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의 영향력은 왜 쇠락하였는가?

크게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합니다.

(1) 비트겐슈타인적 의미론의 설명력이 떨어지는가?

합성성의 원리에 근거한 비판은 포도어와 르포어가 "Brandom’s Burdens: Compositionality and Inferentialism"(Philosophy and Phenomenological Research, Vol. 63, No. 2, 2001.)라는 논문에서 브랜덤에게 제기하는 것이에요. 양상 표현의 의미론의 관점에서 제시되는 비판은 주로 크립키 계열의 철학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고요. 그런데 과연 이러한 비판들이 추론주의를 비롯한 일종의 '비트겐슈타인주의적' 의미론을 성공적으로 논박한다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단언하기가 어려워요. SEP의 '합성성(Compositionality)' 항목에도 나오듯이, 애초에 합성성의 원리 자체를 거부하는 철학자들도 많을 뿐더러, 몇 달 전 서강올빼미에 양상 성향주의 하계 워크샵 공고에도 올라온 것처럼 가능세계를 통해 양상 표현의 의미론을 제시하려는 시도들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되고는 하거든요.

또한, 추론주의적 관점에서 이 문제들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많고, 더 나아가 추론주의적 관점에서 기존 의미론의 한계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을 제시하는 입장들도 많아요. 표상주의적 의미론에서 추론주의적 의미론에 대한 일방적인 공격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론주의적 의미론에서도 자신에게 제기되는 비판에 대한 적극적 대응과 함께, 표상주의 의미론에 대한 공격이 이루어지는 거죠. 대표적으로, 작년에 서산신진철학자상을 받으신 성균관대학교 박성수 선생님의 논문이 이렇듯 추론주의적 관점에서 기존 의미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다루어요.

본 논문의 목표는 브랜덤, 셀라스, 페레그린, 이병덕에 의해 제시되고 발전되어 온 추론주의 의미론(inferential semantics)을 옹호하는 것이다. 한 이론을 옹호하는 작업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뉠 수 있다. 하나는 옹호하려는 이론에 문제가 되는 부분들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거나, 제기되는 비판들에 답하는 종류의 작업이다. 즉, 우리는 어떤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해당 이론의 내적 타당성을 보이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옹호하려는 이론이 다른 이론들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보이는 종류의 작업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이론을 옹호하기 위해 해당 이론이 지니는 이론적 우위성들을 보이는 것에 집중할 수 있다.

논문을 통해 필자가 성취하려고 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두 번째 종류의 작업과 관련된다. 이는 필자의 작업을 기존의 작업들과 구분 짓는다. 추론주의 의미론과 관련된 이전의 작업들은 주로 의미에 대한 추론주의적 접근 방식이 의미를 규명하는 하나의 이론으로 확립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식시키는 데 집중해왔다. 브랜덤, 셀라스, 이병덕, 페레그린이 의미 불안정성, 게리멘더링, 의미의 조합성, 퇴행의 문제 등에 답하려고 해왔던 시도들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들이다.

본 논문은 추론주의 의미론에 대한 기존 작업들의 성과에 기대어 추론주의 의미론이 내적으로 타당한 의미론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뒤 이러한 의미론이 여타 다른 의미론들에 비해 갖는 이론적 우위를 보임으로써 추론주의 의미론을 옹호할 것이다. 물론, 단 한 번의 작업으로 추론주의 의미론을 전적인 대안 이론으로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 단지 추론주의 의미론이 다른 의미론들에 비해 몇몇 유망한 측면들을 갖는다는 것을 보이는 데서 만족할 것이다.

(박성수, 「의미에 대한 추론주의적 접근 방식 옹호」, 성균관대학교: 박사논문, 2022, 1쪽.)

https://dcollection.skku.edu/public_resource/pdf/000000170638_20240914152652.pdf

그래서 저로서는 추론주의 의미론이 "설명력이 떨어진다"와 같은 주장에 연구자 각각의 철학적 관점이 깊게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표상주의 의미론이 결정적으로 승리를 거둘만한 '낙다운 논증(knock-down argument)'이 존재한다고 보기는 힘든 거죠. 물론, 둘 중 더 널리 받아들여지는 쪽은 표상주의 의미론이겠지만, 이런 세분화되고 전문적인 주제에 대해서는 단순히 '다수결'로 특정 이론의 우위성을 말하기는 힘들 거예요. 철학적 논쟁의 결론이 투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2) 비트겐슈타인이 의미론을 제시해야 하는가?

더욱 쟁점이 되는 부분은,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의미론을 거부한다는 점이에요. 문장이 참이 되는 조건를 일반화하여 제시해야 한다는 철학적 관점 자체야말로 비트겐슈타인이 논박하고자 하는 대상이라는 거죠. 이런 식의 의미론은 마치 '사용'과 '사용의 조건'을 서로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나누어 놓는 나머지, "나는 언어를 사용하지만 내 언어 사용의 조건을 모를 수도 있다." 혹은 "나는 언어 사용의 조건은 알지만 언어를 사용하지는 못한다." 같은 주장이 유의미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정한 채 시작한다는 거죠. 그렇지만, 바로 이런 식의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요점이에요. 언어와 언어 사용의 조건을 분리시키는 사람은, 마치 "나는 덧셈을 완벽하게 이해하지만(덧셈의 조건은 이해하지만) 덧셈 문제는 전혀 풀지 못한다(덧셈을 사용하지는 못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사실 일종의 자기 모순에 빠져 있다는 거예요. 덧셈을 이해한다는 것과 덧셈 문제를 푼다는 것은 서로 별개의 상황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애초에 비트겐슈타인에게 '의미론'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 자체가 논점을 일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비트겐슈타인은 '의미론'이라는 기획이 사용과 사용의 조건을 분리시키는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모든 종류의 의미론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철학자니까요. 표상주의적 의미론이든지 추론주의적 의미론이든지, 의미론의 기획 자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요지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런 비트겐슈타인에게 "너의 새로운 의미론을 제시하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요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죠. 이 점이 제가 몇 년 전에 「사용 이론과 회의주의를 넘어서: 비트겐슈타인의 정적주의」(『철학논집』, 제69권, 2022, 143-178쪽.)라는 논문에서 제시한 비트겐슈타인 해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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