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마음, 양립 불가능성 문제, 동기의 문제

열린 마음에 관한 일련의 논쟁 지점을 정리한 것입니다. (출처: Kwong 2016)

  1. Riggs(이하 R)와 Baehr(이하 B)에 따르면 열린 마음은 인식 능력과 같이 의식 이하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인식적 덕성이다.
  2. 그런데 R은 열린 마음에 관한 “양립 불가능성 문제”를 제기했다.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강하게 p라는 믿음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열린 마음을 지닌다는 것은 양립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p를 강하게 믿으면서도 열린 마음을 지녀서 ~p에 열려 있다는 것, 즉 p의 진리치에 대해 의심한다는 것은 양립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 Adler(이하 A)가 제시한 문제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열린 마음을 지녔다는 것은 지니고 있는 구체적 믿음에 관한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해, 열린 마음을 지녔다는 것은 믿고 있는 p의 진리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p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p가 참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과정 중에 무언가 오류가 있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즉, 열린 마음은 자신 믿음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이차적 태도이다.
  4. 하지만 R은 A의 해결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주장한다. R이 보기에 A의 정의는 태도로서의 열린 마음이 우리의 인식적 생활에 어떻게 효과적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동기의 문제”를 지니게 된다: 어떤 사람이 더 나은 인식적 덕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열린 마음을 지녀야 하는가?
  5. R이 내놓는 답변은 A의 정의에 더해 “자신에 대한 앎”과 “자기 감시”라는 두 사유의 특성을 더하는 것이다. 전자는 “자신 믿음과 반대되는 믿음의 참됨을 보지 못하게 막는 자신의 나쁜 습관이나 인식적 결함에 대한 앎”이고, 후자는 “그 습관과 결함의 신호를 감지하고 촉발된 그러한 습관적 반응을 심각하게 여기는 것”이다. R은 이 두 특성이 더해진 정의에 따른 열린 마음을 통해서 우리가 결과적으로 참에 도달할 가능성을 드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6. 하지만 R 주장의 문제는 한 행위자의 믿음과 그에 대립하는 믿음 사이의 갈등이라는 상황을 전제하고 열린 마음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러나 열린 마음이 꼭 갈등 상황과 관계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 B 주장의 핵심이다. 그가 드는 예시가 공정한 판사의 사례이다. 판사는 비록 대립하는 믿음을 가진 두 사람을 다루지만, 열린 마음을 가지고 두 사람의 입장을 공평히 다루면서 모두를 공정하게 다룰 수 있다. 그래서 열린 마음의 핵심에 꼭 갈등이 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이 B의 생각이다.
  7. R이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은 열린 마음이 필수적으로 갈등이라는 요소를 포함하지는 않으나, 판사의 사례에서도 ‘자신에 대한 앎’과 ‘자기 감시’가 “합리적인 평가”를 내리도록 작동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정된 R의 열린 마음에 대한 정의는 갈등이 아닌 ‘자신에 대한 앎’, ‘자기 감시’, 그리고 ‘합리적인 평가’로 구성될 것이다.
  8. 하지만 수정된 R의 제안 또한 문제가 있다. 열린 마음이 꼭 합리적인 평가를 내리는 상황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 같기 때문이다. 이 점 또한 B가 지적한다. B가 드는 학생의 예시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배우는 학생은 세계에 관한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사고 방식을 고수하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열린 마음을 가진다. 게다가 이 상황에서 학생들은 R이 정의한 자신에 대한 앎’와 ‘자기 감시’ 과정을 거치지도 않는다. 그래서 R이 제시한 열린 마음을 구성하는 세 요소는 열린 마음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 B의 주장이다.
  9. B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열린 마음의 핵심은 자신의 기본적 혹은 특권적인 입장을 “넘어서(move beyond) 혹은 초월하여(transcend)” 다른 입장을 공정하고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열린 마음을 통해 사람들은 참에 다가갈 기회를 얻을 수 있다.
  10. 하지만 B는 R이 제기한 두 문제에 대해 분명하게 답변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B의 기본적 입장을 염두에 둘 때, 그는 “참 산출에 이바지(truth-conducive)”할 경우에 열린 마음을 갖춰야 하고, 아닌 경우에는 열린 마음을 갖출 필요가 없다고 답변할 것 같다. 예를 들어, S가 자신의 믿음 p에 대한 탄탄한 근거를 지니고 있으며, p와 관련한 자신의 판단이 믿을만하고, ~p의 근거의 신뢰성을 의심할 이유가 있다면, S는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참에 다가가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p의 근거의 신뢰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만일 ~p를 진지하게 고려해 보는 것이 자신이 참에 도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S가 있다면, 이는 곧 S가 ~p는 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는 S의 p에 대한 확신이 예전보다 확고하지 않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이는 B가 양립 불가능성 문제에 관한 답변을 제공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참 산출’에 기반하여 열린 마음을 주장한 B의 논리를 따른 직전 사례는, “한 사람이 p를 ‘확고하게’ 믿으면서 동시에 열린 마음을 갖출 수 있냐”는 양립 불가능성의 문제 중에서 ‘확고하게’를 만족하지 않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B가 제시하는 그림에서 S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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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면 ~p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어렵지요. 그렇지만 이 문장은 명확하지 못한 주장입니다. 믿음은 주관적이라 판단의 근거로 믿음을 둘 수가 없지요. 주관적인 p에 대해 주관적인 ~p도 언제든지 가능하지요.
허약한 믿음 대신 튼튼한 진리를 근거로 할 때 양립적 문장은 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됩니다.

재밌네요. 여기서 열린 마음이 인식적 덕이라고 하는 건 오류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덕인지, 아니면 더 많은 참인 믿음 혹은 지식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덕인지 궁금하네요.

  1. 요약정리하면서 누락된 부분인 것 같지만 중간중간에 나오는 열린 마음에 관한 "R의 정의", "A의 정의"가 정확히 안 나와있는 것 같습니다. 논쟁의 큰 배경은 열린 마음의 개념에 관한 문제인 것 같은데 논쟁 참여자들의 정의가 뚜렷하지 않아서 따라가기가 좀 어렵네요 ㅎㅎ;

  2. 양립불가능성 문제는 비교적 포인트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S가 어떤 명제 P에 대해 열린 마음(태도?)을 갖고 있다는 것은 명제 P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신념도(credence)를 가질 것을 필요조건으로 하는 것 같은데, S가 강한 확신을 가지고 ~P를 믿는다면, 즉 ~P에 높은 신념도를 부여하고 있다면 저 필요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므로 P에 대해 열린 태도를 취할 수 없다는 것 같네요.

  3. Adler의 주장은 저게 필요조건이 아니라는 것 같고요. 사실 "~p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가 뭘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대략적으로 이해하자면 S가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은 P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신념도를 올리지 않으려는, 말하자면 일종의 인식적 정책을 취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신념도를 부여하는 것 자체에 대한 태도라는 점에서 2차적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고요)

  4. 그 뒤에 이어지는 Riggs의 반론이 효과적인지, Riggs 자신의 정의가 성공적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Riggs의 정의가 뭔지가 분명하지 않은 게 가장 걸림돌이네요.

하지만 문제는 이렇게 단순하지 않다. ~p의 근거의 신뢰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만일 ~p를 진지하게 고려해 보는 것이 자신이 참에 도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S가 있다면, 이는 곧 S가 ~p는 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는 S의 p에 대한 확신이 예전보다 확고하지 않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이 부분의 논증이 건전한 논증인지는 약간 의심스럽습니다.
일단 '시사'와 '함축'이 섞여 있는 게 눈에 걸리는데 이건 일단 넘어가고,

만일 ~p를 진지하게 고려해 보는 것이 자신이 참에 도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S가 있다면, 이는 곧 S가 ~p는 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조건문이 참이 아닌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우선 이 조건문의 후건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읽어볼 수 있습니다.

(1) ...있다면, 이는 곧 S가 ~p에 대해 0이 아닌 신념도 값을 부여한다는 점을...
(2) ...있다면, 이는 곧 S가 ~p에 대해 일정 수준 이상의 신념도 값을 부여한다는 점을...

(1)은 상당히 사소한 주장입니다. 어떤 사람에 p에 대해 0.99만큼의 강한 신념도를 부여하고 있더라도 ~p에 대해서는 (합리적이라면) 0.01만큼의 신념도는 부여하게 됩니다. 즉 아주 그럴듯하진 않지만 ~p가 참일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것이죠. 하지만 이건 본 논증에서 의도하고자 하는 명제는 아닐 것입니다.

(2)로 읽는 것이 논증에서 의도한 내용이라 할 수 있겠는데, 이 해석에 따르면 조건문은 거짓이라고 봄직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p에 대한 가능한 반론들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 우리는 ~p에 대해 가정(supposition)이라는 명제 태도를 취할 수 있고, 제가 생각하기엔 대부분 그렇기 때문입니다. ~p를 가정한다고 해서 ~p를 믿는 건 아닙니다. 아주 낮은 수준으로도 말입니다. 적절한 예일지 모르겠습니다만, 누군가가 부정선거는 없었다는 확신을 유지하면서 부정선거가 참이라고 얼마든지 가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련의 counterfactual reasoning을 통해서 부정선거가 일어났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 조건문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1. 상세한 논의를 몰라서 건설적인 코멘트가 없는 점 죄송합니다. 뭔가 epistemic/doxastic open-mindedness가 doxastic rationality와 밀접하거나 너무 밀접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재밌는 주제 연구가 됐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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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자체에는 동의하는데, 문제는 이 경우 "열린 마음"의 경우에 속하는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열린 마음"이 아니더라도 그러한 반사실석 고려를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예시를 만들어 봅시다:

[1] 영수는 P의 참을 "강하게" 믿고 있고 이것을 조금도 의심하고 있지 않다. 어느 날 영수는 ~P를 주장하는 철수를 만나게 되고, 영수는 그러한 철수를 한심하게 여기면서 철수에게 왜 P가 참인지를 귀류법으로 설명해준다: "어리석은 철수야. 자 봐라. ~P가 참이라고 가정해 봐라. [...] 결국 모순으로 귀결되지? 따라서 ~P는 참이 될 수 없어. 따라서 P가 참이란다".
[2] 철수는 설득이 되어서 돌아간다. 그러나 집에 와서 오늘 대화를 복기하던 영수는 문득 자신이 너무 P의 참을 교조적으로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반성하게 된다. 비록 철수는 멍청해서 별다른 논변을 제시하지 못했지만, ~P의 참을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무언가 설득력있는 근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즉 영수의 평소 강한 믿음이 도그마가 되어 '자신 믿음과 반대되는 믿음의 참됨을 보지 못하게 막는 자신의 나쁜 습관이나 인식적 결함'이 되었던 것은 아닌지 고민해보기 시작한다. 이제 영수는 ~P를 주장하는 논변이 쉽게 귀류법으로 해소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직관에 기초하여, ~P를 진지하게 다시 고려해보기 시작한다: "~P가 진짜 참일지도 모른다. ~P가 참이라고 가정해 보자. [...]"

저는 [1]과 [2]가 꽤 자연스러우면서도 유의미한 구별이라고 생각하며, @Raccoon 님의 설명은 [1]에 대응하고, [1]과 구별되는 예컨대 [2]의 상황이야말로 본문의 의도

라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위 요약을 읽고, 비합리성(Irrationality) 문제에 대한 데이빗슨의 접근이 떠올랐습니다. 데이빗슨은 한편으로는 사유에 구성적인 합리성이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주체들이 모순된 믿음들을 가지는 비합리성의 경우를 설명해야 했는데요. 이에 대한 데이빗슨의 해법은 마음 안에 구획(division)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즉 P를 믿는 마음의 영역과 ~P를 믿은 마음의 영역이 다를 수 있고, 따라서 비합리적 주체는 (P&~P)를 믿는 것이 아니라, P 와 ~P를 독립적으로 믿는다는 것이죠. 합리적인 주체라면 그러한 구획을 없애고 P와 ~P를 동시에 고려하여 더 합리적인 믿음을 따르겠지만, 비합리적인 주체는 특정 믿음을 합리적 이성의 범위 바깥 영역에 위치시켜 그러한 합리적 비교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요지입니다. (D. Davidson, "Deception and Division", 2004)

이러한 마음의 구획 아이디어를 잠시 빌려온다면, "양립 불가능성 문제"에도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즉 P와 ~P가 경쟁하는 것은 truth-conducive일 경우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경우에서 역시 덕성이나, 자기인식, 자기 감시 등을 위해 가능하다는 것이죠. 전자일 경우에는 양립 불가능성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나 논리적 접근 등을 통해 해결하고자 할 수 있을 테고, 후자일 경우에는 애초에 양립가능성을 해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제 논지입니다. 주체가 P의 참을 강하게 확신할 때, P와 ~P의 경쟁은 동일한 층위(truth-conducive)에서 이루어지는 것 뿐만 아니라, 복수의 층위들 사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을 인정한다면요. 가령 truth-conducive 층위에서는 P와 ~P를 공정하게 비교하여 P의 참을 인정하는 한편 (판사의 사례), 자기인식 내지 자기감시의 층위에서는 ~P의 참(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식으로요. 평가와 규범성의 층위가 단일하게 존재한다는 (현대철학에 널리 퍼져 있는) 전제가 문제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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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말씀대로 아주 컴팩트하게 요약하려고 하다 보니 요약문만 읽는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 부분이 좀 있었나 봅니다. 아마 5번이 같이 논의해 볼 법한 문제 제기인 것 같습니다. 그 전에 간단히 드릴 수 있는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A의 정의: 사실 A의 정의는 R이 이해한 A의 정의를 저자가 받아 쓰고 있습니다. open-mindedness is understood as “a second order attitude toward one’s beliefs as believed, and not just toward the specific proposition believed" (72)

R의 정의: 아쉽게도 R의 정의는 명시적으로 나와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명시적으로 R의 정의를 표현하기 힘들었습니다. 원문에서는 단지 "Riggs’s solution is to supplement Adler’s definition with two “characteristics of thought” that a person must acquire in order to be genuinely open-minded. According to him, this person must first gain self-knowledge about her own cognitive weaknesses or bad habits of thought that might prevent her from seeing the truth of opposing views. She must then “self-monitor” for signs of these weaknesses and bad habits and “take whatever prompted these habitual responses seriously” (183)."라고 나와 있을 뿐이에요.(72).

B의 정의: B의 정의는 분명하게 나와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해보고"라는 것은 "give ~p seriously consideration"을 옮긴 말입니다. 이 논문에서 'seriously'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어떤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인지 아닌지 이쪽 분야 연구 역사를 전혀 몰라서 그냥 일상적 용어로 옮겼습니다.

지적하시는 부분에 관한 원문의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To be open-minded in this sense [...] is “to be aware of one’s fallibility as a believer, and to be willing to acknowledge the possibility that anytime one believes something, it is possible that one is wrong”".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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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우면서도 그럴 듯한 접근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준비하고 있는 논문에도 인사이트를 줄 수 있을 것 같아요. 길지도 않으니 한 번 읽어보고, 요약문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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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님의 마지막 문단은 잘 이해가 안되네요. 님은 판사와 일반인의 사례를 병치하면서 마치 두 층위(truth-conducive와 self-reflective)가 공존 가능한 것처럼 말하시지만, 오히려 판사는 법과 판례라는 제도적 정당화 체계에 기반해 판단을 내리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 경우는 철저히 ‘정당화’의 층위에 속한다고 봐요.

반면, 일반인의 자기반성이나 열린 마음은 오히려 판단을 유보하고 다시 질문하는 ‘이해’나 ‘성찰’의 층위에 가깝죠. 그래서 이 둘을 나란히 두는 건 층위를 구분하겠다는 본인의 취지와도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당화된 판단과 열린 성찰은 단순히 층위가 다르다는 게 아니라, 서로 구조적으로 반대방향의 실천이니까요.

그리고 판사의 예에서 판사는 적어도 자신의 판단에서의 도메인을 어느정도 보이지만, 데이비슨이 말하는 더 포괄적인, 논리적 구획 상황에서는 자아분열적인 상황에 어떻게 대응할지도 궁금하네요. (그런데 데이비슨이 이런 구획을 자기 해법으로 정말 내놓나요? 저는 데이비슨이 coherence한 접근을 한걸로 알고 있어서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네요) 가령 어떤 사람과 논쟁을 하다가 그 사람이 자기모순적인 상황에 놓였을때, "이건 내 자아1의 판단이고, 자아2와는 다르다"라는 식으로 자아3, 자아4, 자아5.. 이렇게 갈수도 있을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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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문단을 너무 대충 쓴 것 같긴 하네요.

본문에 따르면 양립 불가능성 문제는, P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어떻게 해서 ~P에 열려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이 일견 모순적 태도로 보이니깐요. 제 답변의 취지는, P와 ~P에 대한 믿음이 동일한 층위에 위치한다면 그러한 양립불가능성이 설득력이 있을 수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강한 믿음 P와 자기감시적 믿음 ~P가 서로 다른 층위에 귀속되는 것이라면 양자를 양립불가능하게 볼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하신 바가 ("서로 구조적으로 반대방향"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제 취지와 충돌하지 않습니다.

이전에 서술했다시피, 데이빗슨은 일관성과 같은 원리들을 사유 자체가 가능하기 위한 일종의 선험적 조건으로 둡니다 (the constitutive ideal of rationality). 따라서 합리적 주체라면 충돌하는 두 믿음들 중 더 많은 근거와 이유에 의해 지지받는 쪽을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때때로 주체들은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P보다 P가 더 낫다"라는 합리적이고 일관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P가 참이다"라는 판단을 따르는 비합리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비합리성을 설명하기 위해 마음의 구획이 들어섭니다. 합리적인 주체라면 두 판단을 모두 마음의 이성적 영역에 집결시켜 그 중 더 나은 판단("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P보다 P가 더 낫다")을 따르지만, 비합리적 주체에게는 이러한 더 나은 판단이 마음의 이성적 영역 바깥에 위치하게 되어 일관성이 작동하지 않게 되는 것이죠.

제 설명은 매우매우 단순화된 서술에 불과하니, 데이빗슨의 구체적인 입장이 궁금하시다면 데이빗슨 선집 4권 Problems of rationality (2004)에 수록된 논문들을 참조하실 것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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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정당화된 판단과 열린 성찰은 서로 구조적으로 반대 방향의 실천"이라고 말씀드린 취지는, 님의 주장처럼 두 층위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을 쓰게 된 더 근본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양립 불가능성' 논의에서 Herb님이 제안하신 데이비슨의 논의는, 저에게 마치 "P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P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사람"처럼 들립니다. 마치 열린 마음 상태에서는 양방향으로 작동하던 사고 능력이, 강한 믿음을 갖는 순간 P라는 한쪽 방향으로만 고정되고 다른 방향으로는 작동 불가능하게 되는 것처럼요. 저는 인간의 마음이 이런 식으로 특정 명제나 이유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사고 능력을 상실한다는 발상 자체가 굉장히 기이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는 '정당화(닫는 실천)'와 '성찰(여는 실천)'이 구조적으로 반대 방향의 능력이지만, 한 주체 안에서 두 능력 모두 온전히 보존된다 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구획'이라는 장치 없이도 자연스럽게 말이죠.

2
그런데 저는 이 '열린 마음' 논의가 데이비드슨이 말하는 순수한 논리적 합리성 문제뿐만 아니라, 인식적 '덕성(virtue)'에 대한 논의 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변덕스럽지 않고 일관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식의 '덕적 일관성' 같은 것이죠.

데이비드슨의 심리철학이 이런 덕성의 문제를 조금이라도 다루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님의 설명을 듣고, 그의 논문을 읽어보니 그의 '일관성' 개념은 거의 전적으로 논리적 일관성 에 국한된 것 같더군요. 이 점은 조금 놀라웠습니다. 덕성이나 신뢰의 문제를 배제한 채 합리성을 논하는 것이 과연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얼마나 잘 설명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더라구요.

님이 설명해주신 데이비드슨의 '구성적 이상으로서의 합리성' 개념은 잘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제 주장이 데이비드슨의 틀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궁금해집니다.

데이비드슨에게 마음은 선험적인 합리적 구조를 가지며, 이에 따라 객관적 해석이 가능하고, 비합리성은 이 구조에 대한 논리적 예외로 간주됩니다. 그렇다면 제 주장은 데이비드슨의 틀 안에서 어디에 위치할까요? 어쩌면 제 주장은 데이비드슨이 말하는 '이유', '정당화', '해석'이라는 합리성의 게임 '바깥'에 있는 이야기 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선험적 심리 모형이 포착하지 못하는, 혹은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영역에 대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뜻이죠.

3
이런 고민 끝에 제가 도달한 결론은 조금 급진적입니다.

저는 논리적 합리성을 근본 토대로 삼는 데이비드슨의 논의 자체가, '열린 마음'에 대한 논의에서 과연 근본 전제로 다뤄질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그의 접근법은 '열린 마음'이라는 현상마저 자신의 '자비의 원리'와 논리적 일관성의 틀 안에 구겨 넣으려는 시도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관계가 전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비의 원리'를 '열린 마음'에 맞춰야 합니다.

데이비드슨의 '자비'는 결국 해석자가 자신의 합리성을 기준으로 타인을 '이해해 주는' 시혜적인 태도입니다. 반면, 진정한 '열린 마음'은 나의 합리성 틀 자체가 완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방의 논리나 입장을 섣불리 '비합리적'이라고 재단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 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해서, 열린마음을 정당화와 논리에 대한 대화와 판단유보의 우선을 말하는 것이죠. (적어도 제게는 이런 의미로 들립니다.)

따라서 '열린 마음'은 데이비드슨의 합리성 게임 안에서 설명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합리성 게임 자체를 가능하게 하거나, 혹은 그 게임의 한계를 드러내는 더 근원적인 배경 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양립 불가능성' 문제에 대한 데이비슨의 해법은, 이처럼 '열린 마음'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모든 것을 논리적 일관성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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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Herb님이 말씀하시는 구획 구분은 '믿음을 담는 인식적 영역을 구분한다'(예를 들어 p는 a에, ~p는 b에)는 의미이지, 정당화와 성찰(아마 self-reflection)이 별개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 듯하네요.

첫 번째 주장과 표현이 옳다고 하더라도, 정당화가 마음을 닫는 실천이라고 여겨질 이유는 없습니다. 정당화 과정에서 '(마음을) 여는 실천'이라고 표현한 성찰 과정을 동반하고, 또 정당화가 그 이후의 열린 마음의 가능성을 없애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본문에서 제가 논한 판사의 예시는 '닫힌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법정 앞에 세워진 두 입장을 고루 듣고 성찰하여 판결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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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이 왜 그렇게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P에 대한 일관되고 강한 믿음을 가지는 합리적 주체는 일반적으로 P를 지지하는 근거/이유와 ~P를 지지하는 근거/이유, 그리고 양자를 비교했을 때 전자가 더 합리적이라는 총체적 판단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당연히 P라는 믿음 뿐만 아니라 ~P라는 믿음 역시 고려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P를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된 사람"은 애초에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P보다 P가 더 낫다"라는 총체적 판단을 내릴 수가 없습니다. 말씀하신 "두 능력 모두 온전히 보존된다"라는 것을 데이빗슨 역시 부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식적 덕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대비되는 개념처럼 이해하고 계신 듯 한데요. 의도하고 있는 대비가 어떤 것인지 일단 잘 이해가 안갑니다만, 데이빗슨의 일관성 개념은 이론적/실천적 맥락을 모두 포괄하는 매우 큰 개념입니다. 즉 믿음, 욕망, 의도, 이유 등등 모든 가능한 명제태도들의 기저에 깔려 있다고 주장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논리적 일관성에 국한된다"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문단 역시 데이빗슨의 입장에 대한 오해에 기초해 있다고 보입니다. 데이빗슨이 "합리성이 사유에 구성적이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비합리성의 경우들을 합리성의 게임 바깥으로 축출하고 배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비합리성의 경우들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합리성을 전제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합리성의 이념이 없다면 "비합리성"이라는 개념과 분류조차 성립할 수 없습니다. (후술하겠지만 이것을 확장하여, 합리성에 기초한 "자비의 원리"가 없다면 비합리성에 대한 "열린 마음"도 없다고 데이빗슨은 아마 말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Ian Hacking이 "자비의 원리"의 기저에 깔려 있는 제국주의적인 태도를 비판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여기서 비슷한 지적을 마주하니 흥미롭네요. 그러나 저는 이것이 데이빗슨의 "자비의 원리"를 그저 해석자의 "심리적" 태도 같은 것으로 오해한 결과라고 봅니다. 자비의 원리는 합리성의 이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로 소통할 때 그 안에 이미 구성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의식적으로 따르고 말고 하는 그러한 원리가 아닙니다. 피해석자가 해석자(=나)와 대다수의 참인 믿음을 공유하고 있다는 자비의 원리에 입각하지 않는다면, 피해석자의 믿음을 참인지 거짓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애초에 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조차 불가능하겠죠. 판단할 내용자체가 주어지지 못했으니깐요.

이에 따라, 데이빗슨은 @holahola2 님의 결론과 정반대의 입장 ("합리성"이 "열린 마음"에 선행한다)을 취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열린 마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참/거짓의 개념(objectivity)이 선제되어야 하고, 이러한 참/거짓의 개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일관성과 합리성의 이념이 선제되어야 합니다. 반대로 말한다면, 일관성과 합리성의 이념을 포기하는 순간 열린 마음에 대해 염려할 이유 역시 사라진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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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 @sophisten 님, 두 분의 답변 감사합니다. 덕분에 제가 데이비드슨의 입장을 일부 오해했던 지점들을 명확히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일관성'이나 '자비의 원리'가 단순한 심리적 태도가 아닌, 소통과 사고의 '구성적 원리'로 제시된다는 점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성적 원리가 심리적 태도에도 반영되어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겠죠.

가령 @sophisten 님께서 제시해주신 것처럼, 데이비드슨 모형 아래에서의 담화는 p와 ~p에 대한 전환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하지만 바로 그 '구성적 원리'라는 개념의 지위와 그 함의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합리성이라는 강한 믿음에 대해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물음이 원리적으로 사고에서 불가능하다면 저는 질문조차 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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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님은 데이비드슨의 원리가 의식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닌, 선험적이고 구성적인 것이라고 말씀하셨어요. 만약 그 논리가 정말 선험적이고 자명하다면, 우리가 지금 이렇게 그 원리의 지위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가능한가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원리를 자명한 전제로 받아들인 후 그 안에서 세부적인 해석을 다듬는 '주석' 작업뿐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지금 명백히 그 원리의 지위 자체 를 논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사실 자체가, 데이비드슨의 주장이 '선험적 진리'라기보다는, 우리에게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는 하나의 **'규칙에 대한 발화'**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그리고 어떤 규칙이든,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한 토론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데이비드슨의 논의는 이미 규칙에 대한 발화상황으로 전환된게 아닐까 싶네요.

따라서 만약 구성적 원리는 의식적으로 따르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데이비드슨의 구성적 원리들을 모두 따르고 믿는다'라는 표현은 '물은 h2o이다'라는 말처럼 자명한 것을 발화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요?

  1. 만약 데이비드슨의 이론이 객관적인 사실의 기술이라면, 이 논쟁은 무의미합니다. 저희는 이 이론의 지위에 대해 참 거짓을 판정할 수 없을 테니까요. 여기서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합니다. 어떻게만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데이비슨의 이론들이 생각과 언어의 가능 조건 자체를 규정함으로써 반대 의견이 애초에 '성립' 혹은 발화조차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다는 말도 이상하거나 부수적입니다)

  2. 만약 이 논의가 의미 있다면, 데이비드슨의 이론은 자명한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 논쟁 가능한 하나의 '주장'일 뿐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저희는 어느정도 논의를 하고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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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제가 "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P를 생각할 능력이 결여된다"는 표현을 쓴 것은, 데이비드슨의 모델이 낳는 기이한 귀결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Herb님의 설명대로, 그의 합리적 주체가 P와 ~P를 모두 고려한 후 결론에 도달한다는 점은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문제입니다. 그 과정은 강한 믿음이 형성된 '이후'에 그것이 어떻게 다시 변화하거나 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끝난 과정의 '결과'일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 데이비드슨이 묘사하는 합리성이란, 창조적인 '사고 과정'이라기보다는 규칙이 정해진 '게임'에 가깝습니다.

이 게임 안에서 대화는 결국 서로의 논증표를 확인하는 '코드 교환'으로 전락하며, 진정한 의미의 '열린 마음'이 들어설 자리는 없어 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데이비드슨이 대화불가능을 우려한 것인지, 아니면 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들고싶은건지 잘 모르겠네요. 적어도 지금 저희의 대화? 혹은 토론은 데이비슨의 맥락에서 제가 말한 '능력이 결여된' 상황에 가깝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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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지만, 데이비드슨의 이론은 '덕성'이나 '신뢰'와 같은 문제를 거의 전적으로 논리적 일관성의 문제로 환원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그의 '합리성' 모델이 현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설명하기에는 너무 얇고 제한적이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포커 플레이어의 '긴장'이나 '속임수'를 간파할 때, 우리의 판단은 종종 해석에 선행합니다. 우리는 그의 미세한 표정이나 행동 같은 명제 이전의 직관적 판단 를 통해 그의 말이 거짓이라고 직감합니다.

궁극적으로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데이비드슨과 같은 합리성 이론가들은 '사람은 비논리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저는 진짜 난점이 다른 곳에 있다고 봅니다. 바로 그 합리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비명제적으로 사고할 수 없다'고 믿게 만든다는 점 입니다. 신뢰, 분위기, 직관, 윤리적 태도와 같은, 명제로 환원될 수 없는 수많은 중요한 차원들을 데이비드슨의 '합리성' 모델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미 이 문제가 모델에 대한 메타-채택 문제에서의 사고 제약에서 근본적인 난점에 처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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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언 해킹이 왜 데이비드슨의 논의를 제국주의적이라고 평가했을까, 저는 그 이유가 데이비드슨의 이론이 복잡한 현실에 대한 설명력과는 별개로 너무나 일반적이고 포괄적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가령 중력은 우리가 그것을 부정하는 '말'을 하는 것을 막지 않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슨의 합리성 원리는 우리의 사고와 발화 자체에 직접 개입하여 , 그 틀을 벗어나는 생각을 '의미 없음' 혹은 비합리적이라고 판단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선험적으로 비합리적이게 되는 것이죠)

가령 저희가 중력 부정론자와 토론할 때, 그 논쟁을 '이 방 안에서의 언어적 토론'으로 국소화 할 수 있습니다. "좋아, 일단 네가 말로는 그렇게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할게. 하지만 실제로는..."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슨의 법칙에 대해서는 이러한 국소화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데이비드슨의 주장은 바로 '이 방 안에서의 언어적 토론' 그 자체를 지배하는 규칙 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법칙을 부정하는 순간, 토론의 장 자체가 무너진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일단 네 주장을 인정하고 토론을 계속하자"는 식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봉쇄됩니다.

물리 법칙은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내면의 성소'까지는 침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상상 속에서 날아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슨의 합리성 법칙은 우리의 생각과 말, 즉 내면의 성소 자체를 점령하고 식민화 합니다. 그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벗어나는 순간 '의미 없음'으로 규정되어 존재 자체가 부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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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열린 마음'은 데이비드슨의 합리성 게임 안에서 설명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합리성 게임 자체의 한계를 폭로하고, 진정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더 근원적인 배경 이라고 생각합니다. '양립 불가능성' 문제는, 이처럼 '열린 마음'을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하고 모든 것을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좁은 틀로만 설명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데카르트의 주체가 그 내용은 정정되었지만, 여전히 데이비슨의 모형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니까 고립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합리적인, 원리의존적으로 하나의 유일한 선택지를 선택하는 주체인 것이죠. 하지만 저는 '밥을 먹는다'라는 표현이 단 하나의 레스토랑 방문 후 식사를 의미한다면, 이미 선택지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의 의견으로 생각을 정리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하네요. (답장을 두분께 동시에 할 수는 없는지라, @sophisten 님이 아닌 @Herb 님에게 답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점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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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댓글 님 말마따나 마음이라는 것은 주관적이며 때때로 급변하기도 하고 본인 스스로 알아채지 못 하게 서서히 미약하게 변해갈 수도 있으며 종 잡을 수 없는 것이기에 무엇으로 정의하기 힘든 것 같습니다.

해당 본문에서도 제시되었던 P가 물리적 이론 (예로 들었던 아이슈타인 이론) 과 같은 것을 참으로 확고한 믿음을 가졌을 때와, 단순히 1+1=2가 참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졌을 때 ~P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질 필요성 또한 명백한 차이가 있죠.

1+1=2는 이미 완벽히 정립된 수식입니다. 해당 사실에 대해서 더 이상의 부정 의견에 대한 수용이 필요없습니다. 그런 경우 수용하지 않는다해서 열린 마음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리학 이론은 완벽히 정립된 것이 아닌 현재 기술로 추론 및 확인 가능한 가장 유력한 정설에 해당합니다. 과학의 기술에 따라 정답이라 여겼던 것이 바뀌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식의 개선, 교육의 수준에 따라 여러 도덕적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마저 바뀌죠. 1+1=2와 같은 열린 마음이 더 이상 필요없는 정립된 공식을 참으로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 ~p를 참고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거죠.

양립불가능에 대한 부분은 '열린 마음의 필요성'에서 찾을 부분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생물학적으로 이성을 사랑해야함이 종의 유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건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참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실제로 참에 해당합니다. 그러나 동성애, 양성애, 범성애 등 우리는 다양한 성소주자들을 수용하고 사회구성원으로서 받아들입니다. 내가 참이라 믿는 '생물로서 이성애를 추구하는 것이 참'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말이죠.

제 견해에선 '열린 마음'이란 것이 꼭 ~p를 이해하고 수용해야만 열린 마음이 아닙니다. 내가 p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다고 한들 p에 대한 반대 의견이든 수정 의견이든 해당 사실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닫힌 마음'이라고 규명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각자 자기 주관대로 존중하는 것 또한 '열린 마음'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말마따나 확률적으로 p의 참을 찾을 때 ~p의 의견을 수용하는 것이 더욱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마음이란 건 수학이 아닙니다. 주관적이고 급진적이며 고정적인 진리가 없죠. ~p의 의견 수용이 p의 참에 다가가는 것에 도움을 준다한들 단순 본인 자아가 '혼자서 탐구하는 것'을 즐기는 성격에 ~p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결국 마음이라는 것을 다루는 데에 있어 이성적임을 따지고 들면 안 된다는 것이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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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은 '필요성'에 의해서 기인하는 것이 아닌 '현상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a) 사유의 구성적 원리로서의 합리성 "내부"에서의 "열린 마음"과 (b) 사유의 구성적 원리로서의 합리성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즉 합리성의 "외부"에 대한 열린 마음을 구분해야겠습니다. 제가 지적했던 것은 (a)에 대한 데이빗슨의 입장을 볼 때, 합리성이 열린 마음에 선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b)의 문제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문제이지만 본문에서의 열린 마음과는 독립적인 문제인 것처럼 보입니다.

(b)에 대한 데이빗슨의 입장은 물론 사실적/경험적 진술이 아니고 선험적인 접근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데이빗슨의 입장이 잘 드러나는 한 문단을 소개하겠습니다 (Incoherence and Irrationality, 1985).

If this is so, then it does not make sense to ask, concerning a creature with propositional attitudes, whether that creature is in general rational, whether its attitudes and intentional actions are in accord with the basic standards of rationality. Rationality, in this primitive sense, is a condition of having thoughts at all. The question whether a creature “subscribes” to the principle of continence, or to the logic of the sentential calculus, or to the principle of total evidence for inductive reasoning, is not an empirical question. For it is only by interpreting a creature as largely in accord with these principles that we can intelligibly attribute propositional attitudes to it, or that we can raise the question whether it is in some respect irrational. We see then that my word “subscribe” is misleading. Agents can’t decide whether or not to accept the fundamental attributes of rationality: if they are in a position to decide anything, they have those attributes.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최근에 쓴 포스트가 있고, 여기에 소개된 논문을 읽어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데이빗슨 역시 거의 동일한 입장을 지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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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데이빗슨을 모르기에 제기한 모든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을 내기 힘들고 또 정확히 어떤 점을 문제 삼으시는지 잘 파악하기 힘든데요, 다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입장을 내놓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어떤 이가 내세우는 어떤 이론이 선험적이고 구성적인 원리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이 그 이론에 대한 비판 가능성을 제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데이빗슨이 선험적이고 구성적인 원리에 관한 어떤 이론을 내세운다면, 데이빗슨의 이론에 대한 비판은 여전히 가능합니다. 마치 칸트가 우리 시공간 형식과 범주에 대한 선험 철학 이론을 내세웠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독일 관념론이 칸트의 선험 철학을 비판한 것처럼요.

당연히 데이빗슨은 논쟁의 영역에 있는 하나의 주장을 내세운 것이고, 데이빗슨도 이 사실을 인정할 겁니다. 그리고 단지 Herb님은 '(데이빗슨의 주장은 논쟁에 영역에 있지만) 내가 보기엔 그럴듯한 이론이다'로 보이고요. (그리고 논쟁 가능성이 주장의 지위를 "뿐"으로 격하시킨다면, 이 세상에 존재했고 존재하는 거의 모든 철학 이론은 고작 주장일 "뿐"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데이빗슨이 선험적이고 구성적인 원리에 관한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나 누군가 '내가 보기엔 그럴듯한 이론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자명한 것을 발화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기에' 참인 이론을 주장하는 (그리고 반론에 열려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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