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적 해석학에 대한 질문

형이상학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상학에 따르면 세계는 우리에게 항상 어떤 의미(노에마)로서 주어집니다. 가령 같은 나무라 할지라도 자연과학자에게는 생물학적인 나무로 주어지고, 목수에게는 자재로 주어지고, 종교인에게는 이렇게, 예술가에게는 저렇게 주어집니다. 따라서 존재란 곧 의미를 드러내는(탈은폐) 것이고, 이러한 의미들의 총체가 곧 세계가 됩니다. 따라서 과학의 세계, 종교의 세계, 예술의 세계 등등 세계는 해석자의 수만큼이나 무한히 다양할 수 있고 미래를 향해 항상 열려있습니다. (youn님의 블로그를 참고했습니다)

첫번째 질문입니다. 형이상학적 의미는 존재할 수 있나요? 같은 나무가 자연과학자에게는 생물학적인 나무, 목수에게는 자재, 예술가에게는 미적인 대상, 종교인에게는 신이 내린 숭배의 대상으로 주어진다면, 마찬가지로 플라톤이나 형이상학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형이상학적 대상으로서의 나무', '나무의 이데아', '이데아의 모방본으로서의 나무' 이런 식으로 주어질 수 있지 않나요? 해석이 다양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왜 이걸 부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설령 형이상학자가 착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이 착각한 게 맞다면 '거짓된 방식으로 그들의 의식에 드러난'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A를 B로 착각했다 하더라도 내 의식에 B는 생생하게 있는 것이니깐요. 존재는 곧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고, 맞게 드러내든 틀리게 드러내든 어쨋든 형이상학자들의 의식에 드러나긴 했으므로 형이상학적 의미는 존재한다고 봐야 되지 않나요?

논의를 확장시키면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건 없어 보입니다. 설령 무언가가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의미를 드러내고 있잖아요. 따라서 초역사적이고 탈역사적인 것도 초역사적이라고 탈역사적이라는 방식으로 의미를 드러내고 있으니까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언어 바깥'도 '초역사적이고 탈역사적인 것'도 '형이상학적인 것'도 존재합니다. 이렇게 말한 순간 제 의식에 드러났으니깐요. 하지만 해석학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역사적입니다. 그렇다면 초역사적인 것은 존재하고 존재하면 역사적이니까 초역사적인 것은 역사적이다(?)가 되버립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할까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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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형이상학'의 의미가 무엇인가?

'형이상학'이라는 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두 가지 정도로 형이상학의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a) 현상학자들이 비판하는 '형이상학'은 단일한 의미만이 실재를 진정으로 반영한다고 주장하는 학문입니다. 현상의 세계는 '다양한' 의미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너머에 '단일한' 실재의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다양한 현상적 의미는 모두 '거짓'인 반면, 단일한 실재의 구조에 대한 진술은 '참'이라고 주장하는 학문 말이에요. (제가 요즘 영미권 메타형이상학 관련 논문들을 자주 찾아 보고 있는데, 이쪽 용어를 사용하자면, 테드 사이더의 '존재론적 실재론(ontological realism)' 같은 입장들이 현상학자들이 반대하는 종류의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겠네요. 반대로, 현상학자들의 입장은 '존재론적 다원주의(ontolocial pluralism)'이라고 할 수 있을 거고요. 실제로, 크리스 맥다니엘이라는 영어권 형이상학자는 바로 이 구도를 바탕으로 메타형이상학의 논의에 하이데거를 끌어들여 와서 사이더 vs. 하이데거라는 구도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b) 그런데 현상학자들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형이상학'의 의미도 존재하기는 합니다. 가령, 헤겔은 현상 뒤에 '사물 자체'라는 단일한 실재가 존재한다는 입장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비판한 철학자들 중 하나이지만, "형이상학 없는 민족"을 "지성소 없는 성전"이라고 비유할 만큼 형이상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도 유명하죠. 이때 '형이상학'이란 현상 뒤편에 있는 단일한 실재의 구조에 대한 학문 따위가 아닙니다. 오히려 형이상학이란 각 민족의 예술과 종교를 통해 표현된 정신을 (특별히, 서양 예술과 종교의 역사 속에 나타난 서구인들의 정신을) 개념적으로 명료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이렇게 헤겔의 형이상학 개념을 단순화해서 설명하면 다소 논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또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도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의 형이상학과는 많이 다릅니다. 화이트헤드 역시 단일한 실재의 구조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철학자 중 하나죠. 하지만 화이트헤드는 '과정(process)'이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틀을 제시하는 것이 유의미할 수 있다고 보았고, 그 관점에서 수행되는 자신의 독특한 세계 해석에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죠.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것을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때, 세상이 어떤 식으로 기술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를 형이상학이라고 본 것입니다.

말하자면, (a)의 형이상학이 아닌 (b)의 형이상학은 현상학자들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b)의 형이상학은 일종의 세계 '해석'이라고 할 수 있죠. 서구의 예술과 종교 속에 나타난 세계 해석은 어떤 것인지를 해명하는 작업이 '형이상학'이라 불릴 수 있고, '과정'이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세계 해석을 해명하는 작업이 '형이상학'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죠. 형이상학이 이렇듯 자기 자신을 하나의 '해석'이라고만 인정한다면, 이런 형이상학 개념은 현상학과 충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형이상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단순한 '해석'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그다지 좋아하는 것 같지 않지만요.)

(2)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 방식으로 드러낸다?

'비은폐(Unverbogenheit)'에 언제나 '탈은폐'의 요소와 '은폐'의 요소가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은 하이데거의 중요한 논지 중 하나입니다. 즉, 무엇인가가 드러나는 상황과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 언제나 동시적으로 발생한다는 거죠. 그리고 이 점은 후설이 '음영(Abschattung)'이라는 개념으로 강조한 사실을 하이데거가 발전시킨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밝게 주어지는 측면이 있다면, 그 뒤로 어둡게 감추어지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 후설의 음영 개념이 말하고 있는 사태거든요.

그런데 이 '드러나지 않는' 측면이라는 것이 '형이상학적' 측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리-토끼' 그림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아요. 우리가 '오리' 그림을 보게 되면 '토끼' 그림이 감추어지고, '토끼' 그림을 보게 되면 '오리' 그림이 감추어지잖아요. 하지만 이때 감추어지는 그림이라는 것이 '사물 자체'처럼 현상 뒤편 어딘가에 놓인다는 의미는 아니죠. '오리' 그림이든 '토끼' 그림이든, 그 둘은 모두 '현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습니다. 즉, 어느 쪽이 다른 한쪽에 의해 감추어진다고 해서, 그 둘 중 어느 한쪽이 '사물 자체'라고 여겨져서는 안 되는 거죠. 오히려 특정한 지향적 태도가 세계를 완벽하게 포착해낼 수는 없다는 것이 후설과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태도를 취하고서 '오리'와 '토끼'를 동시에 볼 수는 없다는 거예요. 한 마디로, 어느 누구도, 어떤 지향적 태도도, '신의 관점(God's eye-vew)'에서 세계를 완벽하게 볼 수는 없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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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음영'이나 '비은폐' 개념이 현상의 숨겨진 측면을 말한다고 해서, 이 사실이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에 대한 옹호로 귀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숨겨진 측면, 은폐된 측면, 드러나지 않은 측면이란 '사물 자체'가 아니니까요. 그조차도 우리가 지향적 태도를 변경할 경우 다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현상'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죠. 오히려 지향적 태도에 근거한 우리의 의식에서는 '신의 관점'이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그 두 주장의 요지에요. 그래서 '신의 관점'으로부터 단일한 실재의 구조를 파악하고자 하는 형이상학의 오래된 시도가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그 개념들에 함의되어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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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한게 있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을 읽고 나니 스트로슨이 제시했다는 구분이 생각났습니다. (b)를 '기술적 형이상학'에 대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이런 측면에서 기술적 형이상학=철학적 해석학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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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요, 제가 기술적 형이상학과 철학적 해석학의 관계를 깊이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스트로슨의 기술적 형이상학은 인간이 공유하는 ‘보편적 개념 도식‘을 기술하려는 시도 아닌가요? 저에게는 그 시도가 일종의 칸트주의적 시도라고 보여요.

헤겔의 형이상학의 경우 어떤 의미에서 기술적 형이상학과 유사한 측면이 있기도 한 것 같아요. 헤겔이 염두에 두고 있는 ‘서구 예술‘과 ‘서구 종교‘에 나타난 정신이란, (적어도 헤겔이 보기에는) 단순히 ‘서구‘나 ‘근대‘라는 특수한 지역과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 어떤 보편성을 지니는 것으로 여겨지니까요. 실제로, 테리 핀카드가 헤겔의 형이상학이 어떤 점에서 ‘기술적‘이라고 할 수 있고 어떤 점에서 ‘규범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논의하기도 해요. (아래 영상의 29:15 이하에 관련 내용이 있어요.)

그리고 하이데거나 가다머의 해석학에도 어느 정도는 기술적인 측면이 있기는 해요. 소위 실존범주에 대한 하이데거의 논의라든가, 경험의 역사성에 대한 가다머의 논의가 그런 기술적 측면에 속하겠죠. (그 두 사람은 ‘현상학적‘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후계자들은 철학적 해석학에 대해 ‘현상학적 해석학‘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지만, 애초에 현상학이 ‘기술적‘ 철학이니 ‘현상학적‘과 ‘기술적‘은 서로 충분히 대체될 수 있는 표현이라고 보여요.)

하지만 제가 좋아하고 옹호하는 해석학은 보편적 개념 도식에 대한 기술은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보편적 개념 도식‘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지 의문스러워 하고, 또 그런 맥락에서 칸트주의의 정당성을 의문스러워하거든요. 오히려 저는 다양한 개별적 개념 도식에 대한 기술 작업으로서의 해석학을 선호해요. 리쾨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해석의 갈등‘이야말로 해석학이 주목할 만한 사안이라고 보는 거죠. 서로 다른 경쟁하는 해석들을 비교해서, 어느 쪽에게 어떤 의의가 있는지 따지는 작업을 좋아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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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답변에 많이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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