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자, 시인, 신의 관점: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환원에 대한 비판

Ⅰ. 들어가는 말

하이데거는 고정된 이론을 통해 존재를 대상화하려는 서양 형이상학에 반대하여 우리의 인식이 언제나 인간의 삶의 지평을 바탕으로 성립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존재가 인간의 삶의 지평 속에서 얼마나 다양하고, 풍요롭고, 경이로운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에 대한 사유’를 수행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과연 서양 형이상학을 철저하게 극복하였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역설적이게도 존재에 대한 대상화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삶의 지평을 다시 대상화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본고는 우선 하이데거의 전기 존재론이 현존재를 중심으로 존재에 대한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에 의존한다고 강조할 것이다(Ⅱ). 다음으로,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론 역시 시인의 언어를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생기에 주목하기 위해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에 암묵적으로 호소한다고 지적할 것이다(Ⅲ). 마지막으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관통하고 있는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이 ‘신의 관점’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일종의 형이상학적 위치를 상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비판적 질문을 제기할 것이다(Ⅳ).

Ⅱ. 현상학자의 관점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그의 스승인 후설을 통해 창시된 현상학의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다. 비록 후설과 하이데거의 입장 사이에는 간과되어서는 안 될 여러 가지 철학적 차이들이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 두 인물이 모두 ‘현상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자신들의 사유를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실제로, 하이데거는 자신이 1916년 이후로 후설에게 현상학적 ‘봄’을 수행하는 방법을 지도받았다고 회상한다(Heidegger, 2008a: 186 참고). 특별히, 하이데거는 현상이 의식에 주어지는 방식에 대한 탐구와 존재가 우리에게 탈은폐되는 방식에 대한 사유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후설의 『논리연구』를 강독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Heidegger, 2008a: 187-188 참고) 하이데거가 1927년에 ‘현상학의 근본문제들’이라는 이름으로 개설한 강의는 그가 ‘현상학적 방법’에 근거하여 자신의 존재론을 전개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Heidegger, 1994: 42-48 참고).

후설과 하이데거가 현상학의 전통 속에서 공유하고 있는 요소는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이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여기서 ‘현상학적 환원’이란 현상학을 성립시키는 세 가지 방법인 심리학적 환원, 초월론적 환원, 형상적 환원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즉, 현상학은 우리가 일상의 선입견을 벗어나 사태 자체를 왜곡 없이 바라보기 위해 세 가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로, 우리는 그동안 우리 자신이 취하고 있던 수많은 이론적 입장에 대해 판단중지를 내린 상태에서 대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체험에만 집중해야 한다(심리학적 환원). 둘째로, 우리는 대상에 대한 체험이 인식하는 주체의 지향적 태도에 따라 수많은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초월론적 환원). 셋째로, 우리는 지향적 태도가 끊임없이 변경되는 과정에서조차 대상이 항구적 동일성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특징인 본질을 기술해야 한다(형상적 환원). 이러한 세 가지 방법은 ‘사태 자체’ 혹은 ‘현상’이 결코 수리물리학과 같은 분과 학문의 이론 속에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통찰을 담고 있다. 수리물리학에서 형성된 이론이 현상을 완벽하게 그려낸다는 생각은 우리가 일상에서 무비판적으로 상정한 선입견으로 폭로되고, 수리물리학은 단지 현상과 인식하는 주체가 관계 맺는 한 가지 제한된 방식으로 규정되며, 현상은 수리물리학이 제시한 의미 이외에도 얼마든지 다양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으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존재와 시간』으로 대표되는 하이데거의 전기 존재론은 이러한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철저하게 계승하고 있다. 서양 형이상학이 존재를 망각한 채 존재자에만 주목하고 있다는 하이데거의 비판은 우리가 사태 자체를 보지 못한 채 일상의 선입견에 빠져 살아가고 있다는 후설의 비판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즉,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는 특정한 이론적 체계 속에 가두어질 수 없다. 우리에게 매 순간 다양한 모습으로 주어지는 존재를 특정한 이론적 체계를 통해 대상화된 존재자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존재자의 존재는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존재자가 아니다.”(Heidegger, 1998: 20) 이러한 혼동에서 벗어나 존재자가 우리에게 존재하는 방식을 왜곡 없이 바라보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방법’이 필요하다. 우리는 존재에 대한 일상의 선입견을 벗어나야 하고(현상학적 환원1), 존재자가 우리 자신의 실존적 결단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하며(현상학적 구성), 존재망각으로 가득한 철학의 역사에서조차 존재에 대한 사유가 이루어진 흔적을 발굴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해체). 따라서 하이데거가 제시한 ‘현상학적 방법’은 후설이 제시한 세 가지 환원의 방법에 많은 부분 대응한다.2 실제로, 존재에 대한 사유가 현상학에 근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이데거의 전기 존재론에서 대단히 강조된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현상학은 존재론의 주제가 되어야 할 그것[곧 존재]으로 나가는 접근양식이며 그것을 증명하며 규정하는 양식이다. 존재론은 오직 현상학으로서만 가능하다. 현상의 현상학적 개념은 자신을 내보여주는 것으로서 존재자의 존재, 그것의 의미, 그것의 변양태 그리고 그것의 파생태를 말한다.(Heidegger, 1998: 58)

하이데거의 전기 존재론에서 제시된 ‘현존재 분석론’ 역시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한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은 대상(존재자)이 인식하는 주체(현존재)의 지향적 태도에 다양한 방식으로 주어진다(존재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즉,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대상이란 인식하는 주체의 지향적 태도를 바탕으로 의미를 획득한다. 두 인물은 모두 인식하는 주체가 대상에 대한 의미 부여자라는 사실에서 출발하여 인식을 위한 가능 조건을 드러내고자 한다. 현상학은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대상과 인식하는 주체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도록 만드는 최초의 계기인 동시에, 그 관계의 구체적인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분석의 방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통해 초월론적 자아의 구조를 현상의 가능 조건으로 기술하고자 하고, 하이데거 역시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통해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를 존재의 가능 조건으로 기술하고자 한다.3 현존재의 실존 없이는 존재자의 존재가 성립하지조차 않는다는 하이데거의 분석은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존재는 오직 존재 이해가, 즉 현존재가 실존할 때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이 존재자는 존재론의 문제틀 내에 출중한 우위를 요구한다. 이러한 우위가 존재론적인 근본 문제들을 논의하는 가운데, 특히 존재 일반의 의미를 묻는 기초적 물음 내에서 알려진다. 이 물음을 정리 작업하여 답변하기 위해서는 현존재에 대한 보편적인 분석론이 필요하다. 존재론은 그 기초 분과로서 현존재 분석론을 갖고 있다.(Heidegger, 1994: 43 인용자 강조)

따라서 하이데거의 전기 존재론이란 현존재의 실존이 존재의 가능 조건이라는 사실을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통해 보여주려는 작업이다. 이러한 존재론은 현존재가 언제나 존재자의 총체인 세계와 지향적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내-존재’이고, 존재자의 총체인 세계는 현존재의 실존적 ‘결단’에 따라 매 순간 새롭게 구성되며, 현존재의 실존적 결단은 ‘시간성’이라는 실존론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즉, 현존재의 실존에서 벗어난 존재자란 존재할 수조차 없다. 존재자는 현존재와 상관없이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존재자는 우리가 놓여 있는 실존적 결단에 따라 수없이 다양한 의미(Bedeutung)를 지닌다. 존재는 우리의 삶이 지닌 실존론적 구조에 따라 매 순간 새로운 의미(Sinn) 속에서 밝혀진다.4 존재자의 존재가 현존재의 실존에 의존한다는 사실이야 말로 하이데거의 전기 존재론이 강조하고 있는 핵심이다.

Ⅲ. 시인의 관점

하이데거는 1930년대에 중요한 사유의 변화를 겪는다. 그는 『존재와 시간』 제1부 3절 『시간과 존재』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주관성을 포기하는 사유”를 충분히 수행하지 못하였고, 자신의 기존 사유가 새롭게 일어난 “전향”을 말하기에는 부족하였으며, “형이상학의 언어의 도움”으로는 자신의 사유를 더 이상 전개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Heidegger, 2005: 140 참고). 아쉽게도, 하이데거가 ‘전향(Kehre)’이라는 용어로 정확히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가 완전히 명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아마도 하이데거가 현존재를 ‘실존’으로 기술하는 입장과 ‘세계-내-존재’로 기술하는 입장 사이에서 구조적 문제를 발견하였을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5 즉, (a) ‘실존’으로 기술된 현존재는 자신의 실존적 결단에 따라 매 순간 존재자의 총체인 세계를 구성하는 능력을 지닌다. 이러한 기술에서는 존재가 현존재의 주관성에 종속되어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러나 (b) ‘세계-내-존재’로 기술된 현존재는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와 관계 맺는 능력만 지닐 뿐이다. 이러한 기술에서는 현존재의 주관성에 앞서서 존재가 언제나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c) ‘실존’과 ‘세계-내-존재’ 사이의 구조적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두 개념 사이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될 필요가 있었다. 현존재가 존재를 구성한다는 주장을 약화시키면서도 존재가 현존재에게 얼마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이야기되어야 했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론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더 이상 존재를 현존재의 실존적 결단에 따라 사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향’ 이후에 전개된 입장은 이제 현존재가 존재를 뒤따라 사유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존재와 시간』에서 시작된 기획은 존재를 ‘뒤따르는 사유(숙고, Nachdenken)’ 없이는 제대로 성립하지 못한다. “[…] 우리는 어떻게 해야 『존재와 시간』, 「시간과 존재」라는 제목을 통해 말해진 그런 사태관계에 사태에 맞게 관여해 들어가는 것일까요? 대답은 이렇습니다. 즉 우리가 여기서 말해진 사태들을 조심스럽게 뒤따라 사유하는 방식으로 [사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Heidegger, 2008b: 28 인용자 강조) 존재를 고정된 이론 속에서 대상화하려는 서양 형이상학의 시도와 존재를 우리의 실존에 종속시키려는 현존재 분석론의 시도는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론에서 모두 거부된다. 두 시도는 일상의 선입견을 통해 존재를 미리부터 규정하고자 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진정으로 존재를 충실하게 기술하기 위해서는 존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사유의 과정에서 주의 깊게 뒤따라가야 할 뿐이다. “먼저 우리는 존재를 뒤따라 사유할 것인데, [그것은] 존재 자체를 자신의 고유함 속에서 사유하기 위해서입니다.”(Heidegger, 2008b: 30 번역 수정)

시인의 언어는 존재를 뒤따르는 사유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시인의 언어야 말로 존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충실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시인은 존재에 대한 세인들의 잡담을 벗어나 있고, 일상의 선입견으로 환원되지 않는 존재의 생기에 주목하며, 자신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존재에 응답하는 방식으로 말을 하고자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론에서 ‘사유’와 ‘시짓기’는 서로 별개의 활동이 아니다. “모든 사색하는 사유함은 일종의 시지음이다. 허나 모든 시[짓기]는 일종의 사유함이다.”(Heidegger, 2012a: 380) 우리는 하이데거가 시인의 언어를 통해 존재를 뒤따르는 사유에 대해 해명하는 방식을 ‘생기’, ‘참말’, ‘인간적 말함’이라는 세 가지 용어를 통해 다음과 같이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

(1) 생기: 하이데거는 존재가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사건을 ‘생기’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존재자가 현출하는 곳에서, 존재는 이들을 이미 생기시켰고 이들을 자신에게로 지정했다. 이것이 존재 자체의 현성이다. 우리는 그러한 현성을 생기라고 명명한다.”(Heidegger, 2015: 31 번역 수정) 여기서 ‘생기’라는 용어에 대응하는 독일어 ‘에어아이그니스(Ereignis)’는 일상적으로는 ‘사건’이라고 번역될 수 있고, 어원적으로는 ‘고유화’6라는 의미로도 풀이될 수 있다. 즉, 존재란 고정된 이론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각각의 존재자가 매 순간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사건이야 말로 ‘존재’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건은 결코 우리가 예측한 방식대로 벌어지지 않는다. 사건의 형태로 주어지는 존재자는 어떠한 이론이나, 법칙이나, 규정에도 가두어지지 않는 자신만의 고유한 모습이 되어간다. 따라서 존재가 생기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란 존재가 대상화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벌어지는 각각의 고유한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2) 참말: 존재는 생기의 과정에서 자신의 다양하고, 풍요롭고, 경이로운 모습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하이데거는 ‘참말’이라고 번역된 독일어 ‘자게(Sage)’가 ‘가리키다’, ‘나타나게 하다’, ‘보게 하고 듣게 하다’와 같은 포괄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지적한다(Heidegger, 2012a: 352 참고). 즉, 각각의 존재자가 각각의 고유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건에서는 은폐되었던 무엇인가가 새롭게 드러난다. 우리는 생기의 과정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거나, 간과했거나, 무시해버렸던 존재자의 면모에 주목하게 된다.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론은 바로 이러한 경험을 ‘존재의 말함(das Sagen des Seyns)’ 혹은 ‘참말(Sage)’이라고 표현한다. 존재가 우리에게 새롭게 주어지는 사건을 존재가 우리에게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말해주는 사건이라고 비유하는 것이다. “참말의 가리킴 안에서 생생하게 일어나는 것은 고유함이다.”(Heidegger, 2012a: 363)

(3) 인간적 말함: 시인의 언어는 존재의 말함을 뒤따라 일어나는 인간적 말함이다. 시인은 결코 자신이 존재를 앞서서 규정하지 않는다. 고정된 이론을 전제한 상태에서 존재를 분석하고, 예측하고, 평가하는 태도는 시인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존재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기 위해 존재의 말함(참말)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이러한 사람은 존재의 생기를 적절한 언어로 기술하기 위해 사태 자체에 주목하고자 한다. “참말은 말 속에서의 발화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참말을] 뒤따라-말하면서 어떤 말을 말할 수 있기 위해 그가 참말에 속해 있으면서 참말에 귀를 기울이는 한에서만 인간은 말할 수 있을 뿐이다.”(Heidegger, 2012a: 377) 존재에 대한 사유를 망각한 세인들에게는 시인의 모습이 단지 ‘낯선 이’, ‘방랑하는 영혼’, ‘(존재를 상실한 세인들과) 결별한 이’, ‘광인’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존재의 생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존재에 대한 사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인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론은 “지상에서는 낯선 것”(Heidegger, 2012b: 59)으로 여겨지는 시인이야 말로 진정으로 존재를 뒤따라 사유할 줄 아는 자라고 평가하고, 시짓기야 말로 존재의 말함을 뒤따라 말하는 활동이라고 강조한다.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시지음이란, 뒤따라-말함(nach-sagen), 즉 결별한 곳의 정신이 내는 아름다운 소리를 건네받아 뒤따라 말하는 행위이다. 밖으로 발언한다는 의미에서의 말함이 되기 이전에 시지음은 아주 오랫동안 처음부터 귀 기울여 듣는 어떤 하나의 들음으로 비로소 존재한다. 결별한 곳은 이러한 들음을 먼저 자신의 아름다운 소리 속으로 가져오며, 그리하여 아름다운 소리는 말함을 울려 퍼지게 하는데, 이러한 말함 속에서 그 아름다운 소리는 뒤따라 발성된다. 성스러운 밤의 신성한 푸름의 차가운 달빛은 모든 바라봄고가 말함을 철저히 조율하면서 울리게 하고 비추어준다. 이러한 말함의 언어는 이렇게 하여 뒤따라 말하는 언어가 되고, 시가 된다.(Heidegger, 2012b: 98 인용자 강조7)

여기서 시짓기란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론에서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에 대응하는 의의를 지닌다. 현상학자가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통해 사태 자체를 기술하는 과정은 시인이 시짓기를 통해 존재를 뒤따라 사유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둘은 모두 일상의 선입견을 벗어나 대상을 왜곡 없이 바라보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현상학자의 관점을 통해 전개된 하이데거의 전기 존재론과 시인의 관점을 통해 전개된 하이데거의 후기 존재론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근본적으로 연속성을 지닌다. 하이데거가 ‘현상학’이라는 철학적 이름으로 강조한 사유는 이제 ‘시’라는 일상적 이름으로 강조된다. 따라서 1930년대에 일어난 ‘전향’에도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은 여전히 존재에 대한 사유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전향’이란 현존재 분석론에 내재된 주관성을 제거하여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더욱 철저하게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변화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Ⅳ. 신의 관점

우리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인간의 삶의 지평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고 요약해볼 수 있다. 존재가 인간의 삶의 지평 속에서 수없이 다양하고, 풍요롭고, 경이로운 방식으로 주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야 말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즉, 존재란 이미 만들어진 형태로 어딘가에 놓여 있는 기성품과 같은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매 순간 존재자와 관계 맺는 방식이 바로 존재자가 우리의 삶의 지평에서 매 순간 존재하는 방식이다.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은 존재자가 지향적 관계 속에서 주어질 때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지향적 관계 자체를 벗어나서는 존재를 사유하거나, 경험하거나, 말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통찰은 존재가 우리의 주관성에 종속되는 사건인 것처럼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되는 상황에서도 결코 부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주관성이 지향적 관계를 마음대로 구성할 수는 없다는 사실로부터 존재가 지향적 관계를 벗어나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인간의 삶의 지평을 존재의 가능 조건으로 드러내기 위해 의존하고 있는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이 과연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하이데거는 일상의 선입견을 벗어나 존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이러한 현상학적 ‘봄’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다지 성찰하지 않는 것 같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존재의 생기를 바라보는 관점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전제를 자명한 것처럼 전제한 상태에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간과한 세 가지 비판적 질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첫째로, 일상의 선입견에 따른 ‘봄’이란 무엇인가? 둘째로,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에 따른 현상학적 ‘봄’이란 무엇인가? 셋째로, ‘봄’과 현상학적 ‘봄’이란 과연 근본적으로 다른가?

(1) ‘봄’이란 무엇인가?: <그림 1>은 ‘봄’이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방식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주체 S1는 대상 O1로부터 주어지는 자료를 아무런 매개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즉, ‘봄’이란 흔히 우리 앞에 세워져 있는 대상을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시선을 통해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활동이라고 여겨진다. 우리는 ‘봄’이 대상을 가장 직접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봄’이라는 활동이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는 각도, 우리가 서 있는 장소, 우리가 시선을 고정시키는 지점 등 다양한 요인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망각되어버린다. ‘봄’이 일상의 선입견에 따라 이루어지는 활동이라는 사실은 정작 일상의 선입견에 따라 이루어지는 ‘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림 1>

(2) 현상학적 ‘봄’이란 무엇인가?: <그림 2>는 현상학적 ‘봄’이 수행되는 방식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초월론적 주체 S2는 일상적 주체 S1와 일상적 대상 O1 사이의 ‘봄’이 지향적 관계 I를 전제한다는 사실을 바라보고 있다. 즉, 현상학적 ‘봄’이란 일상의 선입견에 따른 ‘봄’에 대한 반성이다. ‘봄’과 현상학적 ‘봄’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이루어진다. ‘봄’은 일상적 대상을 그려내고, 현상학적 ‘봄’은 일상의 선입견에 따른 ‘봄’을 그려낸다. 따라서 두 가지 ‘봄’ 중에서 더욱 근본적인 층위는 현상학적 ‘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의 선입견에 따른 ‘봄’에서는 망각된 주체와 대상 사이의 지향적 관계가 현상학적 ‘봄’에서는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제하고 있는 지향적 관계에 따라 대상이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은 현상학적 ‘봄’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다.


<그림 2>

(3) ‘봄’과 현상학적 ‘봄’이란 과연 근본적으로 다른가?: <그림 3>은 ‘봄’과 현상학적 ‘봄’이 동일한 인식론적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초월론적 주체 S2가 바라보고 있는 지향적 관계 I란 또 다른 대상 O2로 변화한다. 이제 S2I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학적 ‘봄’이란 S2O2 사이에서 일어나는 ‘봄’을 단지 다른 방식으로 기술한 활동으로 밝혀진다. 즉, 현상학적 ‘봄’이 과연 일상의 선입견에 따른 ‘봄’보다 더욱 근본적인 층위에 놓여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현상학적 ‘봄’ 역시 지향적 관계를 대상으로 삼아 수행되고 있는 일종의 ‘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봄’이 현상학적 ‘봄’을 통해 반성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경우 현상학적 ‘봄’이 또 다른 현상학적 ‘봄’을 통해 반성되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봄’을 현상학적 ‘봄’으로 반성하고자 하는 시도 자체가 무한퇴행에 빠지고 만다. 어떠한 현상학적 ‘봄’도 결국 대상이 주체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왜곡 없이 바라보지는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만다. 모든 일상의 선입견을 벗어나 ‘신의 관점’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형이상학적 위치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현상학적 ‘봄’의 무한퇴행을 중지시키기란 불가능하다.


<그림 3>

따라서 우리는 하이데거가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관점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질문해야 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현상학자의 관점’ 혹은 ‘시인의 관점’에서 존재자가 우리에게 존재하는 방식을 왜곡 없이 바라보고자 한다. 그러나 현상학적 ‘봄’조차 결국 일종의 ‘봄’에 지나지 않을 경우 존재의 생기에 대한 순수한 기술은 근본적으로 문제에 직면한다. 존재를 뒤따르는 사유는 ‘봄’이 전제하고 있는 조건을 보기 위해서 현상학적 ‘봄’을 요청해야 하고, 현상학적 ‘봄’이 전제하고 있는 조건을 보기 위해서 또 다른 현상학적 ‘봄’을 요청해야 한다는 무한퇴행에 빠지게 될 뿐이다. 신의 관점이라도 무비판적으로 상정하지 않는 이상, 현상학적 ‘봄’의 무한퇴행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현상학적 ‘봄’의 무한퇴행을 해소할 방법이 과연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제시되고 있는가? 존재를 뒤따르는 사유조차 결국 일상의 선입견에 따른 ‘봄’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시인의 언어에 대한 강조조차 암묵적으로 상정된 신의 관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이러한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지는 다소 의문스럽다. 적어도,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현상학적 ‘봄’의 정당성에 대한 논의에서 완전히 면제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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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degger, M. (2005) 「휴머니즘 서간」, 『이정표』, 제2권, 이선일 옮김, 한길사, 123-182.
Heidegger, M. (2008a) 「현상학에 이르는 나의 길」, 『사유의 사태로』, 문동규·신상희 옮김, 길, 179-193.
Heidegger, M. (2008b) 「시간과 존재」, 『사유의 사태로』, 문동규·신상희 옮김, 길, 21-76.
Heidegger, M. (2012a) 「언어에 이르는 길」, 『언어로의 도상에서』, 신상희 옮김, 나남, 331-381.
Heidegger, M. (2012b) 「詩에서의 언어」, 『언어로의 도상에서』, 신상희 옮김, 나남, 55-113.
Heidegger, M. (2015) 『철학에의 기여』, 이선일 옮김, 새물결.
Husserl, E. (2013)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현상학적 심리학』, 이종훈 옮김, 한길사, 325-355.
Lafont, C. (1999) The Linguistic Turn in Hermeneutic Philosophy, J. Medina (trans.), Cambridge, MA: MIT Press.
Pöggeler, O. (1972) “Heidegger’s Topology of Being”, On Heidegger and Language, J. J. Kockelmans (ed. and trans.), Evanston: Northwestern University Press, 107-146.

  1. 여기서 하이데거는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용어를 ‘심리학적 환원’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후설도 종종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용어를 ‘심리학적 환원’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Husserl, 2013: 330-333 참고).

  2. 이승종은 “[…] 우리는 사태상으로가 아니라 순전히 낱말 발음상으로만 후설 현상학의 한 핵심 용어와 연결되는 것이다.”(Heidegger, 1994: 45)라는 구절을 근거로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환원을 각각 ‘인식론적 환원’과 ‘존재론적 환원’으로 대비시킨다(이승종, 2021: 63-65 참고). 그러나 두 인물이 수행한 현상학적 환원이 서로 “평행선을 달린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다소 지나치다. 가령, 초월론적 현상학에서 ‘의식’이란 결코 대상과 독립된 상태로 남겨져 있는 사적 영역이 아니다. 근대 인식론의 의식 개념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은 후설 현상학의 의식 개념에는 적용될 수 없다. 따라서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환원을 ‘인식론적 환원’과 ‘존재론적 환원’으로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후설은 자신의 초월론적 현상학이 보편적 존재론이라고 주장한다(Husserl, 2013: 349-350 참고).

  3. 이남인은 초월론적 자아에 대한 후설의 분석과 현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분석이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는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론이 일종의 초월론적 현상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이남인, 2004: 451-465 참고).

  4.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각각의 존재자의 의미를 이야기하기 위해 ‘베도이퉁(Bedeutu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존재의 의미를 이야기하기 위해 ‘진(Sin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Pöggeler, 1972: 113 각주 8 참고). 따라서 각각의 존재자가 현존재의 실존적 결단에 따라 지니게 되는 구체적인 의미(“칼은 요리를 하기 위한 도구로서 의미를 지닌다.”)는 ‘베도이퉁’이고, 존재가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조 속에서 지니게 되는 일반적인 의미(“존재는 ‘도래’, ‘기재’, ‘현재’라는 탈자태의 시간화가 이루어지는 사건 속에서 의미를 지닌다.”)는 ‘진’이라고 말할 수 있다.

  5. ‘전회’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투겐트하트를 통해 『후설과 하이데거의 진리개념(Der Wahrheitsbegriff bei Husserl und Heidegger)』에서 처음 제시되었고, 라폰트를 통해 『해석학적 철학에서의 언어적 전회(The Linguistic Turn in Hermeneutic Philosophy)』에서 옹호되었다(Lafont, 1999: 59-67 참고).

  6. ‘에어아이그니스(Ereignis)’라는 단어는 ‘됨’을 의미하는 비분리전철 ‘er’, ‘고유한(eigentlich)’을 의미하는 ‘eig’, ‘상태’를 의미하는 후철 ‘nis’로 구성되어 있다.

  7. 신상희는 독일어 ‘슈프레켄(Sprechen)’과 ‘자겐(Sagen)’을 각각 ‘말함’과 ‘말함’으로 볼드체를 통해 구분하여 번역한다. 그러나 우리의 맥락에서는 반드시 두 용어 사이의 차이를 강조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인용문에서는 원문의 볼드체 구분을 무시하고서 ‘뒤따라(nach)’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부분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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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영미권 현상학 교재들과 이와 연관된 심리철학, 도덕 심리학, 인지 심리학 등등의 자료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과연 현상학이 '과학적 학문'으로 성립 가능한지 언제나 의문이 듭니다.

(1-1) '과학적'이라는 단어가 모호하긴 하지만, 여기서는 제가 의미하는 분석적 혹은 자연과학적-사회과학적이라는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이들 학문의 요건은, 근거를 가지고 이론의 정합성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타인에게 설득한다는 점이 있습니다.

(1-2) 그렇지만 의식에 주어지는 현상을 다루는 현상학에서, 이러한 방법이 가능한가, 전 언제나 회의적이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현상학으로 가능한 것은 비평에서 끝나는 것 아닌가, 라는 것이죠. 우리에게 주어진 현상의 느낌에 대한 기술과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기술. 그 이상을 주장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신의 관점을 인간이 가질 수 있다 말하는 오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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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렇죠. 사실, 저는 1960년 이후 유럽권 철학의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바로 '현상학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선입견을 벗어나려는 현상학의 시도를 비판하면서, 선입견이야 말로 인식의 조건이라는 해석학이 나오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해석학이 (특별히, 가다머의 해석학이) '현상학적 해석학'이었기 때문에, 해석학이 말하는 '선입견'이 어떻게 인식의 조건이 될 수 있는지가 다시 문제시되기도 했죠. 그리고 이 문제가 최근까지도 해석학에서는 투겐트하트나 바티모 같은 가다머 이후 세대의 해석학자들에게는 논쟁거리였고요.

(2) "현상학으로 가능한 것은 비평에서 끝나는 것 아닌가?" 저는 비평의 방법으로서는 현상학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비평'이 단순히 예술 비평뿐만 아니라, 사회 비평, 정치 비평, 문화 비평 같은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비평의 방법을 제시하였다는 것만으로도 현상학은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게다가, (a) 인식의 초월론적 조건을 찾으려는 철학적 작업이 아니라 (b) 인식 대상이 '나에게'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를 기술하려는 비평적 작업으로 현상학을 이해한다면, 현상학에 담긴 다소 과한 인식론적 함의를 많이 약화시킬 수 있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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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선생님, 귀한 글 감사합니다. 다소 비판적 관점에서 질문을 드립니다. 선생님의 후기 하이데거 이해는 이 문단에 축약되어 있다고 보이는데요:

현상학자가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을 통해 사태 자체를 기술하는 과정은 시인이 시짓기를 통해 존재를 뒤따라 사유하는 과정과 다르지 않다. 둘은 모두 일상의 선입견을 벗어나 대상을 왜곡 없이 바라보기 위한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 (전기-후기는) 근본적으로 연속성을 지닌다. [...] ‘전향’에도 현상학적 환원의 방법은 여전히 존재에 대한 사유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처럼 'S와 O(표상된 존재자) 간의 관계'로서 하이데거 존재론을 규정하시는 선생님의 관점에 반해, 신상희 선생은 이렇게 해설하신 바 있습니다:

후기 하이데거의 근본물음은 그의 초기 사유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존재에 대한 물음이지만, 이 물음은 단순히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기 이전에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 즉 존재를 그 자신의 가장 고유한 진리 안에서 사유하는 물음이며 [...] 그에게서 존재와 존재자, 그리고 인간은 주객이 분리된 근대적 사유의 전형적인 패러다임에서처럼 서로 근본적으로 분리된 채 놓여 있는 대립자가 아니다. 존재하는 일체의 것은 이미 존재의 열린 장 속에 공속하며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서 그는 사유한다. ['하이데거의 사방세계와 신']

이는 "존재 = 존재자의 존재방식"이라는 선생님의 일관된 정의와는 분명히 충돌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상희 선생의 위 논문에 따르면, 존재란 S와 O의 "지향관계"가 아니라 세계의 개방적 만남을 이루는 "공속관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후기 하이데거의 핵심으로 평가되는 사방세계(Weltgevierte) 개념을 어떻게 정의하고 바라보시는지요? (선생님의 블로그에서도 사방세계를 언급하신 부분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의 비판은 하이데거 사유의 진정한 귀결이라 할 수 있는, (신상희 선생의 노골적인 표현으로) 소위 "신적인 신의 성스러운 도래"를 간과하신 데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요?

이 글과 이전 서평 글을 포함해 선생님의 여러 하이데거 관련 설명 글들을 꼼꼼히 읽고 해소되지 않는 부분으로 남아 물음을 남겨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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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씹어서 읽겠습니다. 양질의 글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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