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적 해석학에 대한 질문

형이상학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상학에 따르면 세계는 우리에게 항상 어떤 의미(노에마)로서 주어집니다. 가령 같은 나무라 할지라도 자연과학자에게는 생물학적인 나무로 주어지고, 목수에게는 자재로 주어지고, 종교인에게는 이렇게, 예술가에게는 저렇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존재란 곧 의미를 드러내는(탈은폐) 것이고, 이러한 의미들의 총체가 곧 세계가 됩니다. 따라서 과학의 세계, 종교의 세계, 예술의 세계 등등 세계는 해석자의 수만큼이나 무한히 다양할 수 있고 미래를 향해 항상 열려있습니다. (youn님의 블로그를 참고했습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형이상학적 의미는 존재할 수 있나요? 같은 나무가 자연과학자에게는 생물학적인 나무, 목수에게는 자재, 예술가에게는 미적인 대상, 종교인에게는 신이 내린 숭배의 대상으로 주어진다면, 마찬가지로 플라톤이나 형이상학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형이상학적 대상으로서의 나무', '나무의 이데아', '이데아의 모방본으로서의 나무' 이런 식으로 주어질 수 있지 않나요?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왜 이걸 부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령 형이상학자가 착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착각한 게 맞다면 '거짓된 방식으로 그들의 의식에 드러난'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A를 B로 착각했다 하더라도 내 의식에 B는 생생하게 있는 것이니깐요. 존재는 곧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고, 맞게 드러내든 틀리게 드러내든 어쨋든 형이상학자들의 의식에 드러나긴 했으므로 형이상학적 의미는 존재한다고 봐야 되지 않나요?

논의를 확장시키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건 없어 보입니다. 설령 무언가가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의미를 드러내고 있잖아요. 따라서 초역사적이고 탈역사적인 것도 초역사적이라고 탈역사적이라는 방식으로 의미를 드러내고 있으니까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언어 바깥'도 '초역사적이고 탈역사적인 것'도 '형이상학적인 것'도 존재합니다. 이렇게 말한 순간 제 의식에 드러났으니깐요. 하지만 해석학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역사적입니다. 그렇다면 초역사적인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면 역사적이니까 초역사적인 것은 역사적이다(?)가 되버립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할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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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이상학'의 의미가 무엇인가?

'형이상학'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두 가지 정도로 형이상학의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a) 현상학자들이 비판하는 '형이상학'은 단일한 의미만이 실재를 진정으로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학문입니다. 현상의 세계는 '다양한' 의미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너머에 '단일한' 실재의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양한 현상적 의미는 모두 '거짓'인 반면, 단일한 실재의 구조에 대한 진술은 '참'이라고 주장하는 학문 말이에요. (제가 요즘 영미권 메타형이상학 관련 논문들을 자주 찾아 보고 있는데, 이쪽 용어를 사용하자면, 테드 사이더의 '존재론적 실재론(ontological realism)' 같은 입장들이 현상학자들이 반대하는 종류의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겠네요. 반대로, 현상학자들의 입장은 '존재론적 다원주의(ontolocial pluralism)'이라고 할 수 있을 거고요. 실제로, 크리스 맥다니엘이라는 영어권 형이상학자는 바로 이 구도를 바탕으로 메타형이상학의 논의에 하이데거를 끌어들여 와서 사이더 vs. 하이데거라는 구도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b) 그런데 현상학자들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형이상학'의 의미도 존재하기는 합니다. 가령, 헤겔은 현상 뒤에 '사물 자체'라는 단일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입장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철학자들 중 하나이지만, "형이상학 없는 민족"을 "지성소 없는 성전"이라고 비유할 만큼 형이상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이때 '형이상학'이란 현상 뒤편에 있는 단일한 실재의 구조에 대한 학문 따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형이상학이란 각 민족의 예술과 종교를 통해 표현된 정신을 (특별히, 서양 예술과 종교의 역사 속에 나타난 서구인들의 정신을) 개념적으로 명료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이렇게 헤겔의 형이상학 개념을 단순화해서 설명하면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또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도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의 형이상학과는 많이 다릅니다. 화이트헤드 역시 단일한 실재의 구조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철학자 중 하나죠.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과정(process)'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틀을 제시하는 것이 유의미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 관점에서 수행되는 자신의 독특한 세계 해석에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죠.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것을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세상이 어떤 식으로 기술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를 형이상학이라고 본 것입니다.

말하자면, (a)의 형이상학이 아닌 (b)의 형이상학은 현상학자들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b)의 형이상학은 일종의 세계 '해석'이라고 할 수 있죠. 서구의 예술과 종교 속에 나타난 세계 해석은 어떤 것인지를 해명하는 작업이 '형이상학'이라 불릴 수 있고,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세계 해석을 해명하는 작업이 '형이상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죠. 형이상학이 이렇듯 자기 자신을 하나의 '해석'이라고만 인정한다면, 이런 형이상학 개념은 현상학과 충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형이상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단순한 '해석'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지만요.)

(2)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비은폐(Unverbogenheit)'에 언제나 '탈은폐'의 요소와 '은폐'의 요소가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은 하이데거의 중요한 논지 중 하나입니다. 즉, 무엇인가가 드러나는 상황과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 언제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는 거죠. 그리고 이 점은 후설이 '음영(Abschattung)'이라는 개념으로 강조한 사실을 하이데거가 발전시킨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밝게 주어지는 측면이 있다면, 그 뒤로 어둡게 감추어지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 후설의 음영 개념이 말하고 있는 사태거든요.

그런데 이 '드러나지 않는' 측면이라는 것이 '형이상학적' 측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리-토끼' 그림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 우리가 '오리' 그림을 보게 되면 '토끼' 그림이 감추어지고, '토끼' 그림을 보게 되면 '오리' 그림이 감추어지잖아요. 하지만 이때 감추어지는 그림이라는 것이 '사물 자체'처럼 현상 뒤편 어딘가에 놓인다는 의미는 아니죠. '오리' 그림이든 '토끼' 그림이든, 그 둘은 모두 '현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즉, 어느 쪽이 다른 한쪽에 의해 감추어진다고 해서, 그 둘 중 어느 한쪽이 '사물 자체'라고 여겨져서는 안 되는 거죠. 오히려 특정한 지향적 태도가 세계를 완벽하게 포착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 후설과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태도를 취하고서 '오리'와 '토끼'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는 거예요. 한 마디로, 어느 누구도, 어떤 지향적 태도도, '신의 관점(God's eye-vew)'에서 세계를 완벽하게 볼 수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음영'이나 '비은폐' 개념이 현상의 숨겨진 측면을 말한다고 해서, 이 사실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에 대한 옹호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숨겨진 측면, 은폐된 측면, 드러나지 않은 측면이란 '사물 자체'가 아니니까요. 그조차도 우리가 지향적 태도를 변경할 경우 다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현상'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죠. 오히려 지향적 태도에 근거한 우리의 의식에서는 '신의 관점'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그 두 주장의 요지에요. 그래서 '신의 관점'으로부터 단일한 실재의 구조를 파악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의 오래된 시도가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 개념들에 함의되어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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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게 있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을 읽고 나니 스트로슨이 제시했다는 구분이 생각났습니다. (b)를 '기술적 형이상학'에 대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이런 측면에서 기술적 형이상학=철학적 해석학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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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제가 기술적 형이상학과 철학적 해석학의 관계를 깊이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스트로슨의 기술적 형이상학은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 개념 도식‘을 기술하려는 시도 아닌가요? 저에게는 그 시도가 일종의 칸트주의적 시도라고 보여요.

헤겔의 형이상학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 기술적 형이상학과 유사한 측면이 있기도 한 것 같아요. 헤겔이 염두에 두고 있는 ‘서구 예술‘과 ‘서구 종교‘에 나타난 정신이란, (적어도 헤겔이 보기에는) 단순히 ‘서구‘나 ‘근대‘라는 특수한 지역과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 어떤 보편성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지니까요. 실제로, 테리 핀카드가 헤겔의 형이상학이 어떤 점에서 ‘기술적‘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점에서 ‘규범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도 해요. (아래 영상의 29:15 이하에 관련 내용이 있어요.)

그리고 하이데거나 가다머의 해석학에도 어느 정도는 기술적인 측면이 있기는 해요. 소위 실존범주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의라든가, 경험의 역사성에 대한 가다머의 논의가 그런 기술적 측면에 속하겠죠. (그 두 사람은 ‘현상학적‘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후계자들은 철학적 해석학에 대해 ‘현상학적 해석학‘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애초에 현상학이 ‘기술적‘ 철학이니 ‘현상학적‘과 ‘기술적‘은 서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는 표현이라고 보여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고 옹호하는 해석학은 보편적 개념 도식에 대한 기술은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보편적 개념 도식‘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스러워 하고, 또 그런 맥락에서 칸트주의의 정당성을 의문스러워하거든요. 오히려 저는 다양한 개별적 개념 도식에 대한 기술 작업으로서의 해석학을 선호해요. 리쾨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석의 갈등‘이야말로 해석학이 주목할 만한 사안이라고 보는 거죠. 서로 다른 경쟁하는 해석들을 비교해서, 어느 쪽에게 어떤 의의가 있는지 따지는 작업을 좋아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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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답변에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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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바쁘실텐데 답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형이상학이나 탈은폐에 관한 제 이해가 좀 더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질문드립니다.

현상학자가 정말로 '존재론적 다원주의'를 표방한다면, '존재론적 다원주의' 자체를 하나의 기본값으로 삼고서 이에 반대되는 '존재론적 실재론'을 유의미하게 공격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형이상학을 둘로 나누고서 전자는 취하고 후자는 취하지 않는 태도는 존재론적 다원주의의 기본 가정에 모순되지 않습니까? 한편으로는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형이상학자의 독단은 치료되어야 한다거나, 그렇지 않다면 (현상학자가 인정하는 ) 두번째 의미의 형이상학으로라도 완화될 필요가 주장은 모순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가장 현상학과는 가 먼 전통적 의미의 형이상학에게조차 '그런 세계도 가능하다'라고 말하며 관용을 베푸는 게 맞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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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나, 칸트 같은 사람들이 제시한 형이상학의 체계대로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다만, 그 체계가 실재의 구조에 대한 유일무이한 정답인 것처럼 주장한다면 문제가 생기죠. 마치 한국어를 사용해서 세계를 표현하고 설명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한국어만 유일무이한 언어이고 다른 언어들은 모두 거짓이라고 한다면 얼토당토 않은 주장인 것처럼요. 한국어도 영어나, 독일어나, 일본어처럼 하나의 언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문제 없지만, 한국어만이 유일무이한 언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인 거죠. (실제로, 존재론적 실재론자들은 '자연의 결(nature's joints)'을 있는 그대로 깎아내는 단일한 언어인 '존재론어(Ontologese)'가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존재론적 다원주의자들은 특정한 존재론어만 실재에 대응하고 다른 언어들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독단적 주장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것이죠.)

사실, 이 주제는 현상학에서 논의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잔니 바티모(G. Vattimo)나 리처드 로티(R. Rorty)의 해석학에서 더욱 강조되는 주제입니다. 이들의 해석학은 '현상학적 해석학'이라고 불리기는 다소 어려운 점이 있지만, (더군다나 메타형이상학에서의 존재론적 다원주의와 반드시 동일한 것도 아니긴 하지만,) 적어도 요지에 있어서는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기는 합니다. 가령, 로티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나, 칸트의 형이상학이 단순히 '틀렸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로티는 형이상학이 자기 자신을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그 철학자들이 수행한 작업은 '실재의 구조'에 대한 유일무이한 이론 건축이 아니라, 단지 다양한 글쓰기 작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들의 형이상학은 그 나름대로 충분히 문화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그 문화적인 의미를 과장해서 "나의 형이상학만이 세계에 대한 참된 이론이고, 다른 것들은 단지 거짓된 이론에 불과하다."라고 할 근거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로티의 요지입니다.

그래서 현상학이나 해석학은 단지 형이상학이 자신을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는 것이지, '형이상학'이라고 불리는 종류의 글쓰기 자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러한 논의가 결코 "형이상학자에게도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 같은 사회 규범적 태도 때문에 제시된 것도 아니고, "형이상학을 인정하지 않으면 현상학이나 해석학이 자기 모순에 빠진다." 같은 상대주의 비판적 논변의 위협 때문에 제시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애초에 현상학이나 해석학은 모든 다양한 종류의 '태도'를 허용하고, 모든 다양한 종류의 '해석'을 허용합니다. 단지, 자신이 일정한 '태도'를 취하고서 세계를 기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이론, 혹은 자신이 일정한 '해석'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이론에 대해, 그 이론이 취하고 있는 태도와 그 이론이 받아들이고 있는 해석을 일깨워줄 뿐인 거죠. 다시 정리하자면, (a) 형이상학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b) 단지 형이상학이 자신조차도 하나의 기술이고, 하나의 해석이고, 하나의 글쓰기라는 사실을 자각하기만 하면 될 뿐입니다. (c)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형이상학이 현상학과 해석학의 비판 대상이 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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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이해한 대로 정리해보자면

(1)해석학은 그것이 플라톤의 해석이든 칸트의 해석이든 형이상학자의 해석이든 문제 삼지 않는다.

(2) 하지만 특정한 해석이
-자신이 하나의 글쓰기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신이 유일무이한 정답인 것처럼 주장하며
-이처럼 독단적으로
-자신을 과장하며 대문자화하기 시작할 때
이것을 비판하기 시작한다.

해석학이 겨냥하는 것은 (1)이 아니라 (2)라는 것, 앞선 답변에서 말씀하신 (b)의 형이상학이 (1)이고 (a)의 형이상학이 (2)라는 것,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명쾌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2)에 대한 비판이 해석학적 입장에서 어떻게 유의미하게 전개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령 해석학자가 "다 좋은데, 과장하지 말아라!" 라고 말할 때, 여기에서 말하는 과장이란 (표준국어대사전의 정의를 따르면) 사실보다 지나치게 불려서 나타내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말하는 사실이란 '해석은 끝까지 간다' '이해될 수 있는 존재는 언어이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와 같은 해석학에 우호적인 문장들을 의미하겠죠. 만일 과장이 문제가 되는 이유가 그들이 (앞선 문장들로 표현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면, 즉 그들이 거짓으로 부풀렸기 때문이라면, 이것은 앞선 문장들에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모종의 독단적 권위를 부여한 셈이 되지 않나요? 다르게 표현하자면 앞선 문장들을 과장하는 것이죠. 앞선 문장들을 과장하지 않고 과장을 저지하는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해석학자가 "다 좋은데, 그게 하나의 글쓰기라는 사실을 자각해!" 라고 말할 때, '모든 게 하나의 글쓰기이다' 라는 문장만큼은 해석이 아니라 '자각해야 하는 사실' '일깨워져야 하는 사실'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불교에서 붓다가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서는 무지한 중생들에게 만물에 집착하지 말라고 설교한 것처럼(집착의 원인은 무명), 해석학자나 로티도 '모든 것이 하나의 글쓰기이다'라는 진리를 깨닫고서는 (자기네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과장하지 말라고 설교한 것으로 봐야 하나요? 그리고 그것이 진리를 깨우치고 자각하는 신의 관점(해석학자가 비판하는 바로 그 관점)을 설정하지 않고서 가능한가요?

제 질문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해석학자는 (1)을 비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2)는 비판하고 있습니다.
  2. 하지만 앞서 보았듯 해석학은 (2)를 비판하면서 '모든 것은 해석이며 하나의 글쓰기이다'를 비롯한 해석학에 우호적인 명제들만큼은 예외로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3. 이것들을 예외로 두지 않고 (2)에 대한 비판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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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습니다. 저는 제기하신 질문이 아주 핵심적이고 중요하다고 봅니다. 실제로, 바티모가 가다머를 비판하면서 저 질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데리다가 가다머를 비판하면서 저 질문을 제기하기도 하고, 투겐트하트가 후설을 비판하면서 저 질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 질문에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가 제 학위 논문 주제이기도 합니다.)

간단하게만 말씀드리자면, 저는 해석학적 예외 명제를 상정하지 않고서도, 형이상학 내부의 자기 모순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2)에 대한 비판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형이상학'이라는 사유가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이상의 명제들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성립된다는 사실을 폭로한다면, 형이상학을 성립시키는 그 명제들 사이의 자기 모순만 가지고서도 형이상학을 공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의 비판은, 아무런 외재적 비판에도 의존하지 않는 철저한 내재적 비판이죠.

이런 비판의 전략은 데리다의 해체주의가 강조하는 전략이기도 합니다. 제 논문 「부정신학 없는 해체주의를 향하여: 해체를 바라보는 네 가지 관점」에 이와 관련한 더욱 상세한 논의가 있습니다.

https://www.riss.kr/link?id=A10839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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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질문과 논의를 제시해 주신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논의 내용을 따라가다 보니 저도 몇 가지 질문과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여기에서 논의에 작은 덧붙임을 드리며, 제 의견을 공유해 보고 싶습니다. :blush:

1. 논문 질문 : 원-문자는 해석학적 예외 명제의 재기술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요?

Youn님께서 해석학적 관점에서 ‘원-문자’라는 개념을 통해 언어의 편재성을 설명해주신 부분은 매우 흥미로웠어요. 다만 이 개념이 해석학의 절대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다소 아쉬움이 있습니다. 언어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만드는 구조를 만들어버린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언어가 가진 해석적 자유를 지키고자 한다면, ‘원-문자’가 과연 좋은 방식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2. 해석학과 내재적 비판은 서로 유관한가요?

또 한 가지, Youn님께서 내재적 비판이 해석학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신 부분이 흥미로웠어요. 그런데, 만약 그렇다면 굳이 해석학이라는 이름이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닐까요? 왜냐하면, 내재적 비판이 스스로의 논리로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면, 특정 학문이나 전통에 얽매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해석학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비판이 해석학의 전제나 배경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의미가 포함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정말 무관하다면 해석학이라는 틀이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럼에도 해석학이라는 학문적 전통 안에서 이 비판을 이루려는 의도가 있다면, ‘모든 것이 해석에 불과하다’는 절대적인 주장은 예외로 두어야 하는 건지 고민이 됩니다. 그 주장이 여전히 중요한 한 가지 해석일 뿐이라고 본다면, 스스로의 전제를 절대화하는 모순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거든요.

하지만 Youn님이 이 비판을 해석학 내에서만 정당화하려 한다면, 해석학 역시 특정 명제들을 절대화하며 자기모순에 빠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즉, 해석학이 ‘모든 것은 해석(텍스트, 혹은 원-문자)일 뿐’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자신은 비판에서 예외적 관점으로 다룬다면, 자가당착을 피하기 어려운 셈입니다.

3. 결론과 제언

따라서 Youn님은 해석학을 절대화하는 명제들과 비판이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시는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저는 두 활동이 무관하다면 그러한 비판이 해석학이라고 불릴 이유는 없고, 유관하다면 해석학적 전통이 가진 예외적 명제들에 대한 비판 혹은 자가당착, 이중잣대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할 것 같아요.

결국, Youn님께서 제시하신 해석학적 비판 방식이, 해석학적 자유와 절대성 사이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혹시 제 의견이 비판적으로 들리셨다면 양해 부탁드리고요. 저는 Youn님의 관점을 존중하면서도,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고민을 더해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사실 해체란, 타인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고, 타인에게 공감하는 데에 관심을 쏟을 때 자연스레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과정에서 오히려 다양한 해석과 새로운 가능성들이 자연스럽게 피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bl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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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제 논문을 읽으셨나 보네요!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내용에 대해 간략하게 대답드리자면,

(1) 원-문자란 무엇인가?

'원-문자(archi-écriture)'는 '문자/목소리'라는 이분법을 비판하기 위해 데리다가 제시한 개념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순수한 '목소리'와 순수하지 않은 '문자'로 나누려는 입장에 반대하여, 데리다는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게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원-문자'라는 개념으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원-문자 개념에서 핵심은, "모든 것은 언어다."라거나 "모든 것은 텍스트다."와 같은 주장이 아닙니다. 이런 단언은 역설적이게도 데리다가 비판하는 형이상학에 (특별히, 이 경우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또 다시 개입하게 됩니다. 실재가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전통적 형이상학처럼) '긍정적'인 형태로든 (부정신학처럼) '부정적'인 형태로든, 어떠한 종류의 단언도 제시하지 말라는 것이 데리다의 핵심 강조점입니다. 즉, '원-문자'란 세상을 '문자/목소리', '기표/기의', '언어/실재'와 같이 나누려는 시도 자체가 자의적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일 뿐, "언어가 실재보다 우선한다."와 같은 또 다른 형이상학적 명제를 함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2)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해석학(hermeneutics)'이라는 용어는 "특정 학문이나 전통"에 얽매이는 용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 '해석학'은 유럽권 철학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폭넓게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가령, 데리다는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해체주의'를 제시하였지만, 오늘날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그롱댕이나 카푸토 같은 학자들에 의해 다시 일종의 '해석학'으로 분류되고는 합니다. 하버마스 역시 가다머의 해석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비판 이론'의 진영에서 자신의 논의를 제시하였지만, 오늘날 비판 이론은 라폰트 같은 학자들에 의해 다시 일종의 '해석학'으로 분류되고는 합니다. 그래서 "해석학이라는 학문적 전통"을 엄격하게 규정하려는 시도는 사실 큰 의미가 없습니다. (약간 오해하시고 계신 것 같지만, 저는 이런 시도에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해석학이라는 학문적 전통"에 머물러야 한다는 의식도 특별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단지 하이데거와 가다머로부터 촉발된 논쟁의 흐름을 '해석학'이라고 편의상 부르는 것일 뿐, 해석학만이 지니는 특별한 전통, 방법, 관점은 딱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3) 내재적 비판이란 무엇인가?

저는 "모든 것이 해석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을 예외로 전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주장을 예외로 상정한 채 해석학을 전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가 강조하는 논점입니다. 굳이 말하자면, "모든 것이 해석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은 저에게 있어 해석학이 성립하기 위한 '전제(premise)'가 아니라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으로 도출되는 '결론(conclusion)'입니다. 즉, 전통적 형이상학은 많은 경우 (a) 사실과 해석은 서로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입장1과 (b) 어떤 해석을 사실을 담고 있다는 입장2를 동시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두 입장이 양립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다른 외재적 기준을 도입하지 않고서도 형이상학이 지닌 자기 모순을 폭로하는 방식의 비판이라는 점에서 '내재적 비판'입니다. 그리고 이 내재적 비판으로부터 도출되는 것이 바로 '사실/해석'이라는 엄격한 이분법이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입니다. '해석되지 않은 사실'이나 '사실이 아닌 해석' 따위가 존재하지 않기에, "모든 것은 사실이다."라는 주장과 "모든 것은 해석이다."라는 주장이 같은 동전의 양면이 되는 것이죠.

철학사적으로, 이러한 방식의 내재적 비판을 가장 철저하게 수행한 최초의 인물이 헤겔이라고 저는 봅니다. 가령, 헤겔은 칸트가 현상과 사물 자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동시에, 그 둘을 다시 일치시키려 하는 자기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 비판하죠.

"모든 이원론적 체계에서, 그리고 특별히 칸트의 체계에서, 근본적 결함은 독립적이어서 결합 불가능(unvereinbar) 하다고 이전에 선언된 것을 결합하는(vereinen) 비일관성에서 드러난다. 결합된 것이 단순히 참이라고 선언되었는데도, 이제 대신 두 계기가, 곧 이들의 독립적으로 분열된 존재가 이들의 진리여야 했던 결합 속에서는 부정된 두 계기가, 이들이 오직 분열 속에서 존재하는 한에서는 진리와 현실성을 획득한다. 이와 같은 종류의 철학함은 이런 식으로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각각의 개별적 결정이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선언된다는 단순한 인식을 결여한다. 그래서 결함은 두 사유를 화해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존재한다." (G. W. F. Hegel, Encyclopedia of Philosophical Sciences in Basic Outline, Part 1: Science of Logic, §60, 원저자 강조)

헤겔이 '현상/사물 자체'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도출해내는 결론도 '매개된 직접성(mediated immediacy)' 개념에 근거한 객관적 관념론이죠. "세계는 개념에 매개되어 있다."라는 주장과 "세계는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주어진다."라는 주장이 같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이 헤겔의 강조점입니다. 그리고, 그 주장은 처음부터 일방적으로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 경험의 변증법 끝에서 도출되는 '결론'이죠. 저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형이상학을 내재적으로 비판할 수 있고, 그 결론으로 '사실/해석'의 이분법이 해체되는 지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말하자면, 헤겔의 논의 방식을 따를 경우, 해석학이 형이상학에 대한 내재적 비판만으로도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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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하고 깊이 있는 답글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Youn님의 답변을 읽으며 여러 가지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덕분에 제가 놓치고 있던 부분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볼 수 있었습니다. 답변을 따라가다 보니 다시 몇 가지 질문과 생각이 더 떠올라, 제 의견을 살짝 더하며 함께 고민해 보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적어 봅니다. :blush:

1. 그렇다면 원-문자는 단순한 비판 도구일 뿐인가요?

Youn님께서 언어의 편재성을 설명하기 위해 ‘원-문자’ 개념을 활용하신 점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이 개념이 단순히 기존 이분법을 비판하기 위한 도구로만 작동한다면, 그 자체로 가진 철학적 함의가 조금 더 명확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원-문자가 단순히 비판의 결론일 뿐 아니라, 언어적 실재를 재구성하거나 새로운 해석의 틀로 작동할 가능성은 없는 걸까요? 원-문자가 단순한 비판 도구가 아니라면, 이것이 형이상학적 전제로 작동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해석 틀로 기능할 가능성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이 부분이 조금 더 논의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 단언을 피하라는 주장은 단언이 아닌가요?

“어떠한 단언도 제시하지 말라”는 주장이 그 자체로 하나의 단언으로 작동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약간의 의문이 들었습니다. 데리다의 입장에서 형이상학적 단언을 피하려는 시도는 분명 중요하지만, 그러한 비판 자체가 (기존의 형이상학은 아니지만, 여전히) 형이상학적 전제로 간주될 여지는 없을까요?

만약 이러한 자기모순을 피하려면 비판의 틀이나 한계가 보다 명확히 설정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3.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대체할 수 있는 더 적합한 표현이 있을까요?

Youn님께서 해석학에 머물 의도가 없다고 하셨지만,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고 계신 점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어요. 해석학에 머물 의도가 없다고 밝히시지만,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독자에게 혼란을 줄 수 있으며, 논의의 전제와 방향성을 모호하게 만듭니다.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단순히 편의성에 기반한다면, 이 용어가 논의 맥락에서 적절한지 의문이 생깁니다.

저는 해석학이라는 용어는 특정한 학문적 전통이나 방법론을 암시하며, 이 용어를 사용하는 순간 독자들은 이 논의가 그 전통과 연결된다고 이해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해요. 따라서 해석학의 맥락과 무관한 논의를 펼치려 한다면, 이 용어를 대체할 다른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습니다. 혹시 ‘해석학’이라는 용어 대신, 논의의 방향성을 더 정확히 드러낼 수 있는 다른 개념이나 표현이 있는지 고민해 보시면 좋을 것 같네요. 예를 들어, ‘해체적 접근’이나 ‘텍스트 중심 비판’과 같은 표현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4. 전제와 결론의 유관성 : 헤겔의 논의가 결론에 기여할 수 있을까요?

헤겔의 변증법적 논의 방식이 해석학의 정당성을 보장한다고 보긴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헤겔의 목적과 해석학의 목적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인데요, 제가 보기에 헤겔이 칸트를 비판하는 방식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극복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지만, 이는 관념론적 종합이라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해석학의 정당성이 이와 연결되려면, 관념론적 통합을 추구하지 않으면서도 내재적 비판을 통해 형이상학을 극복할 방법이 제시되어야 할 것 같아요.

이 두 가지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논의 방식이 어떻게 해석학적 논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헤겔의 비판은 상대의 명제들에 대한 논리적 분석을 통해서 가능한데, 그러한 논리적 분석이 이분법의 해체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전제들이 필요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Youn님께서 "모든 것이 해석에 불과하다"라는 주장을 전제와 결론 어느곳에 놓더라도, 전제가 참인데 결론이 거짓인 경우가 충분히 가능해 보이거든요. 그리고 칸트와 헤겔의 논의는 개념들에 대한 국소적인 검토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에서 굉장히 일반화된 명제가 도출되는 과정이 저는 궁금하네요.

결론

다시 한 번 흥미로운 논의를 제시해 주신 점에 감사드립니다. 제 의견이 비판적으로 느껴지셨다면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만, 저는 Youn님의 논의가 가진 깊이를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몇 가지 중요한 질문과 검토가 논의를 더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원-문자’의 정의와 역할, 해석학과 내재적 비판의 관계, 그리고 헤겔의 방식이 해석학에 미칠 수 있는 영향 등은 앞으로 논의의 틀을 명확히 설정하는 데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논의를 정리하며 떠오른 생각은, 비판적 분석이 논리적 연결고리를 통해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논증들의 관계가 철저히 검토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논증의 어느 위치건, 논증의 일부인 명제들은 곧 주장이라는 점도 그렇습니다. 체계가 없으면 논증도 없고, 표준화도 불가능하니까요.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앞으로의 논의에서 이러한 부분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길 기대합니다. :bl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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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글과 논문을 읽어주시고 적극적으로 비판적 의견을 제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한 걸요! 그래도 제 글과 논문이 데이터 조각으로만 남지 않고 다른 분들에게 생각할 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ㅠㅠ

(1) 원-문자와 실재

원-문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사실 데리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해석상 의견이 다소 갈리는 지점이긴 합니다. 어떤 분들은, SUANI님이 처음에 말씀하신 것처럼, '원-문자' 개념이 다시 언어적 관념론으로 빠지는 '형이상학적' 개념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제 지도 교수님의 지도 교수님이셨던 뉴턴 가버가 실제로 이러한 입장에서 비판을 제시하였죠.) 하지만 저는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개념이 소쉬르의 '기표/기의' 이분법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도출되는 대안적 세계 해석이라고 봅니다.

비순수한 '기표'와 순수한 '기의'를 엄격하게 나누려는 시도가 가능하지 않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기의'라고 믿었던 모든 것들도 실제로는 '기표'의 요소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 데리다의 지적입니다. 그래서 데리다는 모든 것들이 '기표의 연쇄' 혹은 '기표의 놀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강조하죠. 하지만 '기표' 역시 '기의'와의 대비를 통해서만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순수한 '기의'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면, 비순수한 '기표'라는 것도 애초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할 수 있죠.

따라서, '기표/기의'의 이분법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떠한 것도 순수한 '기의'라고 말할 수 없는 동시에, 어떠한 것도 비순수한 '기표'라고 말할 수도 없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기표'와 '기의'라는 쌍개념이 동시에 해체되어서, 어떠한 것도 '기표'가 아니고 어떠한 것도 '기의'가 아닌 것으로 폭로된 상태가 '원-문자'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상태는, 역설적이게도, 모든 것이 '기표'의 측면과 '기의'의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폭로된 상태라고도 할 수 있죠.

(2) 단언과 반대 관계

'기표/기의' 이분법 혹은 '언어/실재' 이분법에 대한 데리다의 비판은 형식논리적으로 볼 때 서로 '반대(contrariety)' 관계에 놓인 두 명제가 동시에 거짓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모든 한국 사람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라는 명제와 "어떤 한국 사람도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명제는 동시에 참일 수는 없지만 동시에 거짓일 수는 있습니다. 어떤 한국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만, 다른 한국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두 명제 모두 거짓으로 드러나죠.

제가 보기에, 데리다는 서로 대립되는 형이상학적 입장들이 일종의 반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평가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머릿속 관념이나 표상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관념론이나, 우리가 실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실재론이나, '기표/기의', '언어/실재', '마음/세계' 등에 대한 잘못된 이분법을 상정한 채 성립한 반대 관계의 입장들이라는 것이죠. 그래서 "실재론이 참이다."라고 주장하든지, 그 반대로 "관념론이 참이다."라고 주장하든지, 그 주장들은 모두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형이상학적 단언을 피하려는 데리다의 입장은 이러한 방식으로 정합적이고 논리적인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3) 해석학과 해체

저는 데리다의 '해체'와 비트겐슈타인의 '치료'라는 관점에서 해석학의 논의들에 접근하길 좋아합니다. 다만, 저로서는 이러한 접근이 하이데거와 가다머로부터 내려오는 기존 해석학의 논의들과 완전히 분리된 것도 아니라고 볼 뿐더러, 새로운 용어를 사용해야 할 필요성도 잘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해석학'이라는 기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하고 유용해요. 이 용어를 통해 제가 관심을 가지는 지적 배경이 무엇인지를 부각시킬 수 있다 보니, 연구자들 사이에서 이미 합의된 텍스트 해석과 문제의식을 충분히 공유하면서 논의를 진행시킬 수 있으니까요.

(4) 헤겔과 관념론

헤겔의 철학이 "관념론적 종합" 혹은 "관념론적 통합"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a) 관념론 자체가 반드시 부정적인 입장인 것은 아닐 뿐더러, (b) 헤겔이 말하는 관념론이 어떤 관념론인지도 따져야 하니까요. 이미 칸트가 '경험적 실재론'과 '초월적 관념론'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강조한 것처럼, 헤겔도 '매개성'과 '직접성'이 동전의 양면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실재와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있다는 주장과 우리의 사유가 개념에 매개되어 있다는 주장이 서로 양립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헤겔의 강조점이죠.

그래서 헤겔의 철학이 흔히 '관념론'이라고 평가되는 것과 달리, 사실 헤겔의 철학은 '실재론'의 측면을 대단히 강하게 지니기도 합니다. (실제로, 연세대 철학과의 고 남기호 교수님은 헤겔이 결코 통속적 의미에서의 관념론자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셨던 대표적인 연구자이시기도 하셨죠.) 저는 이런 맥락에서, 헤겔의 철학이 '관념론'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비판받을 이유가 없다고 보고, 더 나아가 헤겔의 관념론이 사실상 '실재론'이라고 보는 입장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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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세하고 정성 어린 답변을 통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Youn님의 논의가 가진 깊이를 충분히 존중하며, 몇 가지 제가 느낀 점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제 논점과 질문을 명확히 하고 싶습니다

Youn님의 답변을 읽으며, 데리다와 헤겔에 대한 설명이 매우 풍부하고,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을 잘 느꼈습니다. 다만, 제 질문이나 논의의 초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뤄보고 싶어졌습니다. 제가 받는 인상은 개념적 설명이 반복되거나 논점이 확대·전환되면서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 다소 희미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제가 제기한 각 논점과 Youn님의 답변이 만나는 지점들을 하나씩 구체화하면서 다시 접근해 보고 싶습니다.

1. 원-문자와 실재

제가 원-문자에 대해 드린 질문은 “단순한 비판 도구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었습니다. Youn님께서는 ‘원-문자’를 소쉬르의 기표/기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대안적 세계 해석으로 보신다고 답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설명이 여전히 반복적으로 “이분법의 해체”라는 맥락으로만 돌아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궁금했던 핵심은, ‘원-문자’가 이분법을 해체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해석적 틀이나 실재의 재구성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가?'입니다. 즉, 단순히 “모든 것이 기표의 연쇄”라는 상태를 폭로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이를 통해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거나 다루는 방식에 어떤 구체적 변화를 제안할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2. 단언과 반대 관계

Youn님께서 데리다의 비판을 반대 관계(contrariety)로 설명하신 점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실재론과 관념론 모두를 거짓으로 간주한다는 설명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던진 질문은 ‘모든 것이 해석이다’라는 주장이 형이상학적 단언으로 간주될 위험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라는 점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반대 관계의 설명은 흥미로웠지만, 형이상학적 단언을 피하기 위해 데리다의 입장이 어떤 방식으로 논리적 자율성을 확보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답변으로 연결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예컨대, 데리다의 입장이 형이상학적 단언으로 작동하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해석이다”라는 주장도 맥락적으로 제한되거나 조건부로 작동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해석학이라는 용어의 적합성

Youn님께서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로 연구자들 간의 공유된 지적 배경과 문제의식의 유용성을 제시해 주신 점은 현실적이고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존 해석학(특히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진리 중심적 접근)과 데리다의 해체가 철학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Youn님께서 해석학 용어의 실용적 이유를 강조하셨지만, 데리다의 해체가 기존 해석학을 비판적으로 해체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의 관계가 조화로울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데리다의 접근이 기존 해석학의 진리 모형과 어떤 점에서 갈등을 빚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학적 틀 안에 남아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헤겔과 관념론

Youn님께서 헤겔의 관념론을 실재론적 측면에서 설명해 주신 점은 흥미로웠습니다. 특히 관념론과 실재론이 동전의 양면처럼 작동한다는 설명은 깊은 통찰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헤겔의 철학적 태도가 해석학의 다원적이고 열린 구조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질문이 남습니다.

저는 헤겔이 칸트의 모순을 지적하기보다는, 논의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이미 개념화되어 있다는 점에 더 관심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개념화를 일종의 “측도”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재구성된 “모든 것은 측도다”라고 주장하는 헤겔의 입장은 데리다의 “모든 것이 해석이다”라는 관점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헤겔이 “모든 것은 측도다”라고 주장하며 측정을 통해 개념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데리다는 이러한 측정 자체를 해체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헤겔에게 측정은 개념적 통일을 이루는 도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데리다에게는 이 측정 과정이 본질적으로 불완전하고 자의적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즉, 헤겔은 측정을 통해 개념과 실재를 매개하려 하지만, 데리다는 이러한 매개 자체가 끊임없이 흔들리고 탈구되는 과정을 강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이를 분명하게 하자면, 헤겔은 비판을 새로운 구성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그의 변증법은 단순히 기존의 틀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구성하고 새로운 통찰을 도출하는 데 초점이 있었습니다. 반면, 데리다의 해체는 비판적 작업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 구축하려는 철학적 시스템이 부재하다는 점에서 헤겔과 차별화됩니다.¹

헤겔의 관념론이 해석학의 다원성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측정과 내용의 구분, 차이와 공통점의 명확한 해명이 필요합니다. 특히, 차이와 공통점을 모두 보다가 “구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선언으로 나아가는 것은 과도한 비약으로 보이며, 이러한 주장에는 반드시 논리적 정당성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를 피하는 방법 중 하나는 국소적 논의에 머무르고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포괄적 선언은 부당하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헤겔의 관념론적 접근이 해석학적 다원성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비약을 어떻게 피하며, 개념화와 측정의 경계를 어떻게 정립하는지가 중요할 것입니다.

따라서 헤겔의 관념론이 해석학적 다원성과 열린 구조를 포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구분과 정당화의 과정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핵심 과제로 남는 것 같습니다.

제 의견을 정리하며

Youn님의 답변은 풍부하고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반복적으로 개념이 설명되거나, 논점이 계속해서 확대되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제기한 질문들이 충분히 다뤄지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특히 아래의 질문들이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논의되면 좋겠습니다:

  1. 원-문자가 단순히 이분법의 해체를 넘어, 새로운 실재나 해석적 틀을 제공할 수 있는가?

  2. “모든 것이 해석이다”라는 주장이 형이상학적 단언으로 간주되지 않도록 보장하려면 어떤 논리적 틀이 필요한가?

  3. 데리다의 해체가 기존 해석학의 진리 중심적 접근과 철학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4. 헤겔의 관념론이 해석학적 다원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Youn님의 논의 덕분에 여러 새로운 관점을 접하고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덧붙인 질문들이 논의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데 작은 기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blush:


  1. 예를 들어, “같다”와 “다르다”는 모두 측정에 의존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측정의 내용과 그 방법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은 채, “모든 것이 동일하다”거나 “모든 것이 다르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은 혼동을 초래합니다. 해석 가능성에 관한 논의 역시 측정 가능성을 포함하며, 이 점에서 해석학은 학문적 이성의 기초 위에서 논리적 체계를 요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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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 논점과 관련하여 @SUANI 님께 간단한 질문을 남깁니다. 질문자께서 헤겔의 입장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 조금 더 설명을 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헤겔의 칸트 비판이나 헤겔의 '개념'의 개념에 대해 통상적으로 이야기되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서술이나 용어들이 도입되고 있어 파악하기가 다소 어려워서요.

먼저 헤겔이 "논의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이미 개념화되어 있다는 점에 더 관심을 보였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혹시 칸트의 논의 속에서 칸트가 차용하는 용어들이 이미 개념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건가요? 정확히 어떤 뜻으로 말씀하신 건지 감이 잘 안 잡히네요.

또 "측도"라든지 "측정"이라는 용어들을 도입해서 헤겔의 주장을 "모든 것은 측도다"라고 정식화하고 계신데, 이 두 가지 용어들 및 해당 정식화가 정확히 어떤 뜻인지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읽기로는 "측도"나 "측정"은 "measure", 즉 측량하고 재는 기준과 그런 활동을 뜻하고, 헤겔의 주장을 "모든 것은 측정 가능하다"와 비슷한 뜻으로 이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제가 이해한 바가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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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헤겔이 논의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이미 개념화되어 있다는 점에 더 관심을 보였다”는 말의 의미

이 문장에서 제가 강조하고자 한 것은, 헤겔이 철학적 논의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이미 특정한 사유 방식과 철학적 체계 안에서 형성된 개념적 토대 위에 서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칸트의 논의에서 사용되는 주요 용어들(예: 현상, 물자체 등)이 단순히 기술적 표현이 아니라, 이미 특정한 이분법적 구조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헤겔이 비판적으로 접근했다고 보았습니다.

헤겔은 칸트가 제시한 “현상/물자체”라는 이분법이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이러한 이분법 자체가 개념적 매개 과정을 통해 통합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즉, 칸트가 차용한 용어들이 독립적이고 고정된 것으로 간주되지만, 헤겔은 이러한 용어들이 이미 상호 매개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더 높은 단계의 개념으로 종합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다만 제가 말한 “이미 개념화되어 있다”는 표현은, 헤겔에게 용어와 논의가 단순히 현상을 기술하거나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논의를 위한 매개적 역할을 한다는 뜻에서 사용한 표현입니다. 이 점에서 헤겔은 단순한 용어 사용을 넘어,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개념적 구조와 이것의 우선성에 주목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2. “측도”와 “측정”의 의미와 “모든 것은 측도다”의 정식화

제가 언급한 “측도”와 “측정”은 헤겔 논리학에서 다루어지는 “측량(measure)” 개념과 연결됩니다. 헤겔의 논리학에서 측량은 질(quality)과 양(quantity)을 통합하는 과정으로, 이는 단순히 물리적 대상을 측정하는 활동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적 구조와 변화를 이해하는 철학적 과정으로 정의됩니다.

헤겔은 『논리학』에서 측량을 질과 양의 매개를 통해 새롭게 종합되는 개념으로 다루며, 이를 통해 질과 양의 대립을 극복하고 본질(essence)로 전환합니다. 이 과정에서 측량은 사물의 내적 구조와 외적 관계를 매개하며, 개념적 통일의 핵심 도구로 작동합니다.

측량의 철학적 의미

헤겔에게 측량은 단순히 수치적 결과나 물리적 규정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는 질과 양이 서로를 매개하고 상호 규정하는 관계를 드러내는 철학적 작업을 의미합니다. 가령 질은 어떤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나타내고, 양은 그 대상을 계량하거나 수치화할 수 있는 방식입니다. 측량은 이 두 요소를 통합함으로써 대립을 극복합니다. 따라서 헤겔은 측량이 단순한 질-양 관계를 넘어서 반사(reflection)와 종합(sublation)을 통해 본질로 나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 과정은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칩니다:

  1. 특수 양: 초기 단계에서는 단순한 양적 규정으로 시작되지만, 질과 양의 관계를 규제하는 법칙으로 발전합니다.

  2. 실제 측량: 질과 양이 서로를 규정하는 구체적 관계를 통해 체계화됩니다. 예를 들어, 화학적 조합의 법칙은 특정 질과 양의 관계를 규정하는 실제 측량의 사례입니다.

  3. 무차별적 상태: 마지막으로, 양적 차이는 더 이상 고정된 질적 특성과 연결되지 않고, 이로 인해 본질로의 전환이 필요해집니다.

“모든 것은 측도다”의 정식화

제가 사용한 “모든 것은 측도다”라는 정식화는 헤겔의 측량론에서 드러나는 철학적 핵심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논의흐름이 Youn님의 흐름과 공명하는데, 이는 다음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합니다:

모든 존재는 질과 양의 상호 매개를 통해 이해될 수 있다 : 헤겔은 사물의 질적 특성과 양적 특성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이 둘이 통합된 구조 속에서만 그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측량은 개념적 통일을 위한 매개적 도구다 : 따라서 헤겔의 논리학에서 측량은 단순한 도구적 활동이 아니라, 개념적 변화와 통합을 이끄는 매개 과정입니다.

정리

“측도”와 “측정”을 통해 헤겔 철학을 정식화하는 데 있어, 제가 의도한 바는 헤겔의 측량론이 단순한 물리적 측정을 넘어선 철학적 작업임을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는 제가 부연했듯 일종의 구조를 가지는, 체계철학적 작업입니다) 이 개념은 질과 양의 대립을 통합하여 본질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헤겔 논리학의 핵심적 특징 중 하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blush:

혹시 이 설명으로도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추가 질문을 남겨주시면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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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논의들이 많은 경우 모자이크 맞추기 작업과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세부 조각들을 이어 붙여서 전체 그림을 완성시켜야 하다 보니, 그림의 윤곽이 분명해지기 전까지는 어느 부분에 어떤 조각을 써야 하는지, 전체 그림은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가 뚜렷하지 않기도 하죠. 제시하신 모든 의문이 댓글만으로 해소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다시 간략히 제 관점을 적어보겠습니다.

(1) 실재를 원-문자로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실재에 대한 변화된 이해의 결과이다.

데리다의 원-문자 개념을 "통해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거나 다루는 방식에 어떤 구체적 변화를 제안할 수 있는지" 묻는 것은 다소 어색합니다. 애초에 실재를 원-문자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데리다의 주장 자체가 전통적 철학의 실재 이해를 탈피한 '구체적 변화'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즉, 전통적 철학에서는 언어와 실재를 엄격하게 분리시킨 뒤에 언어 바깥에 실재가 존재한다고 상정하였습니다. 데리다는 이런 식의 언어/실재 이분법이 자기 모순을 지닌 것으로 폭로될 경우, "세계는 언어로만 이루어져 있다."라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이나 "세계는 실재로만 이루어져 있다."라는 실재론적 형이상학이 모두 거부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언어다."와 "모든 것은 실재다."라는 입장들 자체가 해체되고 나면, 우리가 '실재'라고 불렀던 영역이란 언제나 언어와 실재 사이의 착종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 데리다가 '원-문자' 개념으로 제안하는 '구체적 변화'입니다.

(2) 반대 관계의 입장들을 모두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 형이상학적 단언을 피하는 전략이다.

제가 데리다에 대해 지금까지 제시한 논의들은 분석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개념과 표현들로 모두 치환 가능합니다. 무엇인가를 '단언(assertion, 언명)'한다는 것은 특정한 믿음에 '개입(commitment)'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데리다는 이러한 종류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것은 실재이다."라는 실재론에 대해서도 "모든 것은 언어이다."라는 관념론에 대해서도, '존재론적 개입(ontological commitment)'을 거부하는 것이죠. 그 두 주장이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그 두 주장 어느 쪽에도 개입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두 주장에 대한 '단언'을 모두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SUANI님은 "모든 것이 해석이다."라는 주장에 자꾸 집착하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은 데리다가 직접 제시하는 주장도 아닐 뿐더러, 그 주장이 "어떤 것도 실재가 아니다."라는 의미로 제시된 것이라면 저조차도 그 주장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해석/실재'라는 이분법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일 뿐, 형이상학적 관념론이 아닙니다.)

(3) 해체주의도 해석학의 일종이라는 것이 연구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견해이다.

저는 '해석학'이라는 용어를 순전히 편의상 사용합니다. 제가 관심을 가지는 지적 배경, 제가 관심을 가지는 텍스트, 제가 관심을 가지는 논쟁사를 가리키기 위한 용어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는, 해체와 해석학이 반드시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습니다. 해체 역시 대안적 해석학이라고 보는 연구자들이 정말 많으니까요. 가령, 가다머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 중 하나인 장 그롱댕도 해체주의를 일종의 해석학으로 분류합니다. 반대로, 데리다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 중 하나인 존 카푸토도 해체주의를 해석학에 포함시킵니다. 여기에 대해 "왜?"라고 묻는 것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애초에 '해석학'이나 '해체'라는 용어가 순전히 편의상 사용되는 용어인 이상, 다수의 연구자들이 해체주의를 해석학의 맥락에 포함시켜 이해하고 있다면, 제가 굳이 그 용어 사용법을 비판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4) 헤겔을 해석학과 해체주의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입장들도 많다.

헤겔에 대한 해석에 있어 SUANI님과 저의 관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저는 여기서 상세하게 제 해석을 설명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이데거부터가 「헤겔의 경험 개념」이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자신의 현상학의 근원을 헤겔에게까지 소급시켰다는 점, 가다머 역시 스스로 헤겔학회 회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해석학적 경험 개념이 헤겔의 변증법 개념에서 나왔다고 강조한다는 점, 심지어 데리다조차 『그라마톨로지』 같은 대표작에서 '해체의 운동'이라는 자신의 개념이 "헤겔이 사유한 모든 것"을 새롭게 재구성한 방식이라고 고백한다는 점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오늘날 영어권의 로버트 피핀이나 테리 핀카드의 '반형이상학적 헤겔 해석' 및 그에 영향을 받아 나온 존 맥도웰과 로버트 브랜덤의 '분석적 헤겔 해석'은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논의와 상당히 친화적이라는 점(그래서 이 영어권 철학자들은 실제로 해석학적 맥락의 텍스트들을 적극적으로 인용하고 옹호하기도 한다는 점)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적어도 제 관점에서는, 헤겔의 철학과 해석학이 조화될 수 없다는 견해보다는, 해석학이 헤겔의 철학의 현대적 상속자라고 보는 견해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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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통적 해석과 권위에 의존하는 문제

Y님께서 제시하신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흥미로운 관점을 제공하지만, 구체적 논증 없이 기존 학계의 합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되면, 철학적 논의에서 필수적인 논증과 근거가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해석”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연구나 자료를 기반으로 하는지 알려주시면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학자분들의 논의맥락을 충분히 존중하지만, 단순히 학계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그렇게 본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질문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를 충분히 제공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데리다의 해체가 “해석학의 한 갈래”로 간주된다는 주장은 흥미롭지만,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사례나 논증이 없다면 저에게는 그저 당돌한 선언으로 보이네요.

2. 질문에 대한 답변 능력과 자료 출처

차라리 특정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어려우시다면, 차라리 그 질문에 접근할 수 있는 적절한 자료나 연구를 제안해 주시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응이 아닐까 합니다. 철학적 논의는 모든 질문에 완벽한 답변을 제공할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답변이 어려운 경우, 질문자가 스스로 탐구를 이어나갈 수 있는 방향성을 제시해 주시면 더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데리다의 원-문자 개념과 헤겔 철학 사이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참고할 만한 데리다의 저작이나 2차 문헌을 제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혹은 헤겔의 구성과 데리다의 해체를 비교하며 논의한 주요 연구를 알려주시면, 이후 논의가 더욱 생산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3. 선언적 진술의 한계

저는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해석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기보다는, 그 한계를 인식하고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태도가 철학적 논의의 본질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철학적 논의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그렇게 본다”는 방식의 주장은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 추가적인 논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컨대, 해석학과 해체의 관계에서 “해체는 대안적 해석학”이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대안적 해석학으로 기능하는지 더 구체적으로 논증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단순히 용어 사용의 문제로 축소하지 말고, 철학적 관점에서 이 관계를 명확히 설명해 주시면 더 깊이 있는 논의가 가능할 것 같아요. 특히 데리다의 “차연” 개념이 하이데거와 가다머의 진리 중심적 해석학과 철학적으로 양립 가능한지, 아니면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나타내는지 명확히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 헤겔과 해체의 관계

헤겔의 철학이 해석학과 해체주의의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헤겔의 구성적 개념이 데리다의 해체와 철학적으로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부족해 보입니다. 헤겔의 개념적 통합이 데리다의 해체적 접근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거나 충돌하는지 구체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까요? 제가 보기에 헤겔의 철학은 구성적입니다. 그리고 데리다가 헤겔의 사유를 “새롭게 재구성”했다고 하셨는데, 이는 헤겔의 변증법적 통합과 데리다의 끝없는 해체적 흔들림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 같아요.

5. 제 의견: 철학적 책임과 건설적 논의

Youn님의 답변은 풍부한 철학적 관점을 제공하지만, 질문에 대해 구체적 답변을 제시하지 않거나, 선언적 진술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논의의 생산성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철학적 논의는 모든 질문에 완벽한 답변을 제시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구체적 자료와 탐구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책임 있는 태도라고 봅니다. 따라서 제가 제기한 질문들에 대해 답변이 어려우시다면, 질문에 접근할 수 있는 자료나 연구를 제안해 주시면 더 의미 있는 논의가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

철학적 논의가 폭넓은 합의나 선언에 의존하기보다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 탐구와 방향성을 제공함으로써 더욱 건설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Youn님께서 제가 제기한 의문들에 대해 참고할 만한 자료나 논의를 제안해 주신다면, 이후 논의가 훨씬 생산적으로 전개될 수 있을 것 같아요. :bl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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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로서는 더 이상 '구체적인 논의'나 '구체적인 논증'을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마도 SUANI님과 저 사이에 구체성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저의 주장에 '논증'이 없다는 주장이 굉장히 의아하게 느껴지기는 합니다. 저는 계속 (a) 전통적 형이상학 내부의 상충하는 입장들이 모순적이라는 점, (b) 실재론과 관념론의 주장들이 반대 관계이기 때문에 두 가지가 모두 거부될 수 있다는 점 등을 논증의 형태로 제시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제 데리다 논문은 아예 형식논리에서 사용되는 연쇄논법의 형태로 데리다의 논증을 '증명'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더욱 구체적인 자료가 필요하시다면 위에서 이미 언급한 하이데거의 「헤겔의 경험 개념」, 가다머의 『진리와 방법』 제2권 중 "경험 개념과 해석학적 경험의 본질"라는 장,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김성도 역본 72-76쪽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아울러 영어권 헤겔 해석과 관련해서는 다음 링크의 논문들과 영상들을 참고하시면 좋습니다(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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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님께 드리는 마지막 의견

Youn님의 추가 답변과 함께 자료를 제시해 주신 점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논의의 범위가 확장되었고, 제가 앞으로 탐구를 이어갈 수 있는 여러 유용한 단서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몇 가지 지점에서 논의가 구체적 논증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 질문의 본질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에 대한 제 생각을 정리하며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1. 구체성에 대한 이해 차이에 관하여

Youn님께서는 구체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다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가 요청드린 것은, 단순히 자료의 제시나 선언적 진술이 아니라, 제기된 질문에 대한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논증이었습니다. 예컨대, 제가 “데리다의 원-문자가 실재를 다루는 방식에 어떤 구체적 변화를 제안했는가?“라는 질문을 드렸을 때, 이는 데리다가 착종 관계를 통해 실재를 해석하거나 다룰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적 틀을 제공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기를 요청한 것입니다. 하지만 Y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원-문자 자체가 전통적 실재 이해의 변화를 제안하는 결과”라는 선언적인 진술로 답변을 대신하셨습니다. 이는 질문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다루는 데는 부족하다고 느껴집니다. 구체성이란 단순히 많은 자료나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에 대한 논리적 연계성과 답변의 명확성을 통해 논의를 깊이 있게 이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 Youn님의 입장이 다르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철학적 논의의 본질에서 벗어난 느낌을 받았습니다.

2. 선언적 진술의 한계

Y님께서 여러 자료와 기존 학계의 합의를 인용하셨지만,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이 선언적 진술로 대체되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예를 들어, 데리다의 단언을 모두 거부하는 입장이 어떻게 또다른 단언을 피할 수 있는지에 대해 구체적인 논증을 요청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은 다시 “반대 관계는 모두 거부된다”는 진술로만 반복되었습니다. 선언적 진술이 유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질문에 대한 논리적 답변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철학적 논의에서 선언적 진술은 반드시 논증과 근거로 뒷받침되어야만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3. 논증과 선언 사이의 차이

철학적 논의에서 선언적 진술은 논증으로 대체될 수 없습니다. Y님께서 반복적으로 “실재론과 관념론의 반대 관계가 모두 거부될 수 있다”는 점을 말씀하셨지만, 이 진술은 선언적 성격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논증이란 단순히 결론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결론에 이르는 논리적 과정을 단계적으로 명확히 보여주는 작업입니다. 예컨대, “실재론과 관념론이 모두 거부된다”는 결론에 이르기 위해 어떤 논리적 원리와 과정이 사용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데리다의 입장이 형이상학적 단언으로 간주되지 않기 위해 어떤 구체적 논리적 틀이 작동하는지, 그 과정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제기된 질문이 충분히 논의되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결국, 선언적 진술은 논의의 출발점일 수는 있지만, 철학적 논의의 도달점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한 추가 논증이 제공되지 않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4. 논의를 마무리하며

Youn님의 해박한 지식과 자료 제시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철학적 논의의 본질인 구체적 논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게 느껴집니다. “구체성”에 대한 서로의 이해 차이로 인해 논의가 완전히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논의가 단순히 선언적 진술이나 학계 합의에 의존하기보다, 제기된 질문에 대한 논리적 정당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데리다의 원-문자가 실재를 다루는 구체적 틀을 어떻게 제공하는지, 형이상학적 단언 회피의 논리적 정합성을 어떻게 확보하는지, 해석학과 해체가 철학적으로 조화를 이루는지 등에 대해 더 깊이 있는 논증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논의가 여기서 끝나더라도, Y님께서 제기해 주신 자료와 관점을 바탕으로 더 깊이 있는 탐구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저 역시 이 논의가 철학적 성장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blu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