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내의 철학 연구자들은 왜 서로의 글을 진지하게 읽지 않을까?' 이건 제가 항상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의문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국내 철학계는 좁은데, 그 좁은 철학계에서 생산되는 연구를 서로 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그다지 관심도 없고, 각자 자기 고립되어서 자기 길만 가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래서 올해 초에, 제 주변 대학원생 연구자들이 출판한 철학 논문들을 한 달에 한 편이라도 "이 논문이 대단하다!"라는 제목으로 리뷰해 보자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2) 그래서 1월과 2월에는 계획대로 리뷰를 해 보았는데, 3월부터 제가 이번 학기에 새로 작업하고 있는 글이 하나 생겨서 계획보다 리뷰가 많이 늦어지고 있네요. 그래도 3월과 4월에 리뷰할 논문들은 정했고, 그 중에서 3월 리뷰 논문은 일단 읽어둔 상태입니다. 각각 최우창의 「현상적 마음 상태의 반선명성」과 박성준의 「순자의 삼혹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3) 최우창의 「현상적 마음 상태의 반선명성」은 티모시 윌리엄슨의 반선명성 논증(anti-luminosity argument)을 소개하면서 이에 대해 제기되는 셀림 버커의 반론을 논박하는 글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의 마음에는 우리 자신조차 선명하게 알 수 없는 상태가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에요. 마음의 선명성(luminosity) 논제와 오차 범위 원리(margin of error principle)라는 두 가지 주장을 모두 받아들일 경우 모순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명성 논제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 논문의 핵심입니다.
(4) 이 논문은 정말 '학위논문의 모범'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잘 쓰인 글입니다. 흥미롭고 중요한 주제를, 간결하고 깔끔하게 다루고 있으면서도, 글의 구성이 대단히 체계적이고 논증적이네요. 읽으면서 '학위논문은 이렇게 써야 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제가 제 석사논문을 쓰기 전에 이 논문을 먼저 읽었다면, 제 허접한 논문을 훨씬 더 많이 개선할 수 있었을 것 같네요. 제가 그동안 모범적으로 생각한 석사논문 중에 김진희의 「힌지의 동물성과 문법성」과 김주용의 「아도르노의 이성 개념의 유물론적 성격에 관한 연구」가 있었는데, 이제 최우창의 「현상적 마음 상태의 반선명성」도 저의 최애 학위논문 리스트에 포함시키려고요.
(5) 그런데, 논문이 너무 잘 쓰여 있다 보니, 솔직히 이 논문을 제가 비판적으로 다시 소개하기가 다소 겁이 날 정도네요. 다른 사람의 글을 정확히 읽고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독해하는 사람이 그만큼 능력을 갖춰야 하잖아요. 어설프게 읽고 어설프게 평가하면, 오히려 독해자의 수준이 고작 그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게 다 들통나고 말죠. 사실, 이 점 때문에 이미 논문을 오래 전에 읽고서도 쉽게 글을 쓰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기도 합니다.
(6) 박성준의 「순자의 삼혹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순자가 자기 시대의 학자들의 주장을 '삼혹(三惑, 세 가지 의혹)'이라는 범주로 분류하는 방식을 정합적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논문은 순자의 논의를 언어철학적-인식론적 문제로 해석하는 앵거스 그레이엄의 입장과 윤리적 문제로 해석하는 정재현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종합합니다. 그레이엄의 입장을 따라 순자가 삼혹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명/실(名/實)이라는 구분을 (명분justification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이름name에 대한 논의로 해석하면서도, 정재현의 입장을 따라 이름에 대한 순자의 분류가 규범적 기준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거죠.
(7) 사실, 저는 이 논문 자체보다도 논문 저자인 박성준이라는 인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저처럼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서강대 철학과에 입학한 1년 후배이고, 저와 같이 종교학을 부전공으로 공부하였기 때문에, 아주 오래 전부터 친하게 진낸 사이인데, 저는 지금까지 이 친구만큼 소설, 미술, 역사, 지리 등 인문-사회 분야 전반에 관한 온갖 지식을 박학다식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단순히 교양으로 아는 지식이 많다는 수준이 아니라, 굉장히 오타쿠스러운(?) 지식들을 폭넓게 알아서요. 아프리카 미술 연구 동향, 시리아 기독교, 인과의 형이상학, 일본 문학, 당나라 불교의 발전사, 남미 가톨릭의 토착화 과정, 미국 대중음악의 역사 등, 도대체 어디서 무얼 찾아봐야 알 수 있는 것인지 감조차 찾기 힘든 주제들을, 도서관에서 영문 자료들을 뒤져가면서 공부하는 친구거든요. 저는 항상 이 친구가 비평가를 하면 정말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8) 여하튼 이런 친구가 쓴 학위논문이다 보니 일단은 내용을 신뢰하면서 읽고 있습니다. 특별히, 학위논문에서 지도교수님을 직접 비판의 대상으로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 꽤나 인상적이네요. 또 (저는 동양철학을 제대로 공부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유가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그동안 연구가 부족했던 순자를 다루고 있다는 점과 순자를 통해 제자백가 중 한 명인 송견의 입장까지도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는 점도 이 논문이 지닌 중요한 의의 중 하나가 아닐까 하고요.
(9) 새로운 철학 분야를 처음 공부하고자 할 때, 그 분야에 관해 쓰인 석사논문들은 꽤나 유용한 '발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해당 분야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너무 수준이 낮지도 않고, 학술적 의의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으면서, 너무 전문적이거나 어렵지도 않으니까요. 물론, 자신의 석사논문을 일종의 흑역사로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리고 제 석사논문도 지금 와서 보면 부족한 부분이 너무 많아 부끄럽지만) 그래도 저는 다른 분들이 쓰신 석사논문을 통해 새롭게 배우게 되는 내용이 많네요.
최우창의 「현상적 마음 상태의 반선명성」
http://www.riss.kr/link?id=T16091411
박성준의 「순자의 삼혹에 대한 새로운 해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