슈타인을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예전에 제가 쓴 논문이 있습니다.
(2) 딜레마
제시하신 딜레마 자체는 좋습니다. 저는 그 문제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P. M. S. 해커의 표준적 해석에 대해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비판이라고 봅니다.
(3) 데이빗슨의 해결책?
그런데 데이빗슨이 이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는지는 다소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규약 T를 통해 형식적 의미론을 구축하려는 시도에는 여러 난점이 제기되거든요. 가령, "그것은 큰 파리이다."라는 문장은 규약 T의 형식으로 의미를 해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그것은 큰 파리이다."는 그것이 크고 그것이 파리인 경우 그리고 그 경우에만 참이다.
와 같은 T 문장을 생성할 경우, '큰 파리'라는 표현의 의미를 놓치게 되죠. '큰 파리'는 파리 중에서 상대적으로 큰 것을 의미하지, 단적으로 큰 것과 단적으로 파리인 것의 결합이 아니니까요. '큰 F'와 같은 귀속적 형용사를 규약 T 형식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려운 거죠. 이런 이론상 자잘한 난점들이 형식적 의미론의 기획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로 남아 있습니다.
(4) 결연한 독해
다이아몬드나 코넌트의 독해는 『논고』에 대한 해석에서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저는 그 독해가 『탐구』 같은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독해에 어떤 새로운 통찰을 제시하는지 다소 의문스럽습니다. 적어도 저로서는, 그 인물들이 자신들의 독해를 『탐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까지 확장한 글을 접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두 인물에게 영향을 준 카벨이 『탐구』에 대한 해석에서 여러 가지 새로운 통찰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데, 저는 카벨의 해석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긍정적으로 봅니다.
(5) 효과적 비판
카벨이나 맥도웰 같은 인물들은 '논리적 통사론'과 같은 기준을 미리 상정하지 않고서도 특정한 이론에 대한 내재적 비판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특정한 이론을 외부의 잣대를 바탕으로 비판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이론 자신이 상정하고 있는 잣대에 따라 내부에서부터 비판하는 방식인 거죠. 카벨은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만일 한 문화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산한 비판이 철학이라면, 그리고 철학이 본질적으로 이러한 비판을 향한 과거의 노력을 비판함으로써 전개된다면, 비트겐슈타인의 독창성은 도덕주의적이지 않은, 즉, 비판자가 자신의 주변에서 발견하는 잘못으로부터 자기 자신만큼은 자유롭다고 상상하도록 남겨두지 않는, 그리고 주어진 진술이 거짓 또는 잘못이라고 논증하기 위해 노력함으로써가 아니라, 주장을 만든 사람이 그가 의미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그가 원한 것을 진정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보여줌으로써 전개되는 비판의 양태를 발전시켰다는 데 있다." (Cavell, 1979: 26, 인용자 강조)
상세하고 깊이 있는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박사 학위 논문의 중심 주제와 겹치는 민감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핵심적인 부분들을 짚어주셔서 논의를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어요.
1
우선, 제가 제시했던 딜레마가 P. M. S. 해커와 같은 표준 해석에 대한 유효한 비판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Youn님의 말씀 덕분에 제 논의의 핵심이 특정 용어의 적절성 여부가 아니라, '이론 거부'와 '규범적 비판'이라는 두 과제를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가라는 구조적인 문제에 있음이 분명해진듯 합니다.
데이비드슨에 대한 Youn님의 지적 또한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데이비드슨의 입장은 제가 제시한 딜레마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이라기보다는, 딜레마의 한쪽 뿔을 선택함으로써 발생하는 문제들을 보여주는 사례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2
Youn님께서 카벨과 맥도웰을 통해 제시해주신 내재적 비판도 바로 이 딜레마를 논의하는데 있어 하나의 중요한 실마리라고 생각합니다. 외부의 잣대 없이, 비판 대상이 스스로 상정한 기준을 통해 그 내부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인거죠. (가령 데이비드슨의 논의에 대해 내재적 비판을 수행하려면, 적어도 합리성 개념에 대해 저 역시 전제하는게 필요할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내재적 비판이 상대방의 전제들을 대부분 수용한 상태에서 그 안의 문제를 드러내는, 일종의 귀류법과 유사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보여주는 몇몇 비판들은 (특히 논고) 분명 이러한 내재적 비판의 유형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비판이 '전부' 내재적 비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가령, 비트겐슈타인이 '본질'을 찾으려는 철학적 충동 자체를 비판하거나, "'여기에 손이 있다는 것을 안다'의 의미는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의 형식 자체를 문제 삼을 때, 그는 상대방의 전제를 받아들이기보다는 그 전제들이 놓여있는 '게임판' 자체를 문제 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상대방과 같은 게임을 하다가 규칙 위반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게임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게임판 자체에 대한 비판'은 더 이상 내재적 비판의 틀로는 설명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제 원래 질문이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게임판 자체를 비판하는 행위가 어떻게 규범적 힘을 가질 수 있는지, 그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지 하는 문제인거죠. 그래서 저는 효과적 비판에 대해 Youn님이 제시해주신 내재적 비판의 예시는 딜레마 상황을 다시 정교하게 재배치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3
물론 이 문제는 Youn님께서 현재 연구하고 계신 박사 학위 논문의 중심 주제라고 하시니, 제가 더 이상 가볍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예의가 아닐 것 같습니다. 오늘 나눈 대화를 통해 저 역시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의 깊이를 더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을 내어 응해주신 점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부디 좋은 논문을 완성하시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
게다가, 챗지피티 같은 오늘날 AI의 기반이 되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기본적으로 인간 언어의 패턴을 모방하고 있지 않나요? AI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를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지만, 적어도 인간은 AI의 응답을 '인간의 언어'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응답을 '언어'로 받아들일 수 있죠. 그러니까, 현재 AI의 개발 방향이 '인간의 언어'로 해석될 수 있는 응답을 생성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래서 인간도 그 응답을 '인간의 언어'로 해석할 수 있는 한, AI와 인간 사이에, 혹은 AI와 AI 사이의 통약불가능성이란 (애초에 이론적으로도 성립하지 않지만,) 현실적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음... 그런데 사실 이것도 '이해' 라는 단어에 대해 우리가 어떤 철학적 기준과 입장을 채택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이드네요.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1953) 에서 개진한 ‘이해’ 라는 것에 관해서도 화용론적으로 접근한 방식을 생각해보면 지적한 대로, 우리가 언어를 배우고 사용하는 것은 특정 규칙을 따르는 '언어 게임'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이해'라는 개념 역시 이 맥락 안에서만 의미를 갖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우리가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말할 때, 이는 특정한 상황에서 적절한 반응과 행위를 보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면 여기서 '이해' 란 독립적이고 추상적인 실체 상태가 아니라 실천적이고 상황 의존적인 능력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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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날의 AI 시스템—특히 LLM 같은 모델—역시 특정한 맥락에서의 입력(프롬프트)에 적절히 반응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 비트겐슈타인의 화용론적 입장에서는 AI도 일정한 '이해'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하네요. 즉, 따지자면 인간의 언어 게임에 참여하고, 그 게임의 규칙을 상당히 잘 따르며, 기대되는 방식으로 행동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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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YOUN님이 비트겐슈타인적 입장을 통해 통약불가능성을 허구라고 일축했지만, 이게 사실 쿤(Kuhn)이나 파이어아벤트(Feyerabend)의 입장과는 약간 다른 문제 차원을 다루는 것 같습니다.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 간 통약불가능성'이라는게 제 생각에는 애초에 서로 다른 세계 이해 방식을 갖는 패러다임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전제를 가지고 있어서 (삶의 형식이랑 좀 다르게) 이론적이고 개념적인 번역이 불가능하다는 것 같습니다. 이는 철학적 탐구가 다루는 '일상적 언어 게임' 에서의 화용론적 이해 문제와는 비슷한데 약간 구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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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맥락에서 다시 AI를 생각해 보면, AI 시스템들이 인간과 유사한 방식으로 세계를 모델링하지 않고 전혀 다른 데이터 구조와 학습 방식으로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면, 적어도 개념적 차원에서 '패러다임적 불일치'가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컨대, 두 개의 AI 시스템이 서로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분류하고 의미를 형성한다면, 애초에 ‘형식’ 이 다르기 때문에 그것들 간의 '통약불가능성'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언어 게임에서의 의미 충돌이 아니라, 쿤이 말한 패러다임 간 개념적 차원의 (이렇게 말하니 서로 비슷비슷해보여서 헷갈리지만 어쨌든 구별되지 않을까 싶네요...) 불일치로 다르게 설명이 되지 않을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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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가 철학적 '이해'의 의미를 화용론적 맥락에서 좁게 해석한다면 현재 AI의 능력도 충분히 '이해'로 간주될 수 있고, 더 넓고 개념적인 수준에서의 통약불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여전히 AI 시스템들 간에도 근본적인 개념적 불일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비트켄슈타인 이해하기도 어렵고 댓글을 이해하기도 어렵군요.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생각하고 댓글을 달면 언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효과적인 수단이고 뇌작용이고 정신 작용입니다. 정신은 보이지 않으나 언어는 보이므로 정신 현상대신 언어로 연구를 하지요. 언어를 유물론적으로 보면 뉴런간의 상호작용이고 언어이론의 공통분모는 볼쯔만 분포이지요. 작년 노벨물리학상은 인공지능 개발의 기본에 해당하는 볼쯔만 개념을 도입한 사람에게 돌아갔습니다. 인간의 뇌나 인공지능의 정보처리는 볼쯔만 분포가 작동합니다. 그러니 적어도 언어이론의 공통분모는 볼쯔만 분포이지요.
볼쯔만 분포를 더 환원시킬 층도 있습니다. 이는 전자기력입니다. 따라서 전자기력이 공통분모에 해당됩니다. 즉 전자기력-> 볼쯔만분포-> 언어 로 창발되는 층이 생성되지요. 새로운 층에서는 정신이 재규격화되면서 언어의 이론은 전자기력의 이론과는 새로운 모습을 보입니다. 언어층에서 통약가능한 부분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환원된 층을 무시할 수는 없지요.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비트겐슈타인, 데이빗슨, 로티, 퍼트남은 공통적으로 우리의 개념 체계 바깥에 결코 이해할 수도 대화할 수도 없는 완전히 다른 개념 체계를 상정하려는 시도를 비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언어를 사용한다면 대화할 수 있어야 하고, 대화할 수 없다면 그 존재는 애초에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로 개념화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깐요.
하지만 통약불가능성이 허구라 하더라도, 언어적 유아론(lingustic solipsism)을 어떻게 비판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언어적 유아론(lingustic solipsism)이란 세상에 정말로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는 나 하나뿐이고 이런 '나의 언어놀이' 바깥에 어떤 언어도 있을 수 없다는 극단적인 입장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지금껏 대화 상대자라고 간주해왔던 youn님이 사실은 언어 사용자가 아니라 옥구슬이었던 셈이죠.
왜 '언어를 사용하는 나' 바깥에 또 다른 언어 사용자가 있을 것이라는 가정이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사실 나만 유일하게 언어를 사용하고 주변은 전부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옥구슬과 같은 자연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 자연과 우리는 대화할 수 없고, 기껏해야 인과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대처(cope with)할 수 있을 뿐이죠. 셀라스 식으로 표현하자면 유일무이한 나의 언어놀이 바깥에는 '자연의 인과적 공간'만 펼쳐져 있는 겁니다. 물론 이 자연은 '나의 언어놀이'에 (언어적이지는 않지만)인과적 영향을 주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이 탄생하고 낡은 개념이 사라지는 언어놀이의 변화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가령 옥구슬이 나에게 인과적 충격을 줘서 내가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옥구슬의 영향을 받은) 나의 언어이지 옥구슬의 언어는 아니죠. 애초에 옥구슬은 언어를 사용할 수 없으니깐요. 마찬가지로 이 세계관에서는youn님이 제가 새로운 언어를 형성하는 데에 영향을 미쳤더라도 그것은 옥구슬과 같은 인과적 충격에 의한 것이므로 어디까지나 제 언어이지, youn님의 언어를 학습한 결과는 아닙니다. youn님은 그저 대화할 수 없는 자연에 불과하니깐요.
이런 세계관에 어떤 모순이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식의 언어적 유아론(lingustic solipsism)이나 유아론적 언어놀이(solipsistic language game)를 어떻게 논박해야 할지 고민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이 여기에 대한 대답일까요? 글쎄요.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의 사적 언어 논증은 '혼자 하는 언어놀이'를 부정했다기보다 언어 이전의 내밀한 감각들과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언어의 의미를 해명할 수 없다는 주장에 가깝지 않을까요? 반면 언어적 유아론은 이런 주장을 하는 게 아니라 언어놀이의 참여자가 오직 나 하나이며, 이외에는 언어 사용자가 없다는 믿음을 갖는 것 뿐이죠. 이 경우 언어 사용자가 애초에 세계에 나 하나이므로, 나의 감각은 세계의 모든 언어 사용자에게 이해 가능한 형태로 열려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트겐슈타인, 데이빗슨, 로티, 퍼트남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언어놀이가 우리(we)의 것이고, 상호주관적인 것이라고 가정됩니다. 맥도웰은 한술 더 떠서 자연이 언제나 개념화되어 있기에 여기에서의 대화 상대자에 자연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언어놀이가 유아론적일 수 있다는 가정을 아무 이유 없이 폐기하는 듯한 기분이 드네요. 왜 내 바깥에 나와 대화할 수 있는 언어 사용자가 있다고 추가로 가정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옥구슬이랑 대화하고 있지 않으며 그것을 언어 사용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이유가 뭘까요? 반면 나 이외의 언어 사용자가 있다고 하나둘씩 가정해나가는 순간, 언젠가 우리는 AI도, 원숭이도, 토끼도, 잔디도, 옥구슬도 언어를 사용한다고 진지하게 가정해야 할 지경에 이르지 않을까요? 잔디랑 대화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지 않기 위해서 이 가정의 연쇄는 어디에서 분명 끝나야 할 겁니다. 그리고 언어적 유아론에 반대한다면 이와 같은 언어 사용자와 비-언어 사용자의 경계 질문에 합리적인 답을 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반대로 언어적 유아론은 나 이외의 언어 사용자를 상정하지 않으므로 그런 질문에 고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데이빗슨의 경우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룬 적이 있습니다. 주관성, 객관성, 상호주관성은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삼각측량 논변), 언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2명의 발화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데이빗슨의 요지입니다. (맥도웰의 경우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데이빗슨의 입장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다음의 글들을 참조할 수 있을 듯합니다.
Davidson, Donald (1992). The Second Person. Midwest Studies in Philosophy 17 (1):255-267.
Davidson, Donald (1991). Three Varieties of Knowledge. Royal Institute of Philosophy Supplement 30:153-166.
Davidson, Donald (1989). The Conditions of Thought. Le Cahier (Collège international de philosophie) 7: 165-171.
여러 가지 층위에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주제입니다. 특별히, "비트겐슈타인, 데이빗슨, 로티, 퍼트남"이라는 다양한 인물들을 언급해 주신 만큼, 말씀하신 유아론의 문제에 그 인물들이 접근하는 층위가 조금씩 달라서 고려해야 하는 사항이 좀 많습니다.
(1)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공동체주의적 해석과 개인주의적 해석
우선 주석적인 문제를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수 있는데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과연 언어 사용에서 '우리'라는 사회적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연구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다소 갈린다는 점입니다. 특별히, 논쟁은 『철학적 탐구』§199를 중심으로 벌어지죠.
오직 한 사람이 하나의 규칙을 따른 경우가 오직 한 번만 있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보고가 이루어질 경우, 명령이 부여되거나 이해된 경우 등이 오직 한 번만 있었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규칙을 따른다, 보고를 한다, 명령을 내린다, 체스 게임을 한다는 것은 관습들(용법들, 제도들)이다.
여기서 '관습들'이라고 번역된 독일어 단어는 '게플로겐하이텐(Gepflogenheiten)'인데, 이 단어가 사실 '관습들'처럼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습관들'처럼 개인적 의미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유의미한 언어 사용을 위해 '다른 언어 사용자'나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기보다는, 단순히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개인의 '습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보는 견해도 꽤 있습니다. 가령, 윈치(P. Winch), 크립키(S. Kripke), 말콤(N. Malcolm), 사비니(E. v. Savigny)는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공동체주의적 해석을 지지하고, 베이커(G. P. Backer), 해커(P. M. S. Hacker), 맥긴(C. McGinn)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개인주의적 해석을 지지하죠. 이영철 교수님의 논문에 이러한 해석상의 차이가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주의적 해석을 지지하는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들은 언어놀이가 '우리'의 것이라거나 '상호주관적'인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거예요. 굳이 사회적 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특정한 활동을 반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만 지닌다면 얼마든지 언어놀이가 성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거죠.
(2) 콰인에 대한 공동체주의적 해석과 개인주의적 해석
좀 더 영어권 주류 언어철학의 중심 계보에 위치한 인물인 콰인에 대해서도 똑같이 공동체주의적 해석과 개인주의적 해석이 나뉘어집니다. 보통 콰인은
Language is a social art. In acquiring it we have to depend entirely on intersubjectively available cues as to what to say and when. Hence there is no justification for collating linguistic meanings, unless in terms of men's dispositions to respond overtly to socially observable stimulations.
W. V. Quine, Word and Object, New Edition, Cambridge, Massachusetts: MIT Press, 2013, p. xxvii.
와 같은 주장 때문에 언어의 상호주관성을 강조한 인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연구자들에 따라서는 결국 콰인은 언어를 자극-반응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굳이 상호주관성을 콰인의 언어철학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개인주의적 해석도 존재하더라고요. 자극-반응에 근거한 개인어(idiolect)가 사실상 콰인의 언어철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지위를 차지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에요.
(3) 데이빗슨의 주장이 지닌 양면적 성격
@Herb 님이 위에서 잘 지적해 주신 것처럼, 콰인의 제자인 데이빗슨은 언어의 사회적 측면을 좀 더 명시적으로 강조합니다. 애초에 "The Social Aspect of Language"라는 제목의 논문까지 쓸 정도로요. 사실, 데이빗슨의 삼각측량 논증은 저에게는 다소 불분명한 구석들이 있다 보니, 그 논증을 자신 있게 소개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그 논증이 기본적으로 타르스키의 '규약 T'를 전제하고 있는 논증이라고 이해합니다. 규약 T에 근거한 의미론을 받아들일 경우, 특정한 믿음이나 판단의 의미를 안다는 것은 특정한 언어가 참이 되기 위한 조건을 안다는 것으로 해명되어야 하고, 그래서 '주관적' 믿음이나 판단, '상호주관적' 언어, 참이 성립하기 위한 '객관적' 조건이 규약 T를 매개로 해서 서로 의존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 데이빗슨의 기본 착상이라고 이해해요.
다만, 데이빗슨의 논의가 과연 데이빗슨 본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언어의 사회적 성격을 강조하고 있는지는 다소 논란의 대상이 되어요. @Herb 님은 맥도웰이 데이빗슨의 논의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하셨지만, 맥도웰이 Mind and World의 '후기 4'에서 데이빗슨을 비판하는 지점 중 하나가 바로 언어의 사회적 측면에 대한 논의에요. 데이빗슨은 의사소통에서 '공유된 언어(shared language)'가 지닌 의의를 간과하였고, 그래서 완전히 낯선 언어를 지닌 사람을 번역해야 하는 인류학자의 '원초적 해석(radical interpretation)' 상황을 의사소통의 기본 모델인 것처럼 너무 자명하게 상정해 버렸다는 것이 맥도웰의 데이빗슨 비판 중 하나에요.
데이비슨의 개념이해에서, 의사소통하는 당사자들은 자족적인 개체들입니다. 그들은 의사소통의 잠재적 당사자들로서, 혹은 개념적 능력을 요구하는 다른 어떠한 활동의 참여자로서 자신들을 구성하기 위해, 언어—이유의 공간의 형태와 관련해서는 전통의 구체적인 저장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데이비슨의 관점에서, 의사소통하는 당사자 사이에서 공유되는 언어라는 생각은 기껏해야 개인어(idiolect)들 속에서 [발생하는] 설명 가능한 정도의 일치를 [가리키기] 위한 약칭일 뿐입니다. 그러한 일치는 해석을 위한 가설을 몇몇 사람쌍들 사이에서 더욱 쉽게 획득할 수 있도록 해줄 수는 있지만, 우리가 언어를 공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적 이해는 [아무런 공유된 언어도 전제하지 않는] 가장 급진적인 해석의 경우와 원리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공유된 언어”란 그러한 언어 없이도 수행될 수 있는 인지적 수행에서의 보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호적 이해를 위한 능력은 철학적으로 흥미로운 어떠한 배경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In Davidson’s conception, the parties to communication are self-standing individuals. They do not need a language— a specific repository of tradition as to the shape of the space of reasons—to constitute them as potential parties to communication, or indeed participants in any other activity that requires conceptual capacities. In Davidson’s view, the idea of a language shared between parties to communication is at best shorthand for an explicable degree of correspondence in idiolects. Such correspondence can make hypotheses for interpretation easier to come by between some pairs of people, but mutual understanding between people whom we think of as sharing a language is in principle no different from the most radical interpretation. The “shared language” is no more than an aid in a cognitive performance that could be undertaken without it; the capacity for mutual understanding needs no philosophically interesting background.
J. McDowell, Mind and World,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p. 185
말하자면, 데이빗슨은 언어의 사회적 측면에 대해서 말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각각의 개인이 자신들의 개인어를 가지고서 완전히 낯선 개인어를 해석해야 하는 원초적 해석 상황으로부터 의사소통을 설명하려 한다는 것이죠. 제가 위에서 인용한 드보르냐크의 논문에서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데이빗슨을 개인주의적 언어관을 지닌 인물로 분류해요.
If we want to give a general account on what natural languages are, how they are formed by speakers and how communication works we have basically two options: to take either the notion of shared language or the notion of idiolect as fundamental. We can include Lewis (1969, 1975) or normative inferentialists such as Brandom (1994, 2000) and Peregrin (2014) among those who take the notion of shared language as fundamental. On the other side of the spectrum, we can find people like Chomsky (1986, 1992, 1995) or Davidson’s views on communication (1986, 1994) and some of his followers.
M. Drobňák, "Quine on Shared Language and Linguistic Communities", Philosophia, Vol. 46, 2017.
(4) 언어적 개인주의가 언어적 유아론인가?
그렇지만 (a) 데이빗슨이 '공유된 언어'보다도 '개인어'를 근본적인 층위로 삼는다고 해서, (b) 그가 '언어적 유아론'에 빠져 있다고 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데이빗슨이야말로 규약 T를 근거로 삼아서 언어적 유아론을 공격한 인물이죠. 언어의 의미가 규약 T라는 공식에 따라 해명되어야 한다면, 번역 가능성과 언어란 분리될 수 없어요. 우리가 '참'으로 받아들이는 언어는 재귀적으로든지 명시적으로든지 다른 사람의 언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발성 행위도 (그 발성 행위가 언어인 이상) 우리가 '참'으로 받아들이는 언어로 번역될 수 있어야 하거든요. "'s' is true iff p"에서 우리의 언어 s가 참이라는 사실과 타인의 언어 p 사이에는 쌍조건문이 성립하니까요. 그러니까, 적어도 규약 T에 근거한 의미론이 설득력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Youn의 발성 행위는 나의 언어로 번역되지만, 그 발성 행위는 사실 언어가 아니라 단지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였을 뿐이다."
라고 유의미하게 말할 수가 없게 돼요. Youn의 발성 행위가 @Philadelphia 님이 참이라고 받아들이는 언어로 번역될 수 있다면, 그 발성 행위는 언어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 발성 행위는 애초에 언어가 아닌 것일 뿐이에요. '번역될 수 있는데도 언어가 아닌 발성 행위'란, '소리없는 아우성'이나 '둥근 사각형'처럼 일종의 형용모순인 것이죠. 물론, 규약 T에 근거한 데이빗슨의 의미론에는 중요한 약점들도 있다 보니, 이 의미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힘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적어도 이 의미론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만큼은 '번역될 수 있는데도 언어가 아닌 발성 행위'를 인정할 수 없게 되죠. (그리고 아직까지 데이빗슨이 제시한 의미론은 영미권 언어철학에서는 거의 교과서적인 입장으로 남아 있는 것으로 저는 알고 있어요.)
(5) '우리'는 누구인가?
개인적으로, 제시하신 논의에 대해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인 대답을 한 인물은 브랜덤이라고 생각해요. 그의 주저인 Making It Explicit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되어서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으로 끝나거든요. 740쪽이 넘는 그 두꺼운 책이 사실 전부 '우리'라는 범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에 대한 논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에요.
브랜덤이 제시한 답변을 여기서 세세하게 소개할 수는 없지만, 그 요지는 우리 자신이 '우리'라고 받아들이기로 인정한 범위가 '우리'라는 데 있어요. 한 마디로, 무엇이 유의미한 언어이고 무엇이 유의미한 언어가 아닌지, 무엇이 진정으로 믿음이나 욕구 같은 지향성을 가진 개체이고 무엇이 단순한 자연물인지는, 미리부터 그어진 경계를 가지고서 판단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그 대상을 '언어'를 지닌 것으로서나 '지향성'을 지닌 것으로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나 의지가 있는지에 달려 있는 문제라는 것이죠. (브랜덤은 이러한 입장을 다니엘 데넷에게서 가져오기도 합니다. 또, 논증의 근거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브랜덤의 입장은 결국 우리가 무엇을 '참'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무엇이 언어이고 무엇이 언어가 아닌지 결정된다는 데이빗슨의 입장과도 분명히 연결되는 지점이 있죠.) 예전에 이와 관련해서 스터디 영상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6) 세인, 아버지의 이름들, 호명 등등
게다가, 왜 수많은 철학자들이 언어를 공동체적인 것으로 보는지의 문제는, 단순히 영미권 언어철학에서뿐만 아니라 대륙철학에서도 중요한 논의 주제이기도 해요. 하이데거의 '세인'이라는 개념이나, 라캉의 '아버지의 이름들'이라는 개념이나, 알튀세르의 '호명'이라는 개념이 모두 이 주제와 연결되어 있거든요. 이 철학자들이 지적하는 핵심은, 우리가 언어를 처음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언어 속에 우리가 들어와 있을 뿐이라는 점에 있어요.
즉, (하이데거가 말하는 것처럼)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을 지배하고 있는 온갖 잡담, 호기심, 애매성은, 현존재 자신이 결단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세인'이라는 기존 사회의 익명적 집단으로부터 현존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죠. 또 (라캉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상징계에는 '아버지의 이름들'이라는 권위가 주어져 있어서, 우리는 그 권위들이 욕망하는대로 욕망하고 있다는 것이고요. 그래서 (알튀세르가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자신만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어서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 이름이 호명되어서 주체로 성립한다고 할 수도 있어요.
이 모든 논의들은 강조점이나 설명 방식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어도, 우리가 언어를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의 일상성, 욕망, 주체성을 성립시키고 있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강조하고 있어요. 우리는 언제나 이미 언어의 질서 속에 들어와서 그 질서가 제시하는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한 번도 언어 바깥으로 나가거나 언어 자체를 완전히 무에서 만든 적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마치 언어가 전적으로 나에게만 귀속되는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질서인 것처럼 상정하는 언어적 유아론은 성립할 수가 없다는 것이 대륙철학에서도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논의에요. 저는 아직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최근에 출간된 배세진 선생님의 『금붕어의 철학』이 이러한 맥락의 논의들을 다루는 것 같더라고요. '언어' (혹은 '기호', '텍스트', '개념' 등등으로 표현되는 것들)의 어항을 완전히 빠져나오겠다는 시도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지, 그렇다면 그 어항 속에서 어항을 변혁시키는 일이 과연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륙철학의 논의를 소개한 책인 것 같더라고요.
세 줄 요약
"비트겐슈타인, 데이빗슨, 로티, 퍼트남" 등등이 ‘나‘ 외부의 언어 사용자를 자명하게 전제하는 언어적 공동체주의자들인지에 대해서는 해석상 많은 논란이 있다
데이빗슨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위의 인물들을 언어적 개인주의자들로 해석한다고 해서 그들이 반드시 언어적 유아론자가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언어적 개인주의를 지지하면서도 언어적 유아론을 비판할 수도 있다.)
언어적 공동체주의자들은 우리 자신이 언어를 만든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 자신을 만든다는 점을 강조한다. (공동체적 언어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점에서, ‘나‘만 혼자 언어를 사용하는 상황이란 언어적 공동체주의자들이 보기에 허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