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설명력은 왜 같이 갈 수 없는가?: 카트라이트의 『물리학의 법칙이 거짓말하는 법』에 대한 메모

원글: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낸시 카트라이트, 『물리학의 법칙이 거짓말하는 법』

1. 과학적 반실재론의 세 가지 유형: 반 프라센, 퍼트남, 카트라이트

I say that the laws of physics do not provide true descriptions of reality. This sounds like an anti-realist doctrine. Indeed it is, but to describe the claim in this way may be misleading. For anti-realist views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are traditionally of two kinds. Bas van Fraassen is a modern advocate of one of these versions of anti-realism; Hilary Putnam of the other. Van Fraassen is a sophisticated instrumentalist. He worries about the existence of unobservable entities, or rather, about the soundness of our grounds for believing in them; and he worries about the evidence which is supposed to support our theoretical claims about how these entities behave. But I have no quarrel with theoretical entities; and for the moment I am not concerned with how we know what they do. What is troubling me here is that our explanatory laws do not tell us what they do. It is in fact part of their explanatory role not to tell.

Hilary Putnam in his version of internal realism also maintains that the laws of physics do not represent facts about reality. But this is because nothing—not even the most commonplace claim about the cookies which are burning in the oven—represents facts about reality. If anything did, Putnam would probably think that the basic equations of modern physics did best. This is the claim that I reject. I think we can allow that all sorts of statements represent facts of nature, including the generalizations one learns in biology or engineering. It is just the fundamental explanatory laws that do not truly represent. Putnam is worried about meaning and reference and how we are trapped in the circle of words. I am worried about truth and explanation, and how one excludes the other.

(Cartwright, 1983: 55-56)

카트라이트는 물리학의 법칙에 대해 일종의 반실재론적 입장을 제시한다. 단적으로 말해, 그는 “물리학의 법칙은 실재에 대한 참된 기술을 제공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순히 ‘반실재론적’이라는 표현만으로는 카트라이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반실재론적 입장이 어떠한 근거에 의해 정당화되는지, 그리고 반실재론적 입장으로부터 어떠한 함의가 도출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과학적 반실재론 내부에서도 서로 다른 입장들이 있다. 가령,

(1) 반 프라센의 반실재론: 반 프라센은 일종의 ‘도구주의’를 바탕으로 반실재론을 제시한다. 관찰불가능한 존재물들은 단순히 경험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유용한 도구로서 상정되는 것일 뿐, 그 존재물들이 세계의 실재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할 만한 아무런 철학적 근거도 없다는 것이 반 프라센의 반실재론을 이루고 있는 핵심이다. 따라서 반 프라센의 반실재론에서는 관찰불가능한 존재물들이 이론적 도구 이상의 형이상학적 지위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2) 퍼트남의 반실재론: 퍼트남은 일종의 ‘반표상주의’를 바탕으로 반실재론을 제시한다. 뢰벤하임-스콜렘 정리에 따라, 우리의 언어는 무한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 그래서 우리의 언어는 세계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상할 수가 없다는 점이 퍼트남의 반실재론을 성립시키는 근거이다. 따라서 퍼트남의 반실재론에서는, 현대물리학의 기초적인 방정식을 제외하면, 어떠한 이론도 실재에 대한 사실을 표상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바스 반 프라센과 힐러리 퍼트남

두 종류의 반실재론과 카트라이트의 반실재론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우선, 카트라이트는, 반 프라센과 달리, 이론적 존재물을 반드시 부정하지는 않으며, 우리가 그 존재물들에 대한 지식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를 문제 삼지 않는다. 또한 그는, 퍼트남과 달리, 언어의 의미와 지시체 사이의 표상 관계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며, 현대물리학의 기초적인 방정식이 세계의 사실을 가리켜 보인다는 주장을 비판한다. 오히려 카트라이트의 반실재론은 ‘진리’와 ‘설명’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3) 카트라이트의 반실재론: 카트라이트는 진리와 설명이 서로 배제하는 관계라는 점에 주목한다. 즉, ‘진리’ 혹은 ‘참’이라는 가치를 지향한다면, 대단히 국소적인 영역에만 초점을 맞추어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경우 그 이론은 다양한 현상을 포괄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자연법칙에 대한 이론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설명력’이라는 가치를 지향한다면, 대단히 포괄적인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 이러한 경우 그 이론은 수많은 예외들을 처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참된 이론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자연세계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법칙’에 대한 이론이란 설명력을 위해 진리를 상당 부분 포기한 이론일 뿐이다. 이러한 이론이란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질 수 없다.

2. 카트라이트의 예시: 중력의 법칙과 쿨롱의 법칙

In words, Feynman tells us:

The Law of Gravitation is that two bodies exert a force between each other which varies inversely as the square of the distance between them, and varies directly as the product of their masses.

Does this law truly describe how bodies behave? Assuredly not. Feynman himself gives one reason why. ‘Electricity also exerts forces inversely as the square of the distance, this time between charges…’ It is not true that for any two bodies the force between them is given by the law of gravitation. Some bodies are charged bodies, and the force between them is not Gmm′/r2. Rather it is some resultant of this force with the electric force to which Feynman refers.

For bodies which are both massive and charged, the law of universal gravitation and Coulomb‘s law (the law that gives the force between two charges) interact to determine the final force. But neither law by itself truly describes how the bodies behave. No charged objects will behave just as the law of universal gravitation says; and any massive objects will constitute a counterexample to Coulomb’s law. These two laws are not true; worse, they are not even approximately true.

(Cartwright, 1983: 57)

카트라이트는 대표적인 ‘자연법칙’ 중 하나인 중력의 법칙을 예시로 사용하여 이론적 법칙에 대한 자신의 반실재론을 설명한다. 가장 유명한 자연법칙인 중력의 법칙조차 수많은 예외들을 무시한 채 성립한 법칙이라는 것이 카트라이트의 지적이다. 즉, 뉴턴의 법칙에 따르면,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두 물체들 사이에는 Gmm′/r**​2만큼의 힘이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법칙은 실제로는 전기띤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전기띤 물체가 지닌 최종적 힘에 대해서는 뉴턴의 법칙과 쿨롱의 법칙이 함께 적용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두 법칙을 함께 고려하더라도, 모든 물체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자연법칙이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뉴턴의 법칙도 쿨롱의 법칙도 그 자체만으로는 전기띤 물체가 지닌 힘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법칙이기는커녕 엄밀하게 말해서는 ‘거짓’으로 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전기띤 어떠한 물체도 보편적 중력의 법칙이 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질량을 지닌 어떠한 물체도 쿨롱의 법칙에 대한 반례가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법칙은 참이 아니고, 더 부정적으로 말해, 그들은 대략적인 참조차 아니다.”

3, 암묵적 수식어: ‘다른 조건이 같다면’

There is an obvious rejoinder: I have not given a complete statement of these two laws, only a shorthand version. The Feynman version has an implicit ceteris paribus modifier in front, which I have suppressed. Speaking more carefully, the law of universal gravitational is something like this:

If there are no forces other than gravitational forces at work, then two bodies exert a force between each other which varies inversely as the square of the distance between them, and varies directly as the product of their masses.

I will allow that this law is a true law, or at least one that is held true within a given theory. But it is not a very useful law. One of the chief jobs of the law of gravity is to help explain the forces that objects experience in various complex circumstances. This law can explain in only very simple, or ideal, circumstances. It can account for why the force is as it is when just gravity is at work; but it is of no help for cases in which both gravity and electricity matter. Once the ceteris paribus modifier has been attached, the law of gravity is irrelevant to the more complex and interesting situations.

(Cartwright, 1983: 57-58)

중력의 법칙에 ‘다른 조건이 갖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일 경우 그 법칙을 참으로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다른 조건이 갖다면’이라는 수식어는 그 법칙을 보편적 자연법칙의 지위에서 격하시킨다. 본래 중력의 법칙은 물체가 온갖 복잡한 상황에서 지니는 힘을 설명하는 법칙으로서 여겨졌다. 그러나 중력의 법칙이 실제로는 제약된 상황에서 제약된 설명력을 지니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우리는 이러한 법칙에 더 이상 자연법칙으로서의 지위를 부여하고자 해서는 안 된다. 중력의 법칙이 세계에 내재된 보편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다는 식의 사변을 전개하고자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4. 설명의 본성: 원인의 합성에 의한 설명

This unhappy feature is characteristic of explanatory laws. I said that the fundamental laws of physics do not represent the facts, whereas biological laws and principles of engineering do. This statement is both too strong and too weak. Some laws of physics do represent facts, and some laws of biology—particularly the explanatory laws—do not. The failure of facticity does not have so much to do with the nature of physics, but rather with the nature of explanation. We think that nature is governed by a small number of simple, fundamental laws. The world is full of complex and varied phenomena, but these are not fundamental. They arise from the interplay of more simple processes obeying the basic laws of nature. (Later essays will argue that even simple isolated processes do not in general behave in the uniform manner dictated by fundamental laws.)

This picture of how nature operates to produce the subtle and complicated effects we see around us is reflected in the explanations that we give: we explain complex phenomena by reducing them to their more simple components. This is not the only kind of explanation we give, but it is an important and central kind. I shall use the language of John Stuart Mill, and call this explanation by composition of causes.

It is characteristic of explanations by composition of causes that the laws they employ fail to satisfy the requirement of facticity. The force of these explanations comes from the presumption that the explanatory laws ‘act’ in combination just as they would ‘act’ separately. It is critical, then, that the laws cited have the same form, in or out of combination. But this is impossible if the laws are to describe the actual behaviour of objects. The actual behaviour is the resultant of simple laws in combination. The effect that occurs is not an effect dictated by any one of the laws separately. In order to be true in the composite case, the law must describe one effect (the effect that actually happens); but to be explanatory, it must describe another. There is a trade-off here between truth and explanatory power.

(Cartwright, 1983: 58-59)

설명력이 큰 ‘근본적 법칙(fundamental law)’들은 사실을 기술하지 못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들은 작은 과정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발생한다. 따라서 (카트라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들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근본적 법칙이란 언제나 더 작은 과정들을 전제해야 한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근본적’이라 할 수 없다. 또한 (카트라이트의 주장이 지닌 함의에 따르면) 근본적 법칙이란 작은 과정들에서 이루어지는 대상의 움직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법칙’이라고도 할 수 없다. 어느 쪽으로 보든지, 자연세계를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근본적 법칙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카트라이트의 반실재론은 설명의 본성에 대한 논의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떠한 현상을 설명한다는 것이란 그 현상을 더 단순한 요소들로 환원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인의 합성에 의한 설명(explanation by composition of causes)’이라고도 일컬어질 수 있는 이러한 환원의 작업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과정에 있어서 중심적이다. 크고 작은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법칙이 불가능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복잡한 현상을 기술하는 법칙은 단순하지 않다는 점에서 참될 수가 없고, 참된 법칙은 단순하다는 점에서 복잡한 현상을 기술할 수가 없다. “참과 설명력 사이에는 여기서 거래가 존재한다.” 가령, 질량을 지니면서 전기띤 물체들의 복잡한 운동은 중력의 법칙과 쿨롱의 법칙의 결합을 통해 설명된다. (a) 이러한 복잡한 현상에 대해 ‘참’이 되는 법칙이란 중력의 법칙도 쿨롱의 법칙도 아닌 (그 현상에 정확히 대응하는) 제3의 법칙이어야 한다. 그러나 (b) 이러한 복잡한 현상을 ‘설명’하는 법칙이란 (그 현상보다도 더 작은) 중력의 법칙과 쿨롱의 법칙이어야 한다. 참과 설명력을 동시에 지닌 보편적 법칙이란 ‘설명’이라는 활동의 본성상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카트라이트의 이러한 논의는 1990년대 이후로 ‘얼룩진 세계(dappled world)’에 대한 사유로도 이어진다. 세계가 수많은 법칙들에 의해 지배되는 다양한 영역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 카트라이트가 제시하는 존재론이다. 이러한 입장은 ‘반실재론’이라는 단순한 용어만으로 규정되기는 어렵다. 카트라이트의 존재론이 모든 현상에 적용되는 포괄적 법칙에 대해 반실재론적 입장을 취하기는 하지만, 수많은 개별적 현상에 대해서까지도 반실재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카트라이트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우주의 창조자는 꽤나 ‘너저분한 정신’을 지닌 분이다. 그는 통일적이고 일원적인 법칙에 따라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파편적이고 다원적인 법칙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였다. 따라서 현실의 모든 대상과 사건을 관통하는 실재의 구조나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수도 없이 다양하고 풍부한 존재의 영역들과 그 영역들에 적용되는 수도 없이 다양하고 풍부한 존재의 법칙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을 뿐이다.

참고

N. Cartwright, How the Laws of Physics Lie, Oxford: Clarendon Press,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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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라이트가 합력[resultant force]과 그 성분력을 제대로 구별하고 있나요? 중력 법칙과 쿨롱 법칙은 각각 물체에 작용하는 어느 한 힘을 다루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나요? 그러면 중력 법칙은 전기 띤 두 물체 사이에 작용하는 여러 힘 가운데 하나를 다룰 뿐입니다. 각 물체에 작용하는 합력 말고요.

그래서 저는 카트라이트의 위 주장에 나온 "the force between them"이라는 명사구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정관사 'the'를 부정 관사 'a'로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정한 주장의 내용은 다음과 내용상 동등합니다.

질량 있는 어떤 두 물체 사이에는 만유인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그런 두 물체를 카트라이트가 제시하지는 않은 듯하네요.

아니면 앞서 말한 명사구를 'the sum of the forces between them'으로 바꿀 수 있겠죠. 그렇게 고친 주장은 중력 법칙과 양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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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인용한 부분이 3장의 1절까지인데, 카트라이트가 그 바로 다음인 2절에서 벡터 개념을 사용하여 말씀하신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다룹니다. 가령, 북쪽을 향하는 힘과 동쪽을 향하는 힘의 합력은 북동쪽을 향하는 힘이 되겠지만, '북동쪽'이라는 방향은 사실 '북쪽'으로 향하는 것도 아니고 '동쪽'으로 향하는 것도 아니라고 지적하면서요.

When a body has moved along a path due north-east, it has travelled neither due north nor due east. The first half of the motion can be a part of the total motion; but no pure north motion can be a part of a motion that always heads northeast. (Cartwright, 1983: 60-61)

그래서, 카트라이트의 입장에서 볼 때, 북쪽 힘을 설명하는 것과 동쪽 힘을 설명하는 것과 북동쪽 힘을 설명하는 것은 서로 별개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조건이 같다면'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된 만유인력의 법칙이 질량을 지닌 물체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여서, 그 법칙이 질량을 지니면서 전기띤 물체까지도 설명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 카트라이트의 지적이라고 보입니다.

그런데 카트라이트의 이 주장이 chabulhwi님의 주장과 상충하는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만유인력이 법칙이 적어도 "어느 한 힘"에 대해서는 잘 적용되지 않느냐는 chabulhwi님의 주장을, 카트라이트가 반드시 부정할 것 같지는 않아서요. 오히려 카트라이트의 논점은 만유인력의 법칙이 "어느 한 힘"을 잘 설명하는 국소적 법칙일 뿐, "모든 힘"을 설명하는 보편적 법칙은 아니라는 데 있다고 보입니다. 즉,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보편적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카트라이트의 반실재론의 핵심이다 보니, 국소적 현상을 설명하는 개별적 법칙들이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해 카트라이트가 거부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유인력 법칙이 '모든 힘'을 설명하는 보편적 법칙이라고 생각하는 동시대 물리학자가 있나요? 카트라이트의 이 주장은 별로 놀랍지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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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역학이 지배적이던 시대에는 뉴턴의 법칙들이 '모든 힘'에 대해 적용된다고 생각하였던 과학자들이 실제도로 꽤 있지 않았나요? 또, (반드시 만유인력의 법칙은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자연법칙'이 존재한다고 믿는 과학자들은 꽤 있는 것 같습니다. 혹은 특정한 물리학 법칙이 '보편성'을 지닌다고 철학적으로 너무나 순진하게 생각하는 물리학자들이나 과학철학자들도 없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카트라이트가 제시하는 논의들은 일종의 '규제적'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물리학에서 곧바로 거창한 철학적 함의를 이끌어내려는 시도들에 대해 경각심을 줄 수는 있는 것으로 보여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방문을 열거나 닫을 때, 그 사람이 방문을 밀거나 당기는 힘을 당시 물리학자들이 만유인력 법칙으로 설명했을까요?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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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물리학자들이나 과학철학자들이 너무 손쉽게 '자연법칙' 혹은 '보편법칙'을 운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이상하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는 분들도 꽤 많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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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말뜻은 당시 물리학자들이 그랬을 것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시 물리학자들의 생각이 지금 보건대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라요. 이는 몇백 년 전 물리학사를 조사해야 할 문제 같네요.

당시 물리학자들이 모든 힘을 만유인력 법칙으로 설명했다면, 그들은 척력(두 물체가 서로 밀어내는 힘)도 인력(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으로 설명한 셈입니다. 이는 꽤 의심스럽네요.

수정 전 댓글을 보고 썼습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 층위의 의미 모두 지닐 수 있죠. 방문을 여는 사례도 포함하여서, 질량을 가진 물체들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는 만유인력의 법칙이 분명히 꽤나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이 법칙을 '자연법칙' 혹은 '보편법칙'이라고 확대해석하였던 과학자들은 당대는 물론 지금도 꽤 있을 거예요. 그래서 (a) 실제 과학 실천의 관점에서도, 과학자들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그렇게까지 세세한 상황에 실제로 다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그 법칙을 '보편법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상하고, (b) 저의 개인적인 관점에서도, 그러한 실천적 사실을 과학자들 자신이나 과학철학자들이 자주 망각한다는 점이 이상해 보입니다.

주의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방문을 열거나 닫을 때, 저와 방문 사이에는 만유인력이 작용합니다. 하지만 그 인력은 제가 근육을 이용해 방문에 가하는 힘과 구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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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그러다 보니, 만유인력의 법칙을 그 사례를 설명하는 데 사용할 수야 있겠지만, 굳이 그 법칙을 사용하여 문이 열리는 원리나 문과 손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라는 데 저도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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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저라면 이렇게 표현하겠습니다.

사람과 방문 사이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은 사람이 방문에 가하는 힘보다 훨씬 작다. 그래서 사람이 방문을 열거나 닫을 때, 방문에 작용하는 합력을 구하는 과정에서 그 만유인력을 무시해도 큰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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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n차원 데카르트 좌표계 위에 있는 질점이고, 시각 t에 대한 P의 위치를 벡터값 함수 r(t)로 나타낼 수 있을 때, rP의 운동을 나타냅니다. 저는 이를 바탕으로 카트라이트가 말한 'part of a motion'의 뜻을 다음과 같이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북쪽만을 향하는 운동은 항상 북동쪽을 향하는 운동의 시간적 부분이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오전 11시부터 정오까지의 제 움직임은 오늘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의 제 움직임의 시간적 부분입니다.

여기서 운동과 힘을 명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서 정의한 시간적 부분 운동은 합성력을 이루는 성분력과 정의 방식이 다릅니다.

동쪽을 x축의 양의 방향으로, 북쪽을 y축의 양의 방향으로 정한 좌표 평면에서, 북쪽 힘 (0, 3)은 북동쪽 힘 (4, 3)의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4, 3) = v + (0, 3)인 평면 벡터 v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북동쪽 힘 (4, 3)을 그런 벡터 v와 북쪽 힘 (0, 3)의 합으로 나타낼 때, 북쪽 힘 (0, 3)은 북동쪽 힘 (4, 3)의 성분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부분 힘을 이처럼 이해하면, 동일한 좌표계 안의 모든 힘 F₁F₂에 대해 F₁F₂의 부분이라는 쓸모없는 결론이 나옵니다. 부분 힘이나 성분력이라는 개념은 어떤 힘을 두 힘으로 분해한 상황에서나 한시적으로 유의미한 듯해요.


다시 생각해 보니, 카트라이트의 보기에서 운동의 '시간적 부분'과 '공간적 부분'을 구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 두 용어는 제가 만든 것이니 물리학 교재에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보건대, 'the first half of the motion'이 늘 북동쪽으로 향하는 운동의 부분인 이유는 어떤 'pure north motion'이 그 북동쪽 방향 운동의 부분인 이유와 다릅니다. 앞엣것은 시간적 부분이고, 뒤엣것은 공간적 부분이 될 수 있습니다.

운동과 힘을 구별해야 한다는 논지는 이해하겠지만, 그 문제가 카트라이트의 논의에서 쟁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카트라이트가 든 북동쪽 움직임의 예시가, 카트라이트가 백터 개념으로 전개하는 (주로 힘에 대한) 논의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보기는 어려울 수 있지만, 단순한 현상에 적용되는 법칙이 복잡한 현상까지도 예외 없이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그의 기본 논지는 여전히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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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라이트의 결론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제시한 근거가 실망스럽네요.


인용문을 더 자세히 읽어 보니, 카트라이트는 만유인력 법칙과 관련된 제 지적을 예상했네요. 그의 논증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는 저도 책을 직접 읽은 뒤에 해야겠습니다.

This law can explain in only very simple, or ideal, circumstances. It can account for why the force is as it is when just gravity is at work; but it is of no help for cases in which both gravity and electricity matter. Once the ceteris paribus modifier has been attached, the law of gravity is irrelevant to the more complex and interesting situations.

"of no help"라는 표현이나 "irrelevant"라는 표현은 너무 지나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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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두 법칙을 함께 고려하더라도, 모든 물체에 예외 없이 적용되는 자연법칙이 존재한다고는 말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뉴턴의 법칙도 쿨롱의 법칙도 그 자체만으로는 전기띤 물체가 지닌 힘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편적 법칙이기는커녕 엄밀하게 말해서는 ‘거짓’으로 여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전기띤 어떠한 물체도 보편적 중력의 법칙이 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고, 질량을 지닌 어떠한 물체도 쿨롱의 법칙에 대한 반례가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법칙은 참이 아니고, 더 부정적으로 말해, 그들은 대략적인 참조차 아니다

예외없이 적용되고 있다는 설명이 왜 참이 안되는지 이해가 어렵긴 하네요. 앞에서 말한 쿨롱과 중력이 같이 예외없이 적용되고 있다는 설명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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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라이트는 너무나 상식적인 주장을 (오히려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얼핏 실재론자의 말꼬리를 잡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즉,

중력의 법칙: 두 물체 사이의 힘은 그 물체들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그들의 질량의 곱에 비례한다.

이 법칙은 '모든' 두 물체 사이에 Gmm ′/r 2만큼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두 물체 사이에 그만큼의 힘이 작용하지 않는 '어떤' 예외 사례가 존재한다면, 이 법칙은 거짓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력의 법칙에 대한 반례: 어떤 두 물체 사이의 힘은 그 물체들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지 않거나 그들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기띤 물체 사이의 힘은 바로 이 반례의 형식에 정확히 대응합니다. 중력의 법칙은 전기띤 물체 사이의 힘이라는 예외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두 물체에 적용되는 '보편' 법칙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카트라이트의 지적이죠. 그래서, 중력의 법칙을 이러한 예외에서 구해내어 '참'이 되도록 만들려면 다음과 같이 그 법칙에 조건을 추가해야 합니다.

중력의 법칙 수정: 만일 중력 이외의 다른 힘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두 물체 사이의 힘은 그 물체들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그들의 질량의 곱에 비례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조건이 같다면(ceteris paribus)'이라는 수식어가 추가된 중력의 법칙은 '참'인 법칙이지만 '설명력'은 상당히 제약됩니다. 이 법칙은 매우 특수하고, 이상적이고, 세부적인 현상에 적용되는 국소적 법칙일 뿐, '모든' 두 물체 사이에 적용되는 법칙이 더 이상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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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는 상상의 영역이지만 궁극의 이론이라 일컬어지는 통일장 이론이 완성되면 카트라이트는 뭐라고 대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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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항상 저는 짧은 분량의 질문이나 의문을 던지는데, YOUN님은 길게 답변을 해주시니 공력에 감사드릴뿐입니다.

중력의 법칙에 대한 이해가 잘못된 거 같습니다. 중력의 법칙은

두 물체 사이의 은 그 물체들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그들의 질량의 곱에 비례한다.

이게 아니라

두 물체 사이의 중력은 그 물체들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그들의 질량의 곱에 비례한다.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래 말씀하신

중력의 법칙에 대한 반례 : 어떤 두 물체 사이의 힘은 그 물체들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지 않거나 그들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지 않는다.

이것은 반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 아래 논의로 이어지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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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저는 카트라이트의 책에 나와 있는, 중력의 법칙에 대한 리처드 파인만의 설명 부분을 거의 그대로 번역하였습니다. 저는 물리학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세부 내용은 잘 모르지만, 두 물체 사이에 Gmm ′/r 2라는 공식에 따라 작용하는 힘을 ‘중력‘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요? (a) 중력은 Gmm ′/r 2의 공식을 따른다는 주장과 (b) 두 물체 사이에서 Gmm ′/r 2의 공식을 따르는 힘이 중력이다는 주장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건 정말로 제가 확신이 없어서 제기하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차이가 없다면, 카트라이트의 논의에 대한 비판이 성립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모든 두 물체 사이에는 Gmm ′/r 2의 공식을 따르는 힘이 존재하고, 그 힘을 ‘중력‘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중력의 법칙의 주장이라면, 그 공식이 정확히 적용되지 않는 힘의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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