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사기와 발작 버튼

  1. 예전부터 철학 관련 내용을 검색하면서 내가 보기에 영 아닌 것 같은 주장을 보면 그 즉시 발작 버튼이 눌려 반박 논리를 짜내기 위해 -정작 키배는 안 뜬다, 쫄보라;;- 하루 종일 짐짓 심각하게 고민하는 버릇이 있다. 소위 말하는 과몰입이다.

가령 그동안 인터넷에서 최근 각 분야에 대두되는 pc주의의 원인을 포스트 모더니즘과 연관시키면서, 그 책임을 포스트 모더니즘을 유발시켰다 여겨지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자들 (들뢰즈, 데리다, 푸코로 대표되는. 가끔 라캉이 얽힌다), 혹은 그 영향을 받은 학자들에게 돌리는 글들이 커뮤니티나 나무위키에 유포되는 것을 여러 번 본 적 있다. 뿐만 아니라 이 20세기 프랑스 철학에 적대적인 학자들도 그런 이미지를 씌우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들 에게 대략 포스트 모더니즘의 이미지는 "상대주의를 기반으로 진리가 없음을 주장해 반지성주의를 부추기는 철학 사조"에 지나지 않는다.

헌데 그런 글들을 보게 되면, 제가 읽거나 공부 해온 철학자들의 사상이 과연 저렇게 귀결되는 건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고, 바로 반박 논리를 짜지 못하는 내 모습에 공부의 부족함을 느끼기도 한다.

  1. 그래도 이렇게 발작 버튼을 눌리는 것의 장점은, 반박 논리를 찾아보며 나름의 공부같은 걸 한다는 점 아닐 까 싶다. 오늘 나는 또 소칼의 지적 사기를 들먹이며 소위 포스트 모더니스트라 불리는 철학자들을 까내리는 글을 보며 아침부터 발작 버튼이 눌리느라, 부끄럽게도 할 일을 못했다. 그 글은 대략 소칼의 주장과 글만을 인용하며, 소칼의 비판 대상이었던 프랑스 이론가들과 과학 철학자들을 같은 '포스트 모더니즘'으로 묶어 객관적 실재와 진리 따위는 언제든지 '구성'될 수 있다 주장하는 집단으로 보는(그리고 커뮤니티에서 생산되고 유포되는 글이 대개 그러하듯 학술적이라기 보다 얄팍한), 그리고 그런 사조가 pc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그런 글이었다. 대개 이런 글들은 소칼(최근 잠시 동안은 조던 피터슨도 껴있었던 것 같다)을 인용하며 프랑스 지식인들과 포스트 모더니즘 패기에 열을 올릴 뿐, 자신들의 주장이 정말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왜 그들의 철학이왜 그런 경향성을 띄고 있고 어떻게 그런 결론으로 귀결 되는지는 묻지 않는다. 일단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이란 전제를 깔고 들어간다.

이런 글들에 대한 명확한 반대 대응은 라캉, 들뢰즈, 데리다, 푸코의 철학이 과연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로 귀결되는지 살펴보는 거겠지만, 나는 저들이 내세우는 '지적 사기'가 정말 '과학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엿먹인 사건' 인지 궁금했다. 나는 당시 소칼 사건과 과학 전쟁에 대한 글들을 찾아 보았고, 이 둘이 세간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어느 한 쪽의 명확한 승리라기 보다, 자신의 입장을 방어하고 상대방의 과학관을 공격하기 위해 소칼을 위시한 과학자들과 소칼에게 비판당한 인문학자들의 지지자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날 선 대화가 오갔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애석하게도 내가 이들의 주장이 '정말' 맞는 지에 대해 다시 검증할 능력은 없다. 나는 과학은 문외한이고 철학도 부족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끄럽게도 뒤이어 소개할 반박 논문들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 글에서 나는 소칼에 대한 반박을 소개하고 개인적인 감상을 쓰는데 그치겠다.

날선 대화들 중에 내가 주목한 것은, 소칼이 말도 안된다 주장한 인문학자들의 '텍스트'들에 대한 해석이다. 이들의 텍스트를 어떻게 해석 하느냐에 따라 소칼이 '따지고 보면 아무 내용도 없는 데 허세를 부린다' 힐난한 텍스트들이 나름의 의미를 부여받을 수도, 나아가 문제되는 텍스트가 정말 사기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2.1. 소칼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한 챕터를 할애해가며 그들의 과학, 수학 전문 용어 사용이 난삽하다 비판한다. 본 맥락에서 이탈된 개념들이 그렇게 쓰인 이유도 제시되지 않은 채 말도 안되는 글nonsense와 진부한 주장truism을 오간다는 것이다(Fashionable Nonsense, 157).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Sometimes the constant-limit itself appears as a relation-ship in the whole of the universe to which all the parts are subject under a finite condition (quantity of movement, force, energy). Again, there must be systems of coordinates to which the terms of the relationshup refer: this, then, is a second sense of limit, an axternal framing or exoreference. For these pro-tolimits, outside all coordinates, initially generate speed abscissas on which axes will be set up that can be coordinated. A particle wil have a positon, an anergy, a mass, and a spin value but on condition that it receives a physical existence of actuality, or that it "touches down" in trajectories that can be graspes by systems of coordinates. It is these first limits that constitute slowing down in the chaos or the treshold of sus-pension of the infinite, which serve as endorefence and carry out a counting: they are not relations but numbers, and the entire theory of functions depends on numbers. We refer to the speed of light, absolute zero, the quantum of action, the Big Bang: the absolute zero of temperature is minus 273.15 degree Centigrade, the speed of light, 299,796 kilometers per second, where lengths contract to zero and clocks stop. Such limits do not apply through the empirical value that they take on solely within systems of coordinates, they act primarily as the condition of primordial slowing down that, in relation to infinity, extends over the whole scale of coeesponding speeds, over the whole scale of corresponding speeds, over their conditional accelerations or slowing-downs. It is not only the diversity of tese limits that entitles us to doubt the unitary vocation of science. In fact, each limit on its own account generates irreducible, heterogeneous systems of coordinates and imposes tresholds of discontinuity depending on procimity of distance of the variable (for example, the distance of the galaxies). Science is haunted not by its own unity but by the plane of reference constituted by all the limits or borders that give the plane its references. As for the systems of coordinates, they populate or fill out the plane of reference itself. (Deleuze and Guattari 1994, pp. 119-120)

(다 받아쓰고 나보니 정말 내가 봐도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 혹시 <지적사기>나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번역본을 얻게되면 국역본으로 수정하겠다.)

소칼은 이 맥락에서 몇 가지 의미 있는 단락들을 찾을 순 있지만, 들뢰즈와 가타리가 진행하는 논의들이 완벽히 말이 안된다utterly meaningless 주장한다. 소칼은 주석에서 말이 되는 단락 ("the speed of light... where lengths contract to zero and clocks stop.") 조차 혼란을 야기하며,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상대성 이론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Arkady Plotnitsky는 자신의 논문 <Chaosmologies; Quantum Field Theory, Chaos and Thought in Deleuze and Guattari's What is Philosophy> 에서 소칼과 브리크몽이 들뢰즈와 가타리에 대한 적절한 읽기 adequate reading에 실패했다며 소칼이 비판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변호한다.

Plotnitsky는 우선 소칼과 브리크몽이 위의 단락을 '완전히 말이 안된다'고 말하면서 대체 왜 말이 안되는 지는 설명하지 않고 넘어감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앞서 소칼이 주석에서 '그나마 말이 되는' 부분이 어떻게 말이 되는 지를 설명한다.

Deleuze and Guattari's actual point in the passage is that this peculiar physical situation is strictly linked to a specific number, the speed of light, 299,795 kilometes per second. The relationships between scientific concepts and measurable numerical quantities define modern science, as Deleuze and Guattari make clear by noting that, 'the entire theory of functions [which defines the practice science] depends on numbers' (WP, 119) (Chaosmologies, 43)

즉 (Plotnitsky의 독해에 따르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나마 말이 되어 보이는 단락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철학이란 무엇인가?> 119쪽에서 들뢰즈&가타리가 '[실천 과학을 정의하는]기능들에 대한 전체 이론이 숫자들에 의존한다' 명시한 것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개념과 측정할 수 있는 수 사이의 관계가 근대 과학을 정의한다는 것이었다.

(<Chaosmologies; Quantum Field Theory, Chaos and Thought in Deleuze and Guattari's What is Philosophy>는 Plotnitsky가 직접적으로 소칼의 주장에 반박하는데 목적을 두는 게 아니기 때문에 소칼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은 여기에서 그친다. 소칼이 말도 안된다 치부한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논의가 과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기 위해선 전체적인 논문의 파악이 필요할 것이다.)

2.2. 이런 들뢰즈 변호자들- 소칼이 말하길, 소칼에게 '이 텍스트는 네가 이해하지 못할 심오함을 갖고 있어' 라고 주장한다는 이들 - 에 대해, 소칼과 브리크몽은 자신들은 들뢰즈가 뭐라 말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들뢰즈를 위시한 '프랑스 지식인'들이 과학 용어들을 맥락 없이, 최소한 그들이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는 지에 대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쓰는 걸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음을 명시한다.

(물론 소칼이 들뢰즈가 뭐라 말하는 지 관심 없다 대놓고 명시해 놓지는 않는다. 다만 소칼은 들뢰즈의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서술하지 않고, 엄밀한 검사closer examination를 통해서 이들이 과학 개념을 오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장한다. (FN, 154) 그러나 여기서 엄밀한 검사란 무엇인가.)

하지만 그 텍스트에서 들뢰즈가 뭐라 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 나아가 들뢰즈가 그 저작에서 전체적으로 무슨 논의를 하는 것인지 파악하지 않는 다는 것은, 말도 안되 보이는 용어들이 들뢰즈의 논의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어떻게 기능하는지 파악하는 걸 포기하는 것과 같다. 소칼은 그 기능을 파악하는 것이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들뢰즈가 텍스트에서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용어가 텍스트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질 모르는데 소칼이 용어 사용을 적절하게 지적할 위치에 있다 할 수 있을까?

한번 과학 전문 용어 A가 있다하고, 이런 구분을 해보자.

(1) 들뢰즈 저작에서 임의적인 A 이해와 A의 사용 - 이때 사용되는 A의 의미는 B1이다.
(2) 수학, 과학 내에서 A의 적절한 사용 - 이때 사용되는 A의 의미는 B2이다.

소칼은 (1)을 인정한다. 들뢰즈는 임의로 '카오스', '한계', '에너지'같은 단어들을 사용할 자유가 있다. 과학이 그 단어들에 대한 독점권을 가진 건 아니니까. 하지만 모름지기 학문에 엄밀성을 가하기 위해선, (1)에서 들뢰즈가 쓰는 A가 적절한 사용이라 평가 받기 위해선 A는 (2)의 맥락에서 사용되거나(B1=B2), 혹은 (2)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맥락에서 A를 쓰는 질 명확히 해줘야 한다(B1≠B2).

그런데 소칼은 B1은 자신의 관심사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B1과 B2가 같은지 다른 지 어떻게 알 수 있을 건가? 비판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에 대한 고찰이 없다는 것, 그것은 B2는 알되 B1은 모른다는 것과 같다. (죽은 들뢰즈한테 직접 가서 묻는 게 아닌 이상 B1이 무슨 의미인지는 텍스트를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 그 사람이 정말 그런 오용을 한 지 어떻게 아십니까?"
"여기 전문용어로 가득 찬 글을 보세요. 딱 봐도 난해하고 어려워 보이죠. 하지만 과학자인 제가 볼 때 이 전문 용어들은 맥락에서 벗어났고 아무렇게나 나열 되어 있어요. 이런 글들은 내용 없이 허세만 부리는 글에 불과해요. "
" 내용이 없다는 것은 어떻게 아십니까? 그 사람이 그 글을 통해 뭐라고 하던가요?"
"그건 저희 관심사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과학 개념들을 오용하고 있다는 거죠."
"그 사람이 그 글을 통해 뭐라고 하는 지도 알 수 없는데, 과학 개념들이 오용되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아는 거죠? 만약, 당신이 '올바르다 생각한' 그 의미로 써져 있는데 당신이 못 알아 본 것이면 어쩌고요?"
"저는 과학자로서 과학용어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진 않습니다."
"하지만 저 글이 무슨 글인지는 모르시 잖아요."

물론 이 유비에는 맹점이 다수 포진 되어있다. 현실이나 텍스트 내에서 의미가 저렇게 1대1로 대응될 거라 생각되진 않으며, 들뢰즈가 죽은 뒤 사람들이 들뢰즈 글 속 A를 읽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 B3가 탄생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유비의 요점은 무릇 정당한 지적을 하는 위치에 서기 위해선 - 즉 B1과 B2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알기 위해선 - B1과 B2를 모두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최소한 자신이 이해한 B1이 무엇 인지에 대해 말해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2)의 B2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칼은 과학은 텍스트가 아니라 주장한다. 과학은 외부 세계의 법칙 같은 '자연적 대상'을 인식하는 최선의 도구로서 자연적 대상을 설명하는데 다른 이론들 보다 우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자연적 대상 탐구는 인문학의 텍스트처럼 사람들의 해석과 합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소칼의 비판 대상들은 과학이 실제를 기술하는 데 우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과학 역시 해석과 합의의 개입에 좌우된다고 보기 때문에 (소칼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과학적 탐구에 사람들의 해석과 합의가 전혀 역할을 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영향이 과학 사회학자/과학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미미하다는 것이다.) 소칼의 표적이 된다.

소칼의 과학관을 받아들여서, 우리는 B2가 B1에 비해 좀 더 '자명성'과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B1을 알 필요 없이 텍스트가 잘못된 지 알 수 있다 반박할 수도 있다. 물론 나는 수학에 대해서도 잘 몰라서, 소칼의 과학 수학관을 받아들인다 해도 이런 자명성과 보편성이 정말 도출되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B2가 모두에게 자명하다면, B1을 알지 않고도 과학 개념이 오용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여전히 B1=B2일지 모르는, 즉 '텍스트 내의 고찰을 통해 얻어진 의미'가 '과학 내에서의 적절한 사용, 나아가 그런 사용을 통해 얻어진 의미'와 별 다를바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데 말이다. 정말 B1=B2인지 알기 위해선 여전히 텍스트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짚고 넘어가자면, Arkady Plotnitsky의 반박이 내가 제시한 B1 B2 사례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소칼도 Plotnitsky가 지적한 구절이 말이 안 되는게 아니라, 말이 되는데...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Plotnitsky가 지적하듯 소칼은 그 구절들이 왜 말이 되고 나머지 구절들은 왜 안되는지 정확히 지적하고 있지 않으며, 들뢰즈의 전체적 논의를 가져와 단락을 해석하는 데는 무관심하다.)

  1. 이를 위해선, 당연하지만 말이 안되는 텍스트만을 골라서 인용할 것이 아니라 텍스트 전체에 대한 독해와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독해와 이해는, 텍스트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해석이라는 것은 본디 주관적이라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인문학은 누구의 해석이 옳은지 경쟁하기도 하고, 반대로 합의하기도 한다.

소칼은 <지적 사기>를 쓰기 이전, 그러니까 소셜 텍스트 Social Text학술지에 터무늬없는 글을 등재해 포스트모더니즘을 '엿먹였다' 주장하는 Sokal Hoax부터 일관되게 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를 비판한다. 그 이유는 라투르가 아인슈타인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며 으스대기 때문이다. 다음은 홍성욱(2003)의 논문에서 소칼이 라투르의 저작 Science in Action을 어떻게 지적하는 지에 대해 발췌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에 대한 대중서적에서 특수상대론을 설명하기 위해 축대 위에 서 있는 사람과 기차를 타고 움직이는 사람의 두 좌표계frame of reference를 설정하고 이 사이에서 로렌츠 변환을 유도한 적이 있었다(이는 보통 특수상대론을 학부 학생에게 가르치는 방법으로 널리 쓰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라투르는 두 좌표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주장을 폈다.
"우리는 기차 안에서 떨어지는 돌의 운동에 대한 관찰이 축대에서 떨어지는 돌의 운동의 관찰과 어떻게 일치한다고 판단할 수 있는가? 하나의, 혹은 심지어 두 개의 좌표계만이 존재한다면 이에 대한 어떤 해법도 찾아질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기차 안의 사람은 직선(낙하)을 볼 것이고 축대에 있는 사람은 포물선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둘이 동일한 물리법칙에 의해서 떨어진다고 우리에게 얘기해 줄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그리고 라투르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급진적인' 해법을 제시했다.
"아인슈타인의 해법은 세 명의 행위자를 상정하는 것이다. 한 명은 기차 안에 있고, 다른 한 명은 축대에, 그리고 세 번째 행위자는 저자 자신, 혹은 저자의 대리인으로서 이 두명의 관찰자가 보낸 정보를 종합하는 사람이다."
(중략)소칼은 라투르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비판한다. 라투르가 물리학의 좌표계와 기호학의 행위자를 구별하지 못했으며(물리학의 좌표계에는 '사람'이 없어도 되기 때문에) 두 개의 좌표계에 적용되는 상대성 이론을 놓고 세 번째 좌표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넌센스를 범했다는 것이다.(홍성욱. (2003). 소칼 논쟁, 그 이후. 과학사상,(44), 126-129)

소칼은 라투르가 상대성 이론과 사회학을 무리하게 엮으며, 자연과학의 명제 역시 사회적으로 구성된다 주장하는 과학 사회학의 '스트롱 프로그램'에 기여를 한다 생각해 과학 전쟁 당시 몇몇 과학자들과 함께 라투르의 글을 맹비난 했다.

그러던 중 물리학자 N. David Mermin이 라투르를 옹호하고 나섰다. 상대성 이론에 대한 라투르의 오해에 대한 비판이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는 것이다.

Latour wants to suggest translating the formal properties of Einstein's argument into social science, in order to see both what social scientists can learn about "society" and how they use the term, and what hard scientists can learn about their own assumptions. He is trying to explain relativity only inso-far as he wants to come up with a formal("semiotic") reading of it that can be transferred to a society. He's looking for a model for understanding social reality that will help social scientists deal with their deabates - which have to do with the position and significance of the observer, with the relation between "content" of a social activity and "context" (to use his terms), and with the kinds of conclusions and rules that can be extracted through observation. (Mermin 1997b , p. 13) (FN 131-132에서 재인용)

즉 머민에 따르면 라투르는 상대성 이론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라, 상대성 이론으로 부터 사회 이론의 틀을 - a model for understanding social reality that will help social scientists deal with their deabates - 발견하려는 것이 목적이다. (머민이 이런 해석을 내놓을 수 있는 데는 문화 연구자인 딸 Liz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하지만 소칼은 머민의 이런 동정적 sympathetic 해석이 반만 맞고 반은 틀리다고 한다. 왜냐하면 라투르는 Science in Action 서문에서 아인슈타인의 작업이 명백히 사회적이라 주장하기 때문이다.

Our purpose... is the following: in what ways can we, by re-fomulating the concept of society, see Einstein's work as explicitly social? A related question is: how can we learn from Einstein how to study society? (Latour 1988) (FN 132에서 재인용)

이어서 소칼은 라투르의 상대성 이론에 대한 기본적 오해가 라투르의 기획의 두 목적(아인슈타인의 작업이 사회적인지 보이는 것, 아인슈타인으로 부터 사회를 연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약화시킨다고 보며, 라투르의 상대성 이론에 대한 이해가 사회학으로 잘 전달될 거 같지 않다고 주장한다. 상대성 이론은 사회학에 대한 아무런 함축이 없으므로.

Has Latour learned anything from his analysis of relativity that can be "transferred to society"? At a purely logic leverl, the answer is no : relativity theory in physics has no implications whatsoever for sociology. (FN 132)

애초에 라투르의 사회학을 설명하기 위해 이런 상대성 이론의 유비를 사용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차라리 라투르는 새로운 사회학적 개념을 만들어 설명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FN 133)

하지만 홍성욱(2003)에 따르면, 소칼은 근본적으로 라투르의 목적을 오해하고 있다. 홍성욱에 따르면 라투르의 목적은 아인슈타인의 작업이 명백히 사회적이며 스트롱 프로그램에 이론적 기여를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트롱 프로그램을 반박하는 데에 있다.

라투르는 1986년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에서 <실험실 생활> 2판을 출판하면서 책의 부제 '과학적 사실의 사회적 구성'을 '과학적 사실의 구성'으로 바꾸었고, 스트롱 프로그램의 사회구성주의 과학사회학과 자신의 사회학의 차이를 부각하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서 스트롱 프로그램이 사회가 과학지식에 어떻게 녹아들어갔는가를 보이려 한다면, 라투르는 과학이 사회를 어떻게 재구성하는가를 보이려 했다. 전자가 '과학 속의 사회'에 관심이 있다면, 라투르는 '사회 속의 과학' 혹은 '사회를 만드는 과학'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보았던 것이다. 사회구성주의자들은 고정된 사회를 가지고 과학 지식의 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사회를 설명하는 일반 사회학자들은 과학기술에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자신의 방법을 사용해서 연구할 경우에 과학은 물론 사회에 대한 우리의 정의와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라투르의 생각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에 대한 논문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씌어진 것이었다.
1970년대에 과학사학자 퓨어 L.S.Feuer는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의 탄생과 수용에 20세기 초엽의 혁명적 사회 분위기라는 사회적 요소가 개입했음을 지적하면서 상대론이 사회,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주장하는 논문을 썼는데, 라투르는 자신의 논문에서 이러한 스트롱 프로그램식의 연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물론 현대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비판한 것이었다. 라투르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철두철미하게 사회적인" 이유는 사회적 요소가 상대론에 개입해서가 아니라 상대론이 현대 사회와 과학의 핵심적인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사회에 대한 관념을 재구성함으로써 우리는 어떻게 아인슈타인의 작업을 명백하게 사회적인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아인슈타인으로부터 어떻게 사회를 공부하라는 법을 배울 수 있는가?" 라는 라투르의 문제 제기는 '사회구성주의'적인 스트롱 프로그램에 대한 라투르의 비판을 담고 있었다.

(앞선 라투르의 상대성 이론 설명에서 다시 시작) 라투르는 이러한 설정으로부터 흥미로운 역설paradox을 끄집어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론은 절대 공간, 절대 시간과 같은 뉴턴주의 물리학의 절대 좌표계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임으로써 특권을 가진 좌표계를 소멸시킨 이론이었다. 즉, 상대성이론에서 우주 속의 모든 관찰자는 동등한 것이다. 반면에 (라투르의 해석에 의하면) 이들이 보내온 관찰 정보는 한 사람에 의해 취합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비교하는 이 사람은 궁극적으로 다른 관찰자들이 가질 수 없는 특권을 획득한다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이 사람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라투르가 '계산의 중심centers of calculation'이라고 부른 곳이며, 실험실과 같은 계산의 중심을 만들고 유지 하는 것이 근대 과학이 사회 속에서 권력을 키우고 이를 통해 사회를 변형시키는 중요한 매커니즘인 것이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상대론은, 스트롱 프로그램 상대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사회 속에서 과학이 '계산의 중심'으로 기능하는 점을 잘 보여준다는 것이다. "상대성 원리(운동이 정지와 다르지 않다는 갈릴레이의 주장), 특수, 일반상대성이론은 서술에 거꾸로 의미를 부여하는 다양한 방식이다. 기구를 설정하고, 계기를 읽고, 좌표를 정하고, 정보를 주고받고, 메시지를 번역하고, 등가성을 확립하는 작업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라고 부른 것이고, 그가 상대주의에 반대한 것이다"라는 주장이나 "아인슈타인의 책은 그래서 [장거리 과학자: 여행자를 불러들이는 새로운 교본]이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다"라는 라투르의 언술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라투르의 얘기처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정말로 '계산의 중심'의 역할이나 과학과 사회의 새로운 관계를 잘 보여주는가? 라투르의 주장을 충분히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이 문제에 대한 답이 다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 답이 과학사회학이 '과학 속의 사회'를 보는 것에 안주하지 말고 과학이 사회를 어떻게 변형하는가를 보아야 한다는 라투르의 주장에 얼마나 설득 되었는 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물론 라투르의 이러한 주장에 동의한다고 해도 상대론에 대한 그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상대론에 대한 그의 해석에는 전적으로 동의해도 그로부터 유도되는 이런 일반적인 명제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 과학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해석과 설득의 게임이며, 텍스트의 의미는 수학 명제와 같은 보편 진술로 환원될 수 없는 주관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텍스트가 독자 마음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라투르의 논문을 충분히 소화한 사람이라면 그 논문의 목적이 상대론에 대한 새로운 물리적 해석을 제공하려는 것도 아니고, 물리학의 상대성이론이 글자 그대로 사회이론이라는 것을 보이려는 것도 아니며, '아인슈타인을 한 수 가르치려고 한' 것도 아니라는 점 정도는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의도한 것은 스트롱 프로그램식의 사회구성주의가 아닌 과학과 사회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상대성이론을 예로 들어 보인 것이다. 홍성욱. (2003). 소칼 논쟁, 그 이후. 과학사상, (44), 125-127

머민의 과학전쟁 회고에 따르면, 소칼은 이런 텍스트들에 대한 대안적 해석들을 받아들이길 꺼려했나 보다. 가령 Arkady Plotnitsky 는 과학전쟁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던 데리다의 언술이 어떻게 읽힐 수 있는지 해석을 제시했지만, 소칼은 Plotnitsky가 물리학에 대해 공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데리다가 그것을 이해했는 지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음으로 그리고 '당시 살아있는 데리다에게 그것을 진짜 알고 있었는지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Plotnitsky의 해석을 기각한다.

Take, for example, what he says about Arkady Plotnitsky's interpretation of an obscure reply by the controversial, charismatic, deconstructionist philosopher Jacques Derrida, lampooned as meaningless nonsense in Sokal's hoax and by earlier science warriors. Derrida was asked whether Einstein's view of space-time might contain an example of a subtle Derridean concept, 'the centre of structure'. Sokal acknowledges that Plotnitsky “has a fair knowledge of physics”, but this fails to capture the unique role Plotnitsky played in the 1990s as the sole participant in the conversation who was as comfortable with theoretical physics and mathematics as he was with literary theory, sociology and science history. Plotnitsky took several pages to elucidate the technical concept of a 'centre', on which the much-maligned comment hinges, before suggesting what Derrida might have been getting at. This demonstration that Derrida's remark need not sound absurd if you are as well acquainted with Derrida as you are with Einstein, is dismissed by Sokal for three reasons: Plotnitsky gives two possible readings,“he offers no evidence that Derrida intended (or even understood) either of them”, and Derrida was alive at the time so “why not just ask him?”.

데리다한테 물어봐서 알 수 있는 것이었으면, 소칼 그 자신이 먼저 글 쓰기 전에 데리다에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았을까? 머민은 글을 끝마치며 소칼의 다른 관점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그의 효율성을 약화 시키는 '진짜 쓰레기의 재앙'scourage of genuine rubbish이라 과격하게 비난한다.

(나중에 시간 되면 쓸 거같은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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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스크러턴의 책이 은근히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나 보네요. 저도 예전에 글쓴이님과 비슷한 논지에서 스크러턴을 비판해 본 적이 있습니다. 스크러턴이 아주 악의적으로 대륙철학자들을 까내렸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스크러턴의 독해는 문제가 많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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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마침 며칠전에 나무위키의 "소칼 사건" 항목의 한국의 반응 부분을 보고, 이정우 선생의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2000)에서 해당 항목을 펼쳐보았습니다.

이 책이 한국에서 출판되었을 때 서울대학교 철학 박사인 이정우가 '3류 물리학자의 국제 사기극', '위대한 인물들의 명성에 흠을 내려는 조잡한 시도'라면서 나쁘게 말한 적이 있지만 소칼이 재직 중인 뉴욕대학교의 쿠란트 응용수학 연구소는 미국에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와 함께 1, 2위를 다투는 최고 수준의 기관이다. 여기서 테뉴어(정년 보장)를 받았다면 온 학계가 1류로 인정해 주는 것인데 학계 밖의 사람이 3류라고 하면 웃고 치울 일일 뿐이다.

이 짧은 글에서,

  1. 이 정우 교수가 30여 페이지를 자극적인 문장 두 개만으로 환원. (이정우 교수는 소칼의 들뢰즈 인용과 코멘트가 이러한 형태를 띄고 있음을 여러 쪽에 걸쳐서 논증하는데, 그걸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과감함.)

  2. 문맥과 관계도 없는 MIT를 운운하며, 학벌주의로 논쟁을 환원.

  3. 이미 1995~1998년 서강대 교수를 역임한 이정우 교수가 2000년 당시 철학아카데미 원장 시절 출판한 책의 내용을 두고 "학계 밖의 사람"의 평가로 환원.

  4. 이정우 교수는 2012년부터 경희사이버대학교수 역임중인데, 강산이 변하도록 업데이트하지 않는 뚝심. (참고: 그 사이에 이정우 교수는 거의 같은 기간(2011.2~2024.1) <세계철학사>(전4권)을 완간하였음.)

  5. "웃고 치울 일일 뿐"이라고 쿨한척.

등을 발견하고,

...저도 웃고 치운 기억이 있어서ㅎㅎ

2부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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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저 역시 소칼 등이 프랑스 철학자들에 대해 인상 비평 수준의 접근만 하고 있음에 동의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프랑스 철학자들이 과학적 개념을 오용하고 있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 들뢰즈 저작에서 임의적인 A 이해와 A의 사용 - 이때 사용되는 A의 의미는 B1이다.
(2) 수학, 과학 내에서 A의 적절한 사용 - 이때 사용되는 A의 의미는 B2이다.

말씀하신 대로 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비판을 위해서는 B1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겠지만, 저로서는 애초에 프랑스 철학자들이 어휘 'A'를 활용한 이유가 무엇인지부터 의심스럽습니다. 특히나 들뢰즈가 동물심리학(?)을 인용하는 모습 등을 보면 철학자들이 과학의 객관적인 이미지(설령 과학의 객관성이 환상에 불과하더라도)에 기생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듭니다.

철학이 세계관에 대해 메타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학문이라 해서 철학자들이 과학적 세계관에 월권을 행사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최근에는 과학적 개념을 인용할 때 이전에 비해 검증을 보다 철저히 하는 것으로 들었는데, 저는 그런 의미에서 소칼이 철학에 겸손함이라는 아주 좋은 미덕을 선물해줬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소칼에게는 조롱의 의도밖에 없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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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던 글들에선, 로저 스크러턴 보단 조던 피터슨을 인용하며 포스트모더니즘과 pc를 악의 축으로 보는 뉘앙스의 글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스크러턴은 국내에서 인지도가 높은 철학자가 아니라, 철학에 깊게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르죠. (예전에 도서관에서 스크러턴의 책을 잠깐 훑어보기만 하고 넘어간적이 있는데, 들뢰즈인가 라캉인가를 비판하는 글에서 소칼을 언급하면서, 소칼은 이런 좌파들의 지적사기를 알고있으면서 계속 좌파이려한다는 뉘앙스로 말했던걸로 기억합니다.)

대략 이들은 포스트 모더니즘의 진리를 부정하고 다원성을 강조하는 논리가 pc를 불러왔고, 더 나아가 이런 pc에 대한 반발이 트럼프를 당선시켰다고 보기도 합니다. 트럼프가 푸코와 데리다를 읽지 않았다고 해도 두 철학자의 철학의 '경향성'이 상대주의적 풍토를 불러일으켰다는 얘기죠.

하지만 정말 푸코나 데리다의 철학이 어떻게 그런 경향성을 띄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령 페넬로페 도이처의 데리다 입문서 How to read Derrida에 따르면, 데리다는 오히려 pc의 일종인 정체성 정치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말합니다.

"나는 여성운동을 포함하여 모든 곳에서 발전하고 있는, 소수자들의 나르시시즘을 향하는 경향이 있는 이러한 운동에 저항한다."

(적어도 제가 공부한 내용에 따르면) 데리다의 이원구조에 대한 해체가 단순히 열등하다 여겨지는 항을 이원구조의 전복을 통해 우월한 항으로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복의 효과를 통해 이원구조 자체를 문제시 하고 새로운 개념의 생산에있음을 생각하면, 데리다가 정체성 정치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겠지요.

"(해체의 일반적인 전략은) 형이상학의 이항대립을 단순히 중화시키거나 이를 공고히 하면서 이러한 대립의 닫혀진 영역 속에 단순히 머무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한편으로 전복의 단계를 거치는 것, 나는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빨리 가치 폄하 되어왔던 이러한 전복의 단계의 필요성을 매
우 그리고 끊임없이 강조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필요성에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고전적인 철학적 대립 속에서 우리가 관여하고 있는 것은 서로 마주보는 상태의 평화로운 공존이 아니라 폭력적 위계 질서 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두개의 용어들 중 하나는 다른 하나를 (위상학적으로, 논리적
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대립을 해체한다는 것은 우선 어떤 주어진 순간에 위계질서를 전복하는 것 입니다… 이러한 단계의 필요성은 구조적이며 이항 대립의 위계질서란 늘 재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끝없는 분석을 필요로 합니다. 그들의 죽음이 결코 사망
선를 준비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작가들과는 달리 전복의 순간은 결코 공백의 시간이 아닙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이러한 단계에 집착하는 것은 해제된 체계의 내부에서 그리고 그 토양 위에서 작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층위를 이룬, 어긋난 그리고 어긋나게 하는 이러한 이중의 글
쓰기에 의해,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을 낮게 하고 승화시키며 이상지향적인 그것의 계보학을 해체하는 이러한 반전의 작업과 더 이상 이전의 체계 속에서는 이해될 수 없었고 지금도 그러한, 새로운 ‘개념’의 돌발적인 출현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야 합니다." (자크 데리다, 박성창 편역, <입장들>, 솔, 1992, 6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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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선생이 <시간의 지도리에 서서>에서 소칼을 어떻게 비판했는지 저도 관심이 가네요. 절판된 책이라 구하기 어렵지만 저도 한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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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실거 같지만, 제가 B1과 B2 유비를 사용한 것은 '철학자의 논의에 관심이 없는 소칼이 정말 오류를 적절하게 지적한다 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기 위함입니다.

소칼이 철학자들이 용어를 자신의 맥락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용어가 과학적 맥락에서 벗어나 어떻게 자신의 맥락에서 다시 쓰이는지 명시 하지 않고있다 비판합니다. 하지만 명시가 되어 있지 않더라도, (명시가 됐으면 더 좋았겠지만) 텍스트에 대한 전체적인 논의를 통해 철학자들이 어떤 맥락에서 용어들을 쓰고있는건지, 더 나아가 왜 과학, 수학적 용어들을 끌어오려는 건지 -가령 말씀하셨듯이 왜 들뢰즈가 동물 심리학을 끌어오려는건지-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과연 적절한지도 파악할 수 있겠지요. 이런 작업이 결여되어있고 말이 안되어 보이는 부분만을 지적하는것처럼 보이기에, 글을 쓰면서 저는 소칼이 오류를 제대로 지적하고 있다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심이 들었습니다. (라투르로 돌아가면, 소칼은 라투르가 상대성 이론에서 세번째 좌표계를 상정하는게 넌센스라고 말하죠. 하지만 홍성욱에 따르면 라투르는 진짜 세번째 좌표계를 상정하려고 그런 말을 꺼낸게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여전히 Levinson님의 문제제기는 옳다고 생각합니다. 소칼이 제대로 지적하지 못한다고 해도, 철학자들의 글에 오류가 남아있을 수 있고,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과학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정말 그 글이 무리한 글이었다 밝혀질 수 있을거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혹이 드는데에는, 프랑스 철학자들이 각종 개념들을 이용해 난해하게 글을 쓴 것과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왜 프랑스 철학자들은 A를 사용해가면서 까지 글을 난해하게 썼을까요?

그것이 지적 허세인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 건지 알아보려면 텍스트에 대한 전체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죠(자꾸 같은 말을 하네요;;) 한편으로는, 왜 그 당시 프랑스 철학자들이 글을 난해하게 쓰려했는지, 왜 글쓰기 스타일이 그모양인지 알아보기 위해선 그당시의 지적 풍토가 무엇인지(가령 라캉에 대한 글을 보면, 라캉은 언어매체에 대해 부정적이어서 글을 여러번 꼬아썼다 말하죠)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겸손함에 대해서는, 좀 과감한 발언이지만, 그런 겸손함이 저는 과학이 인문학을 다루는 반대의 경우에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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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런 느낌을 받네요.
B1을 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A를 굳이 쓰는데서 느껴지는 의도가 좀 찝찝하달까...

그런 것을 떠나서 본문의 문제 제기 자체는 정말 재밌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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