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 감신대, 안동대에서 객원교수로 철학을 가르치고 계신 정제기 선생님이 『바울과 철학의 거장들: 그리스-로마 맥락에서 바울 읽기』라는 책을 번역하셨습니다. 출간 소식을 듣고서 매우 흥미로운 책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감사하게도 정제기 선생님께서 저에게도 책을 한 부 보내주셔서 내용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네요. 성서학과 종교학 등을 전공한 13명의 학자들이 사도 바울의 신학과 그리스-로마 철학 사이의 공통점과 차이점에 대해 쓴 글들을 모아 놓은 책입니다. 서로 다른 두 사유 사이의 대조를 통해 그리스도교 사상이 지닌 고유한 가치에 대해 논의하는 내용들이 많아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신약성서의 바울 서신만을 읽었을 때는 놓치기 쉬운 독특한 사유의 결들을, 1세기 서구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에픽테토스, 세네카의 철학과 비교하면서 굉장히 명료하게 그려내는 책이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이 책의 추천 서문을 존 M. G. 바클레이(John M. G. Bareclay)라는 신약학자가 썼다는 점에 눈길이 갔습니다. 바클레이는 2015년에 『바울과 선물』이라는 대작을 써낸 오늘날 신약학계의 거장 중 하나죠. 특별히, 이분은 신약학자들 중에서도 '철학적인' 기반이 매우 탄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바클레이 자신도 바울의 신학에서 '은혜(grace)'와 '선물(gift)'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철학과의 대화를 통해 풀어내거든요. 즉, 바클레이에 따르면, 세네카 등 1세기 스토아 철학자들이 말하는 '선물'이란 서로 동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호혜의 원칙에 따라 교환되는 것이지만,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이 지닌 소위 '비상응성(incongruity)'이라는 측면을 대단히 강조하는 것이 바울의 신학이 지닌 특징이라는 것이죠.
심지어 바클레이는 바울의 선물 개념이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나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같은 현대철학자들의 선물 개념과도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자신의 책에서 논의합니다. 가령, 데리다가 주장한 '대가 없는' 선물 혹은 '순수한' 선물이라는 개념은 고대인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보니, 이러한 선물 개념으로 바울 신학을 독해하고자 하는 존 D. 카푸토(John D. Caputo)와 같은 인물들의 신학적 시도에 대해 바클레이는 신약학자로서 다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합니다. 다만, 바디우의 바울 해석은 은혜의 '비상응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신약학적으로도 꽤나 정당한 해석이라고 볼 뿐만 아니라, 그 은혜 개념이 사회-정치적으로 지니고 있는 함의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죠. 여하튼, 바클레이 본인부터가 신약학자이면서도 철학에 대해 식견이 많다 보니, 바울의 신학과 그리스-로마 철학을 비교하는 이 책의 추천 서문을 쓰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이 책에서 '친구'라는 주제를 다루는 제3장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제10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어떠한 점에서 당대 그리스-로마 세계에 사상적 도전장을 내밀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내용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 친구: 제3장을 쓴 데이비드 E. 브리오네스(David E. Briones)는 '친구'라는 주제로 아리스토텔레스와 바울을 비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 관계가 당사자 모두에게 상호 유익이 되어야 한다고 조건을 내세우는 반면, 바울은 이러한 조건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이 브리오네스의 중요한 주장 중 하나입니다. 즉, 이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의 감정'이 친구 관계보다 우선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자신을 존중하다 보니, 자신에게 유익과 도움을 줄 수 있는 타자들과 친구를 맺는다는 거죠. 그래서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덕' 혹은 '탁월성'의 측면에서 서로 어느 정도 동등한 사람들이어야 하고, 상대방에게 서로 유익과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은 우리와 '탁월성'의 측면에서 동등하지 않고, 우리에게 '유익'이나 '도움'을 줄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우리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함의하고 있기도 하죠.
그러나 바울은 친구 관계 안에 하나님이라는 매개자를 도입함으로써 동등하지 않은 사람과의 친구 관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가령, 우리가 풍요로운 사람이라면, 이 풍요로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돕도록 위탁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줌으로써 그 사람들과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찾아오는 도움의 손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제하기 위해 보내신 선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풍요로운 사람들과 친구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선물을 경험하게 됩니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 친구 관계란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선물'을 서로 교환하는 과정에서 맺어집니다. 비슷한 수준의 탁월성을 소유한 사람들끼리만 친구를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탁월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선물의 '전달자'로서 상대방과 친구가 됩니다. 이러한 사고 방식에서는 애초에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탁월성이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조차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상대의 탁월성을 측정해서 비슷한 수준끼리 구분짓는다는 발상 자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탁월성' 혹은 '덕'이란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선물을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하는 데서 성립하는 것이지, 미리부터 누군가가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바울의 신학에서 탁월성이란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친구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 따져야 하는 전제가 아니라 친구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결과인 것입니다.
(2) 죽음: 제10장을 쓴 제임스 P. 웨어(James P. Ware)는 죽음에 대해 그리스-로마 사회가 가지고 있던 관점과 바울이 가지고 있던 관점을 대비시킵니다. 즉, 그에 따르면, 당대의 철학자들은 죽음을 결코 극복될 수 없는 것으로 보고서 죽음이 만연한 비극적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령,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나 아이스킬로스의 『에우메니데스』 등 그리스 신화에서는 신들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해낼 수 없다는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리스 철학자들 역시 죽음을 우주에 필연적으로 내재한 섭리로 보았기 때문에, 죽음을 '감수'하거나 '묵인'해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세네카의 경우는 죽음을 최고신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비극적인 현실의 질서에 대해 감정을 내려놓고서 순응하는 것만이 인간이 죽음 앞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약속하는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을 통해 삶을 희망, 기쁨, 기대, 감사의 대상으로 받아들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이 믿었던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우주의 섭리로 인정하는 무력한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의 신학에서 죽음이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침입한 '원수'이고,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인 죽음을 언젠가 영원히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죽음이 세상에서 사라질 날의 도래를 미리 예견해 주는 사건이 바로 예수의 부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가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난 것처럼, 바울은 종말의 날에 세상에서 죽음이 사라지고 생명의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죽음이라는 주제는 그리스-로마 철학과 바울의 신학이 현실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어떠한 차이를 지니는지를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세네카와 같은 철학자들에게 현실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으로 가득한 비극이었지만, 바울에게 현실은 하나님이 창조하고 운행하시는 선한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세네카는 죽음을 우주의 필연적 질서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태도를 권유하지만, 바울은 죽음과 죽음을 일으키는 (가난, 질병, 폭력 등의) 요인들이 우리가 거부하고 저항해야 하는 하나님의 원수들이라고 지목합니다. 즉, 한쪽에서는 세계가 결코 바뀔 수 없는 영원한 질서로 생각되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는 세계가 완전히 바뀔 수 있는 창조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현실을 '체념'의 형태로 받아들일 것인지, '희망'의 형태로 받아들일 것인지도 달라집니다. 이러한 관점은 바울과 그리스도교가 오랫동안 현실에 대해 비관주의적이고 내세지향적인 태도를 퍼뜨린 사상사의 원인으로 (니체에 의해) 지목되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놀라운 것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부활 신앙에 대해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에 비추어 보자면, 바울이야말로 1세기 그리스-로마의 그 어느 철학자들보다도 삶을 강하게 긍정하고 희망한 인물이었으니 말입니다.
'친구'와 '죽음'이라는 주제 이외에도 이 책에는 바울이 당대 사회의 일반적인 입장과는 구별되는 여러 가지 지점들이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고통'에 대해 에픽테토스와 바울이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제1장이나, '노예 제도'에 대해 세네카와 바울이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었는지 이야기하는 제4장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플라톤, 키케로, 바울의 견해 차이를 비교한 제11장도 그리스도교의 소위 '천국' 개념에 대한 대중적 오해를 풀기에 매우 유익합니다. 이 책이 많은 분들에게 널리 읽혀서 바울의 신학이 지닌 고유한 가치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