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ccoon님의 리뷰에 대한 답변

제 석사논문을 소개하는 글 [석사논문] 트롤리 문제 해소하기: 침묵주의적 덕 윤리를 기반으로 에 응답하여, # [간단리뷰] 「트롤리 문제 해소하기: 침묵주의적 덕 윤리를 기반으로」 를 적어 석사논문을 리뷰해주신 @Raccoon 님께 정말 큰 감사를 드린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사실 연구자에게 리뷰어와 비판자가 없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서강올빼미에서 제 논문을 읽고 리뷰하는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그러면 리뷰에 대한 답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리뷰에 대한 답변은 제 글에 대한 의문이나 비판에 대한 응답을 주로 하되, 저에게 해주신 좋은 말씀도 당연히 이해했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먼저 밝히고 갑니다. 그리고 밑 부분에서 Raccoon님은 '리뷰어'로 지칭하도록 하겠습니다.

(1) 문제를 '해소'하는게 맞는지에 대한 의문

저는 논문에서 철학이 트롤리 문제에 하나의 선택지를 정당화해야 한다는 요구 자체가 잘못되었고, 철학이 그것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일종의 해소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리뷰어는 제가 제시한 방식이 정말 해소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제 논문의 답변은 트롤리 문제 자체보다는 트롤리 문제를 단일한 원리로 특정 선택지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전제가 잘못되었음을 보이고 그 전제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해소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소라는 것이 보통 어떤 문제의 전제가 의심스럽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 맞습니다만, 여기에서는 문제 자체보다는 문제를 이해하는 답변자들의 공통된 전제가 의문스럽고, 그 전제를 포기하면 왜 트롤리 문제는 진정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이 정당화된 답변을 제시할 수 없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제 해명이나 설명이 잘 반영되었으면 좋았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트롤리 문제 자체'와 '철학자들이 트롤리 문제를 이해하는 방식'을 구분해서 보고 있습니다. 끔찍한 딜레마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라는 문제 자체는 유의미한 문제이고, 각자가 신뢰하는 도덕 규범이나 도덕적 전제를 테스트하는 작업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철학적 이론으로, 특정한 선택지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적 작업을 해야 한다는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맥락에서 저는 트롤리 문제를 해소한다고 한 것입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트롤리 문제를 해소한다기 보다는 '일원주의자들의 전제 해소하기'가 정확한 제목이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롤리 문제 해소하기라는 말을 굳이 옹호해보자면 트롤리 문제 논의에 참여하는 대다수의 철학자들이 트롤리 문제가 특정한 선택지를 정당화하고, 그 선택지를 잘 설명하는 이론만들기 게임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트롤리 문제 해소하기'라고 이해하면 그렇게까지 잘못된 제목과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제시하는 침묵주의적 덕 윤리(Quietist Virtue Ethics;QVE)는 모든 종류의 윤리적 문제에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딜레마와 같이 객관적인 덕목들이 충돌하여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특정한 덕목이나 원칙을 어기는 경우에 한정짓는 것이 맞습니다.

(2) 캠이 제시한 원리가 받아들일 만하지 않다는 것, 나아가 일원주의적 기획이 그럴듯하지 않다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었는가?

리뷰어는 제가 캠에게 가한 비판을 분석하면서 세 가지 의문점을 제시합니다.

  1. PPH에 대한 케이건의 비판이 다소 과도하다. PPH를 받아들이더라도 직관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2. 케이건의 비판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PPH의 실패이지 일원주의적 기획의 실패가 아닐텐데 어떻게 PPH에 대한 비판이 일원주의적 기획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는가?
  3. 의사결정 과정에서 철학이 어떤 조언을 줄 수 있는가?

각각의 의문에 대해 간략하게 코멘트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케이건의 PPH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PPH가 성공적으로 캠의 직관을 설명한다고 한들 그것이 다른 이들이 가진 직관이 잘못되었고 캠이 가진 직관이 타당하다고 입증하는것 까지 성공하느냐?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리뷰어께서 말씀하신대로 캠의 주장이 옳다면 캠과 반대되는 직관들이 틀렸다는 것을 보여야겠죠. 하지만 캠의 이론에 아무리 추가 설명을 제시해도 결국 캠과 다른 직관을 가진 이들이 틀렸다는걸 입증하는데는 실패했다는 것이 요지입니다. 핵심은 서로 직관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왜 그 다른 직관들 중 캠의 직관이 가장 옳고, PPH가 그것을 입증해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2`) 캠, 바우만, 그리고 모든 종류의 일원주의자들은 트롤리 문제를 해결할 때 특정 문제에서 한 명을 희생하는게 허용가능한지의 여부를 정당화하거나 부정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케이건의 비판을 확장하면 캠 뿐만 아니라 트롤리 문제에 참여하는 그 어떤 철학자들도 자신의 직관이 옳고 타인의 직관은 틀렸다를 입증하는데 실패합니다. 실제로 트롤리 문제에서 모두가 받아들이기는커녕 대체로 받아들여지는 해결책 마저도 없는 상황입니다. 저는 일원주의적 접근을 받아들이게 되면 특정한 직관이나 직관의 집합들만 옳고 나머지는 그르다는 것을 입증해야 하는 unpromising한 기획에 참여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캠의 PPH와 바우만의 PEH가 근본적으로 일원주의적 전제로 인해 실패하게 됐음을 보이고자 했습니다.

3`) 트롤리 딜레마 문제에서 철학이 의사결정과정에 어떤 조언을 줄 수 있을지의 문제에 대해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써놓기는 했지만, 저는 각 선택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논증의 객관성, 타당성, 건전성을 검증하거나 생각해봐야할 요소를 추가적으로, 혹은 생각하지 말아야할 요소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토론의 규칙과 전제를 조율하는 적극적인 심판 내지는 사회로서 참여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 그 외 코멘트들에 대한 답변

이후로는 좀 자잘한 코멘트들에 대한 (구차한) 해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이 비판을 더 치밀하게 다루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만 리뷰어가 정확하게 본 대로 이후 훨씬 강한 비판이 준비돼있고, 상대적으로 사소한 비판이기에 간략하게 처리하고 넘어간 면이 있습니다. 제 전체적인 의도나 기획에는 부합하지만 철학적 기본기를 연습해야 하는 석사논문의 취지상 아쉬운 부분인건 인정합니다.

결과주의도 다뤘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비결과주의는 강한 의무주의나 강한 결과주의와 달리 표준 사례와 루프 사례에서는 기차를 돌리는 것이 허용되지만, 뚱뚱한 남자 사례에서는 한 명을 희생하는게 허용되지 않는다는 일견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법한 직관들을 받아들이고 이것을 해명하는데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결과주의자 중에서 이런 문제의식, 직관을 받아들이고 트롤리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논문을 준비하고 또 지도받을 때 이렇게 최대한 일반적인 사람들의 직관에 부합하는 이론을 세우려는 시도도 성공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검토할 이론들을 선별하는데, 비결과주의 이론들 말고 결과주의 이론들 중에 이런 시도를 하는, 특히 결과주의 진영에서 이런 시도를 하는 작업은 제가 아는 한 없었습니다. 지도교수님께 여쭤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결과주의 이론을 검토하는 자리에 또다른 비결과주의 이론인 피터 바우만의 PEH가 검토된 것입니다.

리뷰가 부족하다고 하셨지만 오히려 리뷰를 보면서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제 논문을 더 충실하게 만들 방법들이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이 큽니다. 이 아쉬움은 앞으로 제가 공부를 하고 글을 쓰는데 있어 시금석으로 삼도록 하겠습니다. 귀중한 코멘트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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