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존 설(J. Searle)의 심리철학을 전공하시는 박사과정 J 선생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나: 그러고 보니, 설의 논의들은 이곳저곳에서 자주 접하였지만, 정작 저는 설의 글을 제대로 읽어본 것이 거의 없네요. 설의 심리철학을 살펴보려면 어떤 글을 읽는 게 좋을까요?
J: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있는 Mind가 심리철학 개론서로 좋아요. 그런데 이 책이 중립적인 관점에서 쓰인 개론서는 아니에요. 설 본인의 관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어서요.
나: 오히려 좋네요! 정보를 병렬적으로 나열하기만 한 책은 재미가 없잖아요!
철학을 처음 공부하던 시절에는 가치 중립적인 관점에서 각각의 입장들을 소개한 개론서들이 좋았습니다. 저자의 관점이 강하게 반영된 글들은, 뭐랄까, '순수하지 않다'고 생각해서요. 그런데 어느 순간 생각이 많이 바뀌었네요.
첫째로, 순수하게 객관적인 관점에서 쓰인 요약이나 논평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종류의 요약은 주어진 전체 텍스트에서 몇 가지 강조점들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죠. 문제는 무엇이 '강조점'이 되어야 하는지를 정하는 기준이 언제나 요약하는 사람의 입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텍스트를 읽고 요약하더라도, 어느 내용에 강조점을 두는지에 따라 서로 다른 요약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죠. 하물며, 논평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요.
둘째로, 저자의 관점이 반영된 글들이 순수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저자의 학문적 기여를 폄하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철학적 논의라는 것은 끊임없이 비판적 관점을 제시하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발전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관점'이 들어간 텍스트를 마치 객관성을 상실한 텍스트인 것처럼 여긴다면, 그건 결국 해당 텍스트의 저자가 철학의 발전에 기여할 만한 실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꼴이 되더라고요. "글에다가 너의 관점을 집어넣는다고? 너가 무슨 칸트나 헤겔 같은 거인이라도 되는 줄 아니? 나는 거인들에게 관심이 있는 거지, 너의 관점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너의 알량한 관점은 철학사에 아무것도 더해주지 못하거든." 같은 식의 태도를 저 스스로가 암묵적으로 숨기고 있었던 것이 아닌지에 대해 어느 순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저자의 관점을 폄하하는 태도는 사실 그 관점을 제대로 평가할 만한 안목이 부족했던 제 자신의 무능력함을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공부를 처음 하는 사람일수록 무엇이 중요한 논의이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 논의인지, 무엇이 새로운 논의이고 무엇이 진부한 논의인지, 무엇이 일반적인 논의이고 무엇이 개성적인 논의인지 구별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다 보니, 아무리 흥미롭고 독창적인 관점이 제시되어도, 그 관점을 객관적인 정보에 불필요하게 뒤따르는 '부가물' 정도로만 생각하고 무시해버리는 거죠. 그동안 저자의 관점이 반영된 글을 제가 순수하지 않다고 보았던 것도, 사실 이렇게 제 부족한 안목과 무능력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아마 저자의 '관점'이나 '개성'을 순수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태도가 단순히 저 혼자에게만 내재되어 있던 태도는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저는 철학을 공부하면서 이런 태도를 지닌 분들을 꽤 많이 접하였습니다. 저와 제 지인분들은 종종 '원전독대'라는 말로 이런 태도를 표현하고는 했는데, 한 마디로, 칸트나 헤겔 등의 고귀한 원전을 기존 연구들이 왜곡하였기 때문에, 아무런 선행연구에 의존하지 않고서 혼자 청정한(?) 눈으로 원전을 독대하여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는 식의 태도였습니다. 물론, 때로는 이런 식의 원전 연구도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저는 많은 경우 이런 태도가 생산적인 논의를 가로막는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고전'이라고 인정된 텍스트 이외에는 어떤 텍스트의 가치도 인정하지 못하게 해버려서, 철학이 끊임없이 제자리 걸음만 걷도록 만드니까요. DBpia 등에 끊임없이 논문이 쌓이는데도, 그 논문들이 아무도 읽지 않는 데이터조각으로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