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신 각각의 의문들에 대해 답변을 드릴 수도 있어요.
(1) 기독교는 단순히 정치 권력에 봉사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흔히 기독교와 로마제국 사이의 관계, 기독교와 중세 유럽 사회의 관계, 기독교와 근대 제국주의의 관계 등을 거론하면서 이런 문제제기들을 많이 하죠. 하지만 실제 역사의 구체적인 정황들을 살펴보면, 결코 정치와 종교 사이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을 금방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령,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의 상황만 하더라도, 그 당시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의 권력 안정화에 반드시 도움이 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오히려 그 시기 콘스탄티누스의 소집으로 열린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으로 인정된 기독교는 성부와 성자의 동일본질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스파였고,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성부와 성자의 유사본질을 주장하는 아리우스파라는 이단에 더욱 기울어져 있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기독교 공인 이후에도 정통파 기독교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어요. (아타나시우스가 집전하는 부활절 미사에서 아리우스파에 의한 대학살이 일어날 정도로요.)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지 못하였던 아타나시우스파가 신학적 논쟁에서는 결국 승리를 거두어서 이후의 수많은 공의회를 통해 '정통'으로 인정된 것이 거의 기적적인 사건일 정도이죠. 로마 정치가 기독교를 정당화했다거나, 기독교가 로마 정치를 정당화했다는 주장은, 적어도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의 아타나시우스/아리우스 논쟁 상황에서는 결코 적용되지 않아요.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이동영 교수님이 삼위일체론 역사 강의에서 이 점을 잘 설명해 주시죠.
더 이전 시대인 초대 교회 시대에는 기독교와 로마 제국이 상당한 갈등 관계이기도 하였죠. 로마가 기독교를 명시적으로 박해하던 시대였으니까요. 게다가, 오늘날 신약성서신학에서 '제국 연구'라는 주제가 많은 학자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듯이, 신약성서 자체가 반제국주의 성격을 꽤나 강하게 지닌 문헌이기도 해요. 애초에 '복음(유앙겔리온)', '주님(퀴리오스)', '국가(바실레이아)', '구원(소테리아)', '하나님의 아들(테우 휘오스)' 같은 단어들은 로마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기 위해 사용된 '전문 용어'들인데, 신약성서는 이 전문 용어들을 예수와 하나님 나라를 전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그 시대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독교가 했던 행위들은 로마 제국에 대한 반역으로 여겨질 가능성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었던 거죠. (실제로, 예수 자신이 반역자로 사형당하기까지 했고요.) <오늘의 신학 공부> 장민혁 전도사님의 아래 영상에 이와 관련한 다양한 논의들이 소개되어 있어요.
또, (Raccon님이 이미 잘 지적하셨듯이,) 정치와 기독교의 결합이 반드시 부당하고 잘못되기만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죠. 가령, 5세기 초에 서고트족의 침략 당시, 황제는 로마를 버리고 떠났지만 교황은 로마에 남아 서고트족과 평화협정을 맺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죠.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했던 로마 말기에, 이렇듯 국가가 수행하지 못하는 정치적 역할을 교회가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그 당시 로마 사람들에게 교회가 인정을 받았던 거고요. (이후 중세 교황권의 강화도 초기 교회의 이런 긍정적인 기능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물론, 교황권의 강화에는 분명히 어두운 측면도 있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이 왜 그 권위를 인정하게 되었는지 추적해 보면 그 과정을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평가하기는 어려운 거죠.)
또 8-9세기 중세 문예부흥도, 샤를마뉴 대제가 잉글랜드의 신학자인 알퀸을 통해 수도원 운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학교를 설립하고, 그리스-로마의 문학 작품들과 기독교 신학서 등 수많은 책들을 필사하고 편찬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문맹이었던 사를마뉴가 자신의 지적 한계를 인정하고서 당대 지식인들이었던 신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었을 때, 중세시대의 중요한 학문적-예술적 결과들이 나올 수 있었던 거죠.
현대적인 예를 들자면,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폐지에 성공회 대주교인 데스몬드 투투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점이나, 미국 침례교 목사인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미국의 인종차별 비판에 앞장섰다는 점 등이 기독교의 정치적 활동에서 대표적으로 긍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네요. 얼마 전에 돌아가신 지미 카터 전 미국대통령도 아주 신실한 신앙인으로 자신의 신앙적 신념과 정치적 신념을 긴밀하게 결합시켰던 긍정적인 사례로 미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죠.
(2) 기독교의 의도는 선하지 않다?
니체가 기독교 도덕을 '르상티망(원한감정)'의 발현이라고 비판하죠. 기독교인들 본인들이 약자들이기 때문에 약자에 대한 사랑과 자비를 내세우는 것일 뿐, 결국 그들도 강자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이런 니체의 비판은 철학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죠. 소위 '의심의 해석학'이라고 하는 (니체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방법론부터가, 반증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뿐더러(포퍼), '의심의 해석학'이라는 방법론이 텍스트가 말하는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자 하는 '신뢰의 해석학'과 반드시 대립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서요(리쾨르). 게다가, 약자를 혐오하는 문화가 당연했던 고대 시대에 기독교가 약자의 편에 섰다는 것 자체가 문화인류학적으로 아주 놀라울 만큼 기적적인 사건이라는 평가도 존재하고요(지라르).
그런데 이런 이론적인 논의들을 떠나서, 실제 기독교인들이 실천하고 있는 활동들을 보면 "저 사람들의 의도는 선하지 않아!"라고 단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뒤에 다른 음흉한 의도를 숨기고서 선한 일을 한다고 하기에는, 인생 전체를 그 일에 다 걸어버리시는 분들이 너무나 많거든요. (그렇게 인생을 다 걸만큼 자신의 이기심을 의도적으로 숨길 수 있다면, 오히려 그 의도야 말로 진정한 '선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래는 제가 출석하는 교회 목사님의 영상과, 제가 한 달에 한 번 봉사활동을 가는 주사랑공동체(베이비박스 설립 단체)의 영상입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입으로도 결심조차 하기 힘든 일들을 실제로 매일같이 해내는 이런 분들을 볼 때, 저는 이분들의 의도가 선하지 않다고 감히 말할 수가 없어요.
(3) 기독교는 현대과학과 상충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올린 영상들에도 많은 답변들이 있고, 제가 개인적으로 서강올빼미에 따로 쓴 글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