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Conant의 논문 "The Search for Logically Alien Thought: Descartes, Kant, Frege, and the Tractatus" 읽기를 계속 미루다가 드디어 읽어보았는데요. 기대 이상으로 내용이 재미있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이 논문에 나타난 코넌트의 초기 비트겐슈타인 해석 자체는 "새로운 비트겐슈타인" 진영을 통해 그 얼개를 직간접적으로 접했었기에 별로 새롭진 않았습니다만, 그러한 해석에 이르는 내러티브를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프레게, 퍼트남을 통해 재구성한 부분이 매우 흥미진진 했습니다. 여기서 그 핵심적인 파트를 간략히 소개해볼까 합니다. 초기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코넌트의 입장은 다른 훌륭한 비트겐슈타인 전공자 분들의 서강올빼미 글들을 참조하실 수 있습니다.
논리적 법칙들이 사유 자체의 법칙으로 이해되는 한에서, 논리적 법칙들은 일종의 사유의 한계를 나타낸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유를 지배하는 논리적 법칙들이 아닌, 다른 논리적 법칙들을 따르는 외계인들과 조우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할까? 예컨대 우리는 a=a 라는 동일률을 받아들이는 반면, 그들의 논리학에서는 동일률의 부정이 참이 되는 그러한 외계인들 말이다. 이들을 "논리적 외계인" (logical alien)이라고 부르자.
이러한 질문은 퍽 자연스러워 보이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러나 프레게는 사고실험을 통해서 이러한 질문의 배후에 있는 비정합성을 꼬집는다. 프레게의 비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레게가 가지고 있는 언어철학적 이해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프레게에 따르면, 진정한 사상 혹은 명제 (eigentlicher Gedanke)는 참/거짓 둘 중 하나이다. 따라서 명제적 형태의 질문은 언제나 그러한 명제의 참/거짓 둘 중 하나를 승인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진리값을 결여하는 명제 혹은 사상은, 엄밀히 말하면, 명제/사상이 아니다. 그것은 가짜 명제 혹은 가짜 사상 (Scheingedanke)일 뿐이다. 그 명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를 화자 및 청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가짜 명제는 진짜 명제인 척 위장하지만 사실은 진짜 명제를 흉내내는 모조품일 뿐이다. 가짜 명제의 발화자는 (만약 그가 이 명제의 참을 진정 주장하고 있다면) 자신이 무엇을 발화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는 상태이다.
다시 논리적 외계인의 사고실험으로 돌아가자. 심리학주의(psychologism)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러한 논리적 외계인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심리학주의에 따르면 논리적 법칙은 우리의 정신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 인류의 정신은 (지금 우리가 따르고 있는) 이 논리적 법칙들을 믿고 그것들에 의해 지배되도록 그렇게 구성되어 있지만, 외계인은 다르게 구성된 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따라서 외계인의 사유를 지배하는 논리적 법칙들은 우리 인간을 지배하는 논리적 법칙들과 충돌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논리적 외계인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심리학주의자들의 논변이다.
그러나 프레게는 이러한 논변이 intelligible하지 않다고 반박한다. 이 논변을 파훼하는 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딱 하나의 질문만 던지면 된다: “그래서 우리와 외계인 중, 누구의 논리적 판단이 옳은가?” 이 질문은 흥미롭게도 인간의 논리학적 관점과 외계인의 논리학적 관점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메타적 관점을 선제한다. 그런데 그러한 메타적 관점이 있다면, 우리와 외계인 모두를 지배하는 논리학적 관점이 있다는 말이 되므로, 심리학주의자 스스로의 주장을 반박하게 된다. 만약 그러한 메타적 관점이 없다면, 이 질문의 참/거짓을 우리는 결정할 수 없고, 따라서 (위의 언어철학적 전제에 따라) 논리적 외계인에 대한 모든 질문과 주장은 모두 가짜 명제에 불과하다.
요약:
- 심리학주의자는, 논리적 법칙이 마음의 구성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 인간과 마음의 구성이 다른 외계인이 있다면 그 외계인은 우리와 다른 논리적 법칙을 가질 것이다.
- 심리학주의자는 1번의 주장을 참이라고 주장한다. 그 배후에는, 우리 인간의 마음이 (1번의 참을 믿도록) 그렇게 구성되었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또한 심리학주의에 따르면, 외계인이 실제로 1번을 참이라고 생각하는지조차 우리는 알 수 없다. 이것은 외계인 역시 마찬가지이다. 외계인 역시, 우리 인간이 1번을 참이라고 여기는지 아닌지 알 수 없다.
- 그러나 이러한 논변에 빠지는 것은 심리학주의자가 이중적인 모순적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 한편으로 심리학주의자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서, 우리의 사고방식과 외계인의 사고방식을 놓고 서로 비교해볼 수 있는 양 행세한다.
- 다른 한편으로, 심리학주의자는 우리 인간의 정신은 이러이러하게 구성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 따라서 논리적 외계인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심리학주의자의 논변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심리학주의자는 “우리와 외계인 중, 누구의 논리적 판단이 옳은가?”라는 질문 자체를 거부하면 되는 것 아닌가? 이러한 질문을 거부하고, 그저 우리의 사고방식에 가두어진 채로 머무르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애초에 심리학주의자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을 상기해보라. 그것은 바로 외계인과 우리가 만나 대화를 나눈다면 어떤 논리적 명제에 대해 그들과 우리가 “불일치”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우리는 동일률 명제를 승인하고, 그들은 부정할 것이다. 따라서 심리학주의자가 “우리와 외계인 중, 누구의 논리적 판단이 옳은가?”라는 질문 자체를 거부해버리면, 애초에 그러한 “불일치” 시나리오를 묘사할 수 없다.
따라서 프레게에 따르면 심리학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에 처한다:
- “우리와 외계인 중, 누구의 논리적 판단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사실상 외계인과 우리의 공통의 기저에 놓여 있는 논리적 관점을 인정하거나
- “우리와 외계인 중, 누구의 논리적 판단이 옳은가?”라는 질문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사실상 외계인과 우리의 논리적 법칙이 다를 수 있다는 묘사 자체를 포기하거나. 이경우 심리학주의자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은, 우리의 논리학과 그들의 논리학 사이의 “일치의 부재”일 뿐 “불일치”가 아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들은 “아! 그렇다면 논리적 외계인은 존재할 수 없구나!”하고 결론내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성급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는 논리적 외계인의 가능성을 주장하는 심리학주의자의 명제가 사실은 가짜 명제였다는 점이다. 이 가짜 명제는 참/거짓을 결정할 수 없는 넌센스이다. 그러나 심리학주의자의 명제가 가짜 명제라면, 그 가짜 명제의 부정 역시 참/거짓을 결정할 수 없는 가짜 명제가 된다. 즉 “논리적 외계인은 가능하다”라는 주장만큼이나 “논리적 외계인은 불가능하다”라는 주장 역시 가짜 명제인 것이다.
결국 프레게의 사고실험은 논리적 외계인의 가능성에 대한 어떤 긍정적/부정적 입장표명을 의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에 대한 긍정적 입장만큼이나 부정적 입장 역시 마찬가지로 가짜 사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그들 심리학주의자만큼이나 (프레게를 포함한) “우리” 역시 이러한 가짜 사유의 유혹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 외계인의 가능성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유혹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논고>에서의 비트겐슈타인이 보여주고자 한 것에 도달한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러한 가짜 명제들 이면에 숨어있는, 어떤 형언할 수 없는 진리(가령 "논리적 외계인은 불가능하다")를 깨닫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유혹 일체를 애초에 떨쳐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