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의사소통의 해석학으로서 기독론 -비테킨트의 종교적 의사소통의 이론을 중심으로- (3)

4. 의사소통 안에서 종교적 주체의 자기반성으로서 기독론

프로테스탄트 신학 안에서 18세기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성서와 역사적 사실성의 동일화가 붕괴됨으로써 신학적 방법론의 중심은 성서 내용의 재현이 아니라 종교개념의 도입으로 인한 역사적 종교의 가치판단이 되었다. 학문적 신학은 근본적으로 역사적 대상 또는 사건의 방법론적 재구성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념의 도입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지는데, 하나는 종교의 한계를 규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종교가 자기의 근원적 관계에 어떻게 결합되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렌토르프 122) 슐라이어마허는 종교론에서 형이상학과 도덕과의 차이 속에서 종교를 독특한 보편자와 인간의 관계의 고유성을 종교개념 안에서 탐구했다. (슐라이어마허) 신학은 슐라이어마허 이후로 종교개념을 통해서 종교의 한계 안에서 독특한 보편에 대한 인간의 유한한 자유의식의 서술이고, 그리스도교는 역사적 현실성 안에서 보편적 하나님 의식의 원형인 나사렛 예수의 관계 안에서 구성된다. (신앙론) 물론 슐라이어마허에게서 기독론은 현재문화와 관계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대상으로서 나사렛 예수가 가진 보편적 인간의 원형(Urbild)을 서술하는 것이지만 그에게서 이미 형상과 사실성의 관계는 동일성으로 설명될 수 없는 상황관계적 해석학적 지평에서 신앙의 자기묘사성을 함축하고 있었다. 슐라이어마허의 구속자의 전체인상(Totaleindruck)은 „예수의 형상(Bild Jeus)“안에서 기독론적 프로그램으로 함축되었고 이 개념은 19세기 리츨학파의 기독론 구상의 핵심이 되었다. (Danz 130) 형상개념은 역사적 사실성이 아니라 역사적 자료로부터 유래하는 영향사적 인상의 자기서술이다. 이와 같이 19세기 리츨과 그의 제자들의 교의학 안에서 역사적 예수연구의 수용은 예수를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서술하려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라는 그리스도교의 기원과의 관계 안에서 상황관계적 신앙의 자기묘사를 지향했다. 따라서 역사적 대상에 대한 서술은 역사라는 텍스트 뒤에 가서 고고학적 발견을 객관적으로 서술 (하르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 앞에서 자기와 연관해서 역사적 대상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 행위이다. (tillich 240) „의미와 지향성은 객관적으로 고정될 수 없기 때문에, 역사는 객관적으로 고정될 수 없다. “ (Tillich 241)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형상은 과거의 현상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의 관계 안에서 의미와 규범을 새롭게 생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교의학적 그리스도론은 인간의 자기이해를 명확하게 만드는 신앙의 반성적 구조로서 이해할 수 있고, 이는 종교적 자기해석의 다양한 형식을 서술할 수 있게 만드는 종교이론으로서 이해가능하다. (Danz 238)

특히 비테킨트는 종교를 보편성을 현실화하는 문화적 양식으로 보는 시각을 거부하고, 종교를 문화 안에 다양한 형태들 가운데 하나로 보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객관적 표상의 기독론적 연계를 끊어버린다. 그는 역사학, 종교이론 그리고 인간학과의 관계 안에서 오직 ‚종교적‘으로 의사소통되었기 때문에 역사는 객관적인 역사가 아니라 상황과 관계된 의미의 교환이며, 종교개념은 보편적 종교가 아니라 임의의 한 종교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근대 이후 보편적 인간의 원형으로서 서술된 예수의 인간적 형상은 이제 종교적으로 의사소통된 종교적 주체로서 제시된다. (Wittekind 2-8) 이제 그리스도교를 보편종교로 이해하고 이 종교의 서술을 위한 종교의 보편개념은 포기되었다. 하나의 종교로서 그리스도교 안에서 생성된 종교적 의미는 오직 그리스도교 종교의 내적 관점에서 나온다. (Wittekind 29) 보편적 종교개념은 종교와 다른 기능을 하는 사회적 형태와 비교를 통해 해체되었고, 따라서 이제 종교는 고유한 발전사적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신학이 관계하는 종교개념은 오직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전개의 컨텍스트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35) 따라서 학문적 신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종교적 진술의 내적 의미인 종교적인 것의 규정 방식과 관계하고, 종교의 본질에 대한 탐구는 오늘날 종교적 조건의 새로운 규정성의 표현이다. (35-36) 따라서 이제 근대신학이 추구했던 문화이론적이고 기원성의 문제와 관련된 종교의 본질은 신학적 연관성을 상실했다. (36) 비테킨트는 이 새로운 종교개념을 예수의 인격과의 의사소통을 통한 인격화와 신앙의 습득으로 확장함으로써 종교학적 객관적 종교의 표상으로부터 벗어난다. 의식의 단일한 그림은 포기되었고, 상황과 관계된 고유한 현실성을 생산하는 언어로서 종교의 기능이 신학적 숙고의 중심으로 제시되었다. (38) 그러므로 신학은 이제 보편적 종교개념에 관계하지 않고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의 자기진술에 관계한다. (46) 이 종교적 진술의 자기진술에 관계하는 신학은 그에 따르면 20세기 변증법적 신학의 보편성 비판과 종교철학적 사유의 결합이다. 보편적이고 추상적 개념에 대한 비판과 종교철학적 사유를 통해 종교적 자기이해 또는 종교적 주체성이 정립됨으로써 다양한 문화 안에서 그리스도교는 이제 고유한 자기지술성을 확보한다. 이는 문화 영역 안에서 인간의 다양한 해석방식의 자율성을 보장하며, 신학을 문화학의 컨텍스트 안에서 고유한 학문으로서 기능할 수 있게 한다. 특히 비테킨트의 이 생각은 신학의 근본적 의미가 단순히 교회의 과거 자기진술을 유지하거나 세속문화에 종교적 진술을 적응시키는 것이 아니라 문화 안에서 고유한 종교적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에 근거한다. (51) 이러한 점에서 종교개념은 비테킨트에게서 근본적으로 종교적 신앙의 실천과 관계하며, 이 실천의 행위 안에서 종교적 주체가 생성된다. (56)

근대신학은 주체가 무엇이고 어떻게 생성되는지 관심을 가지기보다 하나님의 거주장소 또는 신인식의 장소로서 인간의 의식에 관심을 가짐으로써 인간 주체의 보편성을 주장했다. 소위 인간학적 종교개념 또는 인간의 소질로서 종교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보편적 양식이 행위, 지식 또는 감성으로서 나타나는 것에 논쟁할 뿐 이 종교적 특성이 보편적이라는 점에는 일반적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비테킨트는 이 보편적 주체성을 거부하는데, 왜냐하면 보편적 주체에 의해서 현실적이고 실증적 종교의 참여자의 주체가 온전히 제시될 수 없으며, 이로 인해서 종교적이라는 고유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오직 언어적으로 규정되고 종교적 진술로서 전승된 그리스도교적 전통, 종교적 관점 안에서 이 전통의 공동체적 이해 그리고 그리스도교 종교의 역사적 의사소통의 컨텍스트 안에서 신앙은 발생한다. (58)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의 신앙 또는 종교적 의사소통의 방법은 특정한 종교적 전통이라는 구체성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지 어떤 추상적 개념에서 추론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테킨트에게서 그리스도교의 절대성과 규범성은 구체적인 종교적 경험의 진술을 통해 형성된 신앙의 주체를 의미하며, 이 진술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사건은 기독론적 반성을 통해 성취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독론은 단순히 역사적 예수나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 내용의 서술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통해 만들어지는 종교적 주체의 그리스도교적 자기 반성행위이다. 그리스도교적 신 진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개별적 종교이해가 전체로 확장되는 자기반성적 확장을 경험한다. (137) 기독론은 상황관계적 진술로서 종교적 의미생산의 해석학적 재구성이다. 즉, 비테킨트는 기독론의 구원론적 기능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는 의사소통 기능을 통해서 종교적 의미의 전달과 습득 과정에서 종교적 의사소통의 성공을 추구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의 하나님 관계의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은 결국 예수에 대한 의사소통 사건 안에서 가능하다. 근대 신학은 역사적 예수와 의식이론적 구성의 통합을 통해서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관계를 해명하려고 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역사적 예수 연구는 사실 그 자체를 재현하려는 목적보다는 역사적 표상에 대한 유비의 연관성 안에서 인간과 하나님 관계를 해명하려고 시도했다. (1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인간의 하나님 의식의 원형으로서 인간의 지향점이 되어버려서, 예수와의 의사소통을 통한 하나님 관계보다 하나님 의식을 통한 내적 일치를 목표로 했다. 결국 근대 기독론의 비언어적 의식이론적 신인식의 통합은 실증적 종교로서 기독교의 고유한 주체성을 상실시켰다. 하지만 그리스도로서 예수는 역사의 관계 안에서 개별적 신앙인에 대한 전달의 의미 속에서 종교적 진술의 신인식의 확장이다. (153) 비테킨트에게서 신인식의 장소는 보편적 인간의 의식 안이 아니라 구체적 종교의 하나님의 백성(Gotteskindschaft)이고, 이 역사적 이해 공동체 안에서 예수에 대한 기억을 통해 신인식의 확장이 경험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종교적 주체의 자기 반성을 종교적 의사소통을 통한 기억된 예수의 확장 또는 기독론적 반성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기독론은 인간학적 보편성이 아니라 종교적 진술의 신학으로부터 유대적 컨텍스트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인격의 결합이다. 실제적 예수의 형태는 전기적 정보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의 의사소통을 통한 예수경험의 종교적 의미의 재구성이다. 따라서 종교적 의사소통 안에서 그의 이웃과 하나님 선포를 결합하는 예수에 대한 기억 밖에서 신앙은 불가능하다. 이 말은 결국 의사소통에서 형성된 종교적 주체없는 신앙 또는 종교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의사소통을 형성할 수 없기 때문에 종교로서 인식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독론은 예수의 속성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아니라 종교적 진술의 상황 안에서 종교적 주체의 자기서술이다. 예수는 그리스도교적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하나님 관계를 통해 선포하는 예수경험의 확장이다. 이 종교적 진술의 의사소통의 의미 안에서 예수는 그에게 체험된 종교적 이웃을 그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 신인식의 내용으로서 이해되고 진술되고 그래서 하나님 백성의 인식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 인식의 고유한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예수말씀이 독특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청중에 대한 그의 인격적 관심과 결합했다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해 하나님의 신앙의 명료성을 확장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이제 한편으로 고대 형이상학적 삼위일체적 기독론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 기독론의 기초는 역사적 예수의 인격의 객관적 서술이 아니다. 신학은 종교적 진술의 사건 안에서 형성된 종교적 주체를 종교의 기초로서 이해한다. 인간이 종교를 통해 의사소통함으로써, 이 의사소통의 관계 안에서 종교는 존재한고, 신인식은 종교적으로 의사소통된 종교적 의사소통을 위한 종교의 신학적 재구성 안에 있으며, 이제 이 신인식의 순환이 그리스도 관계를 통해 공동체 영역으로 확장됨으로써 구원론적 기능을 가진다. 종교적 대화 안에서 종교적 주체가 형성되고, 그런 점에 있어서 기독론은 신앙의 주체성-, 개인성-, 그리고 인격성과 관계하는 구성요소의 반성이다. 그러므로 기독론은 종교적 진술의 사건 안에 주어진 신앙하는 주체의 자기존재의 반성이다.

나가는 말

오늘날 다원주의적 문화 안에서 그리스도교는 다양한 문화양식과 타종교와의 공존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한편으로 그리스도교만이 진정한 종교라는 주장은 실증적 종교로서 그리스도교의 현실성을 반영하지 못하며, 다른 한편으로 모든 종교는 동일한 실재에 근거한 문화적 경험이라는 다원주의적 진술은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형식들을 정적으로 상호관계없이 방치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스도교는 다원적 현실 안에서 서로 서로가 상호 관계하면서 종교적 자기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20세기 후반 타종교와의 만남 속에서 기독론적 중심성의 포기와 다르게 기독론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주체의 자기진술로서 다시 신학의 중심에 세워야 한다.

20세기 후반부터 많은 사람들이 타자의 인정 또는 수용을 통해 현대사회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새롭게 세우려고 했고,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주체를 정립하거나 타자의 인식 자체가 자기정체성을 형성해 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반대로 고유한 자기정체성만이 타자를 타자로서 인식하게 해주고 주체와 타자 사이의 확고한 구분을 통한 차이인식이 다시 주체와 타자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종교 또는 어떤 문화적 양식을 보편적 관념으로 소급하는 이념은 모든 문화 양식의 다양한 인식을 가로막는다. 만약 우리가 보편적 이념을 포기한다면 이제 각각의 문화형식은 차이성에 근거하여 상호간 대화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폴카르트 비테킨트의 탈보편주의적 종교철학적 지평의 종교적 주체의 자기반성으로서 기독론은 다원주의적 문화 안에서 기독교의 자기존재의 입장을 다른 문화적 양식에 독특한 종교적 방식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보편성에 기초하지 않아도 자기 종교의 절대성과 무조건성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절대성 또는 무조건적 경험의 의미로서 종교는 구체적이고 실증적 종교에서 얻는 삶의 의미이지 추상적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로서 예수의 고백은 죄의식으로부터 해방 또는 억압하는 실재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현재의 상황 안에서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얻어지는 새로운 주체의 자기반성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 고백의 의미는 예수의 생애, 죽음, 부활 그리고 성령의 임재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의사소통을 통한 새로운 그리스도교적 주체의 소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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