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설의 후기 현상학을 비판에서 구출하기?: 이남인의 「현상학과 해석학」에 대한 단상

국내 현상학 연구자 중에서 이남인 교수님만큼 명료하고 치밀하게 글을 쓰는 분도 찾기 어렵지만, 나로서는 후설의 현상학을 어떻게든 변호해주려고 하시는 이남인 교수님의 입장에 대해서는 참 동의하기 힘들다.

이남인 교수님은 후설의 초중기 현상학과 후기 현상학을 구분하여 후대 철학자들이 후설에 대해 제기하는 비판이 오직 초중기 현상학에만 적용된다고 주장하신다. 즉, 1920년대 이전까지의 초중기 후설은 소위 '데카르트적 길'을 따라 근대 의식철학의 틀 속에서 현상학을 전개한 반면, 후기 후설은 더 이상 의식철학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 이남인 교수님이 「현상학과 해석학」이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요지이다.

그런데 사실 그 '데카르트적 길'을 집약해서 보여주고 있는 후설의 「데카르트적 성찰」은 후설이 1929년에 소르본 대학에서 행한 강의를 1931년에 출판한 결과물이다. 1925년에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행한 강의인 「현상학적 심리학」 역시 의식의 자기 반성에서 시작하여 초월론적 현상학으로 나아가려는 기획이라는 점에서 딱히 '비데카르트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후설의 후기 현상학에서 의식에 '필증적 명증성'으로 주어지지 않는 여러 요소들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탐구를 '데카르트적 길'에서 '비데카르트적 길'로의 단선적 발전 과정의 결과처럼 설명하는 것은 솔직히 너무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이런 발전을 통해 후설의 초중기/후기 현상학이 칼로 무 자르듯 명쾌하게 나누어져서 후기 현상학에는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친 이론적 단순화로 보인다.

차라리 자하비처럼 후설의 초월론적 현상학으로 가는 길에는 「이념들」 제1권으로 대표되는 '데카르트적 길'도 있고, 「현상학적 심리학」으로 대표되는 '심리학적 길'도 있고, 「위기」로 대표되는 '존재론적 길'도 있다고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은 다양한 통찰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어서 반드시 데카르트적 길에만 종속되는 것은 아니라고 변호하는 게 더 설득력 있을 것 같다. 후기 현상학이라고 해서 특별히 '비데카르트적 길'이 다른 길보다 더 부각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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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지 오래되어 가물가물합니다만, '의식철학의 틀'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그게 왜 비판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제가 볼 때 이남인 교수님은 데리다 같은 논자들의 비판을 인정하면서 논지를 펼치시느라 '의식철학은 문제가 있다'는 식의 전제를 불필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덧붙여 나중에 후설 현상학에서 '필증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요소들에 대한 탐구로 범위가 확장되는 것, 그래서 '단선적인 발전'이 있는 것은 대개 사실로 간주됩니다. 그게 바로 발생적 현상학이거든요. 20년대부터(<시간의식>강의 등을 고려하면, 더 초기로 잡을 수도 있습니다) 후설은 무의식, 유아의 의식, 태아의 의식, 심지어 삶 이전의 자아 같은 것에 대해 접근하는 작업을 많이 합니다. 이 권역은 반성에서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부터 분석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해석을 통해 혹은 인과적 설명을 통해 접근되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적 길, 심리학적 길, 존재론적 길 같은 것들은 현상학의 범위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초심자가 처음 현상학에 접근하는 길로서 (입문서에서) 제시된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현상학의 발전 혹은 범위 확장이라는 논지와는 그다지 유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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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OP님이 발생적 현상학에 대해 설명하신 내용 속에 이미 이남인 교수님의 독창적인 해설이 반영되어 있는 것 같아요. 이남인 교수님 스스로도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이라는 구별이 후설에게서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에 비해, 사실 두 현상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지는 그다지 뚜렷하지 않죠(「현상학과 해석학」, 312쪽.).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이남인 교수님이 제시하는 입장 중 하나가 바로 발생적 현상학이 본능, 의지, 무의식 같은 '비객관화 작용'을 다룰 수 있도록 해주는 현상학이라는 거에요(「현상학과 해석학」, 355; 361쪽.) 저는 이런 해설을 부정하지는 않아요. 오히려 폭넓은 텍스트 독해에 근거한 굉장히 명료하고 치밀한 해설이라고 생각해요.

(2) 다만, 이남인 교수님이 '정적 형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이라는 구분을 후설의 '초중기 현상학'과 '후기 현상학'에 각각 대응시켜서 후기 현상학을 따로 구해내려 하시려는 게 불만족스러워요(「현상학과 해석학」, 355쪽.). 발생적 현상학이 후설의 작업을 대폭 확장시킨 것은 맞지만, 이건 이남인 교수님 본인도 설명하듯이 "초월론적 현상학의 두 얼굴"(「현상학과 해석학」, 311쪽.)이지, 기존 작업을 대체하거나 전환시킨 게 아니잖아요. 의식에 주어지는 심리적 체험을 중심으로 초월론적 현상학을 해명하고자 하는 기획은 후기 후설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을 뿐더러, 「데카르트적 성찰」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사실 초월론적 현상학으로 처음 들어가기 위한 반성을 시작하는 단계에서는 그런 의식철학적 기획이 훨씬 더 강조되고 있죠. 그런데도 후기 후설을 의식철학적 사유에서 면제되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이남인 교수님의 입장은, 후설을 비판하는 후대 철학자들의 논점을 간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해요. "A처럼 하는 건 정당화되지 않잖아?"라고 비판하는데, "그래도 B는 여전히 훌륭한 작업인 걸?"하고 다른 대답을 하는 것처럼 보여요.

(3) 그래서 저는 후기 후설에게서 의식철학을 넘어서는 요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후기 후설의 작업이 의식철학 비판에서 면제되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건 비약이라고 봐요. 그냥 "후설이 반드시 데카르트적 길을 따르는 것만은 아니더라. 후설은 여러 면모를 지닌 복합적 철학자더라." 정도로만 주장하셨어도 될 내용을 이남인 교수님이 무리하게 후기 후설 전체를 구해내려는 시도로 확장시키려 하신 게 아닌가 해요. 가령, 루돌프 베르넷(R. Bernet) 같은 학자도 이남인 교수님처럼 후설의 현상학이 의식철학을 넘어서는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요소를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주장을 후설의 초중기 현상학과 후기 현상학을 구분하는 방식으로 제시하지는 않더라고요. "너무 후설의 의식철학적 면모만 비판하지는 마라. 고마해라. 마이 무따 아이가." 정도가 후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변호가 아닌가 싶어요.

(4) 게다가 사실 후설이 본능적이고 무의식적인 요소를 다룬다고 해도 여전히 데리다 같은 사람들은 만족스러워하지 않을 거에요. 데리다는 니체와 프로이트조차 일종의 '현전의 형이상학'을 주장한 인물들이자 '형이상학으로 형이상학을 대체하려는 시도'에 빠져 있는 인물들이라고 비판하니까요. 후대 철학자들이 비판하는 '의식철학'은 단순히 "의식에만 주목하고 의식 외적 현상에는 주목하지 않는 철학"(제가 보기에 이남인 선생님은 후설이 이런 의미의 의식철학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시려는 것 같아요.)이라기보다는, "기성품처럼 존재하는 진리를 우리 의식에 표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철학"이죠. 이런 관점에서 보면 후설이 설령 본능과 무의식에 주목하고 '해석'의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후설 현상학이 '초월론적 자아'라는 인식의 조건을 상정한 상태에서 그 조건을 명증적으로 '기술'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의식철학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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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남인 교수님의 대응 방식에 다소 비판적인데, youn님의 논평을 통해 생각이 더 분명해진 것 같아요. 제 의견을 조금 더 써 보도록 할게요.

(1) 정적 현상학은 주체의 발달을 설명하지 않는 현상학, 발생적 현상학은 그것을 설명하는 현상학으로 심플하게 이해해도 문제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 설명이 이남인 교수님의 독창적인 해설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아요. 발생적 현상학은 주체의 발달을 다루기 때문에, 정적 현상학과 달리 우리가 곧바로 접근할 수 없는, 발달되고 완성되기 전의 주체의 모습(태아의 의식, 무의식 등)을 다룬다는 점에 대해 폭넓은 합의가 있어요. 이남인 교수님의 독창적인 해설은, 정적 현상학은 '타당성 정초'를 다루는 반면에 발생적 현상학은 '시간적 정초'를 다루기 때문에 각각의 주제가 다르다는 주장에 있는데, 후술하겠지만 저는 이 견해에 동의하지 않아요.

(2) 저는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의 구별이 '초중기 현상학'과 '후기 현상학'의 구별과 꼭 일치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들어맞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후설의 '초중기 현상학'에 가해지는 비판이 '후기 현상학'에 대해서는 상당 부분 유효하지 않다는 이남인 교수님의 주장에는 불만이 없어요. 하지만 이남인 교수님의 견해와 달리, 발생적 현상학은 정적 현상학을 '대체'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이 서로 다른 영역을 가진다는 이남인 교수님의 견해는 사실 마이너리티에 속하죠. 표준적인 견해는 발생적 현상학이 정적 현상학의 '완성된 형태'라는 것이에요. 우리가 주체의 현재 모습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설명하려면, 먼저 우리가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주체의 현재 모습을 기술하고 분석할 수밖에 없죠. 이 점에서 발생적 현상학은 정적 현상학의 테두리 안에 머무를 수 있는 작업들을 전제하고, 나중에 주체의 현재 모습의 발생을 설명함으로써 그 작업들을 넘어선다고 생각해요.

(3) '정적인' 작업들이 발생적 현상학을 수행하기 위한 조건이기 때문에, 현상학으로 입문하기 위한 단계에서는 정적 현상학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기획이 제시되고 있어요. 그래서 전술했듯이 데카르트적 길, 심리학적 길 등은, 그것들이 입문서에서 제시된 입문적 길에 불과하기 때문에, 후설이 실제로 몰두하는 작업이 정적 현상학인가 발생적 현상학인가라는 점과 그다지 연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데카르트적 길이 제시되므로 여전히 정적 현상학이 메인이다', '비데카르트적 길이 제시되므로 발생적 현상학이 메인이다'라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죠.

(4) 사실 '의식철학에 대한 비판'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어서, 여기에서 저는 '정적 현상학에 대한 비판'을 염두에 두었어요. youn님이 말씀하시는, '기성품처럼 존재하는 진리를 표상할 수 있다는 철학'이 잘못되었다는 비판이 적법하다면, 제가 논한 것과 별개로 후설의 현상학에 대해 정당한 비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논점이 정적 현상학과 발생적 현상학의 구별, 데카르트적 길과 비데카르트적 길의 구별과 연관이 있는지 분명하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후설의 현상학은, 정적 현상학이든 발생적 현상학이든 간에, 데카르트적 길이든 비데카르트적 길이든 간에, 언제나 주체를 다루고 그러한 의미에서 언제나 의식철학이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아무리 무의식이나 원시적인 주체를 다루더라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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