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속(substitution)'과 '케노시스(kenosis)'가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케노시스'는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이기 때문에, (특별히,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하는 가장 본질적인 방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는 신학 용어이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모든 활동을 '케노시스'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신학적 시도들도 많이 있을 정도예요. 다만, 논의의 맥락을 위해 몇 가지 구분이 필요해 보입니다. (a) 영상에서 설명되는 토마스 제이 오어드의 '본질적 케노시스' 개념은 '케노시스'에 대한 일반적인 신학의 논의와는 약간 차이가 있고, (b) 그리스도론의 맥락에서 제기된 '케노시스' 사상이 어떻게 신론 일반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도 해명되어야 하고, (c) '대속'이라는 주제도 그리스도교 신학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여러 가지 오해나 논쟁이 얽혀 있다 보니 이 주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서도 입장을 설정해야 해요.
(1) '케노시스'란 무엇인가?
오어드는 '케노시스'를 '하나님의 한계'나 '하나님의 무능력' 등 대단히 폭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이런 식의 이해가 '케노시스' 개념에 대한 아주 일반적인 이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케노시스'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비움' 혹은 '비하'라고 할 수 있어요. 본래 이 단어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 강조해서 사용한 용어거든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지만 자신을 비워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이야기죠.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ekenosen)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그래서 '케노시스'는 본래 예수의 탄생, 사역, 죽음이 지닌 특징을 가리키는 용어예요. 그리스도교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가 이 세상에서 살아간 모든 삶의 궤적이 자기 비움의 과정이니까요. 예수는 당대 사람들에게 "세리와 죄인의 친구"(마태복음 11:19)라는 비난을 들을 정도로 가난한 자, 병든 자, 세리, 창기의 자리까지 스스로 내려갔잖아요.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고, 그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그 사람들의 편에 서서 당대 사회의 질서를 비판한 것이 예수의 주된 활동이었죠.
실제로, 존 도미닉 크로산처럼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역사가조차도 예수가 죄인들과의 '식탁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점을 아주 특징적이라고 지적해요. 현대사회에서도 그렇지만, 우리가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는지가 우리가 누구와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잖아요. 예수는 당대 사회에서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과 식사를 함께 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들이 놓여 있던 사회적 자리에까지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죠.
존 도미닉 크로산 (John Dominic Crossan)
그리고 이런 예수의 활동은 십자가에서 가장 절정에 이르죠. 유대인들에게나 로마인들에게나 십자가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의 죽음"(갈라디아서 3:13)이라고 여겨졌으니까요. 말하자면,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로서 죽었다고 할 수 있어요. 당대 사회가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고 규정한 죄인들을 찾아갔던 것으로도 모자라서, 마침내 예수 자신이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 중 하나가 되어서 죽은 거죠. 그래서 예수의 마지막 말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마가복음 15:34)였고요.
(2) 케노시스 그리스도론에서 케노시스 신론으로
그런데 사도 바울을 포함한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예수의 모습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새롭게 깨닫게 되죠.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사흘만에 부활하게 되면서, 예수가 자신의 삶에서 보여주었던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 자신에 의해 확실한 '의(dikaiosyne, 옳음)'로 선언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1세기 유대인들에게 부활이란 세상의 마지막 날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나게 될 '종말론적' 사건이었거든요. 하나님이 이 세상의 끝에 이르면 억울하게 죽은 의인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시킴으로써 누가 역사의 승리자였는지를 확정해 줄 것이라는 게 당대 유대인들의 믿음이었으니까요.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라는 신학자는 바로 이 맥락에서 예수의 부활 사건이 예수의 신성이나 삼위일체 같은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를 확증해주는 중요한 근거라고 지적해요.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사실은 (a) 예수가 하나님에 대해 가르친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옳았다고 최종적으로 선언되었고, (b) 예수가 행하였던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서 옳았다고 최종적으로 선언되었고, 그래서 (c) 예수의 말과 행동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인지가 계시될 수 있다는 사실이 최종적으로 선언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가 부활 사건을 통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거죠.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기준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언할 수 있다고 강조해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예수를 보아야 하고, 예수를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거예요. 물론, 신학마다 어느 정도의 편차는 있긴 하지만,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확신만큼은 그리스도교 신학이라면 거의 모든 입장이 공유하는 대전제라고 할 수 있어요. 더욱이, 20세기 이후의 현대신학은 신론에 대한 그리스도론의 우선성을 대단히 강조해요. "하나님은 불멸자이다."라거나 "하나님은 영적 존재이다." 같은 형이상학적 사변을 먼저 내세우기 전에,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를 통해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거죠.
이 주장을 가장 철저하게 개진한 신학자가 바로 칼 바르트예요. 바르트는 하나님이 창조 이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에베소서 1:4의 구절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자기결정(selbstbestimmung Gottes)'이라는 놀라운 개념을 발전시키거든요.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기준이라면, 세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자기 결정을 통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르트의 교의학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 주장이에요.
칼 바르트(Karl Barth)
여기서 '하나님의 자기 결정'이란 하나님이 세상의 창조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만나시기로 스스로 결정하였다는 의미에요. 즉, 하나님은 영원 속에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을 사랑하는 자가 되겠다."라고 자기 자신에 대한 최초의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에 따라 역사 속에서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운행한다는 거예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모든 활동은 최초로 선포된 하나님의 자기 결정에 근거하고 있는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의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거죠.
바르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 한 명이다 보니, 이후의 현대신학은 바르트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아서 그리스도론으로부터 신론으로 나아가려는 기획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요. '케노시스'라는 주제도 바로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론을 넘어서 신론으로까지 확장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을 '케노시스'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케노시스'를 통해 소외된 자들의 자리로까지 내려가셨다고 할 수 있다면, 케노시스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회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본질적으로 귀속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케노시스'라는 주제가 그리스도론을 넘어 창조론이나 신정론 등 신학의 수많은 다른 영역에서까지 나타나는 거죠. 가령, 위르겐 몰트만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의 창조가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자기를 비워내신 사건이라고 주장하고, 이와 같은 몰트만의 창조론은 커다란 파급력을 일으켜서 그에 대한 신학자들의 후속 논의들이 『케노시스 창조이론』이라는 논문집으로 출간되기도 했죠. 또한 (이미 영상으로 확인하셨듯이) 오어드 같은 철학자는 악의 문제에 케노시스 개념을 적용해서,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필연적으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고요. (오어드만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 전통에 있는 헤롤드 쿠쉬너 같은 랍비나 엘리 위젤 같은 작가도 유사한 주장을 하고, 몰트만의 신정론도 넓은 의미에서는 케노시스 신정론에 속한다고 할 수 있어요.)
(3) 케노시스와 대속
그래서 '케노시스'가 신적 개입과 대비되는 개념이라고 하기는 힘들어요. 오히려 창조, 구속, 섭리 등 모든 종류의 신적 개입을 '케노시스'의 맥락에서 이해하려는 시도가 더욱 일반적이죠. 즉, 오어드의 논의에서는 '케노시스'가 마치 하나님의 개입 불가능성을 나타내는 용어인 것처럼 쓰였지만, 실제로 '케노시스'는 하나님이 세상에 개입하는 가장 본질적인 방식을 나타내는 용어로 더 널리 통용돼요. 하나님은 자신을 비우시는 방식으로 세상에 찾아오는 분이시고, 자신을 비우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고, 자신을 비우시는 방식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분이라는 거죠.
당연히 '대속'도 케노시스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어요. 애초에 사도 바울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일어난 대속을 설명하기 위해 '케노시스'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 걸요. 하나님은 자기를 비우셔서 인간이 되셨고, 자기를 비우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셨고, 자기를 비우셔서 죄인들을 위한 십자가를 감당하셨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강조점이니까요. 사도 바울의 관점에서는 대속의 사건이란 그 자체로 케노시스의 과정인 거죠.
다만, 그리스도교의 '대속'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어요.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동의하는 바이지만, 대속이 단순히 예수가 '죄'라는 신비적인 형이상학적 실체를 짊어지고 인간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형벌을 받았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는 어려워요. 소위 '형벌 대속(penal substitution)' 사상은 중세의 봉건 사회를 염두에 두고서 안셀무스가 고안해 낸 해석 방식이라서요. 이런 해석 방식에 나름대로의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고린도전서 15:3)라고 말하였을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형벌 대속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 오늘날 조직신학이나 성서신학의 거의 지배적인 의견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오히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형벌'의 사건으로 보기보다는 '정화'의 사건으로 보거든요. 가령,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힐라스테리온(hilasterion)으로 내주셨습니다."(로마서 3:25)라고 하는데, 과거에는 '힐라스테리온'을 형벌 대속 이론에 따라 '속죄제물'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오늘날에는 이 단어가 '속죄소'라고 번역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더욱 설득력을 얻고 있어요. '속죄제물'이라는 번역을 지지하는 입장은 예수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은 제물이라는 의미로 저 구절을 해석하지만, '속죄소'라는 번역을 지지하는 입장은 예수야말로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시는 장소라는 의미로 저 구절을 해석하거든요.
'힐라스테리온'을 속죄소로 번역하는 입장은 케노시스 사상과도 매우 잘 어울리죠.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올 자격이나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하지만,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낮추셔서 '예수'라는 속죄소 안에서 인간을 만나셨고, 인간과 함께 하셨고,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것이니까요. 말하자면, 하나님이 죄인들의 자리로까지 내려와서 직접 세운 속죄소가 예수라는 거예요. '죄인'이라고 치부된 가난한 자, 병든 자, 세리, 창기를 예수가 찾아왔고, 결국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의 하나로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함으로써,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까지 하나님의 속죄소가 세워졌다는 거예요. 예수에게 나아오면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죄인'이라고 여겨지지 않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예수야말로 죄를 정화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속죄소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거예요. 바로 이 전체 과정이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구원이라면, 케노시스는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