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주를 복사하는데에 어려움이 있기에 이를 한번에 남깁니다.
본 연구에서는 논리적 악의 문제(the logical problem of evil) 를 다룰 것이다.
‘악(惡)의 문제' 는 무신론자들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거다. 기독교 전통에 근거한 서구 유신론에서 신은 전지전능하고 지선(至善)하며 우주만물을 창조한 완전한 존재자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이러한 신이 창조한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 현실은 창조의 완전성을 훼손할뿐만 아니라 신의 완전성마저 훼손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가장 설득력 있는 논증은 일찍이 흄(1779)이 필로(Philo)의 입을 통하여 간명하게 제시한 바 있다:
“신이 악을 막을 의지를 가졌는데 막을 수 없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한 셈이네. 혹시 그가 그럴 능력은 있는데 그렇게 할 의지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적이로군. 그가 능력도 가졌고 의지도 가졌나? 그렇다면 악은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맥키는 악의 문제가 “종교적인 믿음이 합리적 지지를 결여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종교적 믿음이 명백하게 불합리한(positively irrational) 것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핵심적인 신학의 교리들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 전체를 유지하려 하는 신학자는 이성적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을 믿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주장하는 다른 믿음들에 의해 논파된(disproved) 것을 믿고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Mackie, 1955, p.77)
결국 신의 존재와 악의 존재는 양립할 수 없는데. 악의 존재가 너무나 명백한 현실이어서 부정할 수 없으므로 신의 존재가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유신론자가 악의 문제에 근거한 무신론 진영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악이 존재하는 현실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 악이 신의 완전성을 훼손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는 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논거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필요악' 개념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악이 신의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그런 악이 이 세상에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오히려 완전한 창조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의 악을 필요한 것으로 보게 되면, 악의 존재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전통적 신정론(神正論)의 논리다.
로우는 이러한 전통적인 신정론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 ‘불필요악’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실에 주목했다. 즉 신정론이 말하는 필요악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필요악이라고 볼 수 없는 악이 허다하게 존재하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불필요악이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아무 의미도 없는 악을 말한다. 불필요악으로 인해 겪은 고통이 초래하는 더 큰 선이나, 그 고통이 차단하는 더 나쁜 악이 있다고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 세계는 완전한 피조물이라고 볼 수 없고, 그런 불완전한 세계를 창조한 신은 완전한 존재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유신론자들은 신이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자라고 규정했다. 이 지점에서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이 말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주장하게 된다. 로우는 이상의 생각을 다음과 같은 형식의 논변으로 정리한다.
회의적 유신론은 로우의 무신론적 논변이 기본적으로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전통적인 신정론을 옹호하려고 했다.
와익스트라는 로우의 논변이 인간의 인식적 한계를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와익스트라는 인간이 불필요악에 대해 인식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시야를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자격이 없게 된다. 반면에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자로 정의된 신의 시야에서는 그런 선이나 악이 인식적으로 접근되는 것이기에 그런 선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또는 그런 악을 용인치 않기 위해서 신이 현재의 극심한 고통을 용인한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물음이 로우에게 제기된다. 따라서 로우의 전제 (i)이 참이라고 볼 근거가 없게 되어 로우의 논변은 타당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와익스트라의 비판의 핵심이고, 회의적 유신론이 갖는 회의적 요소가 여기에 있다. 즉 인간의 인식적 한계로 인해 불필요악의 존재를 주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불필요해 보이는 악’이라고 해서, 즉 아무 이유도 없어 보이거나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인다고 해서 실제로 그 악이 발생하게 된 이유가 없다거나 그 악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마치 벌레가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데도 물렸다고 생각하는 오류와 다름없다는 뜻이다. 즉,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이 이 세상에서 발견되는 악을 허용할 도덕적으로 충분한 이유를 가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할 처지에 있지 않다.
해당 문제에 대한 본 연구자의 답변은 이와 같다. 인간의 인식적 한계에 봉착하여 만약 어떠한 방법으로도 신, 혹은 신의 위대한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면 신의 선을 펼칠 원대한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어떠한 방법으로도 관측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오직 불필요악으로 보이는 고통 뿐이라는 것이다_성경에 제시된 각 사건의 증거물이 명확하게 제시되거나 증명되어야만 한다. 다만 신이나, 혹은 원대한 계획을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애당초 이는 존재하는 것일지에 대한 의문이 필요하다.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The Demon-Haunted World≫ 의 세이건의 용_사고실험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그 어떠한 방법_간접적인 방법으로도 관측할 수 없다면 이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해석할 수 있다.
“불을 뿜는 용이 우리 집 차고에서 살고 있어”. 내가 당신에게 진지하게 이 같은 주장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틀림없이 당신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용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가 전해져 왔지만 실제 증거가 제시된 적은 없었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당신은 “보여줘”. 라고 말한다. 나는 당신을 데리고 차고로 갔다. 차고 안에는 사다리, 빈 페인트 깡통, 낡은 세발자전거가 있었지만 용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물었다. “용은 어디 있지?”
“오, 바로 여기 있어.” 나는 막연하게 손짓하면서 대답한다.
“아, 이 용이 보이지 않는 용이라고 말하는 걸 잊었군.”
당신은 차고 바닥에 밀가루를 뿌려서 용의 발자국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이 용은 공중에 떠 있어.”
그러자 당신은 적외선 센서를 이용해 보이지 않는 불을 탐지하려고 한다.
“좋은 생각이지만, 보이지 않는 불에는 열기도 없어.”
다시 당신은 분무 페인트를 뿌려서 용의 형상이 나타나도록 해보자고 제안한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무형의 용이라서 페인트도 소용없어.”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계속된다. 나는 당신이 제안하는 모든 물리적 테스트가 성공하지 못할 특별한 이유를 들면서 대응할 것이다.
그렇다면 허공에 떠 있는 채로 열기가 없는 불을 내뿜는 무형의 보이지 않는 용이 있다는 말과 ‘애당초 용이 없다’는 말의 차이는 무엇인가? 주장을 반증할 방법이 없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실험도 소용이 없다면, 용이 존재한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이 우리를 창조하였기에 우리가 증거물이다” 와 같은 주장 또한 관측할 수 없기에, 신은 보이지 않는 용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브래들리(1930)는 악의 문제가 해결 불가능한 자가당착임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과 용기만 있으면 된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절대자가 도덕적 인격체라는 생각에서 발생한다. 이런 기반에서 출발하면 악과 절대자의 관계는 즉시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이 딜레마는 명백한 자기모순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것이 해결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신이 만약 도덕적 인격체가 아닌 동시에 선하며 전지전능하다면 악의 문제를 해결할 몇가지 방안이 있다. 신이 오직 인간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정과, 모든 악을 멸하고 선만 남게 되었을 때는 애당초에 선이 선으로써 기능하지 않거나, 혹은 그저 극의 선(최고선)을 추구하여 도덕법칙에 매몰된 기계로서 작동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신이 오직 인간만을 위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해당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신이 문자 그대로(literally) 만물을 창조하였다면, 신은 만물을 공평히 대우하는 체계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다수의 존재가 이로운 방향으로 세상을 조율할 것이다. 즉, 한명의 인간과 그보다 많은 생명체를 비교하였을 때, 상대적으로 후자의 가치가 더 높기 때문에 후자를 살릴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이 때는 필요악의 존재가 쉽게 인정된다. 인간을 죽이는 행위가 그 인간이 죽였을 생명체를 살린다는 결과에 귀납하게 된다면, 그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는 세계 대전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쟁이나 혹은 질병 등은 정당화 될 수 있다.
만약 모든 악을 멸한다 가정하더라도, 정작 선만 남은 세상은 이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추측은 비합리적이다. 만약 선만 남은 세상이 이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정도의 선을 행하며, 그 사람들이 악으로 변하지 않도록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이는 도덕법칙에 매몰된 유토피아를 가장한 디스토피아를 건설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선은 악이 존재함으로써 존재하기에, 선만 남은 세상에서 새롭게 그 정도에 따라 선과 악이 분류될 것이다. 즉, 그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치 자체가 높아짐에 따라, 새롭게 악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_모든 사회적 기준과 도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Hum e, David (1779), Dialogue Concerning Natural Religion. Part X. (Rowe (2001)에 수록) p.43
Mackie, J.L. (1955) “Evil and Omnipotence” (Mind 64, 200-212) in Rowe (2001) 77-90에 수록
1.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전지전능하고 도덕적으로 완전하다.
2.만약 신이 전능하다면, 신은 모든 악을 제거할 능력이 있다.
3.만약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신은 악이 언제 존재하는지를 안다.
4.만약 신이 도덕적으로 완전 한다면, 신은 모든 악이 제거되기를 바랄 것이다.
5.악은 존재한다.
6.악과 신이 모두 존재한다면, 신은 모든 악을 제거할 능력이 없거나, 악이 언제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모든 악이 제거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7.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EP)]
하종호. (2017). 악의 문제에 대한 회의적 유신론과 현상적 보수주의. 철학연구, 119, 323-342, 10.23908/JSPS.2017.12.119.323
(i) 전지전능한 신이 더 큰 선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또는 그것과 똑같이 나쁘거나 더 나쁜 다른 악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막을 수 있었을 법한 극심한 고통의 사례들이 존재한다.
(ii)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신이라면, 더 큰 선을 상실하지 않는 한, 또는 똑같이 나쁘거나 더 나쁜 다른 악을 초래하지 않는 한, 그는 어떠한 극심한 고통의 발생도 막았을 것이다.
(iii) 그러므로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Wykstra(1984)
Wykstra(1984), 88.
Draper(1996), 176.
KOREA SKEPTIC Vol.19 2019 ISSN 2383-9848
Bradley, J. (1930) Appearance and Reality. (Swan Sonnenschein) p.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