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 외계인은 가능한가?"에 대한 사견 — "초록색 생각을 하는 외계인은 가능한가?"

@Herb 님이 올려주신 글과, 첨부된 논문을 읽고 생각난 것들을 끄적여 봤습니다. 특히, 다음 단락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원 논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If we take the sentences "illogical thought is impossible" or "we cannot think illogically" to indeed present us with thoughts (with senses which we can affirm the truth of), then we concede what a moment ago we wished to deny (namely, that the negation of these sentences preseunt us with a genuine content, one which is able to stand up to the demand for judgment). But if we conclude that these words (which we want to utter in response to the psychologicstic logician) do not express a thought with a sense, then aren't we, if we judge psychologism to be false, equally victims of an illusion of judgment? This is the problem at the heart of the onion.

즉, 논문의 저자는 다음의 문장이 실제로는 생각thought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1. 비논리적인 생각은 불가능하다.

이것을 논리식으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 I(x): x는 비논리적이다, T(x): x는 생각이다 )

  1. ~∃x ( I(x) ∧ T(x) )

이제 이를 다음의 문장과 대조해 보자. ( G(x): x는 초록이다 )

  1. 초록색 생각은 불가능하다.

  2. ~∃x ( G(x) ∧ T(x) )

(1)과 (3)은 형태론적으로 같은 문장이다. 그런데 (3)은 의미가 있는 문장으로 보인다. 그 의미란, 이 세상에 초록색이면서 생각이기도 한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 실증주의자라면 (3)이 반증 가능성 원리 또한 통과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요컨대 세상의 모든 초록색 대상 중 생각에 해당하는 것이 발견되면 (3)은 기각된다는 것이다. (이 입장은, G의 외연에 속하지 않는 대상은 ~G의 외연에 속한다는 입장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3)의 논리적 표현인 (4)는 어떠한 논리적 규칙도 위배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3)과 (4)가 유의미하다는 생각은, 프레게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각의 환영"에 사로잡힌 것이다. 이 입장을 논증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4)에서 등장하는 무제약적 양화사 ∃x 의 부당함을 피력하는 것이다. x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내 앞의 사과가 x에 양화될 수 있다면, 사과의 꼭지 또한 x에 양화될 수 있는가? 무언가가 — 이를테면 나뭇잎 — 대상의 부분이 아니라 독립적인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반대로, 무언가가 — 이를테면 나무 — 대상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독립적인 대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수학적 플라톤주의를 인정하여 '자연수 집합' 또한 양화의 대상으로 고려해야 하는가? '신' 또한 양화의 대상인가?

이렇듯 무제약적 양화사는 사용자로 하여금 강한 존재론적 개입을 요구한다. 무제약적 양화사의 사용은 언어 사용자가 세상의 모든 존재자에 대해 사고할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 위에서 성립한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우주에는 적어도 두 개의 대상이 있다"라는 러셀의 주장이 의미를 결여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것을 극복하는 한 가지 방법은 무제약적 존재 양화를 사용하는 대신 x를 T의 진리집합으로 양화시키는 것이다. 요컨대 (4)를 (5)와 같이 수정하는 것이다.

  1. ∃x ∈ Th : G(x)

여기서 Th는 생각들의 집합이다. 그런데 이렇게 적고 나면, (5)는 적형식이 아니게 된다. 문제는 G를 정의하는 데 있다. 우리가 무제약적 양화를 피하고자 한다면, G의 정의역을 정의하는 데 있어서도 무제약적 양화를 피해야 한다. 즉 a는 가능하지만 b는 불가능하다.

    a) G: 물리적 대상 → {T, F} (O)

    b) G: 모든 대상 → {T, F} (X)

따라서 (5)는 적형식이 아니다. (5)는 정의역에 속하지 않는 대상을 술어에 적용하고 있으므로 논리적 규칙을 위배한 것이다. 그러므로 (3)은 의미를 결여한 문장이다. 주목할 점은 (3)이 의미가 없는 이유는 형이상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논리적 표현인 (5)가 논리적 규칙을 위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음의 수학적 예시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독자 분은 0 < i 가 올바르지 않은 부등식임을 배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해당 맥락에서 <는 실수 위에서만 정의되기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 실수 위에서만 정의 가능한 이유는 실수, 허수, 그리고 <가 요구하는 논리적 규칙들과 연관한다. <의 규칙에 따르면, 양변에 0보다 큰 수를 곱하면 부등호의 방향이 유지되고, 0보다 작은 수를 곱하면 부등호의 방향이 뒤집힌다. 그런데 만약 0 < i 라면 양변에 i를 곱했을 때 0 < -1이 되어 모순이고, i < 0 일 때도 같은 모순이 일어난다. 물론 이는 0 < i 가 거짓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0 < i 가 거짓이라면 0 > i 가 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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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인지 지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결론을 위해서는 Th가 단지 사고들의 집합일 뿐 아니라, 초록색인 사물들과 유형론적으로 다른 대상들의 집합이어야 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구문론적으로 Th의 논항과 G의 논항이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사실 그 자체로 논쟁의 대상입니다.

한 가지 우회로는, Th가 문장 유형의 표현들만을 논항으로 갖는 술어라고 보는 것이겠습니다. 한편 G는 이름 유형의 표현들을 논항으로 가질 수 있다고 보는 것이겠고요.

그으러나 문제는… 우리는 보통 문장 유형의 표현에 대한 술어로 ‘사고이다’를 쓰는 대신 함수적 표현으로 ‘…에 대한/의/라는 사고이다’를 쓴다는 겁니다. 이때의 명사화는 어떤 유형의 표현을 낳는가? 만일 이를 일차 유형 표현으로 본다면, 퍼즐은 이어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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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과 (3)은 불가능성에 대한 주장으로 양상문장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2. (1)과 (2)는 논리적 불가능성에 대한 주장이지만 (3)과 (4)는 형이상학적 불가능성에 대한 주장입니다. 따라서 (3)과 (4)에 대한 고려가 논리적 외계인의 가능성과 유관한지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3. ‘무제약적 양화사’로 absolute quantification을 의도하신 것이 맞다면, (3)과 (4)의 양화사가 왜 무제약적 양화의 사례로 이해되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디멘님은 아니지만…

2

글쎄요, 둘이 서로 다른 양상성에 관한 문장으로 여겨져야만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둘 다 (생각에 관한 문장으로 본다면) 형이상학적 불가능성에 관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고, (문장의 무의미성에 관한 것으로 본다면) 논리적 불가능성에 관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1과 3이 서로 다른 양상성을 표현하는 문장이라는 바로 그 주장 자체가, 주장된다면, 별도로 논증되어야 하는 주장에 해당하는 것도 같습니다. 어떻게 자연언어 상으로 동일한 구조를 갖는 두 문장이 논리적 구성에 있어 차이날 수 있는지를 설명해 주어야 하니 말입니다.)

3

이것도 사실 본문의 논의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원글에서는 4로의 번역을 무제약적 번역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인데, ‘자연언어 문장 3을 4로 번역했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2와 4의 논리적 구조가 동등하다’에 초점을 맞추면 이 점에 대해 원글 작성자가 해명을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한편 4의 양화사를 ‘무제약적’으로 부르고 있는 점은, 말 그대로 4에 등장하는 양화사가 별다른 유형론적 제약 없이 등장하고 있다는 단순한 이유때문으로 보입니다. unrestricted quantifier에 대한 일반적 이해에 비추어볼 때 큰 문제 없는 명명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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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물론 논리적 양상과 형이상학적 양상 사이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은 논의의 맥락도 있겠지만 현재 논의의 맥락이 논리적 외계인의 가능성과 관련된 맥락이기 때문에 이 구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논리학에서 말하는 비일관적인 문장이 표현하는 사고가 있을 수 있는지가 쟁점인 맥락에서 '초록색 사고는 불가능하다'와 같은 사례로부터 유관한 함축을 끌어낼 수 있을지 여부가 불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1)을 형이상학적 불가능성에 대한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될 경우 이 문장이 논리적 외계인의 가능성과 관련해서 어떤 함축을 갖는지 여부가 마찬가지의 이유로 불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만약 (3)을 문장의 무의미성과 관련된 이유에서 논리적으로 불가능성에 관한 문장으로 본다면 이때의 논리적 불가능성 개념이 논리적 외계인의 가능성을 따질 때의 논리적 불가능성 개념인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1)과 (3)이 서로 다른 양상성을 표현하는 문장이라는 주장 자체가 논란의 여지가 있을지 예상하진 못했는데, 생각해본 결과 'illogical thought is impossible'은 '비논리적이면서 사고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본 논의의 맥락이 프레게를 논의하는 맥락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비논리적이면서 문장인 것은 어떠한 사고와도 표현 관계를 맺지 않는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저는 처음에 (1)을 자연스럽게 이렇게 읽었었던 것 같습니다.)

아 absolute quantification이 아니라 unrestricted quantifier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볼 수도 있군요. 하지만 (2)와 (4)의 논리적 구조가 동등하다라는 사실만으로 제 우려가 모두 해소되진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1)이 (그리고 (3)이) unresetricted quantifer를 포함하는 양화문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것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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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지적)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내용은 저 또한 매우 인정하는 바입니다. 이는 원 논문에서도 간접적으로나마나 지적되는 바인 듯합니다.

We cannot express "it" — the logical form of language in language; but we can gesture at it. One such feature is the distinction between concept and object. We cannot express this distinction in language. When we attempt to, we try to make a concept play the role of an object. That is something a concept cannot do. Logic won't permit it.

이 퍼즐에 대한 만족스러운 정답은 저도 오리무중입니다.

3
네, 그 점이 사실 가장 문제되는 것이겠고, 디멘님의 결론이 이에 대한 한 가지 답으로 의도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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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지적에는 사실 동의가 어렵네요. ‘it’을 여러 유형으로부터 정의되는 함수들의 합(union)에 상당하는 함수로 생각한다면 별 상관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함수 𝜄가 있어서, 어떤 맥락 c에 대해 𝜄(c)가 의도된 언어적 표현 e와 의도된 맥락 c’의 순서쌍 (e, c’)을 그 값으로 갖는다고 한다면, “it”의 c 상대적 지칭 [[it]]c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it]]c=[[e]]c’

이때 “e”가 대상 유형 표현일 수도, 명제 유형 표현일 수도 있다는 점은 별 문제가 안 됩니다. [[・]] 자체가 입력값의 유형에 따라 서로 다른 종류의 대상을 값으로 갖는 함수이므로….

실제로 “it”뿐 아니라 동일성 표현이나 “의미한다”를 비롯한 수많은 자연 언어 표현들이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 같아요. 우리는 대상과 술어가 동일하다고 하는 것을 문법적 오류로 보지만, 대상과 대상, 술어와 술어가 동일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죠.

약간의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원문의 맥락에서 "it"은 언어적 도구로서의 "it"이 아니라, 기존의 비트겐슈타인 해석자들이 <논고>가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인용문에서는 논문의 저자가 그러한 진리의 한 가지 사례로, 대상과 개념의 구분을 들고 있습니다. (대상과 개념을 구분하는 행위 자체가 서로 다른 두 유형을 같은 문장에 사용하는 것이므로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오해의 여지가 있게 인용을 가져 온 점 죄송합니다.

그와는 별개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it'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제안에 관해서는 조금 더 엄밀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저 또한 충분히 가능한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앗 ㅋㅋ큐ㅠㅠ 읽다가 이상해보이는 부분을 여쭐걸, 그냥 휙 읽고 오해했네요. 민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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