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적 해석학에 대한 질문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덕분에 @SUANI 님께서 헤겔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헤겔 논리학 그것도 특히 도량 논리학을 가르치는 곳을 한국에서 본 적이 없는데, 반갑기도 하고 어디서 관련 내용들을 공부하셨는지도 궁금합니다. 제 입장에서 다소 의문스러운 점 몇 가지만을 덧붙입니다.

1번 논점에서는, 제가 짐작하기로는

(1) 헤겔은 칸트의 논의 구도 자체가 한 범주의 의미를 그와 대립되는 범주들과의 관계로부터 떼어내 고립 및 고정시키는 이른바 ‘오성적인’ 사유방식에 입각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2) 헤겔은 대립되는 범주들이 사실 그 대립 관계로 말미암아 상호 의존 관계에 있는 까닭에, 오성적 사유방식은 결국 성공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 두 가지 점을 서술하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뜻하시고 계신 바가 제가 요약한 바와 일치한다면, 1번의 서술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헤겔 철학의 입장은 “모든 것은 도량이다”로 정식화될 수 있는가?

그런데 @SUANI 님께서 위와 같은 헤겔 철학 전반의 입장을 정식화하기 위해 하필 (편의상 표준적인 역어들을 차용하겠습니다) 도량(measure; Maß) 범주를 도입한다는 점은 제가 보기에 다소 의아합니다.

먼저 도량이 “개념적 통일의 핵심 도구”라거나, 또 헤겔이 도량 범주를 통해 개념과 실재를 매개하려 한다는 이야기는 제가 보기에 부정확합니다. “개념과 실재를 매개하려 한다”는 문장으로 무엇을 뜻하시고 계신지가 불분명하지만, 아마 (1) 사유와 존재, 혹은 의식과 대상의 매개 혹은 (2) 『논리의 학』 내적인 의미에서 개념과 실재의 매개 둘 중 하나를 염두에 두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둘 중 어느 선택지를 고르더라도 도량은 부적합한 범주입니다. 왜냐하면 (1)의 경우 이미 논리학의 시작점에서 해소된 구별이며, (2)의 경우 개념과 실재의 통일성을 서술하기에 도량은 턱없이 단순한 범주이기 때문입니다. 이 용어가 왜 턱없이 단순한 범주인지를 구구절절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니, 일단은 존재론/본질론/개념론 사이에 중요한 구조적 차이들이 존재한다는 점, 한 영역을 지나 다음 영역으로 진입할수록 범주들의 구조가 더욱 복잡해진다는 점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혹시 설명을 요구하신다면 다음 답글에서 더 자세히 서술하겠습니다.)

또 도량 범주가 질과 양의 통일이며 본질론이라는 새로운 논리적 영역을 여는 데 중요한 고리라는 점은 그 자체로는 옳은 서술이지만, 그러한 과정이 자기부정을 통해 달성된다는 점 역시 중요하게 지적되어야 합니다. 도량은 질과 양의 상호 규정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그러한 상호 규정의 근저에 놓인 과정 자체는 여전히 그러한 상호 규정에 무관한(gleichgültig) 것으로 남습니다. 이는 도량이 범주들 사이의 상호 규정이 일어나는지, 이 규정 관계가 과정 속에서 어떤 구조를 갖는지를 보여주는 최종적인 범주가 되기에 부적합한 이유가 됩니다. 말씀처럼 도량 개념이 결국 절대적 무차별(absolute Indifferenz)로 귀결되어 본질로 전환되는 이유, 정확히 말하면 절대적 무차별 속에서 스스로 붕괴되어 자기 자신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3. 헤겔과 데리다의 유사성

이러한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지만, 헤겔 체계에서 서술과 비판은 사실 동전의 양면입니다. 도량논리학은 도량 범주가 무엇인지,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존재의 구조를 이루는지를 서술하고 있지만, 이 서술은 곧 도량 범주가 내포하는 일면성과 무관성(Gleichgültigkeit)에 대한 비판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는 헤겔의 변증법적 서술을 데리다의 해체적 작업에 굉장히 가깝게 수렴시킵니다. 이는 (통상 "synthesis"의 역어인) “종합”이라고 번역하신 “sublation” (Aufheben)이 사실은 ‘보존’(aufbewahren)뿐만 아니라 ‘중단’(aufhören)을 의미한다는 점에서도 잘 나타납니다(‘sublation’이 통상 ‘종합’이 아닌 ‘지양’으로 번역되는 데에는 그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솔직히 데리다가 헤겔과 얼마만큼 닮아있는가, 두 철학자가 얼마만큼 구별되는가를 본격적으로 논하는 것은 이 지면에서 다 다루지 못할 복잡한 학술적인 논쟁거리입니다. 더구나 저는 데리다의 저작을 자세히 탐구한 적도 없는 까닭에 그러한 답변을 할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YOUN 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충실히 따라가자면, 데리다가 언어/실재의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원-문자 개념에 도달하는 과정은 헤겔이 오성이 지닌 이분법적 사유를 비판하고 새로운 범주를 이끌어내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헤겔에게 범주들의 서술은 곧 범주비판이고, 범주비판은 곧 범주들의 서술이기 때문입니다.

Ps. 사소한 이야기지만, 도량논리학에서 본질논리학으로의 이행 과정을 서술하실 때 언급하셨던 순서에 관해서도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반성(Reflexion)은 본질론으로의 진입 이후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본질과 ‘가상’ 등의 범주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나서야 등장하는 범주입니다. 따라서 도량이 자기 자신을 지양(sublation)함으로써 본질로 나아간다는 서술은 옳지만, 반성을 통해서 본질로 나아간다고 기술하는 것은 부정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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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NewHegel님께 드리는 답변

TheNewHegel님께서 주신 상세한 질문과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헤겔 논리학, 특히 도량 논리학에 대한 제 관점을 정리할 기회를 주셨고, 새로운 관점을 통해 제가 놓쳤던 부분들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도량 개념의 적합성과 헤겔과 데리다의 유사성에 관한 논의는 제 주장에 대한 중요한 검토 지점이라고 느껴집니다. 이 글에서는 주신 질문에 대한 제 의견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며 답변하고자 합니다.

1. 헤겔의 칸트 비판과 사유 방식

TheNewHegel님께서 정리해 주신 헤겔의 칸트 비판 요약은 제가 뜻한 바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헤겔은 칸트의 범주적 사유가 고정된 관계와 독립적인 의미를 상정하며, 이로 인해 대립적 범주 사이의 상호 의존성을 간과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대립하는 범주들이 상호 의존 관계에 있다는 점은 헤겔 철학의 중심적인 특징이며, 이는 헤겔이 보여주는 사고의 근간을 이룹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헤겔은 칸트적 “오성적 사유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립적 관계를 새로운 통합으로 이끄는 작업을 수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가 “이미 개념화된 용어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것은, 범주적 사유가 단순히 고립된 독립적 실체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적 구조 속에서 그 의미를 획득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헤겔 철학을 “모든 것은 도량이다”로 정식화할 수 있는가?

TheNewHegel님께서 제기하신 이 부분은 매우 핵심적인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모든 것은 도량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도량이 질과 양의 통합적 개념으로서 논리적 과정을 매개하는 중요한 중간 단계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이 헤겔 철학 전반을 대표하거나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1. 개념과 실재의 매개라는 표현에 대하여

제가 “도량이 개념과 실재를 매개한다”고 언급한 이유는, 도량이 질적 특성과 양적 특성을 동시에 설명하는 범주라는 점에서, 이를 통해 사유와 존재, 혹은 주관적 논리와 객관적 논리 사이의 과정을 연결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TheNewHegel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도량 범주는 개념론적 통일성을 서술하기에는 단순한 수준에 머무른다는 점을 간과한 것 같습니다. 특히, 존재-본질-개념으로 이어지는 구조적 단계에서 도량은 본질로 넘어가는 전환점일 뿐, 이후의 개념적 통일성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한 범주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1. 도량의 자기부정과 본질로의 이행

TheNewHegel님께서 지적하신 “도량의 자기부정”은 헤겔의 논리 체계에서 핵심적입니다. 도량은 질과 양의 상호 규정성을 보여주지만, 이 상호 규정이 근본적으로 무관적(Gleichgültig)이라는 점에서 본질로의 이행이 불가피합니다.

제가 도량을 강조했던 이유는, 도량이 질과 양의 대립을 매개하는 단계로서 해석학적 논의와 연결되는 지점을 보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질로 넘어가는 자기부정의 과정이 충분히 서술되지 않은 채, 도량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은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3. 헤겔과 데리다의 유사성과 차이

저도 헤겔의 범주 서술과 비판이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에서는, 데리다의 해체 작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가령 헤겔이 범주를 서술하면서 동시에 그 범주를 비판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범주를 이끌어내는 방식은 데리다의 해체적 작업과 닮아 있습니다. 예컨대, 데리다가 언어/실재의 이분법을 해체하면서 원-문자 개념에 도달하는 과정은 헤겔이 오성적 대립을 비판하며 새로운 통합을 제시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헤겔이 데리다와 결정적으로 구별되는 지점은 비판을 통한 새로운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헤겔의 변증법은 단순히 기존의 틀을 비판적으로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비판을 새로운 구성과 통합의 기반으로 삼습니다. 반면, 데리다는 해체의 과정을 통해 기존 구조를 비판하고 불안정하게 만드는 데 집중하지만, 새로운 철학적 통합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데리다(혹은 Youn님)가 원-문자를 통해 종국에 제시하는 네러티브는 (제가 헤겔의 철학을 측도론으로만 설명하는게 지나친 단순화이듯이), 단순하고 심지어 원-문자의 지위에 대해서도 명확히 해명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저는 헤겔과 데리다가 그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고 생각해요.

4. 기타 논점: 반성과 본질로의 이행

TheNewHegel님께서 지적해 주신 도량에서 본질로의 이행 과정에서 “반성을 통해 본질로 나아간다”는 제 서술은 부정확하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반성(Reflexion)은 본질 내부에서 논의되는 범주이며, 본질로의 진입 자체를 설명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했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논리학 전반의 체계를 충분히 서술하지 못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지적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논의를 마치며

TheNewHegel님께서 지적해 주신 여러 관점 덕분에 저의 해석을 다시 돌아보고, 부족했던 부분을 더 명확히 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도량의 역할과 한계, 헤겔과 데리다의 유사성과 차이, 그리고 본질로의 이행 과정에서의 제 서술 부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헤겔과 데리다의 논의를 더 깊이 탐구하며, 제 논의가 더 정교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TheNewHegel님의 지적이 제 철학적 탐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느끼며,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bl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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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에 대해서 요즘 관심을 갖고 있어서 한 번 덧붙여볼게요. 일단 (1)을 보기 가장 좋은 곳은 엔치클로페디 §1 이라고 생각합니다:

philosophy can, of course. pre­ suppose some familiarity with its ob-jects; in fact it must presuppose this, as well as an interest in these ob-jects [Gegenstand]. The reason is that in the order of time consciousness produces representations of ob-jects before it produces concepts of them; and that the thinking spirit only advances to thinking cognition and comprehension by going through representation and by con­verting itself to it.

예전에 Gegenstand 와 Objekt의 구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Gegenstand'와 'Objekt'의 차이 - yhk9297 님의 게시물 #9
덧붙이자면, 헤겔에게 Gegenstand란, 개념론의 맥락에서 언급되는 Objekt와 다르게, 말 그대로 Gegen-stand, 즉 의식이나 생각에 대립하는 무언가로 보여집니다. 외적 물체가 될 수도 있고, 논리학의 물체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1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의식이 표상을 먼저 만들어내야 그 다음에 철학적 개념들을 생각해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건 §3에서도 되풀이되는 내용입니다:

Since the determinacies of feeling, of intuition, of desire, of will­ ing, etc., are generally called representations, inasmuch as we have knowledge of them, it can be said in general that philosophy puts thoughts and categories, but more preCisely concepts, in the place of representations.

그러니깐 헤겔에게 있어서 매개와 생각의 구분은 처음에 의식/사물의 대립을 통해 표상을 얻어내고, 그 표상에 기반하여 개념을 만들어낸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요즘 헤겔의 논리학이 꼭 선험적이진 않을 수도 있겠다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선험적이지 않다고 해서 필연적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전 논리학을 후험적이고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네요. 다시 말하면 논리학의 변증법은 필연적으로 특정 모양을 띄어야하지만, 그 모양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철학이나 과학의 발전이 있어야한다... 정도로 보고있습니다.).

두 분이 하고계신 논의에 딱히 기여를 하는 것 같진 않지만, 그냥 흥미로우니 추가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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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람되지만 혹시 논의하는데 있어 AI의 도움을 받고 계신가요? 문체나 지적 내용이 제가 논문 작성할 때 AI한테 도움받았던 답변내용과 상당히 유사하네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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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사이트가 동일한 마크다운 문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스타일상 비슷하게 보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직접 작성한 내용입니다만, 문법과 구조가 통일되어 있어서 그런 인상을 줄 수도 있겠네요. 이외에 논의하고 싶은 부분이나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좋은 대화로 이어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bl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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