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적 길"과 "존재론적 길" - 『위기』와 『이념들』의 관계

"데카르트적 길"과 "존재론적 길" - 『위기』와 『이념들』의 관계¹

에드문트 후설이 그 자신의 저작들 곳곳에서 누누히 강조하듯이, 현상학의 영역은(자연과학이나 다른 인문과학의 영역처럼) 그 자체로 주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고유의 방법론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현상학적 환원(Phänomenologische Reduktion)"이다. 이것은 판단중지epoché를 통해 획득된 무전제성의 세계현상을 순수 주관성의 초월론적 영역으로 환원시켜 그 순수 자아의 초월론적 장(場)을 드러내고자 하는 방법이다.² 이때 이 순수 영역에로 이르는 길은 결코 한 가지가 아니다. 후설은 환원에로 이르는 세 가지 방법을 자신의 저작들에서 수행한다. 먼저 의심할 수 없이 명증적인 사유하는 나의 존재, 즉 자아(ego)에서 시작하는(『이념들 I』 §47, §49, §50, §51, §54 외 곳곳) 데카르트적 길, 그리고 '심리학적 환원'을 통해 순수심리학의 영역을 획득하고 거기서 '초월론적 환원'을 수행하여 초월론적 영역을 획득하는(「현상학」 B.9) 심리학적 길, 그리고 '미리 주어진 생활세계'로부터 시작해 초월론적 주관으로 나아가는(『위기』 §28, §43, §44, §51 등) 존재론적 길이 그 세 가지 길들이다.³ 우리는 이 글에서 후설의 이 세 갈래길 중 전기에 해당하는 '데카르트적 길'과 후기에 해당하는 '존재론적 길'에 초점을 맞추어, 그 각각의 방법은 무엇이며 그 차이는 무엇인지에 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 데카르트적 길
'데카르트적 길'은 막 초월론적 현상학에 들어선 후설의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I』(1913)으로 대표되는 첫 번째 길이자 가장 직접적이고 단순한 길이다. 이 방법은 다른 방법들과 달리 자아에서부터 시작한다. 후설은 『이념들 I』의 §49에서, 세계무화(Weltvernichtung)라는 일종의 사고실험을 통해 자아가 절대적으로 존재 독립적임을 입증한다.
"의식의 존재, 모든 체험흐름 일반의 존재는 만일에 사물세계가 무화하면(Vernichtung) 변용을 입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그렇다고 그 자신의 존재(Existenz)에 있어서는 아무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떠한 실재적 존재도, 즉 의식에 현출을 통해서 제시되는 어떠한 것도 (체험흐름이라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의식 자체에 대해서는 필연적이 아니다. 내재적 존재는 그러므로 원리상 현존을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nulls 're' indiget ad existentum)는 의미에서 절대적 존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Ideen I, 91/178)⁴
후설에 따르면, 세계는 전적으로 주관에게 의존한다. 단 자하비(Dan Zahavi)가 말하듯이, "세계 없는 주관은 상상할 수 있는 반면 주관 없는 세계는 상상할 수 없다."(Zahavi 2017, 89쪽)
따라서 이에 따라 주관의 세계구성적 측면이 우리의 눈앞에 열린다. 다시 말해 순수 자아(reine Ich/Ego⁵)의 초월론적 측면이 현상학적 장(場)으로서 눈 앞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앞서 말했듯이 직접적이고 단순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길을 통해 현상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에는 큰 오해들이 뒤따를 위험성이 내재해 있다. 대표적으로 독아론적 오해와 관념론적 오해, 그리고 현상학은 세계의 존재에 관계없이 오직 순수 주관만을 탐구한다는 오해가 그것이다. (실제로 후설은 그의 현상학에 대해 이러한 오해들을 수없이 많이 받아 왔다. 그는 그의 저서들 곳곳에서 이러한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해명하는 구절들을 남겨 두었지만, 그의 글의 난해함 탓인지 그의 사후에도 그런 오해들을 풀기에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후설아카이브 설립 이후 『제일철학 II』, 『현상학적 심리학』, 『위기 보충판』 등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 하나둘 출간됨으로써⁶ 그리고 단 자히비 등 수많은 학자들의 탁월한 결과물들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이러한 오해들은 점차 해소될 수 있게 되었다.) 후설은 결코 타자 없는 독아론적 주관을 탐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현상학이 주관과 세계에 대한 근본적 학문인 한, 그것은 상호주관성(Intersubjektivität)을 반드시 포함한다. 후설은 심지어 상호주관성이 초월론적 자아에 미치는 영향까지도 분석하여 그것을 "구성하는[구성적] 상호주관성"(『위기』 313쪽 등)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또 현상학이 관념론의 특수한 형태라는 해석도, 관념론이 세계(인식대상)가 실재함을 부정하고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지) 단지 주관의 표상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인 한, 결코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실재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주관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실재가 단지 주관의 심적 표상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상적인 것은 시선 앞에 '그 자체'가 있는 것으로 그리고 '주어진 것'으로 의식될 뿐 아니라, 순수하게 주어진 그 자체로서, 철두철미하게 그것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그대로 의식된다."(『이념들 I』 230쪽)

"지향적 체험으로서의 현상(Erscheinung)과 현상하는 대상(객관적 술어들의 주어)을 구분하지 않고, 그럼으로써 감각들의 체험된 복합체와 대상적 특징들의 복합체를 동일시하는 것이 현상주의 이론의 근본적 결함이다."(Logische Untersuchungen II, 371)

"공간사물은 지각된 것, 즉 그 생생함 속에 의식에 적합하게 주어진 것이다. 공간사물 대신 어떤 심상이나 부호가 주어진 것이 아니다. 지각작용을 부호의식이나 심상의식으로 삽입하면 안 된다.(...) 그런데 직접 직관하는 작용 속에 우리는 '그 자체'를 직관한다. 그 자체는 더 높은 파악이 아니라 직관하는 파악 위에 구축되고, 따라서 직관된 것이 어떤 것에 대한 '부호'나 '심상'으로 기능할 것은 전혀 의식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을 '그 자체'로 직접 직관되었다고 한다. 지각 속에 그 자체는 더욱 본래—기억이나 자유로운 상상 속의 '눈앞에 아른거리는' '현전화한' 이라는 변양된 특성에 대립해— '생생한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 사물지각은, 마치 기억이나 상상 속에 있듯이, 비-현재하는 것(Nichtgegenwärtiges)을 현전화하지 않는다."(『이념들 I』 159~161쪽)⁷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설은 자신의 철학을 "초월론적 관념론"이라고 부른다(「『이념들』제 1권에 대한 후기」 『이념들 3』 234p, 『성찰』 §41 등 곳곳). 그 이유는 주관성이 세계구성적이며 초월론적으로 세계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Erste Philosophie II, 215쪽).

"지향적 방법들이나 초월론적 환원, 혹은 이 둘의 가장 깊은 뜻을 오해하는 사람들만이 현상학과 초월론적 관념론을 분리시키고자 한다." (『성찰』 165쪽)

"이처럼 체계적으로 구체화되어 수행되었다면 현상학은, 비록 근본적으로 본질적이고 새로운 의미에서이지만, 당연히 초월론적 관념론(transzendentaler Idealismus)이다. 이 초월론적 관념론은 심리학적 관념론, 즉 의미가 없는 감각자료에서 의미가 있는 세계를 도출해내려는 관념론이 아니다. 그것은 '물 자체'에 관한 세계의 가능성을 적어도 한계개념(Grenzbegriff)으로서 보류해놓을 수 있다고 믿는 칸트적 관념론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가능한 인식의 주체인 나의 자아에 관해 체계적인 자아론적 학문의 형식으로 일관되게 수행된 자기 해명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닌 관념론이다. 더구나 자아인 나에 대해 곧바로 의미를 가질 수 있어야만 할 존재자의 모든 의미에 관해 수행된 자기 해명으로서의 관념론이다. 이러한 관념론은 심심풀이로 장난하는 논의의 형성물이 아니며, 실재론(Realismus)과의 변증법적 논쟁(dialektischer Streit)을 통해 전리품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자아인 나에게 언제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유형의 존재자, 특히 경험을 통해 나에게 실제로 (미리 주어진) 자연·문화·세계 일반의 초월성에서 실제적 연구를 통해 수행된 의미해명(Sinnesauslegung)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명은 구성하는 지향성 자체를 체계적으로 드러내 밝히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념론을 입증하는 것은 현상학 자체이다."(『성찰』 164~5쪽)

후설의 초월론적 관념론은 결코 종래의 의미에서의 관념론이 아니라, 단지 주관성의 초월론적 우위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이해된다(Zahavi 2017, 124쪽) 후설의 관념론은 그저 구성하는 지향성에 대한 체계적 분석을 통해 세계의 초월과 풍부함을 이해하고 해명하려는 시도이다. 곧, 후설의 관념론은 자연적 태도의 실재론과의 단절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되찾고자 한다(Zahavi 2017, 127쪽).

그러므로 후설의 현상학은 초월론적 관념론인 동시에 하나의 실재론이다. 그것은 결코 그 둘 중 하나만의 입장을 취하지도 않으며, 전통적 의미에서의 그것들인 것도 아니다.

"실재론(Realismus)이라는 말이 '나는 이 세계 속에 사는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 점에서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따라서 이것[현상학]보다 더 강한 실재론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자명성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문제이다." (『위기』 345쪽)

이러한 점에서 단 자하비는 후설이 관념론과 실재론 둘 모두를 넘어선다고 말한다. 만일 관념론이 주관성이 세계 없이 존속할 수 있다고, 실재론이 세계가 주관성 없이 존속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고 정의한다면 말이다(Zahavi 2017, 129쪽). (그리고 이러한 후설의 독특한 관념론은 그의 독특한 "구성(Konstitution)"개념에서 정점에 달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아마 나중에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후설의 현상학이 세계를 배제하고 오직 주관성에만 몰두한다는 해석도 부조리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현상학의 주제는 주관과 세계 둘 모두를 포괄하기 때문이다.

2 . 존재론적 길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후설은 위와 같은 방법 대신 환원에 이르는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데, 그것은 저 첫 번째 방법이 위에서 보았던 것처럼 너무나도 많은 오해의 위험성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후설은 그의 마지막 저서 『유럽학문의 위기와 초월론적 현상학』(1929)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에 덧붙여 나는 나의 저술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Ideen zu einer reinen Phänomenologie und phänomenologischen Philosophie)에서 서술했듯이 초월론적 판단중지를 통한 훨씬 짧은 길(viel kürzere Weg)—이것을 나는 "데카르트적 길(Cartesianischen Weg)"이라고 불렀다(즉 이것은 "성찰Meditationes"에서 데카르트적 판단중지(Cartesianische Epoché)에 단순히 반성하면서 깊이 파고들어 감으로써, 그리고 데카르트의 편견과 혼동을 비판적으로 순화함으로써 획득한 것으로 생각된다)은 다음과 같은 커다란 결함을 갖는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이 길은 실로 단 한 번의 비약으로 초월론적 자아(transzendentale ego)에 이르는 것 같지만, 그러나 선행하는 어떠한 설명도 분명히 없으므로 초월론적 자아를 가상적인, 내용적으로 공허한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우선, 그것에 의해 무엇이 획득되었는가, 게다가 이것에서 새로운 그리고 철학에 대해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완전히 새로운 토대학(Grundwissenschaft)이 어떻게 획득되었는가 하는 난처한 문제에 직면했다. 그러므로 나의 저술 "이념들(Ideen)"이 이룩한 성과가 제시하듯이,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그리고 곧바로 최초의 출발에서부터 그렇지 않아도 매우 빠지기 쉬운 소박한-자연적 태도(naiv-natürliche Einstellung)속으로 다시 굴러떨어졌다."(『이념들 I』 292쪽)⁸

이른바 '존재론적 길'은 세계가 선소여되어 있다는 것에서 시작한다. 세계는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미리 주어져 있다. 이러한 세계, 즉 모든 실재성들의 궁극적 원천이자 근원적인 명증성의 세계(『위기』 251쪽/334쪽 등)인 세계는 "생활세계(Lebenswelt)"라 불리운다.⁹

"경험에서 (근원적으로) 순수하게 학문 이전에 우리에 대해 존재하는 것인 세계 자체는 그 불변의 본질적 유형 속에 미리 모든 가능한 학문적 주제를 부여한다. (『위기』 398쪽)"

이러한 원초적 세계 위의 대상들에서 후설은 분석을 시작한다. 예를 들어 눈 앞의 저 상자는 '나타난 것'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게다가 그것은 언제나 음영지어, 즉 일부의 면만이 우리에게 주어진다(『이념들 I』 §42, §44 등). 우리는 정육면체를 단 한 번만에 여섯 면을 동시에 직관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나타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나타남의 상관자 내지 가능 조건으로서의 주관으로 이끈다. 이로부터 초월론적 주관/자아의 장이 열리게 된다.
물론 이때 이 방법을 통해서는 현상학이 단순히 주관적 자아 그 자체에만 몰두한다는 오해는 발생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소여방식에서 세계와 주관 간의 불가분적 상관관계(Korrelaktion)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설은, 주관적인 것(das Subjektes)은 자아 자체뿐만 아니라 대상 모두를 포괄한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 '주관적인 것'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은 판단중지에서, 자아 극들과 많은 자아 극들의 우주이든 나타남들의 다양체이든 대상 극들과 대상 극들의 우주이든, 모든 것을 포괄한다." (『위기』 332쪽)

또한 이 길에서는 현상학이 독아론이라는 오해 또한 생길 수 없다. 왜냐하면 생활세계란 본질적으로 공동체 즉 '상호주관성'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이다.¹⁰

"세계는 개별화된 인간에 대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에 대해서도 존재하며, 더욱이 단적으로 지각에 합당한 것을 공동체화함으로써 존재한다."(『위기』 307쪽)

"세계가 우리에게 미리 주어져 있다는 주관적 나타남의 방식들의 다양성을 통해 오직 이처럼 몰두함으로써 (...) 실로 이제 다음과 같은 통찰이 명백히 밝혀진다. 즉 여기에서는 우연적 사실성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인간도—우리가 그 인간을 아무리 변화시켜 생각하더라도—우리에 의해 일반적으로 다시 해석되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대성, 즉 인간의 의식 삶과 그의 동료 인간들과의 공동체 속에 그에게 미리 주어진 세계 이외에 달리 주어지는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할 수는 없다는 통찰이다."(『위기』 309쪽)

심지어 후설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까지 한다: "주관성은 상호주관성 속에서만 그 본질, 즉 구성적으로 기능하는 자아이다(...)"(『위기』 321쪽)

게다가, 현상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은 이 상호주관적 생활세계에 '흘러들어 가' 침전됨으로써 그 생활세계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우리 모두에 대한 세계'인 생활세계는 일반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모든 세계와 동일하다. 모든 새로운 통각[=파악]은 통각이 전이됨으로써 본질적으로 새로운 환경세계를 유형화하고, 교류됨으로써 즉시 일반적 언어로 흘러들어 가(einströment) 명명된다. 그러므로 세계는 언제나 경험적이고 보편적으로 (상호주관적으로) 해석할 수 있고, 동시에 언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세계이다. (『위기』 376쪽)

이렇게 해서 존재론적 길은 바로 '세계에서' 초월론적 장을 얻는다는 점으로 특징지어진다. 따라서 이러한 길은 앞에서 본 방법보다 더 구체적이고 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드러나듯이, 현상학은 결코 추상적인 세계탐구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에 대한 본질적 탐구이다. 현상학은 이러한 탐구를 통해 모든 객관적 학문을 궁극적으로 정초짓고, 거기에 더해서 현상학을 하는 자는 자신의 삶을 절대적 자기책임(Selbstverantwortung)에 입각하여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는 더 이상 '소박한 나'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되돌아가 묻는(rückfragen) 철학적 자아'가 된다.

"그러나 초월론적-현상학적 태도전환을 통해 소박함을 분쇄함으로써 이제 중요한 변화, 즉 심리학 자체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현상학자로서의 나는 항상 자연적 태도로, 나의 이론적 또는 그 밖의 다른 삶의 관심들을 단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나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다시 가족의 가장, 시민, 공무원, 훌륭한 유럽인 등으로서 나의 인간성 속에, 나의 세계 속에 한 인간으로 활동할 수 있다. 물론 이전과 마찬가지라도 완전히 이전과 마찬가지는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더 이상 이전의 소박함을 되찾을 수 없고, 오직 그 소박함을 이해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자연적 태도로 돌아감으로써 새로운 모든 초월론적 발견은 나의 영혼 삶과 다른 모든 사람의 영혼 삶을 풍부하게 만든다."(『위기』 376~7쪽)

3 . 결론
이제까지 우리는 초월론적 현상학에 이르는 대표적인 두 가지 길(방법)에 대해 알아보았고, 그 과정을 통해 또한 초월론적 현상학에 대한 오해들을 해소해 나갈 수 있었다. 판단중지와 환원이라는 여정을 통해 현상학은 비로소 초월론적 장(場)에 다다를 수 있게 되고, 그곳에서 현상학의 연구는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이러한 탐구를 통해 현상학이 이루고자 하는 것은 비단 "모든 앎과 학문들의 궁극적 정초"뿐만이 아니라, "궁극적 원천으로 되돌아가 묻는 근원적 태도"를 세우려는 실천적(윤리적) 목표도 포함된다. 초월론적 현상학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더욱 명증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또한 우리가 사는 사회와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더 넓은 생활세계적 지평 위에 자기성찰적 자아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에드문트 후설(Edmund Husserl), 『순수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I』(2013)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21
에드문트 후설,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1929)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16
에드문트 후설, 『데카르트적 성찰』(1931) 이종훈 옮김, 한길사, 2016
단 자하비(Dan Zahavi), 『후설의 현상학』 박지영 옮김, 한길사, 2017
한전숙, 『현상학』 민음사, 1996
이남인, 『현상학과 해석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3

¹ 이 글은 사실상 불완전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글을 쓰는 데 있어서 매우 큰 도움이 될 문헌들(예컨대 수전 커닝햄의 『언어와 현상학』 등)을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 글을 다소 미흡한 '제 1판'이라고 생각하고 읽어 주었으면 한다. 개정하고 증보할 수 있을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 믿는다.
(인용에 관한 언급: 제목에서처럼 나는 이 글을 『이념들 I』과 『위기』를 중심으로 전개하고자 하므로, 인용 또한 그것들을 중심으로 표기할 것이다.)

² 여기서 "초월론적(transzendental)"이라는 말은 칸트에서처럼 '경험(초월)을 가능하게 하는'의 의미에서 쓰이지만, 이것은 동시에 모든 인식형성의 궁극적 원천으로 되돌아가 묻는 궁극적 동기를 지칭한다.
"나 자신은 이 "초월론적(transzendental)"이라는 말을 가장 넓은 의미에서 데카르트(Descartes)가 모든 근대철학에 의미부여한 동기이며, 모든 철학에서 자각하게 된 동기, 즉 진정하고 순수한 그 과제형태와 체계적으로 발전하려는—우리가 방금 상세하게 논의한—원본적 동기(originale Motiv)에 대한 명칭으로 사용한다.그것은 모든 인식형성의 궁극적 원천으로 되돌아가 묻는 동기이며, 인식하는 자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인식하는 삶에 대해 자기성찰하는 동기인데, 이 인식하는 삶에서는 인식하는 자에게 타당한 모든 학문적 형성물이 합목적적으로 발생하고 획득물로 보존되며 자유롭게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게 되며, 또한 계속 그렇게 될 것이다. (『위기』 206쪽)

³ 이러한 구분은 단 자하비, 『후설의 현상학』89p를 보라.

⁴ '/' 앞의 번호는 독일어판 『이념들 I』의 쪽수를 인용한 것이며, 뒤의 것은 한국어판(한길사, 2021)의 인용 쪽수이다. 필자는 이것을 한전숙, 『현상학』 (민음사, 1996) 185p에서 재인용했는데, 그것은 현재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한국어판(이종훈 역, 한길사)의 번역 상태가 영 좋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한전숙의 번역을 토대로 하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한에서 일부 번역어를 이종훈의 번역어로 바꾸었다.

⁵ Ego는 판단중지를 통해 드러나는 자아(Ich)를 의미한다. (『위기』 340쪽)

⁶ Zahavi 2017, 247쪽

⁷ 후설의 관념론 비판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이념들 I』 §43 주해 - 신이성론과 관념론 비판, 그리고 그 타당성에 관하여 (1)」을 보라.

⁸ 그러나 후설은 후기(1929)에 속하는 『데카르트적 성찰』에서도 데카르트적 길을 사용한다. 따라서 이 두 길을 시기적으로 단순히 툭 잘라서 나누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후설의 후기 현상학을 비판에서 구출하기?: 이남인의 「현상학과 해석학」에 대한 단상 를 보라.

⁹ 생활세계에 대한 망각에서 비롯한 과학 절대주의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현상학적 관점에서 과학주의 비판과 과학자의 올바른 태도에 관하여 - 후기 후설을 중심으로」를 보라.

¹⁰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후설이 상호주관성이라는 개념을 후기에 가서야 생각해 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이미 후설은 『이념들 I』에서부터 상호주관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48, §151 등).


사실 조금 생산적인 글을 쓰고 싶었으나 제 역량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탓에 그냥 "읽었던 것을 정리해야지" 하는 마음가짐으로 짧은 글을 써봤습니다. 앞으로도 당분간 후설에 관해서는 정리 형식의 글을 주로 쓸까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3개의 좋아요

저는 후설을 몰라서 글쓰기 형식에 관해서만 몇 가지 첨언드립니다.

첫째, 괄호 속 외국어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가독성도 떨어지고 텍스트 경제적으로도 좋지 않습니다. 옛날 텍스트들의 경우 한문이나 독어가 많이 붙어있었으나 요즘에는 번역이 힘든 용어거나 의미가 헷갈릴 수도 있는 경우에만 병기하는 추세인듯합니다. 예컨대, 누구나 '현상학적 환원'이라 함은 'Phänomenologische Reduktion' 을 떠올리기에 병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호주관성, 실재론, 판단중지, 생활세계 등도 같습니다.

둘째, 인용 출처를 밝히는 양식을 통일하셔야 합니다. 위에서는 『이념들 I』이라고 하시다가 중간에 Ideen I 라고 사용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셋째, 몇 가지 빼먹으신 것이 있어 보입니다. 예를 들어, 아래 문장은 "가 하나 빠져있어 어디까지가 인용인지 모르겠습니다.

넷째, 참고문헌이 불완전합니다.

논리연구를 인용하셨으나 참고문헌에 들어가있지 않네요. 그리고 이 책 또한 왜 국역본이 아닌 독어본으로 인용출처를 밝히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후설에 대해 몰라서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일 수도 있구요.)

다섯 째, 중간에 후설의 저작에서 텍스트를 뽑아내 연달아 인용하시는 부분들이 있는데, 구절을 인용만 하지마시고 그것이 본 글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되는지 설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5개의 좋아요

지적 감사합니다!

1개의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후설의 글들이 굉장히 복잡하고 추상적인 데도 핵심을 잘 파악하고 계시네요.

1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