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리뷰] 「트롤리 문제 해소하기: 침묵주의적 덕 윤리를 기반으로」

일전에 YOUN님께서 이런 글을 올리신 적이 있습니다.
두 편의 석사논문에 대한 단상 “국내 저자들은 왜 서로의 글을 읽지 않는가?”라는 문제의식에 저 역시 깊이 공감하고 있고, 또 해당 글에서 감사하게도 리뷰를 받은 사람 중에 하나인지라 작은 움직임에 저도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컸습니다. 하지만 한참 지난 남의 석사논문을 가져오는 것도 좀 이상한 것 같고 또 전문분야나 관심분야가 아닌 논문은 읽고 글을 남기기에는 버거웠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올빼미에 올라온 한 편의 석사논문은([석사논문] 트롤리 문제 해소하기: 침묵주의적 덕 윤리를 기반으로) 주제가 윤리학이어서 반가운 마음에 읽고 글을 남기려고 합니다. 모쪼록 저자께는 읽을거리가 되기를 바라고 나아가 이렇게 짧은 리뷰라도 서로 써주면서 학술적인 장으로서의 서강올빼미가 더 활기를 띠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인태(이하 ‘저자’) 님의 석사논문 「트롤리 문제 해소하기: 침묵주의적 덕 윤리를 기반으로」(이하 ‘논문’)은 윤리적 판단과 그 기저 원리에 관한 규범 윤리학적, 혹은 도덕 심리학적 논의에서 오랫동안 논의되었던 트롤리 문제(Trolley Problem)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의 논문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결과주의로 분류될 수 있는 두 가지 유망한 원칙, 즉 프랜시스 캠(Francis Kamm)의 허용 가능한 해악 원칙(Principle of Permissible Harm; PPH)와 피터 바우만(Peter Baumann)의 평등 해악 원칙(Principle of Equal Harm; PEH)를 검토하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답변을 ‘침묵주의적 덕 윤리’(Quietist Virtue Ethics; QVE)라고 명명한 이론에 입각하여 제시하고 정당화하고자 합니다. 저자의 주장은 트롤리 문제에 대해 단일한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가 잘못된 것이며 트롤리 문제에 대해 철학(혹은 윤리학)은 침묵해야 한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이 논문은 형식적으로 상당히 표준적인 석사논문의 양식을 갖고 있습니다. 논문의 목차는 문제 제기, 기존 논의에 대한 간략한 검토, 목표가 되는 핵심 반론에 대한 분석과 비판, 저자의 답변 제시, 가능한 반론과 응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기본에 충실한 구조라고 생각됩니다. 석사 논문을 준비하고 계신 독자분이 계시다면 이런 구조를 따르는 것을 추천합니다. 특별히 주제 분석을 요구한다든가 논점을 대화 구조로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런 구성이 무난하고 안정적인 구성이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저자의 고민과 독창성을 보이려고 한 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주제가 되는 캠과 바우만의 논문이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논문인 것을 보니 최신 연구를 소화하기 위해 많은 고심을 했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듭니다. 또 논쟁의 한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이 제 3의 입장을 세우는 것이 기획의 일부였으니 품이 더 많이 들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석사논문에서 잘 구축된 이론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저자의 침묵주의적 덕 윤리라는 기획은 매력적인 기획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철학 혹은 윤리학이 모든 문제에 답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려야 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문제에, 어떤 이유로 우리가 그런 강박을 버려야 하는지를 발전된 형태의 침묵주의적 덕 윤리가 진단해줄 수 있다면 규범 윤리학적 논의에서 주목할 만한 입장이 될 것도 같습니다.

아래에서는 논문을 읽으면서 든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 전에 몇 가지 유의점을 말씀드립니다. 저자의 논문을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목적은 아니므로, 캠과 바우만의 주장은 최대한 저자가 제시한 방식대로 두고 읽었습니다. 이미 지난한 심사과정을 거치면서 세세한 문제들에 대한 피드백은 전문가의 조언을 받으셨을 테니, 세세한 개념 해명의 문제를 하나하나 다루기보다는 문제의 설정과 논증의 목표 같은 큰 논점을 중심으로 질문을 남겨보고자 합니다. 저의 질문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1) 이 논문이 문제를 대하는 방식을 ‘해소’라고 할 수 있는가?

저자는 일관되게 논문의 핵심적인 목표가 트롤리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침묵주의는 트롤리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는 않지만, 일원주의적 원칙을 도입하여 한 가지 선택지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잘못된 요구를 거부한다. 이를 통해 트롤리 문제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하여 문제를 ‘해소’한다. (4쪽)

침묵주의적 덕 윤리를 기반으로 하여, (...) 철학이 한 가지 선택지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그 외의 영역에서 조언을 줄 수 있다는 방식의 답변을 통해 트롤리 문제는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해소되어야 할 문제임을 보일 것이다. (5쪽)

(QVE)는 트롤리 문제를 해결하거나, 트롤리 문제는 사실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트롤리 문제는 실제로 객관적인 덕목들이 충돌하는 문제 상황이지만 구체적인 답을 철학이 제공해야 한다는 잘못된 전제를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답변들과 궤를 달리한다. (93쪽)

요컨대 저자는 논문에서 ‘문제의 해소’의 의미를 그 문제에 대해 철학 혹은 윤리학이 답을 해야 한다는 요구를 거부하는 것으로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제를 해소하는 전략이 어떤 전략을 가리킬 수 있는지는 다소 이해의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어떤 문제가 암묵적으로 의심스러운 전제를 갖고 있고, 그 전제를 거부함으로써 아예 그 문제는 제기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의미로 볼 때, 저자의 해소 전략은 다소 의문을 남깁니다. 저자는 트롤리 문제가 성립하지 않는 사이비 문제 혹은 잘못 제기된 문제라고 주장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저자가 만일 문제 성립 자체에 시비를 다투지 않는다면 저자의 해소 전략은 적어도 특정 문제가 전제하고 있는 바를 지적함으로써 문제가 제기되지 않게 하는 전략은 아닙니다. 문제는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지만, 여기에 답하지 않겠다는 것이 저자의 요지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답하지 않기가 진정한 의미에서 문제를 해소하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습니다.

물론 저자의 의도에 따라 ‘해소’를 이해해서 트롤리 문제가 본질적으로 하나의 원리를 답으로서 요구하고 있다면 그 요구가 부당함을 밝힘으로써 어떤 의미에서 문제를 해소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또 한 가지 드는 의문은 트롤리 문제가 본질적으로 그런 요구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저자의 문제제기에서는 트롤리 문제가 그런 요구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 문제와 요구 사이에 어떤 전제적(presuppositional) 관계가 있는지는 명시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5명을 향해 달리는 트롤리의 방향을 바꾸면 1명이 죽는 <표준 사례>와 5명을 향해 달리는 트롤리를 멈추기 위해 뚱뚱한 사람을 선로로 밀어 넣는 <뚱뚱한 사람 사례>에서 우리가 <표준 사례>에서 트롤리의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판단하고 <뚱뚱한 사람 사례>에서 뚱뚱한 사람을 밀면 안 된다고 판단한다고 가정해봅시다. (실제로 우리의 직관이 그렇다는 가정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1. <표준 사례>에서는 한 명을 죽이고 다섯 명을 살리는 선택을 할 것이고, <뚱뚱한 사람 사례>에서는 한 명을 죽이고 다섯 명을 살리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2. 그런데 <표준 사례>와 <뚱뚱한 사람 사례>는 판단의 근거가 되는 요소들이 동일하다.
  3. 동일한 판단 근거에 입각해서 서로 다른 두 판단을 내리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이 세 전제가 비일관적이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대로 내버려둔다면 1과 같은 판단을 내린 누군가는 비합리적인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제가 파악하기에 트롤리 문제는 이 퍼즐을 어떻게 풀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답이 있을 수 있습니다. 1이 받아들일 만하다고 두고 보면 2나 3 중에 하나를 거부해야 할 것이고, 3이 포기할 수 없는 근거라면 1이나 2를 거부해야 합니다. 물론 트롤리 문제를 파악하는 저의 방식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만, 이 해석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트롤리 문제가 본질적으로 1의 두 직관을 포섭하는 하나의 통일적 원리를 통해 해결될 것을 요구한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하나의 통일적 원리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2를 거부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판단 원리는 동일하지만 사례의 구조 혹은 고려사항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저자의 비판은 이런 전략을 취하는 사람들이 ‘왜 판단 원리는 동일하다고 가정하는 것인가?’에 대한 적절한 비판은 되어도 트롤리 문제 자체의 전제나 그 문제가 요구하는 바를 허무는 비판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만일 제가 행간에서 읽지 못한 저자의 견해가 위 명제쌍이 비일관적이라는 것 자체가 전제하고 있는 어떤 명제가 있고 그것을 거부하면 세 명제가 일관될 수 있다는 주장이라면 꽤나 인상적인 주장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 있겠습니다만, 80페이지 이하에서 QVE가 트롤리 문제를 다루는 방식이 이런 트롤리 문제와 관련된 합리성에만 관여하는 것 같은데 맞나요?)

(2) 캠이 제시한 원리가 받아들일 만하지 않다는 것, 나아가 일원주의적 기획이 그럴듯하지 않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었는가?

저자는 트롤리 문제에서 제기되는 여러 직관을 포섭할 수 있는 통일적 원리를 제시하고자 하는 철학자들 중 비결과주의적 원리를 제시하는 캠과 바우만의 주장을 검토합니다. 두 학자의 원리에 대한 논의는 공통적으로 두 가지 비판점을 짚고 있습니다. 첫째는 두 원리가 궁극적으로는 트롤리 문제를 해결하는데 불충분한 답변을 제시할 뿐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두 원리 모두 일원주의적 기획의 한계를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존 이론들에 대한 비판이 저자의 제안, 즉 QVE를 설득력 있게 만드는 기반이라면, 이 비판이 그 목적을 충분히 달성했는지가 관건이 될 것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지지 않게, 저는 캠에 대한 비판적 논의에 대해서만 의문을 제기해보겠습니다.

저자는 캠의 원리를 두 가지 측면에서 비판합니다. 첫째는 (1) 루프 문제를 캠이 잘못 분석했고, 그보다 덜 무리한 분석에 따르면 루프 문제에 대한 캠 자신의 직관이 PPH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2) 캠의 루프 문제 분석을 받아들인다 하여도 캠의 원리는 (케이건의 지적대로) 우리의 도덕적 직관이 단일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고, 캠의 원리가 호소하는 특정 요소가 도덕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아 보인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루프 사례에 대한 캠의 분석을 비판하는 부분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24-26쪽) 루프 사례와 수레 사례를 캠과 달리 하나의 위협만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주장을 좀 더 치밀하게 다뤘으면 좋았겠다 싶은 생각이 있지만, 대체로 저자의 지적에 수긍이 갑니다. 하지만 이 비판을 통해 입증된 것은 루프 사례에 대해 캠 자신의 직관을 자신의 원리가 포섭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PPH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대응해야 할 치명적인 비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PPH가 근본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원리라는 것까지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도 당연히 이를 염두에 두고 있고, 루프 사례에 대한 비판이 다소 사소해지는 측면이 있지만 케이건의 비판을 인용하여 더 강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비판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우선 PPH가 성공적이려면 각각의 트롤리 사례들에서 하나의 올바른 직관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캠의 직관이 옳다는 근거도, 실제로 사람들이 통일된 직관을 갖고 있다는 근거도 없기 때문에 단일 원리로서의 PPH는 성공적이지 못합니다. 나아가 PPH가 그 자신이 포섭하는 직관들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판단의 고려사항이 되는 요소가 도덕적으로 유관한 요소인지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케이건의 주장에 따르면 PPH는 대체와 종속이라는 조건을 허용가능성에서 핵심적인 요소로 보는데, 이것이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구분인지 불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PPH가 실제로 우리의 직관적인 도덕적 판단 배후에 존재하는 일종의 추론적 원리로 간주되지 않는 경우에도 케이건의 첫 번째 비판이 유효한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게 아니라 직관적인 도덕적 판단은 즉시 이루어지는 반면 그것들이 합리적 이유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판단인가를 따지는 규범적 원리로서 PPH가 제시된 것이라면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직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다만 PPH가 합당한 원리라면 몇몇 직관들은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캠은 자신의 직관이 PPH에 의해 정당화된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여러 사례에서 PPH가 적절한 직관에 대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전히 두 번째 비판에는 열려 있겠지만, PPH와 도덕적 직관에 부여하는 지위에 관해 캠을 자비롭지 않게 해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 점은 제가 캠의 의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캠에게 우호적인 해석을 한 번 제시해본 것입니다.)

다음으로, 케이건의 비판을 모두 수용한다고 해도 그것으로부터 입증할 수 있는 것은 PPH가 단일한 원칙이 되기에 불충분하다 혹은 적합하지 않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여기에서 어떻게 PPH의 실패가 일원주의적 기획에 근거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지지되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PPH나 바우만의 PEH에 대한 비판이 모두 적절하다면 두 원칙이 트롤리 문제를 해결하는 대원칙이 되지 못한다는 점은 납득이 갑니다만, 그것으로부터 (이전의 비판들이 각 원칙들의 한계를 지적한 것 같았는데도) 각각의 원칙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일원주의적 기획이 잘못된 것이라는 게 어떤 논증에 의해서 지지되는 것인지 지적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비판이 수긍할만하다면, 트롤리 문제에서 일원주의적 기획보다 다원주의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이 매력적으로 보이긴 합니다. 한편으로 궁금한 것은 저자가 제시한 버전의 다원주의, 즉 침묵주의적 덕 윤리가 예컨대 <표준 사례>에서 레버를 당길 위치에 있는 한 그룹의 의사결정과정에 대해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결과주의자들과 비결과주의자들이 싸우는 고전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즉, 복수의 트롤리 변형 사례에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직관을 다루는 트롤리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표준적인 트롤리 딜레마에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는 집단 내 갈등에 대해서 저자가 보기에 철학이나 윤리학이 할 수 있는 조언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끝으로 자잘한 의문과 코멘트를 남겨보겠습니다. 이 논문의 서론을 읽고 든 첫 번째 의문은 ‘왜 결과주의는 다루지 않는가?’였습니다. 물론 모든 논의를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논문에서 다룰 논증이나 입장을 선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비결과주의적 원리를 일원주의의 대표자로 선별한 이유가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이 논문을 다 읽고 나서 든 한 가지 깨달음은, 저자가 천착했던 것처럼, 모든 철학적 문제가 언제나 답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겠다 하는 것입니다. 또, ‘왜 일원적 답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저자의 노고에 비해 형편없는 서평이라 송구한 마음입니다.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는 상황이면 좋았을 텐데, 저도 여의치가 않네요.
한 편의 성과를 이루어내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앞으로의 연구가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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