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유신론을 바탕으로 한 악의 문제(the problem of evil) 에 대한 짧은 단상

각주를 복사하는데에 어려움이 있기에 이를 한번에 남깁니다.

본 연구에서는 논리적 악의 문제(the logical problem of evil) 를 다룰 것이다.

‘악(惡)의 문제' 는 무신론자들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논거다. 기독교 전통에 근거한 서구 유신론에서 신은 전지전능하고 지선(至善)하며 우주만물을 창조한 완전한 존재자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이러한 신이 창조한 세계에 악이 존재하는 현실은 창조의 완전성을 훼손할뿐만 아니라 신의 완전성마저 훼손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가장 설득력 있는 논증은 일찍이 흄(1779)이 필로(Philo)의 입을 통하여 간명하게 제시한 바 있다:

“신이 악을 막을 의지를 가졌는데 막을 수 없었던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한 셈이네. 혹시 그가 그럴 능력은 있는데 그렇게 할 의지가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는 악의적이로군. 그가 능력도 가졌고 의지도 가졌나? 그렇다면 악은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맥키는 악의 문제가 “종교적인 믿음이 합리적 지지를 결여하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종교적 믿음이 명백하게 불합리한(positively irrational) 것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핵심적인 신학의 교리들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 전체를 유지하려 하는 신학자는 이성적이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는, 증명될 수 없는 것을 믿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주장하는 다른 믿음들에 의해 논파된(disproved) 것을 믿고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Mackie, 1955, p.77)

결국 신의 존재와 악의 존재는 양립할 수 없는데. 악의 존재가 너무나 명백한 현실이어서 부정할 수 없으므로 신의 존재가 부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유신론자가 악의 문제에 근거한 무신론 진영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악이 존재하는 현실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 악이 신의 완전성을 훼손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는 논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논거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필요악' 개념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악이 신의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면, 그런 악이 이 세상에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오히려 완전한 창조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의 악을 필요한 것으로 보게 되면, 악의 존재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전통적 신정론(神正論)의 논리다.

로우는 이러한 전통적인 신정론의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 ‘불필요악’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실에 주목했다. 즉 신정론이 말하는 필요악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필요악이라고 볼 수 없는 악이 허다하게 존재하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불필요악이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아무 의미도 없는 악을 말한다. 불필요악으로 인해 겪은 고통이 초래하는 더 큰 선이나, 그 고통이 차단하는 더 나쁜 악이 있다고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이 세계는 완전한 피조물이라고 볼 수 없고, 그런 불완전한 세계를 창조한 신은 완전한 존재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유신론자들은 신이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자라고 규정했다. 이 지점에서 무신론자들은 유신론이 말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주장하게 된다. 로우는 이상의 생각을 다음과 같은 형식의 논변으로 정리한다.

회의적 유신론은 로우의 무신론적 논변이 기본적으로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전통적인 신정론을 옹호하려고 했다.
와익스트라는 로우의 논변이 인간의 인식적 한계를 반영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와익스트라는 인간이 불필요악에 대해 인식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시야를 넘어서 있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자격이 없게 된다. 반면에 전지전능하고 완전한 존재자로 정의된 신의 시야에서는 그런 선이나 악이 인식적으로 접근되는 것이기에 그런 선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또는 그런 악을 용인치 않기 위해서 신이 현재의 극심한 고통을 용인한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물음이 로우에게 제기된다. 따라서 로우의 전제 (i)이 참이라고 볼 근거가 없게 되어 로우의 논변은 타당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와익스트라의 비판의 핵심이고, 회의적 유신론이 갖는 회의적 요소가 여기에 있다. 즉 인간의 인식적 한계로 인해 불필요악의 존재를 주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불필요해 보이는 악’이라고 해서, 즉 아무 이유도 없어 보이거나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인다고 해서 실제로 그 악이 발생하게 된 이유가 없다거나 그 악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결론짓는 것은 마치 벌레가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아무것도 없는데도 물렸다고 생각하는 오류와 다름없다는 뜻이다. 즉,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이 이 세상에서 발견되는 악을 허용할 도덕적으로 충분한 이유를 가질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할 처지에 있지 않다.

해당 문제에 대한 본 연구자의 답변은 이와 같다. 인간의 인식적 한계에 봉착하여 만약 어떠한 방법으로도 신, 혹은 신의 위대한 의미를 찾아볼 수 없다면 신의 선을 펼칠 원대한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어떠한 방법으로도 관측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오직 불필요악으로 보이는 고통 뿐이라는 것이다_성경에 제시된 각 사건의 증거물이 명확하게 제시되거나 증명되어야만 한다. 다만 신이나, 혹은 원대한 계획을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애당초 이는 존재하는 것일지에 대한 의문이 필요하다.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The Demon-Haunted World≫ 의 세이건의 용_사고실험을 인용하자면, 우리는 그 어떠한 방법_간접적인 방법으로도 관측할 수 없다면 이는 없는 것과 다름없다 해석할 수 있다.

“불을 뿜는 용이 우리 집 차고에서 살고 있어”. 내가 당신에게 진지하게 이 같은 주장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틀림없이 당신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용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가 전해져 왔지만 실제 증거가 제시된 적은 없었다.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당신은 “보여줘”. 라고 말한다. 나는 당신을 데리고 차고로 갔다. 차고 안에는 사다리, 빈 페인트 깡통, 낡은 세발자전거가 있었지만 용은 보이지 않았다.
당신이 물었다. “용은 어디 있지?”
“오, 바로 여기 있어.” 나는 막연하게 손짓하면서 대답한다.
“아, 이 용이 보이지 않는 용이라고 말하는 걸 잊었군.”
당신은 차고 바닥에 밀가루를 뿌려서 용의 발자국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좋은 생각이긴 한데, 이 용은 공중에 떠 있어.”
그러자 당신은 적외선 센서를 이용해 보이지 않는 불을 탐지하려고 한다.
“좋은 생각이지만, 보이지 않는 불에는 열기도 없어.”
다시 당신은 분무 페인트를 뿌려서 용의 형상이 나타나도록 해보자고 제안한다.
“좋은 생각이야, 하지만 무형의 용이라서 페인트도 소용없어.”
이야기는 그런 식으로 계속된다. 나는 당신이 제안하는 모든 물리적 테스트가 성공하지 못할 특별한 이유를 들면서 대응할 것이다.

그렇다면 허공에 떠 있는 채로 열기가 없는 불을 내뿜는 무형의 보이지 않는 용이 있다는 말과 ‘애당초 용이 없다’는 말의 차이는 무엇인가? 주장을 반증할 방법이 없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실험도 소용이 없다면, 용이 존재한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신이 우리를 창조하였기에 우리가 증거물이다” 와 같은 주장 또한 관측할 수 없기에, 신은 보이지 않는 용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브래들리(1930)는 악의 문제가 해결 불가능한 자가당착임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과 용기만 있으면 된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절대자가 도덕적 인격체라는 생각에서 발생한다. 이런 기반에서 출발하면 악과 절대자의 관계는 즉시 해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이 딜레마는 명백한 자기모순에 근거하기 때문에 이것이 해결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신이 만약 도덕적 인격체가 아닌 동시에 선하며 전지전능하다면 악의 문제를 해결할 몇가지 방안이 있다. 신이 오직 인간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가정과, 모든 악을 멸하고 선만 남게 되었을 때는 애당초에 선이 선으로써 기능하지 않거나, 혹은 그저 극의 선(최고선)을 추구하여 도덕법칙에 매몰된 기계로서 작동할 수 있다는 가정이다.

신이 오직 인간만을 위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해당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 신이 문자 그대로(literally) 만물을 창조하였다면, 신은 만물을 공평히 대우하는 체계인 존재자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다수의 존재가 이로운 방향으로 세상을 조율할 것이다. 즉, 한명의 인간과 그보다 많은 생명체를 비교하였을 때, 상대적으로 후자의 가치가 더 높기 때문에 후자를 살릴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이 때는 필요악의 존재가 쉽게 인정된다. 인간을 죽이는 행위가 그 인간이 죽였을 생명체를 살린다는 결과에 귀납하게 된다면, 그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는 세계 대전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전쟁이나 혹은 질병 등은 정당화 될 수 있다.

만약 모든 악을 멸한다 가정하더라도, 정작 선만 남은 세상은 이상적으로 작동할 것이라는 추측은 비합리적이다. 만약 선만 남은 세상이 이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정도의 선을 행하며, 그 사람들이 악으로 변하지 않도록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이는 도덕법칙에 매몰된 유토피아를 가장한 디스토피아를 건설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선은 악이 존재함으로써 존재하기에, 선만 남은 세상에서 새롭게 그 정도에 따라 선과 악이 분류될 것이다. 즉, 그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치 자체가 높아짐에 따라, 새롭게 악을 제거해야 할 것이다._모든 사회적 기준과 도덕은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Hum e, David (1779), Dialogue Concerning Natural Religion. Part X. (Rowe (2001)에 수록) p.43

Mackie, J.L. (1955) “Evil and Omnipotence” (Mind 64, 200-212) in Rowe (2001) 77-90에 수록

1.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전지전능하고 도덕적으로 완전하다.

2.만약 신이 전능하다면, 신은 모든 악을 제거할 능력이 있다.

3.만약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신은 악이 언제 존재하는지를 안다.

4.만약 신이 도덕적으로 완전 한다면, 신은 모든 악이 제거되기를 바랄 것이다.

5.악은 존재한다.

6.악과 신이 모두 존재한다면, 신은 모든 악을 제거할 능력이 없거나, 악이 언제 존재하는지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모든 악이 제거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7.그러므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SEP)]

하종호. (2017). 악의 문제에 대한 회의적 유신론과 현상적 보수주의. 철학연구, 119, 323-342, 10.23908/JSPS.2017.12.119.323

(i) 전지전능한 신이 더 큰 선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또는 그것과 똑같이 나쁘거나 더 나쁜 다른 악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막을 수 있었을 법한 극심한 고통의 사례들이 존재한다.
(ii)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신이라면, 더 큰 선을 상실하지 않는 한, 또는 똑같이 나쁘거나 더 나쁜 다른 악을 초래하지 않는 한, 그는 어떠한 극심한 고통의 발생도 막았을 것이다.
(iii) 그러므로 전지전능하고 지선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Wykstra(1984)

Wykstra(1984), 88.

Draper(1996), 176.

KOREA SKEPTIC Vol.19 2019 ISSN 2383-9848

Bradley, J. (1930) Appearance and Reality. (Swan Sonnenschein)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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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에 마무리를 못한 감이 없지 않게 있네요

재미있습니다! 다만, 저는 의견이 좀 다르네요.

저는 왜 선만 남은 세상이 이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모든 개체가 자유의지를 지니면서도 악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하는 일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에요. 실제로, 종교 전통에서는 그런 세상이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와 같은 이미지로 상상되고 있잖아요. 선만 남은 세상이 이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천국이나 하나님 나라가 불가능하다는 또 다른 문제를 종교인들에게 남기지 않을까 하네요.

개인적으로, 저는 소위 '악의 문제'가 성서 전통의 내러티브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사이비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가령, 실제 성서 전통은 애초에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종류의 '전능' 개념을 주장하지조차 않기 때문에 이런 문제 제기 자체가 허수아비 논증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악의 문제를 구성하는 네 가지 전제들인

(1) 신은 전능하다.
(2) 신은 전지하다.
(3) 신은 전선하다.
(4) 세상에는 악이 존재한다.

중에서 하나 이상의 전제를 거부해야 한다면, (1)이나 (4)를 거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봐요. 특별히, (4)가 거짓이라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이후로 정통 기독교 신학의 중요 교의이기도 하죠. 세상에 '악'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적어도 기독교 신학의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오류라는 것 말이에요. (애초에 물리주의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무신론자가 "세상에 왜 이렇게 악이 많은가!"라고 주장하는 것부터가 다소 우습지 않나요? 악이 쿼크나, 렙톤이나, 보손으로 이루어진 실체인 것처럼 생각하는 꼴이잖아요. 하물며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고대인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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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생각에는 현재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는 선이라는 개념과 과거의 선, 그리고 미래의 선은 명백히 다르기 때문에 이상적인 세계가 건설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유색인종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는 것만으로도 선이라고 여겼다면, 현재는 유색인종과 백인을 동일시 여기는 것이 선이 아닌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 처럼-사회적 기준, 즉 선과 악을 판별하는 도덕적 기준 또한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만약 남을 도우는 선인들만 남은 세상이 있다 가정하더라도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은 높아짐에 따라 선인들을 다시 새로운 선과 악으로 분류할 것이라는 추측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다시 악을 제거하는 과정이 이루어진다면, 다시 사회적 기준이 높아지는 순환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과 악을 나누는 기준이나 도덕 법칙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설명하는데에 어려움이 있으나, 국가별로 다른 문화 등 또한 예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말씀해주신 악이라는 개념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는 저 또한 동의합니다. 이 때문이라도 사실 악의 문제를 통한 제대로된 논의가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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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논증은 시대나 문화에 따라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이 변화한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네요. 하지만

(a) 시대나 문화마다 선의 기준들은 다양하다.
(b) 특정한 시대나 문화가 지향하는 개별적 선의 기준을 실현하기란 불가능하다.

라는 주장은 구별될 필요가 있다고 보여요. 가령,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라는 명제가 어느 사회에서나 보편적으로 '선'인 것은 아니었죠. 오히려 고대 사회에는 이런 명제들이 나약함을 확산시키는 '나쁜' 명제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지만, 기독교에서는 이런 명제들이 '도덕'으로 받아들여지는 등, 시대에 따라 '선'이나 '도덕'의 기준이 달라졌죠.

하지만 이 사실로부터 특정한 시대나 문화 속에서 제시된 개별적 선의 기준들을 실현하기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죠. 가령,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라는 주장을 모든 사람이 '선'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잖아요. 시대나 문화에 따라 선의 기준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각각의 선의 기준들은 얼마든지 원리적으로 실현 가능성을 지니는 거죠. 즉, 기독교가 생각하는 이상향, 유교가 생각하는 이상향, 불교가 생각하는 이상향 등이 (특별히 그 이상향 내부에 논리적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 이상) 애초에 실현 불가능하다고 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저는 글쓴이님께서 시대와 문화에 따른 선의 다양성을 강조하시면서도 "사회적 기준을 높인다"와 같이 '높음/낮음'의 은유를 사용하시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려요. 글쓴이님은 마치 시대에 따라 선의 기준이 달라지는 현상을 선의 기준이 더욱 고도화되고 발전되는 과정처럼 묘사하시는데, 이런 발전 도식은 결국 '이상적 선'을 상정하고서만 유의미할 수 있는 것이라서요. 그러니까, 글쓴이님께서는 "이상적 세계는 건설될 수 없다. 선은 시대나 문화마다 다양하다."라고 말씀하시지만, 정작 그 주장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는 여전히 나름의 '이상적 세계'의 기준을 다시 상정하신 게 아닌지 의문스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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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궁금하네요. 전능 개념이 어떻게 다르게 사용되서 악의 문제를 피할 수 있게되는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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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이 자신이 원할 때 마음대로 악을 없앨 수 있다는 의미라면, 성서는 그런 의미에서의 전능한 신을 상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고대근동 신화와 유대교에 대한 오늘날의 연구는 성서 이야기에서 '창조의 취약함'이라고 할 수 있는 모티프들을 자주 발견해내고는 합니다. 쉽게 말해, 성서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아직 완전히 승리하시지 못하신 분이라는 사실, 그래서 세상에는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혼돈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한다는 거죠. 뛰어난 유대교 구약성서학자인 존 레벤슨이 『하나님의 창조와 악의 잔존』이라는 책에서 이 주제를 아주 잘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 이 주제와 관련된 가장 뛰어난 성서신학적 연구서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약간 대중적이지만 상당히 깊이 있는 책들 중에서는 유대교 랍비 헤롤드 쿠쉬너의 When Bad Things Happen to Good People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납니까?』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었는데, 2011년에 『착한 당신이 운명을 이기는 힘』이라고 개정판이 나왔네요. 쿠쉬너는 뛰어난 유대인 철학자인 아브라함 요슈아 헤셀의 제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 책도, (제목만 보면 가벼운 감성 에세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악의 문제를 굉장히 진지하고 실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중학생 때 구판으로 읽었는데, 저에게는 상당히 큰 울림을 주는 책이었습니다. 쿠쉬너는 유대교 전통에 서서, 하나님이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에서) '전능한' 분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한계는 단순히 유대교 전통만 강조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도 '케노시스(kenosis)'라는 중요한 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낮춰서 약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상이죠. 실제로, 그리스도교가 믿는 예수는 폭행당하고, 희롱당하고, 고문당하고, 사형당한 존재잖아요. 애초에 그리스도교는 하나님의 아들조차 세상의 악에 희생당한 존재라는 고백으로부터 출발하는 신앙이라는 거죠. 원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한' 신에 대한 신앙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신정론의 문제에서 이 주제를 다루고 있는 논문들 중에서는 토머스 제이 오어드의 「본질적 케노시스 관점」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아래의 책 『신정론 논쟁』의 4장으로 수록되어 있어요.

위의 논문에 대한 감리교신학대학교 종교철학과 장재호 교수님의 소개 영상도 올립니다. 장재호 교수님은 영국의 「과학과 종교 포럼」에서 피콕 상(2015)을, 「과학과 신학 유럽학회」에서 ESSSAT 논문상(2018)을 수상하신 아주 뛰어난 신학자이십니다. (개인적으로, 장재호 교수님은 제 고등학교 선배님이시고, 고등학생 시절부터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종종 뵈었는데, 뛰어난 신학자가 되셔서 굉장히 놀랐네요.)

그리고 이런 '케노시스'라는 주제를 가장 잘 강조한 유명한 현대신학자 중 하나가 위르겐 몰트만입니다. 마침 몰트만이 어제(6월 3일)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네요. 몰트만의 대표작 중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이 고통과 악의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믿는 하나님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라기보다는, 고통당하는 자들의 정당성을 옹호하면서 그들의 호소가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약속을 보증하는 존재라는 것이 몰트만의 중요한 주장 중 하나입니다.

몰트만 본인부터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 전쟁의 참혹함을 겪으면서 포로수용소에서 신앙을 가지게 된 인물입니다. 또한 이 책은 수많은 제3세계 국가들에서 사회정의를 위한 운동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은 책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민주화운동 당시 감옥에서 몰트만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법정 최후 진술에 이 책을 인용한 인물들도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사변적인 신정론의 논의들과 달리, 몰트만이 제시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야기는 정말로 엄청난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저에게도 '인생책'이기도 해요.

만약 하나님이 '전능한' 분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고백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 말은 하나님이 '현재에' 전능하시다는 의미가 아니라 '미래에' 전능하게 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은 현재 세상에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온갖 혼란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세상의 마지막에 그 모든 혼란에도 불구하고 폭행당한 자들, 희롱당한 자들, 고문당한 자들, 사형당한 자들이 결국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죠. 마치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부활한 것처럼요. 세상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래, 악이 결국 패배하였구나! 하나님이 결국 이기셨구나! 이 세상을 사랑으로 이끄시는 전능하신 분이 우리를 버리시지 않으셨구나!"라는 고백이 완성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몰트만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기 낮추심은 신격화되고 인격화되어 생각되었다. [……] '유대교 신비가들은 이 명제를 언제나 여러 가지 점에서 주저하는 태도로 제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의 실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신성의 삶과 활동에 있어서 어떤 신비스러운 균열이 있다'는 것을 게르숌 숄렘(Gersohm Scholem)은 제시하였다. 이 관념은 카발라 학파가 '셰키나의 유형'이라고 부르는 관념으로 더 발전되었다. 온 세계의 조화가 회복되고 모든 사물들이 본래 세계의 계획에 있어서 차지해야 할 자리를 얻게 되는 구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성서가 말하는 바와 같이──'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의 이름은 하나이다.'라는 것이 참되고 궁극적으로 될 것이다.'" (위르겐 몰트만, 『삼위일체와 하나님의 나라』, 김균진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1989, 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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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나가는 뉴비입니다.. 악의 문제나 신정론은 평소 궁금했지만 깊게 파보질 못한 주제였는데 서강올빼미에서 언급되니 반가운 마음이 드네요ㅎㅎ 하여 초면에 실례 무릅쓰고 불쑥 댓글 달아봅니다.

YOUN님이 인용하신 유대교 전통의 해석이나 몰트만의 해석은 신학에 무지한 저에게 신선한 감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알려주신 문헌들을 기회될 때 차근차근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YOUN님이 인용한 "전능"의 해석 사례들이 과연 성경과 신경(信經, creed)에서 언급하는 "전능하신 창조주"에 대한 그리스도교 내부의 주류적 해석에 해당하는지, 일부 특수한 해석에 불과한건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신학에 무지한 저로선 YOUN님의 댓글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리스도교 혹은 아브라함 계열 종교에서의 "전능"에 대한 의미가 일반적 통념과 다르다면, 굳이 오해하기 쉬운 "전능"이란 어휘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악의 문제가 사이비 문제라고 공박히기에 앞서 먼저 그리스도교 혹은 아브라함 계열 종교 신학의 엄정성을 재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그리스도교에서 예정된 미래의 악에 대한 완전한 승리가 곧 "전능"에 해당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 듭니다. 신의 자기 낮춤 등 "케노시스"라 일컬어지는 그리스도교 특유의 교리를 그대로 수용한다고 치더라도, "전능"을 유예하는 기간 동안 발생할 무수히 많은 악과 고통의 문제에는 분명 완전한 치유나 보상이 불가능한 비가역적 측면이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교적 최종 승리가 실현된 미래 시점에도 여전히 그 승리가 "전능"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댓글들을 보면서 비록 외부자들이 잘 알지 못하는 "전능"에 대한 내러티브가 존재하더라도, 그러한 내러티브들은 신앙을 전제로 한 내부자용 해명의 성격이 강하고 다소 나르시시스트적이라 보편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물론 한편으로 그리스도교 내지 아브라함 계열 종교에 대한 외부의 오해와 편견도 상당하며, 악의 문제나 신정론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매우 심도있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구요. 댓글과 알려주신 문헌들을 바탕으로 더 공부해봐야겠단 생각이 듭니다. 본문과 댓글 쓰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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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
'전능'이 자신이 원할 때 마음대로 악을 없앨 수 있다는 의미라면, 성서는 그런 의미에서의 전능한 신을 상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고대근동 신화와 유대교에 대한 오늘날의 연구는 성서 이야기에서 '창조의 취약함'이라고 할 수 있는 모티프들을 자주 발견해내고는 합니다. 쉽게 말해, 성서는 하나님이 세상에서 아직 완전히 승리하시지 못하신 분이라는 사실, 그래서 세상에는 하나님의 통제를 벗어난 혼돈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인정한다는 거죠.

그렇군요. 저도 막연히 신과 선악에 대한 논증을 이해하고 있었는데, 신학에 대해 일반인이 많은 오해와 착각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상당히 놀라면서 읽게됩니다.
여호와가 만든 세상에도 악은 있다는 누군가의 글을 읽고는 당시엔 신의 불완전성을 이해하라는 의견인지 다름 혹은 틀림 (설사 극단적인 파시스트)조차 이해하라는 건지 애매하게도 얘기한다고 느꼈는데 차라리 이글이 솔직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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