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음, 양립 불가능성 문제, 동기의 문제

@Herb @sophisten 님, 두 분의 답변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데이비드슨의 입장을 일부 오해했던 지점들을 명확히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일관성'이나 '자비의 원리'가 단순한 심리적 태도가 아닌, 소통과 사고의 '구성적 원리'로 제시된다는 점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성적 원리가 심리적 태도에도 반영되어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겠죠.

가령 @sophisten 님께서 제시해주신 것처럼, 데이비드슨 모형 아래에서의 담화는 p와 ~p에 대한 전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바로 그 '구성적 원리'라는 개념의 지위와 그 함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합리성이라는 강한 믿음에 대해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물음이 원리적으로 사고에서 불가능하다면 저는 질문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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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님은 데이비드슨의 원리가 의식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닌, 선험적이고 구성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만약 그 논리가 정말 선험적이고 자명하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그 원리의 지위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원리를 자명한 전제로 받아들인 후 그 안에서 세부적인 해석을 다듬는 '주석' 작업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지금 명백히 그 원리의 지위 자체 를 논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실 자체가, 데이비드슨의 주장이 '선험적 진리'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하나의 **'규칙에 대한 발화'**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그리고 어떤 규칙이든,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한 토론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데이비드슨의 논의는 이미 규칙에 대한 발화상황으로 전환된게 아닐까 싶네요.

따라서 만약 구성적 원리는 의식적으로 따르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데이비드슨의 구성적 원리들을 모두 따르고 믿는다'라는 표현은 '물은 h2o이다'라는 말처럼 자명한 것을 발화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요?

  1. 만약 데이비드슨의 이론이 객관적인 사실의 기술이라면, 이 논쟁은 무의미합니다. 저희는 이 이론의 지위에 대해 참 거짓을 판정할 수 없을 테니까요. 여기서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어떻게만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데이비슨의 이론들이 생각과 언어의 가능 조건 자체를 규정함으로써 반대 의견이 애초에 '성립' 혹은 발화조차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다는 말도 이상하거나 부수적입니다)

  2. 만약 이 논의가 의미 있다면, 데이비드슨의 이론은 자명한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논쟁 가능한 하나의 '주장'일 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저희는 어느정도 논의를 하고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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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제가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P를 생각할 능력이 결여된다"는 표현을 쓴 것은, 데이비드슨의 모델이 낳는 기이한 귀결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Herb님의 설명대로, 그의 합리적 주체가 P와 ~P를 모두 고려한 후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문제입니다. 그 과정은 강한 믿음이 형성된 '이후'에 그것이 어떻게 다시 변화하거나 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끝난 과정의 '결과'일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 데이비드슨이 묘사하는 합리성이란, 창조적인 '사고 과정'이라기보다는 규칙이 정해진 '게임'에 가깝습니다.

이 게임 안에서 대화는 결국 서로의 논증표를 확인하는 '코드 교환'으로 전락하며, 진정한 의미의 '열린 마음'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데이비드슨이 대화불가능을 우려한 것인지, 아니면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고싶은건지 잘 모르겠네요. 적어도 지금 저희의 대화? 혹은 토론은 데이비슨의 맥락에서 제가 말한 '능력이 결여된' 상황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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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지만, 데이비드슨의 이론은 '덕성'이나 '신뢰'와 같은 문제를 거의 전적으로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그의 '합리성' 모델이 현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얇고 제한적이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포커 플레이어의 '긴장'이나 '속임수'를 간파할 때, 우리의 판단은 종종 해석에 선행합니다. 우리는 그의 미세한 표정이나 행동 같은 명제 이전의 직관적 판단 를 통해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직감합니다.

궁극적으로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데이비드슨과 같은 합리성 이론가들은 '사람은 비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저는 진짜 난점이 다른 곳에 있다고 봅니다. 바로 그 합리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비명제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고 믿게 만든다는 점 입니다. 신뢰, 분위기, 직관, 윤리적 태도와 같은, 명제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중요한 차원들을 데이비드슨의 '합리성' 모델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미 이 문제가 모델에 대한 메타-채택 문제에서의 사고 제약에서 근본적인 난점에 처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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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언 해킹이 왜 데이비드슨의 논의를 제국주의적이라고 평가했을까, 저는 그 이유가 데이비드슨의 이론이 복잡한 현실에 대한 설명력과는 별개로 너무나 일반적이고 포괄적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중력은 우리가 그것을 부정하는 '말'을 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슨의 합리성 원리는 우리의 사고와 발화 자체에 직접 개입하여 , 그 틀을 벗어나는 생각을 '의미 없음' 혹은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선험적으로 비합리적이게 되는 것이죠)

가령 저희가 중력 부정론자와 토론할 때, 그 논쟁을 '이 방 안에서의 언어적 토론'으로 국소화 할 수 있습니다. "좋아, 일단 네가 말로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할게. 하지만 실제로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슨의 법칙에 대해서는 이러한 국소화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데이비드슨의 주장은 바로 '이 방 안에서의 언어적 토론' 그 자체를 지배하는 규칙 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법칙을 부정하는 순간, 토론의 장 자체가 무너진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일단 네 주장을 인정하고 토론을 계속하자"는 식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됩니다.

물리 법칙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내면의 성소'까지는 침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슨의 합리성 법칙은 우리의 생각과 말, 즉 내면의 성소 자체를 점령하고 식민화 합니다. 그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벗어나는 순간 '의미 없음'으로 규정되어 존재 자체가 부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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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열린 마음'은 데이비드슨의 합리성 게임 안에서 설명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합리성 게임 자체의 한계를 폭로하고, 진정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배경 이라고 생각합니다. '양립 불가능성' 문제는, 이처럼 '열린 마음'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모든 것을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좁은 틀로만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데카르트의 주체가 그 내용은 정정되었지만, 여전히 데이비슨의 모형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까 고립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합리적인, 원리의존적으로 하나의 유일한 선택지를 선택하는 주체인 것이죠. 하지만 저는 '밥을 먹는다'라는 표현이 단 하나의 레스토랑 방문 후 식사를 의미한다면, 이미 선택지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의 의견으로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답장을 두분께 동시에 할 수는 없는지라, @sophisten 님이 아닌 @Herb 님에게 답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점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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