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질문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을 자세하게 다루려면 텍스트를 많이 인용하고 해설해야 하지만, (제가 지금 기말 레포트에 치이고 있다 보니, 관련 구절들을 하나하나 다 찾은 다음 말씀드릴 수가 없어서) 여기서는 핵심만 개략적으로 대답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에 등장하는 '사방세계'란 전기 사유의 '세계' 개념과 근본적으로는 동일합니다. 다만, 현존재 자신이 세계를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는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이 전기보다 후기에 이르러 더욱 강조될 뿐입니다. 이와 관련된 몇 가지 문제들을 더 구분해 보자면,
(1)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이란 무엇인가?
흔히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은 '존재자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고, 후기 철학은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이라는 구분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전기의 '존재(Sein)'라는 단어가 후기에는 '존재(Seyn)'라는 독일어 옛 단어로 바뀌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전기와 후기 사이에 마치 급진적인 단절이 있는 것처럼 다소 과장된 어조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전기의 '존재(Sein)' 물음이나 후기의 '존재(Seyn)'에 대한 사유나, 근본적으로 말해지는 현상 자체는 동일합니다. 'Seyn'은 'Sein'에 대응하는 옛 독일어 단어일 뿐이지, 이전의 'Sein'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대상을 의미하는 새로운 용어가 아닙니다. (하이데거는 단어의 그리스적 어원이나 옛 독일어 용법 속에 우리 시대의 존재 경험보다도 더 원초적인 존재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Sein'보다 'Seyn'을 사용하길 선호하는 것일 뿐입니다.) 둘 다 대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의미하는 표현들입니다. "존재=존재 방식"이라고 요약하신 공식 자체는 전기나 후기나 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후기에서는 이 공식이 "Es gibt (그것이 준다=존재한다)"라는 독일어 관용어를 통해 「시간과 존재」나 「언어에 이르는 길」 등에서 더욱 빈번하고 명시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단지, 전기의 존재론에서는 현존재의 실존이 존재자의 존재를 구성하는 조건이라고 주장되었던 반면에, 후기의 존재론에서는 현존재의 실존을 강조한 이전 입장이 일종의 주관성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받을 뿐입니다. 존재 자체를 사유한다는 건, 현존재를 통해 존재를 구성한다는 생각을 포기한다는 의미이지, '존재자의 존재'와는 다른 종류의 '존재 자체'라는 것이 어딘가에 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즉, 핵심은, (a) 존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방식을 기술해야 한다는 입장과 (b) 현존재가 존재를 구성하는 방식을 기술해야 한다는 입장이 서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전기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론은 자주 (a)와 (b)를 혼동하였지만, 후기 하이데거의 사유는 (a)로부터 (b)가 도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는 점이 '전회'에서 결정적으로 주목되어야 하는 내용입니다.
참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존재=존재 방식'이라는 공식은 하이데거 연구자들에게 (특별히, 영어권 연구자들에게) 굉장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 가령, 샤츠키(T. R. Schatzki)는 "Early Heidegger on Being, The Clearing, and Realism"이라는 논문에서 존재자의 존재를 "사람들에 대한 존재자의 가능한 현시의 양태(the mode of possible manifestation of entities to people)"라고 말합니다. '객체지향 존재론'으로 최근에 국내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하먼(G. Harman) 역시 Heidegger Explained라는 단행본에서 "Es gibt"라는 독일어 관용어 표현을 강조하면서 '존재'라는 개념이 일종의 '주어짐'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죠. 비슷한 맥락에서, 드레이퍼스(H. Dreyfus)와 호그런드(J. Haugeland)는 "Husserl and Heidegger: Philosophy's Last Stand"라는 논문에서 우리 자신과 독립된 형이상학적 '본질(essence)' 개념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야 말로 하이데거의 가장 큰 철학적 공헌이라고 강조합니다.
(2) '공속관계'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신상희 선생님이 '공속관계'라고 표현하신 것이 바로 현상학이 말하는 '지향적 관계'입니다. '지향적 관계'라는 개념은 "주객이 분리된 근대적 사유의 전형적인 패러다임"를 비판하기 위해 제시된 개념입니다. 둘을 서로 대비되는 것처럼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지향적 관계는 주객 분리를 전제하고, 공속관계는 주객 분리를 극복한다고 받아들이시는 건 큰 오해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주객 분리'라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제가 종종 사적인 자리에서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지만,) '주객 분리'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이란 <앤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인류 보완 계획'처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LCL 용액 속에 녹아들어가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과의 관계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인 대상이란 (LCL 용액이 굳이 지구를 뒤덮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애초에 존재한 적조차 없다는 것이 '공속관계'나 '지향적 관계'라는 개념이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가령, '칼'이라는 대상은 누군가에게는 '요리 도구'로 존재하고, 누군가에게는 '범행 도구'로 존재합니다. '우리'가 칼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 '칼'이라는 대상이 존재하는 방식이 매 순간 달라지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와 칼이 맺고 있는 관계가 '지향적 관계'이고 '공속관계'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미(immer schon) 이 관계 속에 들어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와의 관계에서 완전히 분리된 '칼 그 자체'나 '칼의 형이상학적 본질'이란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 하이데거의 지적입니다. 그런 '사물 자체'나 '본질'이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철학적 입장은, "존재한다"라는 술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제대로 생각해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드레이퍼스와 호그런드가 하이데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라고 평가하는 내용이고 말입니다.)
(3) '신적인 신의 성스러운 도래'란 무엇인가?
하이데거에게서 '신'이나 '성스러움' 같은 표현은 결코 신비적이거나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용어는 단지 '생기(Ereignis)'의 경험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즉, 우리 자신이 미리 설정해 놓은 이론적 틀 속에 세계가 가두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래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란 매 순간 우리에게 새로운 면모로 주어진다는 사실이 바로 '성스러운' 경험이고, '신적'인 경험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코레트(E. Coreth)가 「마틴 하이데거에서 ‘존재의 문제’와 ‘신의 문제’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대단히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와 관련해서 글을 써둔 것이 있습니다. 바디우의 하이데거 비판을 재비판하는 내용입니다.
하나가 없는 다수를 사유하기: 알랭 바디우, 『일시적 존재론』 제1장 해설 및 평가
여기서 ‘신의 회귀’란 결코 구원에 대한 막연한 동경 따위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어떠한 종교적, 신학적, 신비적 희망도 함의하고 있지 않다. 다만, 존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개시하는 ‘사건(Ereignis)’에서 우리가 ‘성스러움(Heilige)’과 ‘신성(Gottheit)’을 경험한다고 강조할 뿐이다. 즉, 신의 회귀를 기다리는 태도란 존재가 우리에게 매 순간 새롭게 개시될 수 있도록 사유를 열어두는 자세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존재를 ‘하나’와 ‘다수’ 중 어느 쪽으로도 미리 규정할 필요가 없다.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은 어떠한 가정도 없이 존재에 대해 개방된 태도만으로 충분히 성취된다. ‘하나’를 가정하는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다수’를 가정하는 바디우의 존재론은 모두 존재에 대한 개방된 태도에 철저하게 머무르지 못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4) '사방세계'란 무엇인가?
후기 사유의 '사방세계'와 전기 사유의 '세계'는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두 가지는 모두 현상학에서 '생활세계(Lebenswelt)'라고 일컬어지는 개념의 하이데거적 표현 방식입니다. 다만, 후기 사유에서는 세계의 중심에 현존재가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즉, 전기 사유에서는 세계가 '존재자들의 지시연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지시연관은 '사용사태'에 따라 맺어져 있고, 그 사용사태는 결국 세계의 중심에 있는 존재자인 '현존재'를 가리켜 보이고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현존재가 존재자들 사이의 의미 관계 총체를 규정하는 자라는 거죠. 그러나 후기 사유에서 현존재는 더 이상 세계의 중심에 있는 특별한 존재자가 아닙니다. 현존재는 땅, 하늘, 신, 인간이라는 네 가지 방역 중 하나일 뿐인 거죠. 여기서 각각의 방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하이데거의 텍스트를 뒤져가면서 여러 가지 해설을 제시할 수도 있지만, 사실 제가 보기에 그 문제는 후기 사유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 그래서 인간은 단지 존재의 생기에 응답하는 자일 뿐이라는 사실이 후기 사유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5) 첨언
쓰고 보니 굉장히 길어졌는데, 솔직히 말하면 "하이데거의 후기 사유는 전기 존재론과는 달리 신비롭고 심오한 뭔가가 있어!"라는 주장이 저에게는 일종의 발작 버튼(?)입니다;;; 제가 이런 식의 주장을 굉장히 싫어해서 조금 발작을 하고 말았네요. 사실, 전기 하이데거와 후기 하이데거 사이의 차이에 대한 논의는 하이데거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적인 주제이기는 합니다. 가령, 티슬턴은 이 문제를 둘러싼 학자들 사이의 입장 차이를 이렇게 요약 정리하기도 하죠.
2015년 1학기 특별 주제: 존재와 언어, 마르틴 하이데거, 시간에서 언어로(1)
마르조리 그린(Marjorie Grene):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은 날카롭게 대비된다. 전기 사상이 철학적으로 진정한 가치를 지니며 후기 사상은 무가치하다(M. Grene, Martin Heidegger, p. 117.).
하인리히 오트(Heinrich Ott):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은 날카롭게 대비된다. 전기 사상은 제한된 견해인 반면 후기 사상은 훨씬 통찰력 있다(H. Ott,n, Denken und Sein, Der Weg Martin Heideggers und der Weg der Theologie; 또는 Geschichte und Heilsgeschichte in der Theologie Rudolf Bultmann).
베르너 브록(Werner Brock):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 사이에 견해의 변화는 없다(W. Brock, An Account of ‘The Four Essays’ in Martin Heidegger, p. 134).
칼 뢰비트(Karl Lowith):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은 완전히 다르다. 전기 사상은 실존주의적인 성격이지만, 후기 사상은 신학적이다. 하이데거를 충실히 따른다면 그의 후기 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K. Lowith, Heidegger, Denker in durftiger Zeit, p. 7.).
윌리엄 리차드슨(William Richardson):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 사이에 변화가 있다. 하지만 주제가 되는 문제는 동일하다(W.J. Richardson, Heidegger: Through Phenomenology to Thought, p. xxii.).
루트비히 란트그레베(Ludwig Landgrebe): 전기 사상에서 후기 사상으로 전회하면서 하이데거 철학은 모호하고 비의적(秘儀的)으로 변했다(L. Landgrebe, The Study of Philosophy in Germany: A Reply to Walter Cerf, pp. 127-131.).
오토 푀겔러(Otto Poggeler): 전기 사상에서 후기 사상으로 발전하면서 하이데거 철학의 강조점이 실존적 분석에서 존재의 본질로 옮겨졌다(O. Poggeler, Der Denkweg Martin Heidegger, p. 176.)
마이클 겔빈(Michael Gelven): 전기 사상에서도 존재론에 대한 강조가 꾸준히 증가하며,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 사이에는 종류의 차이보다는 존재론적 방향설정에서 정도의 차이가 나타난다(M. Gelven, A Commentary on Heideggers, pp. 137-142.).
제시 그레이(Jesse Glay): 전기 사상에서 후기 사상으로 발전하면서 하이데거 철학의 강조점이 인간실존에서 자연에로 옮겨간다(J.G. Glay, Heidegger's Course: From Human Existence to Nature).
존 마쿼리(John Macquarrie): 첫째, 전기 사상에서 후기 사상으로의 ‘전회’는 ‘역전(reversal)’이 아니며, 하이데거는 후기의 문제들을 처음부터 의식하고 있었다. 둘째, 전기 사상과 후기 사상이 하나의 전체를 이루므로 분리시킬 수 없다(J. Macquarrie, Heidegger’s Earlier and Later Work Compared, pp. 3-16.).
예전에 하이데거 철학의 '전회'라는 주제에 몰두했는데, 저는 전기와 후기 사이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물론, 현존재의 주관성이 더 이상 강조되지 않는다는 건 큰 변화가 맞고, 또 이 점에서 후기 사유가 전기 사유보다 더 발전되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마치 후기 하이데거에게는 우리의 논리를 뛰어넘는(?), 신비적이고(?), 신적인(?), 무엇인가 심오한 것(?)이 있다는 식의 해설을 저는 부정합니다. 반대로, 전기와 달리 후기 하이데거가 혼자만의 망상(?)에 빠졌다든가, 더 이상 엄밀한 사유(?)를 진행하지 않는다든가, 문학적인 길(?)로 가버렸다든가 하는 식의 해설도 부정하고요. 전기와 후기 하이데거의 사유는 모두 일관된 현상학적 작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