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비도덕적이고 다혈질적이다?!: 러셀, 도올, 어만, 진규선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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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토 디 본도네, <성전의 환전상을 쫓아내는 예수>

원글: 잡념과 공상 : 네이버 블로그

1. 예수는 비도덕적 인물이다?!: 러셀의 예수

버트런드 러셀(B. Russell)의 논쟁적인 저서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에는 예수의 도덕성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비판들이 등장한다. 러셀은 예수의 도덕성이 의문스럽다는 논거로 (a) 예수가 지옥을 믿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자비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리 죄인에게라도 지옥의 영원한 형벌 같은 보복을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또한 그는 다른 세부 논거로 (b) 예수가 거라사 지방에서 축귀를 행할 때 귀신들이 돼지떼에게 들어가도록 하여 돼지떼를 몰살시켰다는 점(마태복음 8:28-34; 마가복음 5:1-20; 누가복음 8:26-39)과 (c) 예수가 아직 열매 맺을 철도 되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나무를 말라비틀어지게 하였다는 점(마태복음 21:18-19; 마가복음 11:12-14)을 거론하기도 한다. 아무 잘못도 없는 돼지떼와 무화과나무를 죽게 하는 복음서 속 예수의 모습은 도대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러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로서는 예수가 지혜로 보나 도덕성으로 보나 역사에 남은 다른 사람들만한 높은 위치에 있다고 도저히 볼 수 없다. 그런 점들에 있어서는 석가나 소크라테스를 예수 위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Russell, 2005: 37)

나는 러셀이 악의를 가지고 예수를 희화화하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의 교훈들이 지닌 가치에 대해 러셀이 높게 평가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꽤나 공정한 시선에서 예수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러셀과 같은 당대의 지성인에게조차 기독교 신학이 낯선 분야였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러셀이 제기한 비판은 성서학이나 성서신학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전형적인 허수아비 논증에 대응한다. 러셀이 언급하고 있는 구절들에 대해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완벽하게 합의된 ‘교과서적’ 해석이 있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복음서에 대한 아주 기초적인 몇 가지 지식만으로도 그 구절들이 예수의 도덕성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사용될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주기는 쉽다. 가령,


버트런드 러셀

(1) 지옥 문제: 복음서에서 ‘지옥’이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는 ‘게헨나(Gehenna)’이다. 이 단어는 사람이 죽어서 가게 되는 형이상학적 공간 따위가 아니다. 오히려 이 단어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존재하던 쓰레기 소각장을 가리키는 실제 지명이었다. 오늘날에도 그 지역의 계곡은 ‘게힌놈(Ge Hinnom)’이라고 불린다. 예수 역시 바로 이 쓰레기 소각장을 떠올리면서 ‘게헨나’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로마에 대항하여 일어나던 유대인들의 무장 반란이 가망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그와 같은 무장 반란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보겠다는 시도가 결국 예루살렘을 불타는 쓰레기 소각장인 ‘게헨나’처럼 황폐하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실제로, 기원후 70년에 제1차 유대-로마전쟁의 결과로 예루살렘은 불타버리고 말았다.) 즉, ‘게헨나’에 대한 예수의 경고는 대단히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맥락을 지니고 있다. 복음서에 나타난 ‘게헨나’에 대한 구절로부터 내세에 존재하는 ‘지옥’에 대한 주장으로 나아가는 것은 예수 당시의 지리적-사회적-정치적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잘못된 추론일 뿐이다. 신약학자 니콜라스 토마스 라이트(N. T. Wright)는 이런 식의 추론이 마치 예수가 제시한 탕자의 비유로부터 탕자의 실제 이름을 찾아내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것이라고 지적한다(Wright, 2009: 276-278 참조).

(2) 돼지떼 문제: 예수가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그 귀신은 자신들이 수가 많아서 “레기온(Legion)”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레기온’이란 6천명 단위의 로마 군대를 세는 명칭이다. 로마 군대를 의미하는 ‘레기온’이라는 귀신 집단이 사람에게서 빠져나와 돼지떼에게 들어갔고, 그 돼지떼가 다시 바다에 빠져 몰살당하였다는 복음서의 이야기는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이집트 탈출 사건을 자신들의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이와 같은 함의를 무시할 수 없도록 만든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집트 군대를 바다에 빠뜨려 이스라엘을 구원한 것처럼, 복음서에서 예수는 로마 군대(레기온)를 바다에 빠뜨려 귀신 들린 사람을 구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라사 지방에서의 축귀 이야기는, 단순히 돼지떼를 몰살시킬 정도로 강력한 예수의 마술적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가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구원을 일으킬 메시아라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신현우, 2011: 92-93 참조). 이 이야기에 대해 “애꿎은 돼지떼를 몰살시킨 예수는 비정한 인간 아니냐?”라고 비판하는 것은 (동물권에 대한 오늘날의 감수성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어느 정도 수긍은 될 수 있을 만한 비판이긴 하지만,) 애초에 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과 맥락을 전혀 잘못 짚고 있다. 마치 「북풍과 태양」이라는 이솝의 우화에 대해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몰래 벗기려 하다니, 북풍과 태양은 비도덕적인 것 아니냐?”라고 비판하는 것처럼 다소 문제의 논점이 어긋나 있다.

(3) 무화과나무 문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예수의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마태복음 21:12-17; 마가복음 11:15-18). 심지어 마가복음에서는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 앞뒤로 배치되어 있을 정도이다.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할 때 사용한 문구(마태복음 21:19; 마가복음 11:14)도 예루살렘 성전을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에 비유한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야의 비판(예레미야 8:11-13)과 대단히 유사하다. 즉, 복음서 이야기에서 예수가 분노한 대상은 무화과나무 자체가 아니라 무화과나무에 대응된 예루살렘 성전이다. 예수는 당대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차별 대우를 받는다는 점, 제사장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한 가난한 자의 재산을 털어간다는 점, 예루살렘 성전에서 돈을 환전하거나 제물을 사고파는 상업적인 행위들이 이루어진다는 점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남유다 왕국의 말기에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다.”라고 한탄한 것처럼, 1세기에 예수 역시 예루살렘 성전을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에 대응시켜 “이제부터 영원히, 네게서 열매를 따먹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저주하였다(Guelich, 2001: 322; Wright, 2004: 516 참조). 특별히, 이와 같은 저주는 유대교 랍비 문학에서 전해져 오는 랍비 요세의 전승과도 대비된다. 랍비 요세와 그의 품꾼들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을 때, 하루 종일 노동하여 지친 품꾼들이 배고파하자 요세는 무화과나무를 향해 “무화과나무여, 무화과나무여, 내 아버지의 품꾼들이 먹을 수 있도록 열매를 내거라.”라고 소리를 쳤고, 무화과나무는 “때가 아닌데도” 열매를 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전승의 배경에서 볼 때, 열매를 요구하였는데도 열매를 내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말라버렸다는 이야기는 1세기 유대인들에게 그다지 어색한 이야기가 아니었다(Guelich, 2001: 321 참조).

많은 경우 예수의 도덕성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들은 이와 같이 복음서가 놓인 문화적 맥락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예수를 도덕적으로 흠결 없는 인간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오히려 ‘도덕성’이라는 기준이 복음서 속 예수의 모습을 자칫 왜곡할 우려가 있다고도 생각하지만, (그래서 ‘도덕/비도덕’이 아니라 ‘정결/부정’이라는 유대교적 기준으로 예수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성서학적 상식조차 일반인들 사이에 퍼져 있지 않다는 점은 다소 안타깝게 생각한다. 인터넷에 종종 떠도는 ‘예수 조폭설’ 정도라면 웃어넘길 수 있고, 러셀처럼 나름대로 공정한 관점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려는 사람들이 제기하는 비판이라면 대화할 수 있지만, 종종 기독교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진 분들이 성경에서 몇몇 구절을 마구잡이식으로 뽑아내어 맥락 없이 비판의 근거로 던지고 다닐 때면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상황을 풀어나가야 할지 막막하다. 그럴 때마다 나로서는 거의 창조과학자나 지구평평론자를 설득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가장 기초적인 상식부터 이야기를 해나가야 하는 상황이니 말이다.

2. 예수는 다혈질적 인물이다?!: 도올과 어만의 예수

그런데 반대로 성서학이나 성서신학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를 꽤나 다혈질적인 인물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히, 역사적 예수 연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학문적으로 소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분들 중에 이와 같은 경우가 많다. 이런 분들이 참조한 연구 사조를 하나로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내가 보기에는 예수를 ‘카리스마적 존재’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아마도 이런 분들의 예수 이해에 명시적으로든지 암묵적으로든지 많은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예수를 카리스마적 존재로 보는 관점 자체는 1960년대 이후 학계에 널리 퍼져 있다. 예수를 ‘카리스마적 지도자’로 규정한 마르틴 헹엘(M. Hengel)의 『카리스마적 지도자와 그 제자들』(1968), 예수를 ‘카리스마적 기적 치유자’로 재구성한 게자 베르메스(G. Vermes)의 『유대인 예수』(1973), 예수를 ‘떠도는 카리스마자’로 해석한 게르트 타이센(G. Theissen)의 『예수운동의 사회학』(1977) 등이 증명하였듯이, ‘카리스마’라는 관점에서 예수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는 꽤나 타당성이 있다. 예수는 강력한 권위와 비범한 힘을 지니고서 세상과 갈등하였던 인물이라는 것이다(Theissen & Mertz, 2001: 277-351 참조).

‘카리스마’는 예수에게 적용되기에 좋은 수식어이긴 하다. 나 역시 종교에 있어서 카리스마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루돌프 오토(R. Otto)의 현상학에 대단히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별히, 나는 복음서를 비롯한 종교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단순히 도덕적 교훈으로 환원되어서 안 된다는 오토의 주장에 아주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복음서의 예수는 결코 세속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을 고분고분 준수하기만 한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물이 아니다. 예수의 가르침이나 행위는 소위 ‘도덕 교과서’ 속에 담길 수 없다. 오히려 예수는 당대 유대와 로마의 사회적 질서와 강하게 맞부딪쳤던 인물이었다. 그 과정에서 예수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하였고, 로마의 앞잡이였던 헤롯 안티파스를 ‘여우’라고 욕하였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인들의 좌판을 뒤엎고 채찍을 휘두를 정도로 과격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고, 결국 유대를 대표하는 산헤드린 공의회와 로마를 대표하는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 조폭설’ 같은 농담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김용옥, 『나는 예수입니다』

문제는 예수를 ‘카리스마적 존재’로 이해하려는 시도가 종종 예수를 성격이 사납고, 짜증을 잘 내고, 거칠고, 독선적이고, 고압적인 인물인 것처럼 만들어버릴 때가 있다는 점이다.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카리스마적 면모를 지나치게 과장하여, 복음서에서 조금이라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구절이 있으면 그 내용을 역사적 예수의 불같은 성품 때문이라고 쉽게 가정해 버리는 것이다. 나로서는 도올 김용옥의 글들을 읽다 보면 종종 이런 식의 성급한 해석들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 가령, 도올은 무화과나무에 대한 저주 사건(마태복음 21:18-19; 마가복음 11:12-14)을 해석하면서, 이 사건이 배고픔을 참지 못하여 순간적으로 나무에 저주를 퍼부은 예수의 모습을 제자들이 오해한 것이라고 규정해버린다. 역사적 예수의 내적 심정과 성품을 자신이 1인칭 화자의 시점에서 직접 볼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도올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내[예수]가 예루살렘에 온 것이 3월 말, 4월 초경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3‧4월에 꽃이 피어(무화과無花果도 꽃이 핀다.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이다.) 6월이 되어야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열매가 열리지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 그 무화과나무(무화과나무 일반이 아니고 한 나무를 지칭)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여 아무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도 뒷켠에서 나의 이 말을 또렷이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내가 행한 유일한 파괴기적사화라고 말하기도 하고, 자연물을 상대로 한 유일한 이적행위라고 말하기도 하고, 그 의도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이적행위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결코 자연기적에 속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내면의 심정을 노출시킨 상징적 담론symbolic discourse에 불과합니다.

나는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나의 배고픔을 해결해 줄 수 있는 듯이 보이는 나무가 나타났습니다. 그 나무는 너무도 무성하고 탐스럽고 아릅답고 때깔좋고 풍성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비록 계절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 나무는 나에게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는 아무런 열매를 제공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나의 배고픔을 해결해줄 수 없다고 한다면 이 무화과나무야! 영원히 열매를 맺지 말아라! 뿌리부터 썩어 말라 버려라!

(김용옥, 2020: 225-226)


바트 어만

심지어 이와 같은 예수 이해는 바트 어만(Bart D. Ehrman)처럼 전문적인 신약성서학자에게서도 발견된다. 어만은 「분노한 예수의 손에 잡힌 나병 환자」라는 논문에서 마가복음 1:40-45를 해석하며 예수에게 귀속되는 주된 감정을 ‘분노’라고 주장한다. 본래 이 논문은 마가복음 1:41에 대한 사본학적 연구이다. 대다수의 사본은 마가복음 1:41을 예수가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겼다(splanchnistheis)”라고 기록하고 있고, 소수의 사본만 해당 구절을 “분노하였다(orgistheis)”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사본학적 관점에서는 ‘더 어려운 본문 우선의 원칙(lectio difficilior)’에 따라 “분노하였다”라는 구절을 신빙성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어만의 주장이다. 이와 같은 주장 자체는 학술적으로 보았을 때 (다소 논쟁의 여지는 있다고 해도) 크게 잘못된 것이 없다. 문제는 어만이 자신의 주장을 논증하는 과정에서 예수에 대한 그의 이미지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어만의 예수는 매사에 끊임없이 분노하는 다혈질적 인물이다. 어만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기억해야 한다. 문제는 예수에 대한 어떤 묘사를 우리 자신이 가장 편안하다고 생각하는지가 아니라, 예수에 대한 어떤 묘사가 본래 마가복음의 저자에 의해 제시된 것인지이다. 심지어 비판적인 주석가들조차도 종종 이 구분에 실패한다. 명백히도, (일부 주석가들을 포함하여) 마가복음의 대다수 독자들은 이 복음서에서 예수가 치유를 할 때 동정심을 발휘하는 것으로 결코 묘사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지 못하였다. 오히려 예수와 일반적으로 연관된 감정은―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분노이다. (Ehrman, 2006: 129)

어만은 분노하는 예수에 대한 자신의 이미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마가복음에서 몇몇 구절들을 지적한다. 가령, (a) 마가복음 9:14-29에서 어느 아버지가 귀신 들린 자신의 아들을 예수에게 데려와서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라고 요청하자, 예수는 화를 내면서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라고 대답한다. (b) 마가복음 8:11-13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내리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예수에게 요구하자, 예수는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라고 분노로 깊이 탄식한다. 또한 (c) 마가복음 10:13-16에서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 앞으로 데려오는 것을 예수의 제자들이 저지하자, 예수는 분노하여서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제자들을 꾸짖는다. 마지막으로, (d) 마가복음 3:1-6에서 예수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서 병자를 고쳐주는지를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자, 예수는 분노하여서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라고 따져 묻는다. 따라서 어만에게는 이와 같은 예수의 분노 이야기들이 마가복음 1:41의 “불쌍히 여겼다”를 “분노하였다”로 바꾸어 읽어야 하는 ‘내적 개연성(intrinsic probabilities)’을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수에 대해 어만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마가복음을 독해하는 어만의 방식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점을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어만이 “불쌍히 여겼다”보다도 “분노했다”를 지지하는 최우선적 이유는 ‘더 어려운 본문 우선의 원칙’이다. 분노하는 예수의 일화들은 ‘더 어려운 본문 우선의 원칙’에 따라 도출된 주장을 보충하는 근거로서만 어만의 논문에서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3. 예수 vs. 시몬 바르 코크바: 메시아는 어떤 인물인가?

비도덕적 예수나 다혈질적 예수는 소위 ‘진보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이와 같은 논의가 기성 교회에서 통용되는 예수의 이미지보다 얼핏 참신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기성의 교회가 2,000년 동안 가르친 예수는 사랑이 많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신실하고, 오래 참는 인물이다. 그러나 무신론자나 진보적 기독교인에게는 소위 ‘성인(聖人)’ 예수의 이미지가 대단히 진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이와 같은 이미지가 ‘예수’라는 인물에게 온갖 좋은 요소들을 무비판적으로 귀속시킨 결과가 아닌지 의심스러워한다. 따라서 기존 사회나 종교가 가르치는 가치 규범들이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닌지도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역사적 인물인 예수가 과연 선 그 자체의 실현인지에 대해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들은, 비도덕적인 예수와 다혈질적인 예수에 대한 논의에서 어떤 ‘해방감’ 같은 것을 느끼고는 한다. 꽉 막힌 기성 교회의 전통을 극복할 수 있는 탈출구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비도덕적인 예수와 다혈질적 예수야말로 교회가 감추고 싶어 하는 ‘진실’을 폭로하고 있는 것으로 환영받는다.

그러나 진부하고, 의심스럽고, 비현실적이라고 폄하되는 기성 교회 속 예수의 이미지에는 결코 쉽게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진실’이 담겨 있다. ‘메시아’라고 하면 우리가 예수의 이미지를 가장 먼저 떠올리기 때문에 자주 잊어버리는 사실이지만, 애초에 메시아가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지니는 분이라는 생각 자체가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에서 대단히 독특한 점이다. 메시아나 예언자가 긍휼과 사랑을 지니고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살핀다는 생각은 그 시대에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교회가 예수를 긍휼과 사랑이 많은 메시아로 증언하였다면, 그 증언은 일종의 사상적 ‘전회’나 ‘혁명’이라고 부를 만하다. 1세기 유대 세계에서는 거의 상상할 수 없었던 종류의 메시아가 예수를 기점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을 넘어 전세계에 퍼졌으니 말이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지도자였지, 죄인들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놓는 구원자가 아니었다.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사복음서가 모두 예수님의 이야기를 그분의 긍휼과 사랑을 반복해서 부각하는 방식으로 들려준다는 데 놀라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그분의 긍휼과 사랑이 두드러진 특징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제2성전기 유대 세계에서 예언자나 메시아가 되려는 인물이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었다. 우리는 요세푸스의 저술에서 잠시 만나는 메시아가 되려는 이들을 포함한 지도자들이나, 예수님의 공생애 이후로 거의 100년 뒤에 실패한 최후의 혁명을 이끈 시몬 바르 코크바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에게서 우리가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성품 같은 인상은 받지 않는다. 그 점에서는, 세례 요한도 “[마음이]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다”거나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그들이] 간절히 필요로 하는 쉼을” 준다고 그려지지는 않는다.(마 11:29) (Wright, 2019: 270)


시몬 바르 코크바

예수를 통해 초대 교회에 퍼진 메시아의 이미지가 얼마나 독특한 것인지는 132-135년경 메시아로 추앙받았던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hbar)와의 비교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 제3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유대인들을 지휘하였던 바르 코크바는, 당대 최고의 랍비이자 지금까지도 『미쉬나』를 체계화한 것으로 존경받고 있는 랍비인 아키바 벤 요셉(Akiva ben Yosef)에 의해 유대 민족을 해방시킬 메시아로 지목되었다. 바르 코크바는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에 대항하여 유대 민족 최후의 저항을 이끌었지만, 결국 그의 반란은 실패하여 예루살렘은 철저하게 멸망하고 만다. 흥미로운 점은, 유대 세계 전체를 뒤흔들면서 당대 최고의 랍비에게까지 ‘메시아’로 선언되었던 바르 코크바가,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메시아’로 불렸던 에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닌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초기 랍비 문학에서 묘사되는 바르 코크바는 비범한 육체적 힘을 지닌 용사이다. 유대교 연구자인 리처드 G. 마크스(Richard G. Marks)는 『전통적 유대 문학에서 바르 코크바의 이미지』라는 저서에서 바르 코크바가 초기 랍비들에게 어떤 이미지였는지를 잘 설명한다. 마크스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예루살렘 탈무드와 미드라쉬 애가 속 바르 코크바에 대한 전설은 그를, 마치 랍비 전설의 깃보림[gibborim, 용사들]과도 같은, 그리고 깃보림이 지닌 특징적인 탁월함과 악함, 위험성과 그들의 힘의 영광과도 같은, 비범한 육체적 힘을 보여주는 카리스마적 전사의 특징으로 그려낸다. 동시에, 바르 코크바의 이미지는 그리스 비극 영웅 및 이사야의 산헤립[남유다 왕국을 침공한 앗시리아 제국의 왕]의 이미지(열왕기하 19:2-8)와 유사성을 지니며, 서사의 주인공으로서 벤 코지바[바르 코크바의 본명]는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이 겪는 갑작스러운 인식과 반전을 겪게 되는 인물이다. (Marks, 1994: 43)

바르 코크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예수 이후로 100년이 지났을 무렵까지도 메시아를 일종의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 메시아에게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것은 성전을 재건하거나 로마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었다(Wright, 2004: 733-740 참조). 즉, 긍휼과 사랑을 지닌 메시아의 이미지는 1세기 유대 세계 속에서 널리 퍼져 있던 메시아의 이미지와는 유사하지 않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역사적 예수 연구의 중요한 기준들 중 하나인 (특별히, 예수 세미나 같은 급진적인 역사적 예수 연구 집단에서조차 강력하게 옹호하는 기준들 중 하나인) ‘비유사성(dissimilarity)’ 혹은 ‘비연속성(discontinuity)’이라는 기준에 비추어볼 때 대단히 중요한 함의를 지닌다. 역사적 예수와 관련된 특정한 자료가 당대 세계의 일반적인 맥락과 유사하지 않아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일종의 어색함이나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자료는 역사적으로 사실에 가깝다는 기준 말이다. 후대의 인물들이 굳이 자신들의 상식과 일치하지 않는 방향으로 자료를 왜곡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라이트는 바로 이와 같은 점을 들어서 복음서가 예수를 통해 말하고 있는 메시아의 이미지가 실제 역사적 예수에게 충분히 귀속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유대교 및 초대 교회 속에서의 메시아상을 잠깐만 훑어보아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되돌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메시아라는 개념은 어떻게 해서 전자에서 후자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일까? 궁극적으로 가장 단순한 가설은 그 교량의 역할을 했던 것이 예수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Wright, 2004: 745)

4. 사랑 vs. 분노: 복음서는 무엇을 강조하는가?

‘긍휼과 사랑을 지닌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1세기 유대 세계에서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복음서에 나타난 구절들을 훨씬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다. 즉, 초대 교회가 단순히 예수의 이미지를 미화하기 위해 ‘긍휼’과 ‘사랑’ 같은 덕목을 역사적 예수에게 억지로 귀속시킨 것이 아니라, 그 덕목이 역사적 예수에게서 실제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특별히, 이와 같은 점은 공관복음 중에서도 역사적으로 가장 초기에 쓰인 것으로 널리 인정되는 마가복음에 대한 독해에서 매우 중요하다. 마가복음에서 예수에게 귀속되는 주된 감정이 분노라는 어만의 주장과 달리, 마가복음은 종종 다른 복음서보다도 예수가 지닌 긍휼과 사랑을 더욱 명시적으로 부각시키는 특징이 있다. 물론, 마가복음의 예수는 대단히 카리스마적인 인물이고, 그는 종종 사람들과 강하게 충돌하기도 하지만, 예수의 카리스마가 예수의 긍휼과 사랑을 대체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과장이다. 마가복음이 다른 복음서들보다도 예수의 긍휼과 사랑을 얼마나 자주 언급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표를 통해 정리해 보자.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1)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서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곧 그의 나병이 나았다. (마태복음 8:3) 예수께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splanchnistheis)/분노하시고(orgistheis),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마가복음‬1:41)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서, 그에게 대시고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니, 곧 나병이 그에게서 떠나갔다.(누가복음 5:13)
(2) 돼지를 치던 사람들이 도망 가서, 읍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렸다. (마태복음 8:33) 그러나 예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집으로 가서, 가족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큰 은혜를 베푸셔서 너를 불쌍히 여겨 주신(eleesen, 긍휼히 여겨 주신) 일을 이야기하여라.” (마가복음 5:19) “네 집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네게 하신 일을 다 이야기하여라.” 그 사람이 떠나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일을 낱낱이 온 읍내에 알렸다. (누가복음 8:39)
(3)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esplanchnisthe), 그들 가운데서 앓는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마태복음 14:1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큰 무리를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으므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다(esplanchnisthe). 그래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마가복음‭6:34) 그러나 무리가 그것을 알고서, 그를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맞이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해 주시고, 또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누가복음 9:11)
(4)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splanchnizomai). 그들을 굶주린 채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다. 가다가 길에서 쓰러질지도 모른다.” (마태복음 15:32) “저 무리가 나와 함께 있은 지가 벌써 사흘이나 되었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가엾다(splanchnizomai). 내가 그들을 굶은 채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그 가운데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마가복음 8:2-3) ×
(5) 예수께서 어린이 하나를 곁으로 불러서,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8:2-3)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신 다음에, 그를 껴안아 주시고(enankalisamenos)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9:36) 예수께서 그들 마음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가복음‭9:47-48)
(6)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하면,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복음 19:21)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egapesen).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가복음‬10:21)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누가복음‭18:22)

잘 알려져 있듯이, 두 자료 가설에 따르면, 마가복음과 Q 자료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보다도 역사적으로 우선성을 지니는 문서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이 마가복음을 확장시키거나 축소시켰을 가능성은 있어도, 마가복음의 저자가 다른 복음서를 확장시키거나 축소시켰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세 복음서의 병행구절들 중 마가복음에서 유달리 예수의 긍휼과 사랑에 대한 언급이 빈번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은 꽤나 놀라운 일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복음서의 편집 과정에 대한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에 의문을 제기한다. 가령, 어만은 마가복음 1:41에서 “불쌍히 여겼다.”가 본래 “분노하였다”로 쓰였을 것이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은 예수가 “분노하였다”라는 마가복음의 증언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그 구절을 자신들의 글에서는 생략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Ehrman, 2006: 125). 그러나 마가복음에서 명백히 “불쌍히 여겼다”, “긍휼히 여겼다”, “껴안아 주었다”, “사랑하였다.”로 쓰여 있는 구절조차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 종종 생략된다는 사실은 어만의 추측이 그다지 견고하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이 단순히 납득이 되지 않는 예수의 모습을 미화하기 위해 “분노하였다”와 같은 표현들을 생략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가장 초기 복음서인 마가복음이 예수의 긍휼과 사랑을 다른 복음서들보다도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복음서가 예수의 긍휼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들 중에서도 “불쌍히 여겼다” 혹은 “가엽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단어의 중간태인 ‘스플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는 주목할 만하다. 이 단어는 창자를 의미하는 ‘스플랑크논(splangchnon)’에서 파생되었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애끊다”와 “애탄다”에 정확히 대응한다. 우리말 ‘애’가 창자를 지칭하고, “애끊다”와 “애탄다”는 그 창자가 끊어지고 타들어가는 격렬한 연민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처럼, 마가복음은 예수가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창자가 끊어지고 타들어가는 감정을 느꼈다고 증언하고 있다. 사람들에 대해 이와 같이 격렬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예수의 모습이 굳이 분노하는 예수의 모습과 반대되거나 모순되어야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마가복음 속 예수의 긍휼과 사랑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역사적 예수가 얼마나 ‘카리스마적’ 인물이었는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역사적 예수는 격정적인 감정의 소유자였고, 사람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에 휩싸인 인물이었으며, 그 긍휼과 사랑 때문에 세상의 고통과 악에 대해 격렬하게 분노하던 인물이었다고 말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분명히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역사적 예수가 (어만의 주장과 달리) ‘분노’보다도 ‘긍휼’과 ‘사랑’으로 훨씬 더 잘 특징지어지는 인물이라는 점을 우리가 대단히 신빙성 있게 추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바로 이와 같은 지점에서 소위 ‘진보적’이라고 자부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해 커다란 불만이 있다. 그분들이 잘 알고 있는 대로, 마가복음이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역사적 예수의 실제 모습에 가깝다면, 왜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긍휼과 사랑은 자주 간과되는가? 특별히, ‘긍휼과 사랑을 지닌 메시아’라는 생각은 1세기 유대 세계에서 독특한 것이었는데도, 왜 비평학자들은 정작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면서 예수의 가장 특징적인 점을 자주 놓치고 마는가? 심지어 교회가 2,000년동안 예수를 사랑이 많은 분으로 묘사하였는데도 왜 비평학자들조차 종종 이런 증언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갈릴리 나사렛의 목수였던 예수가 고매한 인격을 지녔을 리가 없다는 문화적 편견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이데올로기에 속고 있으며, 진실은 우리의 믿음과는 다를 것이라는 (아니 달라야만 한다는) 철학적 편견 때문이다.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본성은 독선과 아집과 분노와 욕망과 좌절과 슬픔밖에 없을 것이라는 인간학적 편견이 정작 역사적 예수에 대한 가장 명백하고 직설적인 사실조차 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복음 1:46)이라는 오랜 냉소가 예수를 보는 눈을 가리는 것이다.

5. 보론: 진규선의 예수

진규선은 마가복음 1:41의 “불쌍히 여겼다”를 “분노하였다”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는 독법을 지지하면서 예수의 나병 환자 치유 사건을 자신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 예수가 나병 환자에게 분노한 이유는 나병 환자가 유대교의 정결법을 어기고서 예수 자신의 몸에 접촉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 진규선의 주장이다. 즉, 유대교의 정결법은 부정한 것에 접촉한 사람을 공동체로부터 격리시킨다. 진규선은 예수가 정결법을 의식하여 자신에게 접촉한 나병 환자에게 화를 내었고, 더 나아가 자신이 나병 환자와의 접촉으로 부정해졌다는 사실이 다른 유대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나병 환자에게 침묵을 명령(마가복음 1:44)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진규선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마도 예수를 찾아온 피부병 환자는, 예수가 그에게 다가가기 전에 ‘먼저’ 예수에게 접촉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에 의하면 피부병 환자와 접촉한 사람은 ‘부정한’ 사람이 됩니다. 피부병 환자들은 사실상 시체와 같은 취급을 당한 것입니다(민수기 12:12 참고). 시체와 접촉한 사람이 격리 생활을 한 뒤 정결 예식을 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그는 저주받은 자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끊어진 사람이 되었습니다(민수기 19:1-13 참고). 게다가 이 정결 예식은 매우 복잡하고 정결 예식을 위한 값비싼 ‘성수’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잿물)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런 규정을 알고 있었던 예수는 피부병 환자가 다가와 접촉했을 때 놀라서 당황하며 화를 냈을 것입니다. (진규선, 2023: 87)

나로서는 이와 같은 방식의 재구성이 기존 학계의 원칙과 상식조차 철저하게 무시하면서까지 예수를 ‘평범한 인간’으로 그려내고 싶어 한다는 점이 다소 놀라울 정도이다. 물론, 예수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주장 자체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든지 제기될 수 있다. 역사적 예수는 인격적으로 그다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자신에게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사건들에 대해 종종 당황하거나, 놀라거나,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주장을 (a)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 통용되는 원칙과 상식으로부터 도출해내는 것과 (b) ‘역사적 예수는 ‘평범한 인간’이니 …했을 것이다.’라고 단순히 추정하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진규선의 재구성에는 크게 세 가지 비판이 제기될 수 있고, 그 중 두 가지 비판은 진규선의 재구성이 지닌 근본적 허술함과 관련되어 있다.


진규선, 『마리아의 아들』

(1) 마가복음 1:41의 “불쌍히 여겼다(splanchnistheis)”를 “분노하였다(orgistheis)”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그 자체로 완전히 자명한 것은 아니다. “분노하였다”를 지지하는 자료는 시리아의 에프렘이 쓴 「『디아테사론』에 대한 주석」, Codex Vercellensis (a), Codex Corbeiensis II (ff2), Codex Bezae (d), Codex Usserianus I (r1*)이다. 그러나 에프렘의 주석에 사용된 시리아어 표현(ettpir)이 과연 “분노하였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에프렘이 그 표현을 성경에서 명시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나머지 라틴어 사본들은 서로 지역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필사 과정에서 “불쌍히 여겼다(misertus/miseratus)”와 “분노하였다(iratus)”라는 라틴어 단어를 혼동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유일한 그리스어-라틴어 역본인 Codex Bezae도 이와 같은 오류에 영향을 받아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만일 마가복음 1:41이 “분노하였다”라면, 이 구절을 인용한 암브로시우스 같은 초기 교부들이 그 표현을 강조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현대의 독자에게는 예수가 분노하였다는 사실이 어색해 보이겠지만, 마르시온주의를 비판하고자 하였던 교부들에게는 예수의 분노야말로 정통 교리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입장에서는 구약의 ‘분노하는 하나님’과 신약의 ‘자비로운 예수’를 대립시키고자 하는 마르시온주의자들을 거부하기 위해서라도 마가복음 1:41을 “분노하였다”로 읽는 편이 더욱 편리하였을 것이다. (Johnson, 2017 참조)

(2) 설령 “분노하였다”라는 독법을 받아들여 본문을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진규선이 그 독법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들이는 가정들은 그가 이 주제와 관련된 학술적 담론들을 거의 참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예수가 부정이 옮는 것을 두려워하여 나병 환자에게 분노하였다는 주장은, 그 분노 바로 다음에 예수가 나병 환자에게 직접 손을 내밀어 그를 만졌다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더욱이, 진규선의 해석은 마가복음에서 예수가 혈루증으로 부정하게 된 여자와 접촉하고(마가보음 5:21-34), 부정한 귀신을 쫓아내고(마가복음 5:1-20; 9:14-29), 부정 중의 부정인 시체를 만진다는 사실(마가복음 5:35-42)을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 예수의 이와 같은 활동을 유대교 정결법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고(Crossan, 2000: 514-516 참조), 반대로 유대교 정결법에 근거한 정화 사역으로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지만(Thiessen, 2021 참조), 어느 쪽으로 보든 예수가 부정이 옮는 것을 두려워하였다는 주장은 역사적 예수 연구에서나 성서학에서나 통용되지 않는다. 심지어 “분노하였다”라는 독법을 옹호하는 학자들조차도 (특별히, 이 독법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인 어만조차도) 예수가 정결법 때문에 나병 환자에게 분노하였다는 식의 해석을 단칼에 거부한다(Guelich, 2001: 162; Ehrman, 2006: 136; France, 2017: 207; Thiessen, 2021: 125-127 참조).

(3) 따라서 진규선의 해석은 강력한 확증 편향에 따라 전개될 뿐이다. (a) “불쌍히 여겼다”와 “분노하였다”라는 두 가지 독법 중에서는 별다른 고민 없이 “분노하였다”가 선택되고 있고, (b) 분노의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는 별다른 논증 없이 예수가 놀랐을 것이라는 추측만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선택의 가장 밑바닥에는 예수가 당연히 ‘평범한 인간’일 것이라는 확신이 너무나 자명하게 전제되어 있다. ‘평범한 인간’ 예수는 당대 사회의 관습을 넘어서지 못하였을 것이고, ‘평범한 인간’ 예수는 나병 환자가 불쾌하였을 것이고, ‘평범한 인간’ 예수는 부정한 인간의 갑작스러운 접촉에 화가 났을 것이고, ‘평범한 인간’ 예수는 다른 유대 사람들이 자신을 부정한 인간과 동류로 취급할까봐 걱정되었을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문제는 이와 같은 연쇄적인 확신들이 아무런 정당한 학술적 근거도 없이 나열되고 있을 뿐인데도, (심지어 거의 아무런 진정성 판별 기준들을 고려하지 않고서 나열되고 있을 뿐인데도,) 그 모든 것들이 스스로 역사적 ‘진실’이라고 너무나 당당하게 자부한다는 점이다. 사건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이 늘어날수록 정당화의 부담은 점점 더 커진다는 논리학적 원칙 따위는 가볍게 무시된다. 텍스트가 말하고 있는 내용도, 그 내용을 둘러싼 학자들의 논쟁도, 그 논쟁을 통해 생겨나는 다양한 해석의 가지도 어느 것 하나 진지하게 취급되지 않는다. 예수를 어떻게든지 ‘평범한 인간’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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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우, 『메시아 예수의 복음』, 킹덤북스, 2011.
진규선, 『마리아의 아들』, 수와진, 2023.
Crossan, J. D. 『역사적 예수』, 한국기독교연구소, 2000.
Ehrman, B. D. “A Leper in the Hands of an Angry Jesus”, Studies in the Textual Criticism of the New Testament, Brill, 2006, 120-141.
France, R. T. 『NIGTC 마가복음』, 이종만·임요한·정모세 옮김, 새물결플러스, 2017.
Guelich, R. A. 『마가복음』, 상권, 김철 옮김, 솔로몬, 2001.
Johnson, N. C. “Anger Issues: Mark 1.41 in Ephrem the Syrian, the Old Latin Gospels and Codex Bezae”, New Testament Studies, Vol. 63, 2017, 183-202.
Marks, R. G. The Image of BAR KOKHBA Traditional Jewish Literature, The Pennsylvania State University Press, 1994.
Russell, B.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개정판, 송은경 옮김, 사회평론, 2005.
Theissen, G. & Mertz, A. 『역사적 예수』, 손성현 옮김, 다산글방, 2001.
Thiessen, M. 『죽음의 세력과 싸우는 예수』, 이형일 옮김, 새물결플러스, 2021.
Wright, N. T.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 박문재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4.
Wright, N. T.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양혜원 옮김, IVP, 2009.
Wright, N. T. 『혁명이 시작된 날』, 이지혜 옮김, IVP,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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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강 일별해보니 역사적 예수 담론 때문에 속이 많이 상하신 것 같네요..ㅎㅎ
저도 개인적으로 종교에 합리성이니 진보성이니 하는 잣대를 지나치게 들이대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똑똑하지 않은 사람들이 똑똑한 척하고 싶어하거나, 관종인 사람들이 관종짓할 때 흔히 사용하는 프레임이라..
비도덕적이고 다혈질적인 예수상을 건립한들 무슨 이로움이 있을까요?ㅎ 무의미한 논쟁만 늘어나지 않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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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좋아해요. 다만, 제 발작 버튼이 눌리는 상황이 몇 가지 있는데, 바로 역사적 예수 연구 운운하면서 기존 신앙인들을 멍청하다고 폄하하려는 태도를 접할 때가 그래요. 예전에 진규선 목사의 유튜브에 철학과 관련된 논의가 올라와서 댓글을 달았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기독교인으로서‘ 철학을 연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제 모든 주장이나 근거들이 다 폄하되더라고요. 또 플란틴가나, 스윈번이나, 월터스토프나, 반 인와겐 같은 세계적인 기독교 철학자들도 다 무시되고요. 그때부터 제 발작 버튼은 눌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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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목님이 그러시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네요. 저는 원래도 '나일론 신자'였다가 지금은 '가나안 신자'가 되었지만, 나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일에 종사하면서 철학 공부도 하고 있는데... 자신이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종종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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