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의사소통의 해석학으로서 기독론 -비테킨트의 종교적 의사소통의 이론을 중심으로 (2)

약간 맥락이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제가 지난 방학 동안 아주 재미있게 완독한 책 중 하나가 리처드 보컴(Richard Bauckham)의 『예수와 그 목격자들』이었어요. 보컴이 이 책에서 복음서를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 보아야한다고 강조하는 이유 중에,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이 신뢰할 만 하다는 점이 있더라고요. 오랫동안 양식비평이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기억을 너무 과소평가한 것과 달리, '통제된 구전 전승'에 대한 케네스 베일리(Kenneth Bailey)의 연구 이후에 그 기억이 꽤 신뢰할 만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부각되었고, 이 주장을 제임스 던(James Dunn)이나 톰 라이트(N. T. Wright)가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보컴은 베일리의 논의를 수용하면서도 통제된 구전 전승에 대한 베일리의 가설이 지닌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증인의 기억'에 대한 논의를 제시하더라고요. 한편, 베일리의 논의 반대편에서는 베일리의 주장에도 여전히 약점이 있다는 테오도어 비덴(Theodore J. Weeden)이나 바트 어만(Bart D. Ehrman)의 재반박도 제기되고요. 이 논쟁들이 하도 재미있어서 인터넷으로 보컴과 어만의 토론까지 찾아봤네요.

그런데 영어권 성서학계에서 '기억된 예수'의 문제는 역사적 예수 연구의 문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주제인 것 같아요. 결국 보컴과 어만의 논쟁에서도 쟁점은, '증인의 기억'이라는 것을 정말로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기억으로부터 우리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충분히 신뢰할 만한 지식을 도출해낼 수 있는지이니까요. 단순히 기억과 그 기억에 대한 반성적 재해석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기억 자체가 과연 믿을만 한지가 성서학계에서는 중요한 쟁점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읽기로는, 비테킨트도 결국 기억된 예수와 역사적 예수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입장 아닌가요? 종교적 의사소통의 해석학으로서 기독론 -비테킨트의 종교적 의사소통의 이론을 중심으로- (3) 나온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비테킨트도 역사 서술이라는 것이 단순히 '객관적 서술'(하르낙)이라는 형태로 수행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대상으로부터 '의미를 부여받는 행위'(틸리히)라고 강조하니까요.

저는 이런 주장들에 동의하기는 하는데, 이 주장 자체만으로는 논의가 너무 원론적인 층위에 머무르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서요. 성서학계에서 '기억된 예수'를 둘러싸고 논쟁하는 실제 쟁점들이 다루어지고, 그 쟁점들을 통해 교회의 기억이 역사적 예수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정당화되어야, 교회가 그 기억을 바탕으로 예수에 대해 수행하는 모든 해석들이 "예수와 청중의 살아있는 만남"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성서학적 논의가 전제되어야 '신앙의 그리스도/역사적 예수'라는 이분법이 극복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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