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기존 해석에 대한 의문

답변 감사합니다. Youn님 덕분에 제 질문의 배경과 의도를 더 명확하게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제 표현 중에 중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애매한 용어들이 있었다고 지적해주셨는데, 혹시 어떤 부분이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우셨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의도했던 바를 더 적절하게 해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토론은 명확한 이해에서 시작되니까요. 질문에 언제든 열려있습니다.

1.

Youn님께서는 비트겐슈타인이 '도식/내용' 이분법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데이비드슨과 같지만, 데이비드슨이 '규약 T'에 기반한 형식적 의미론을 구축하려 했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바로 이 '결의 차이'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표준 해석이 직면한 근본적인 딜레마를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제 질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비트겐슈타인은 데이비드슨처럼 거대한 이론적 장치 없이도, 통약불가능성이 허구라고 성공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가?"

데이비드슨의 비판은 '진리'와 '합리성'이라는 보편적 개념을 축으로 하는 강력한 이론적 논증 입니다. 반면, Youn님께서 설명하신 표준 해석에 따르면, 비트겐슈타인은 '삶의 형식'이나 '철학적 치료'라는 비(非)이론적, 실천적 방식을 택합니다.

2.

바로 여기서 딜레마가 발생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표준 해석은 데이비드슨이 Problems of Rationality의 논문 중 하나인 「Paradoxes of Irrationality」에서 제시한 역설과 정확히 동일한 구조에 갇히게 됩니다. (p.181)

비합리성의 근본적인 역설, 그리고 어떤 이론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역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비합리성을 너무 잘 설명하면, 그것은 숨겨진 형태의 합리성으로 바뀌게 됩니다. 반대로, 너무 쉽게 일관성 결여로 치부해버리면, 비합리성을 진단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훼손하게 됩니다. 이는 어떤 진단이든 정당화하려면 필연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합리성의 배경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입니다.

“The underlying paradox of irrationality, from which no theory can entirely escape, is this:
if we explain it too well, we turn it into a concealed form of rationality;
while if we assign incoherence too glibly, we merely compromise our ability to diagnose irrationality by withdrawing the background of rationality needed to justify any diagnosis at all.

이 틀을 '통약불가능성'이라는 철학적 혼란을 비판하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적용해 보겠습니다.

  1. 비판을 너무 잘 설명하는 경우 (새로운 토대주의):
    만약 표준 해석이 '삶의 형식'이라는 공통의 합리적 기반 에 호소하여 통약불가능성이 왜 틀렸는지를 체계적으로 설명한다면, 상대주의자의 오류는 이 공통 기반 안에서 벌어진 '실수', 즉 '숨겨진 형태의 합리성'이 됩니다. 이 경우, 비판의 근거가 된 '삶의 형식'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새로운 토대주의 이론 이 되며, 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이론 거부' 입장과는 상충됩니다. 이것이 제가 처음 제시했던 '화용론적 입장' 입니다.

  2. 비판을 너무 가볍게 부여하는 경우 (회의주의):
    반대로 표준 해석이 상대주의자의 주장에 대해 "그건 그냥 무의미한 소리다"라고 너무 가볍게 선언한다면, 그들은 왜 그것이 '무의미'한지를 정당화할 공통의 배경을 스스로 제거 해버립니다. 비판은 힘을 잃고, 진단할 능력 자체를 손상시키게 됩니다. 이는 결국 비판의 힘을 잃은 회의주의적 입장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통약불가능성을 어느정도 받아들이기 위한 '회의적' 입장입니다. (Youn님은 두 입장을 둘 다 통약불가능성을 거부하는 입장으로 이해하셨지만, 그렇다면 굳이 딜레마에 대해 논의할 이유는 없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3.

그래서 저는 이 딜레마를 피하기 위한 대안으로, 소수 의견인 코라 다이아몬드나 제임스 코넌트의 '결연한 독해(Resolute Reading)'가 더 설득력 있는 길을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에서 '논리적 통사론'을, 이론적 토대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문학적/치료적 장치 로 사용했다고 봅니다. 저는 이걸 후기 해석에도 연장해서, '문법'이라는 개념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첫 질문자이신 @wlqqns님의 "사다리를 분석하지 말고 버려라"는 직관과도 정확히 맞닿아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비트겐슈타인은 외부의 상대주의자를 직접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철학적 혼란이라는 '허수아비'를 스스로 만들어 스스로 때려 부수는 과정 을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자신의 혼란을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문학적 아이러니 를 구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의 '이론 거부'를 일관되게 지켜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 역시 명백한 한계를 가집니다. 만약 비트겐슈타인의 작업이 오직 '자기-치료'의 과정이라면, 그의 철학이 어떻게 우리와 다른 외부의 입장(예: 과학주의, 상대주의)을 비판 하고 바로잡을 수 있는지, 그 정당화 측면 에서는 굉장히 곤란해지는 듯합니다.

(이에 대한 제 나름의 해법은 열린 마음, 양립 불가능성 문제, 동기의 문제 - holahola2 님의 게시물 #12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4.

결국 표준 해석은 딜레마에 빠지고, '결연한 독해'는 비판의 힘을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Youn님께서는 이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비(非)이론적 접근이 어떻게 이론적 토대 없이도 상대주의에 대한 효과적인 비판 으로서의 힘을 가질 수 있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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