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자, 시인, 신의 관점: 하이데거의 초월론적 사유에 대한 비판」 출판

저의 논문 「현상학자, 시인, 신의 관점: 하이데거의 초월론적 사유에 대한 비판」(『현상학과 현대철학』, 제101권, 2024, 123-156)이 출판되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가 과연 서양 형이상학의 한계를 철저하게 극복하였는지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입니다. 저는 (a)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이 모두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 (b)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이 칸트의 ‘초월론적 사유’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 (c) 초월론적 사유가 소위 ‘신의 관점(God's eye veiw)’이라는 형이상학적 시선을 암묵적으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하이데거가 형이상학에 의존하여 형이상학을 비판하는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 저의 논문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요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심 요지를 논증하는 과정에서 하이데거를 둘러싼 다양한 세부 논쟁들 역시 함께 고려됩니다. 후설과 하이데거가 ‘현상학’이라는 같은 이름 아래에 묶일 수 있는지,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이 연속성을 지니는지, 하이데거가 초월론적 철학을 극복하였는지가 바로 저의 논문에서 다루어지는 중요한 세부 논쟁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얼마나 다양한 결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그 중에서 어느 쪽이 좀 더 정당한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시는 분들이라면 이번 논문을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들어가는 말

‘해석학적 철학(hermeneutische Philosophie)’은 20세기 이후의 유럽에서 등장한 철학적 논의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용어이다. 현대철학을 이루고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사조를 지역의 차이에 따라 구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대륙철학’과 ‘영미철학’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더라도, 그 두 가지 사조를 방법의 차이에 따라 구분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해석학적 철학’과 ‘분석철학’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여기서 ‘해석학적’이란 우리가 결코 순수하게 중립적인 상태에서 세계를 바라보지는 못한다고 지적하는 입장들을 수식하는 표현이다. 우리가 지닌 선입견,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무의식, 우리가 속한 계급,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등이 우리의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고 강조하는 입장들은 넓은 의미에서 모두 ‘해석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해석학적 철학에서는 우리의 인식을 통해 세계를 완벽하게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히려 세계란 우리가 놓인 제한된 상황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해석의 과정에서 드러날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조건 속에서 세계를 파악하고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란 세계에 대한 우리의 해석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해석학적 철학을 성립시킨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으로는 하이데거가 있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스승인 후설이 당대 유럽 학문의 실증주의적 경향을 비판하기 위해 제시한 현상학의 이념들 속에 해석학적 철학의 함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였다. 즉, 하이데거에 따르면,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적인 의미는 <해석>이다.”(GA 2, 50/61) 현상학적 기술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지향적 태도에 따라 대상이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현상학적’ 주장은 우리의 지향적 태도에 따라 대상이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해석학적’ 주장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학과 해석학이라는 두 가지 철학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현상학은 해석학의 이론적 근거이고, 해석학은 현상학의 실천적 귀결이다. 오늘날의 철학적 해석학은 하이데거를 통해 현상학이라는 ‘엄밀한 학문’을 토대로 삼아 정초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가 해석학적 철학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는 ‘형이상학의 극복’이다. 하이데거는 세계를 사물들의 총체라는 형태로 특정한 이론 속에 가두어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를 비판한다. 특별히, 그는 갈릴레이와 뉴턴 이후로 존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게 된 과학주의를 우리 시대의 형이상학이라고 평가한다. 즉, 하이데거에 따르면, 과학주의는 (근대의 학문에 따라) 수리물리학적 법칙으로 규정되는 사물만을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으로 인정하고, (현대의 기술에 따라) 우리 앞에 주어진 자연을 우리의 편리를 위해 존재하는 부품으로 바라본다. 이러한 형이상학은 존재가 자연과학이 제시하는 해석에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자연과학은 존재에 대한 유일한 해석도 아니고 불가피한 해석도 아니다. 현상학적 기술의 방법은 자연과학의 틀을 벗어나서도 존재가 얼마든지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특정한 해석을 통해 존재를 완벽하게 포착할 수 있다는 주장은 독단일 뿐이다. 자연과학을 비롯한 어떠한 형이상학도 존재에 대한 해석으로서 최종적인 권위를 지닐 수 없다는 것이다.

본고는 형이상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시도가 지닌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그 시도가 간과한 문제를 드러내고자 한다. 하이데거는 고정된 이론을 통해 존재를 대상화하려는 형이상학에 반대하여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언제나 우리의 삶의 지평을 바탕으로 성립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소위 ‘존재 사유(Seinsdenken)’를 통해 존재가 우리의 삶의 지평 속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풍요롭고, 경이로운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과연 형이상학을 철저하게 극복하였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역설적이게도 존재에 대한 대상화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의 지평을 다시 대상화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본고는 우선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이 현존재를 중심으로 존재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에 의존한다고 강조할 것이다(제2장). 또한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 역시 시인의 언어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생기에 주목하기 위해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에 암묵적으로 호소한다고 지적할 것이다(제3장). 다음으로, 하이데거의 존재 사유를 관통하고 있는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이 ‘신의 관점’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위치를 상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논의할 것이다(제4장). 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의 지평에 대해 현상학적 기술을 제시하고자 하는 하이데거의 시도가 인식의 가능 조건에 대해 형이상학을 구성하고자 하는 ‘초월론적 사유’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할 것이다(제5장).

이번 논문을 쓰기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본래 이번 논문은 2022년 이승종 교수님의 대학원 하이데거 수업의 기말 레포트로 제출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 레포트 내용을 확장하고 다듬어 2023년12월 한국현상학회 학술 세미나에서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받은 많은 조언과 비판이 이번 글을 완성하게 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논문의 내용을 더욱 확장하여 가다머와 가다머 이후 철학적 해석학의 논의들 역시 비판적인 관점에서 연구하려고 합니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방법론에 의존하고 있는 기존 ‘현상학적 해석학(phenomenological hermeneutics)’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 저의 연구 과제입니다. 또한 현상학적 해석학을 극복하기 위해 ‘분석적 해석학(analytic hermeneutics)’이라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저의 연구 목표입니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 하이데거 이후로도 가다머, 하버마스, 리쾨르, 바티모, 투겐트하트 등 철학적 해석학의 주요 인물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을 수행할 예정입니다. 철학적 해석학의 이론적 토대에 관심을 가지신 많은 분들이 논문을 읽고 조언과 비판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논문 다운로드 링크(한국현상학회)

https://ksp.jams.or.kr/co/main/jmMain.kci#학회

논문 다운로드 링크(한국학술지인용색인)

논문 다운로드 링크(Academia.edu)

24개의 좋아요

꾸준히 열심히 하시는 모습 멋집니다! 재밌게 잘 읽겠습니다.

4개의 좋아요

잘 읽었습니다! 짧은 비평문을 써봤습니다.

윤유석 선생님 논문(2024)에 대한 비평

윤유석 선생님(이하 존칭 생략)은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현상학적 ‘봄’)과 그것의 하이데거 철학 내에서의 중요성을 설명한 후, 현상학적 ‘봄’이 사실 신의 관점을 상정한다는 점에서 하이데거 철학이 모순을 겪게 된다고 비판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세인이 행하는 ‘봄’은 자신이 어떠한 관점에 서서 대상을 바라본다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하나, 현상학적 ‘봄’은 그러한 세인의 ‘봄’에 대한 일종의 반성적(혹은 초월적) 봄으로 제시된다. 그리고 이 현상학적 ‘봄’에 의존해 우리는 존재의 생기를 포착할 수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이 현상학적 ‘봄’이라는 것 또한 일종의 ‘봄’인바, 이에 대해서도 2차적인(second-order) 현상학적 ‘봄’이 요구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는데 어떻게 존재의 생기를 볼 수 있냐는 지적이 논문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는 자신이 줄곧 비판한 형이상학적 관점, 윤유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의 관점’을 전제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논문은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좋았다. 필자가 하이데거에 관한 글을 볼 때마다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많은 수의 논문이 하이데거의 주장을 요약하는 데 그친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윤유석은 자신 나름의 견해를 제시한다.
둘째로 좋았던 것은 하이데거의 언어를 받아쓰기하지 않고 자신의 언어로 풀어낸다는 점이다. 하이데거에 관련된 글을 볼 때 이게 하이데거가 쓴 것인지 필자가 쓴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하이데거의 말을 그대로 가져오는 경험을 종종 겪었다. 그래서 하이데거에 대한 지식이 하찮은 나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곤 했다. 반면 윤유석은 하이데거의 말을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지평 속에 위치시켜 잘 이해되도록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잘 소화한 결과일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부족한 나도 잘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사소한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하이데거가 ‘신의 관점’을 전제한다는 비판은 처음 제기된 것이 아니다. 윤유석이 주석 20번에서 밝히듯이, 하이데거가 모종의 ‘신의 관점’을 전제하기에 형이상학 극복이라는 자신의 과업을 이루지 못했음은 데리다와 로티가 지적했다. 물론 둘의 비판은 “철저한 주석 없이 일종의 단언처럼 제시되고 있”기에 윤유석은 데리다 및 로티의 비판 논리를 견주는 작업까진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144). 그러나 데리다와 로티의 그러한 비판에 대한 2차 연구가 있을 것이니, 그것을 활용해서 자신 비판의 독창성을 두드러지게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 번째 아쉬운 점은 2장과 3장에 대한 것이다. 윤유석은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이 모두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라며, 현상학적 환원을 받아들인 하이데거의 모순적인 입장을 비판한다(136). 그렇다면 2장과 3장에 걸쳐 전기 철학과 후기 철학을 설명한 후, “더 이상 존재를 현존재의 <실존적 결단에 따라> 사유하지 않는다”라는 등 둘의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 필요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시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공통점에 의거해 논의를 펼치는 것이라면, 2장과 3장을 잘 통합시키고 더 간명하게 만들면 본론 격인 4장과 5장에 더 빠르게 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나의 이러한 소견은 너무나 사소한 것이라 이 논문의 강점을 가리지 않는다.

  • 선생님이 박사 논문에 쓰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오탈자처럼 보이는 것을 메모해둡니다! 141페이지의 "태양이 미지의 대상인 사물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태양'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지조차 우리가 전혀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에서 '하기는'을 빼야할 듯 합니다.
8개의 좋아요

와, 정말 감사합니다!!

2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