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소프트 파시즘, 인공지능, 그리고 수치심의 몰락」

인상깊게 본 지젝의 강연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원 강연은 2024년 11월 26일에 이루어진 슬라보예 지젝의 옥스포드 강연입니다. 주석은 역자 주입니다. 섹션의 구분도 제가 편의를 위해 넣은 것입니다. 매끄러운 흐름을 위해 내용을 덧대거나 빼는 수준의 의역과 문장 재배치를 한 부분이 있습니다.

1. 운명론적 역사관 비판

저는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몇 가지 개괄적인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양자역학의 개념을 빌려와서 이 사회적 · 역사적 질문에 접근하고 싶습니다. 우선 저의 기본적인 생각은, 자유주의나 마르크스주의에서 피력하는 낙관적인 역사관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관들은 운명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례로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의 종말[1]”을 주장했습니다. 한편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러 굴곡이 있더라도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미래는 사회주의거나 야만주의다”라고 말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처럼 운명론에서 아주 살짝 비껴난 입장도 있기는 했지요. 여담이지만, 안타깝게도 룩셈부르크는 이 점에 있어 틀렸습니다. 스탈린주의에는 둘 다 있었으니까요.

이런 운명론에 매달리기보다,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점 A에서 점 B로 이동하는 입자는 A와 B를 잇는 모든 경로를 양자 중첩 상태로 거칩니다. 우리가 관측하는 것은 그러한 중첩 상태에서 붕괴된 하나의 경로이지요. 저는 우리의 현 사회가 붕괴 전의 중첩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누가 앞으로의 인류가 어디로 향할지 알겠습니까?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의 미래에 치명적인 위협들이 있다는 것뿐입니다. 환경, 전쟁, 인구 문제 등이 떠오르네요. 우리는 이러한 위협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할지도 오리무중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환경 위기가 심각해지면 전쟁은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점에 관해 회의적입니다.

2. 소프트 파시즘과 불량 국가

이러한 위협들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미래에는 새로운 사회주의가 도래할지도 모릅니다. 일부 문명만이 섬처럼 고립된 형태의 세계적인 야만주의가 도래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제가 예상하건대 — 그리고 이 예상은 저를 정말 슬프게 만듭니다 — 가장 도래할 가능성이 높은 미래는 제가 소프트 파시즘Soft Fascism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소프트”라는 표현은 이것이 나치주의와 같은 노골적인 파시즘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파시즘의 가장 괜찮은 정의는 “보수적인 혁명”입니다. 영리한 파시스트들은 자본주의의 활력과 빠른 발전력을 탐내면서도, 방임된 자본주의는 사회 분열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파시즘의 발상은, 강력한 국가 권력이 전통 · 종교 · 민족 등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자본주의적 경제 구조를 억지로 유지해 내는 사회입니다.

제가 소프트 파시즘의 교과서적인 사례로 생각하는 국가가 있습니다. 바로 중국입니다. 두 달 전, 중국 지도자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세대의 젊은이들이 충분히 교육되지 않았으며 그들을 사상적으로 훈련시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그가 늘 하던 말 — 마르크스를 읽으라는 둥, 마오를 읽으라는 둥 — 을 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가 언급한 것은 유교 전통이었습니다. 통합을 위해서는 유교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일이 인도에서는 모디Narendra Modi에 의해 행해지고 있습니다.[2] 극도로 야만적인 자본주의 체제가 비자본주의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 유지됩니다. 저에게 물어본다면, 이것이 대다수의 국가가 봉착하게 될 미래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편에 서 있지 않습니다.

저를 염려시키는 또다른 사실은, 소위 불량 국가rogue state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황하지 마세요. 제가 말하는 “불량 국가”는 서구의 제국주의적 언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3] 제가 정의하는 “불량 국가”란, 현존하는 질서가 자기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조건 속에서 스스로를 법적으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야만적이고 불법적인 폭력에 의존해야 하는 국가입니다.

아무래도 아이티가 가장 먼저 따오르는 사례군요. 그곳은 국가가 붕괴하여 국토의 80% 이상이 갱단에 의해 경영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아이티 같은 이례적인 사례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러시아는 어떻습니까? 바그너 그룹은 전형적인 반법半法, 불법 군사 조직으로서, 이제는 러시아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왔음이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 그룹은 중앙 정부와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었죠.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은요? 솔직해집시다. 서안 지구[4]에 정착한 이스라엘인들은 다름아닌 이스라엘의 법에 따라 범법자들입니다. 이스라엘의 비극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타마르 벤그리브는 20여년 전에 인종 범죄로 이스라엘 법정에 기소된 바 있습니다. 지금 그는 이스라엘 안보부 장관입니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현재 미국에는 반이슬람주의자, 반유대주의자, 프라우드 보이즈[5]와 같은 단체들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트럼프는 그들과 거리를 두면서도 그들을 통해 사회를 조종합니다. 이들이야말로 실패한 국가들입니다. 이들은 그 자신의 이데올리기와 법적 근거만을 통해서는 질서를 지탱할 수 없는 국가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극단적인 혼돈과 비결정성을 인지해야만 합니다. 현재의 상황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그러나 그 종착지가 어디일지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다시 양자역학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의 중첩 상태가 어떠한 하나의 상태로 붕괴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미래가 가장 바람직한 특정 정치 형태로 나아가리라는 생각은 일종의 착시입니다.

3. 사후성

자세히 말할 시간은 없지만 저는 헤겔이 이것을 내다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사후성retroactivity에 관한 헤겔의 논의를 봅시다. 특정한 현실이 자리를 잡으면, 그 현실이 과거를 실질적으로 변화시키지는 않지만 사후적으로는 변화시킵니다. 다시 말해, 현재는 우리가 과거를 인지하는 방식과 과거에 부여하는 서사를 변화시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늘 과거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같은 주장을 마르크스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순진한 진보주의자로 폄하되곤 하지만 — 물론 그에게 이러한 면모가 실제로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 그에게는 다른 면모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인간의 해부학이 유인원의 해부학을 이해하는 열쇠인 것처럼 자본주의는 역사의 모든 단계를 해석하는 능력을 제공한다.” 마르크스의 이 대목은 놀랍도록 반-운명론적인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말하려는 것은 “자본주의의 도래는 예정된 것이었다”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의 요점은 훨씬 더 정교합니다. 자본주의가 승리하고 나면, 우리는 사후적으로 역사를 해석하여 과거의 모든 사건들이 마치 자본주의를 향해 왔던 것처럼 재서술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저는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와 윈그로David Wengrow의 연구를 — 비록 그들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 아주 높이 평가합니다. 그들은 고대 잉카 문명에서, 현대의 우리가 처한 것과 같은 중첩 상태를 포착하고자 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잉카 문명이 언제나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식의 공포로 점철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잉카에서는 놀라운 수준의 지역 민주주의 체계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 붕괴했을 뿐이었지요. 이로부터 제가 내리는 교훈은 이것입니다.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어날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은 그저 소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반동적인, 어쩌면 진보적인, 일종의 염원으로서 사회에 잔존합니다.

4. 인공지능과 인간다움

이러한 이유로 저는 우리가 “진보”를 정의하는 데 있어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중요한 주제인 인공지능의 사례를 봅시다. 저는 우리가 “인공지능도 사고할 수 있게 될까?”와 같은 질문만 던져서는 인공지능의 문제에 올바르게 접근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고”란 우리 인간과 같은 방식의 사고를 말합니다. 우선 이것은 우리가 답을 알지 못하는 추상적인 질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방식의 사고 가능성에 집착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정신이라든가 영혼이 생길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신 제가 여러분을 자극할 만한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인공지능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흔히 있는 멍청한 토론 주제죠 — 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면, 당연히 인공지능은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계산할 수 있고, 스스로 학습할 수 있고, 자기 복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인간에게 고유한, 그리고 인간다움의 핵심을 이루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일상에서의 의식, 달리 말하자면 미신적 습관입니다. 개인적인 사례를 들자면 저는 손을 씻고 수도꼭지를 잠굴 때 꼭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보고서도 꼭지에 손을 대서 확인하곤 합니다. 정신분석학자라면 이것을 피임에 대한 무의식적 강박으로 해석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사양하겠습니다. 이것은 단적인 습관일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이같은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아가타 크리스티의 전기에서 읽은 사실인데요, 그는 목욕을 하고 나올 때마다 사과 한 알을 먹었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런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행동들이 가지는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외양에 불과합니다.[6] 혹은 의미를 가지지 않는 의미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행동의 이면에는 이러한 트라우마가 있다”라든가 “이 행동의 이면에는 이러한 무의식적 동기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아가타 크리스티나가 무의식적으로 본인이 에덴 동산의 이브라고 생각했다는 말입니까? 아니죠. 이러한 텅빈 의미의 외양은 우리 인간이 노골적일 정도로 혼란스러운 삶의 무의미에 대응하는 한 가지 방식에 다름 아닙니다.

둘째로, 저는 인공지능이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욕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있어 욕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입니다. 욕은 단순히 저급한 언어가 아닙니다. 욕은 인간이 언어 안에 존재하기를 원한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사고는 언어의 형태로 이루어지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에 거주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욕을 할 때는 단순히 객관적 사건에 대한 불만족을 표출하는 것이 아닙니다. 욕은 그것을 언어로 형성할 수 없는 데에서 오는 분노의 표출입니다. 일례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떠올려 보세요. 저는 아무리 예수라고 해도 죽어가면서 욕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소 어이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와 시발…”이라고 중얼거렸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제 요점은, 언어 안에 완전히 존재할 수 없을 때 느끼는 수치심이야말로 인간다움을 구성하는 본질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5. 수치심의 몰락

이제 또다른, 어쩌면 놀랍게 들릴 수도 있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오늘날 저를 정말로 슬프게 만드는 것은 뻔뻔함shamelessness의 폭증입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공적인 장소에서 말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말들이 이제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도널드 트럼프나 보리스 존슨과 같은 뻔한 사례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연코 반유대주의자가 아니지만 — 저는 이스라엘의 입장도 고려하려 합니다 — 최근에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두 가지 일은 저를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8월에 이스라엘 의회 케네셋에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먼저 배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루살렘의 남쪽에 있는 하마스 수용소에서는 간수들이 수감자들을 매우 잔혹하게 다루고 있었습니다. 영상 자료도 유출되었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요. 바늘로 뒤덮인 커다란 철제 막대기를 항문에 쑤셔 넣는 등의 고문으로 인해 많은 수감자가 과다출혈로 사망했습니다. 물론 저는 중립을 지키고 싶기 때문에 하마스 측에서는 무슨 고문을 하고 있을지 누가 아냐는 단서를 남겨두겠습니다. 하지만 저를 정말 슬프게 만드는 것은, 케네셋의 논쟁에서 지배적이었던 의견이 간수들의 잘못을 따지는 것이 아닌, 가혹행위를 한 간수들이 기소되었다는 사실을 치욕으로 여기는 의견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마스는 인간도 아니기에 그들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것이었죠. 저는 이런 솔직함보다는 위선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두 번째 사건을 말해 보겠습니다. 엘리란 미즈라히라는 한 정직하고 올바른 이스라엘 병사가 있었습니다. 가자에서 복무할 당시 그는 끔찍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생사 여부를 따지지 말고 수백 명의 팔레스타인을 트랙터로 깔아뭉개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는 명령을 이행했지만 이후 극심한 혼란에 살다가 이내 자살했습니다. 미즈라히는 윤리적 고결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를 본 이스라엘 방위군의 심리전문가들은 어떻게 병사들을 훈련시켜야 그들이 윤리적 딜레마를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말하는 “뻔뻔함”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저에게 무척이나 흥미로운 것은, 저의 스승이라고 부를 수 있을 자크 라캉의 견해입니다. 그는 69-70년에 정신분석학의 다른 측면에 대한 세미나를 진행했었는데요, 그 세미나는 68혁명에 대한 그의 반응이기도 했습니다. 세미나에서 라캉은 학생 저항을 지지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에게 결여되어 있는 것은 수치심이다.” 라캉에 따르면, 자유방임적인 오늘날의 사회에서 정신분석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아버지의 억압을 몰아내거나 성적 환상을 실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치의 결여,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보편적인 도착증perversion이 주제입니다.

도착증은 히스테리아에 비해 훨씬 덜 전복적입니다. 정신분석학에 대해 조금 들은 바가 있다면 아시겠지만, 이 두 증세는 성별과 결부되곤 합니다. 남성 쇼비니즘의 일환입니다만, 요지는 여성은 히스테리적이라 불평을 하면서도 은밀하게 새로운 주인에게 지배받기를 원하고, 남성은 도착적이라서 자신의 꿈을 시행에 옮기기에 급급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찍이 프로이트는 알고 있었습니다. 도착증보다 무의식이 더 억압받는 곳은 없으며, 모든 위대한 일은 히스테리아를 통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를 위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7]

제가 젊었을 때 저와 친구들은 촌스러운 좌파였습니다. 우리는 권력자들이 위엄을 지니고 생각했고, 우리 자신은 온갖 상스러운 손짓과 더러운 말을 주고받았지요.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권력을 가진 저들이야말로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상스러운 자들입니다. 지난 선거 때 우리는 완전히 틀렸었습니다. 민주당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것이죠. 트럼프가 거짓말을 했음이 밝혀졌을 때 민주당은 그의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니었지요! 오히려 그에게 도움이 됐습니다. 트럼프의 천박함과 거짓말은 그의 정체성을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바로 그 이유에서 그를 사랑했던 것이지요. 따라서 자유방임적인 오늘날의 시대에서 우리가 물어야 하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가장 기본적인 수치심의 감각을 되살릴 것인가?

감사합니다.


  1. 동명의 저술에서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자본주의의 혼합 체계가 사회문화적 진화의 궁극적 단계라는 이론을 주장했다. 이후 후쿠야마는 트럼프를 비롯한 미국 내 극단주의 세력의 부흥을 목격하고 자신의 이론을 폐기했다. ↩︎

  2. 모디 정권은 힌두교의 극단주의화를 촉진시키고 인도의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

  3. 2002년에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 이란, 북한을 “악의 축”으로 부른 것과, 최근에 미국 상원 원내대표가 중국, 러시아, 이란을 “새로운 악의 축”으로 부른 것을 비꼰 것이다. ↩︎

  4. 팔레스타인 지역의 일부. 팔레스타인 지역은 크게 이스라엘, 가자 지구, 그리고 서안 지구로 구성되어 있다. ↩︎

  5. 미국의 대안우파 단체. 좌익 단체에 대한 폭력적인 반대 활동으로 알려져 있으며, 2021년에 해당 단체의 회원들이 미국 국회의사당 습격 혐의로 기소되었다. ↩︎

  6. 더미 텍스트와 같이 통상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나 — 텍스트, 신호, 행동 등 — 실제로는 의미를 완전히 결여하고 있음을 뜻한다. ↩︎

  7. 도착증은 무의식적 긍정성의 발현으로서 자유, 방임, 행동, 능동성 등을 아우르는 개념인 한편, 히스테리아는 무의식적 부정성의 발현으로서 억압, 제약, 금지, 수동성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지젝은 본 강연에서 이데올리기와 자본주의가 기형적으로 융합된 "소프트 파시즘", 인공지능, 그리고 "뻔뻔함의 폭증"을 긍정성의 맹목적인 발현, 즉 도착증이라는 범주 아래에 포섭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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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이런 솔직함보다는 위선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하는 대목이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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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 부분이나 현대 국제 정치에 관해서 다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지젝의 통찰이 돋보이네요. 갑자기 지젝의 글을 찾아 읽어보고 싶은 글이었습니다. 번역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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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의 눈이 예리하군요. 각각의 사회비판을 흥미로운데 합리적 사회, 인공지능, 수치심 회복을 동시에 추구할 방법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중국 공산당이 자본주의를 도입하면서도 유고사상을 통해 교육한다. 3개 사상의 장점을 취하는 방법이고 사회불만족 계급의 출현을 막는 방법이지요. 지젝의 표현에 따르면 잠재된 중첩상태를 막는 방법이지요. 다양성을 막으니 저도 선호하지는 않지만 이런 정책을 자본주의 이데올로지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진단은 수용하기 어렵지요. 공산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진단해도 틀린 말은 아닐텐데.

트럼프가 수치심이 없지요. 너무 노골적이라고 저도 보고 있지만 수줍은 보수의 자기 표현이라고도 볼 수가 있습니다. 힘들게 개척했더니 이익은 타인이 취하는 현실에 대한 반동적 행동일 수도 있지요. 중첩되었지만 권력을 얻지 못한 숨은 보수가 나타난 것이지요. 수취심 상실 자체로만 보면 한숨짓지만 책임과 보상측면에서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다양성을 억압하는 중국에 대비하면 다양성 표출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가치를 보여 주지요.

소프트 파시스트적인 중국, 이익에 몰두하는 미국을 각각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그 중간의 균형을 제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불균형은 새로운 권력을 부르는 인간 본성에 맡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욕을 내뱉는 인공지능도 나와야 되는 것이 아닌가?

저는 지젝을 아주 좋아하지만 중국에 대한 지젝의 이해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의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가장 잘 아는 이들인데 -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주류 사회과학에서 '자본주의'는 이론적 용어로 사용되지 않습니다 - 그래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정치경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해 더 엄밀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들은 따로 있죠. 경제학자이기도 한 마르크스주의자들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중국의 정치경제 체제는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두 권의 저서가 국역되어 있고 블로그를 통해 활발한 현실 정치경제 논평들을 쏟아내고 있는 영국의 마르크스 경제학자인 Michael Roberts 죠. 그는, 특이하게도, 중국의 정치경제 체제는 사회주의도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자본주의이고 더 나아가 제국주의적이기까지 하다고 생각하는 마르크스 경제학자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확실히 있구요. 이곳은 철학을 주제로 하는 곳이고 사회철학조차도 정치경제학과 일정하게 구별되는 것이니 Michael Roberts가 그 주장을 개진한 책 한권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겠습니다. 다음 책의 6장입니다:

Capitalism in the 21st Century: Through the Prism of Value (IIPPE) Paperback – December 20, 2022
by Guglielmo Carchedi (Author), Michael Roberts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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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요, 전 이 글을 높게 평가하기가 힘드네요.

여러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을 하나로 꿰는 (어떤 의미에서) 시적인 에세이라는 점에서는 높게 평가하겠지만, 결국 이 글은 한 두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고 ([1] 이데올로기 교육와 외주화된 폭력이 일상화된 현실, [2] 인공지능과 대비되는 인간다움 [3] 수치심의 회복), 이 세 가지 주제가 어떻게 연관성이 있는지는 굉장히 모호합니다.

사실 지젝이 가진 이런 문학성이야 말로 그의 능력이라 생각하지만....이 문제에서 헤겔이니 라캉이니 심지어 그레이버에 대한 논의조차 전 유럽 지식인 특유의 현학적 젠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게다가 현재 사회 체제의 위기와 AI에 대해서 훨씬 솔리드하고 디테일한 논의가 가능할텐데, 결국 하나마나한 이야기를 한다는게, 시의가 맞을 뿐 - 무언가 그 너머를 바라보는 의의가 있다 생각하기 어렵네요.

뭐....제가 삐딱한 걸 수도 있지만요 :rof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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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뜻인가요? 2020년 이후로도 '중국'과 '자본주의'를 연결하는 학술적 논의는 많은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들이 잘못된 관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만이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쓰는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좀 이상합니다. 그들만이 자본주의를 잘 이해한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그게 '정의상'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https://scholar.google.com/scholar?start=0&q=China+Capitalism&hl=en&as_sdt=0,5&as_ylo=2020

주류 사회과학에서 이론적 용어로는 쓰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대신 '시장경제'를 주로 쓰죠. '자본'도 마찬가지죠. 토마 피케티가 '21세기 자본'이라고 할 때의 그 '자본'은 상당히 이론적으로 구성된 마르크스적 의미의 '자본'이 아니죠. 심지어는 거의 이론적 용어도 아니죠.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보자면, 본질적 연관이 아니라 현상적 사실을 경험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죠. 그리고 중국과 자본주의를 연결하는 학술적 논의가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중국 경제는 현상적으로는 마르크스적 의미의 '자본주의'든 주류 사회과학에서 '시장경제'와 동의어로 쓰는 '자본주의'든 그 자본주의처럼 보이니까요. 그러나 상당수의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은 지젝 같은 이들과는 달리 중국 경제를 마르크스적 의미의 자본주의가 아니라고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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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말은 많지만 몇가지만 추리면

지젝은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목적론적 역사관을 비판하며, 헤겔의 후행적 시간성 개념(사건 발생 이후 의미가 구성되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현대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비결정성과 구조적 복합성을 중시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이러한 단순한 목적론적 접근을 상당 부분 넘어서고 있습니다.

후행적 의미 구성은 필연적 낙관주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현대 마르크스주의는 위기 가능성과 보수적 회귀 가능성 또한 충분히 고려합니다.
지젝의 이러한 연결은 흥미롭지만, 다소 단순화의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젝은 자본주의의 지속을 위해 비노골적이고 문화적 억압 장치로서 소프트 파시즘이 등장한다고 봅니다.
이는 전통적 파시즘과 달리 정서적 감정 동원, 타자 배제, 규범적 통제 등을 통해 사회를 관리합니다.
그러나 지젝이 언급하는 중국. 이스라엘,미국등은 정치 사회 종교 구조가 매우 이질적이기 때문에 이를 하나의 모델로 단순화하는 데는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또한 각국 내부와 국제사회에서도 이를 파시즘으로 규정할지 여부나 민주주의 후퇴 여부를 두고 논쟁과 비판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젝의 논의는 충분히 생산적이지만, 동시에 전략적 단순화의 흔적도 엿보이며, 이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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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간 변호해보자면—'맑스주의자'보다는 '비판이론가'가 정의상 자본주의에 대해 무엇인지 잘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만—그들들이 자본과 자본주의의 개념에 대한 분석을 끊임없이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자본주의는 어떤 형태를 갖고 어느 방면에 대한 착취를 진행했으며 그에 대항하는 사회주의 프로젝트는 무엇이었는지 분석하고, 또 현시대의 자본주의의 형태 및 착취 대상을 분석하고 신시대 사회주의 프로젝트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제안합니다. 특히,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현상에 대한 기술뿐만 아니라 그것이 암묵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철학적 입장을 파악하기도 하고 규범적 비판 또한 진행한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좀 더 깊은 이해를 추구하고, 실제로 어느 정도 더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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