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학생은 2차문헌을 (얼마나) 봐야 하는가?

얼마전 @YOUN 님의 글에 등장한 “원전독대”라는 단어를 보고, 예전부터 묵혀두었던 개인적인 물음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제 개인적인 경험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학부과정을 국내 철학과에서 마쳤는데요. 학부과정 내내 거의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2차문헌을 보지말고 원전을 직접 보아라”. 아마 이것은 비단 제 경험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저는 원전을 보라는 말에 당연히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2차문헌을 보고 피상적으로 이해할 바에 원전을 직접 보고 대가의 문장과 사유의 흐름을 느껴보는 것이 그 자체로 매우 권장할만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문제는, 원전을 등한시 하지 않으면서도 지적호기심이 불타올라 2차문헌을 탐독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향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철학 공부에 매우 열정적인 학생들이죠. 이 열정적인 학생들에게도 “2차문헌을 보지말고 원전을 직접 보아라”라는 말이 해당되는 것일까요? 만약 해당된다면, 이건 약간 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원전을 아예 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원전과 2차문헌을 함께 읽으며 원전에 대한 이해를 깊고 풍부하게 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을 막을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러나 적어도 제 경험에 따르면, (적어도 몇몇) 교수님들은 학생들의 열정과 관계 없이 “2차문헌을 보지말고 원전을 직접 보아라”라는 준칙을 모두에게 고수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대부분 비슷했습니다. 2차문헌보다는 원전을 마주해야 “자신만의 문제의식”과 “자기 스스로 생각하기”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궁금증이 남습니다. 2차문헌을 통해서 원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게 된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만의 문제의식”도 더 유의미하게 가질 수 있는 것 아닌가? 기껏 “자신만의 문제의식”이랍시고 생각해냈던 주제가, 알고보니 2차문헌에서는 거론할 가치도 없는 사이비 문제라면 어찌되는가?

한 가지 에피소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학부생 초기에 스피노자 수업에서 발제를 맡은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열정 넘치는 철학도(!)였기 때문에, 단지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하는 것을 넘어서, 프랑스 스피노자 연구의 사조들 (게루, 마트롱, 들뢰즈, 마슈레, 발리바르 등등)을 적극 참조하고 발제에 인용했습니다. 내심 “교수님 어때요?”하는 심정으로 열심히 준비했지만, 돌아온 것은 교수님의 의외로 냉담한 반응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저를 직접적으로 질타를 하시진 않았지만 2차문헌보다는 원전독대의 중요성을 (위에 언급한 이유에서) 강조한 뒤, 한 학기 수업동안 프랑스 스피노자 2차문헌에 대한 논의를 배제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것을 두고 분석철학에 대해서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라고 한정지을 필요는 없겠습니다. 크립키나 롤스 등의 현대 영미철학의 거장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후 같은 교수님의 다른 수업에서, 이번에는 2차문헌을 싹 배제하고 원전을 중심으로 발제를 했더니 교수님이 아주 칭찬을 하시더군요. 이외에도 2차문헌의 논의를 섞은 에세이/답안지보다, 2차문헌을 전혀 섞지 않고 (한편으로 제 스스로에게는 헛소리로 보이는) 저 자신만의 독창적인 의견을 개진했을 때 더 좋은 평가와 반응을 받은 적이 거의 대부분이었습니다.

기이한 것은, 석사에 진입했더니 여기서는 2차문헌을 배제하는 것이 academic writing으로서 결격사유더군요. 페이퍼 등을 쓸 때 2차문헌을 참고하지 않는 것은 석사과정에서는 이제 감점요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참고로 저는 학술적인 글들은 2차문헌을 적극적으로 참조해야 한다는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는 편입니다.) 저는 해외에서 석사를 마쳤습니다만, 아마 국내 석사과정도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학부->석사 에서의 이러한 급격한 온도변화가 많은 철학과 석사생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잡설이 길었습니다만, 요지는 2차문헌을 참조하는 것과 자신의 문제의식을 가지는 것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있는 듯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긴장이 어떤 측면에서는 상당히 기이해 보이기도 합니다. 자신만의 문제의식이란 것은 비단 철학과 뿐만 아니라 타 학과에서도 후학을 양성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일텐데 말이죠. 그런데 예컨대 물리학과에서 학부생들의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해 “2차문헌을 멀리하고 (가령) 아인슈타인 혹은 교과서와 독대하라!”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반면 철학과에서는 학부생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대학원생에게 요구하는 것 사이에, 심지어 대학원생에게 요구하는 것 사이에서도, 상당한 차이 내지 긴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교수님들은 왜 “2차문헌을 보지말고 원전을 직접 보아라”말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제가 지금에 이르러 가지게 된 (잠정적) 결론은 이렇습니다:

  1. 학부생 (어찌보면 석사생에게도) 2차문헌을 보는 것은 우선 “긴급하지 않다”. 만약 너가 참신하고, 너가 보기에 긴급한, 너만의 고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너는 후에 자연스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차 문헌을 참고할 것이고, 이 문제의식은 너만의 고유한 색깔을 담고 있으므로 너는 방대한 2차문헌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쉽게 자기화할 수 있을 것이다.
  2. 반면 너만의 고유한 문제의식이 아닌, 2차문헌에서의 중요한 논쟁적 주제를 바탕으로 탐구를 시작한다면, 너는 방대한 2차 문헌의 늪에서 끝내 허우적 거리다 사라질 것이다. 대다수의 논쟁적인 주제들은 애초에 논쟁적이고 고전적인 이유가 있다. 논쟁의 양 측면, Pro와 Contra 모두 상당한 철학적/텍스트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는 이 방대한 2차 문헌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시간만 보내다가 어느덧 “내가 이 문제를 왜 시작했더라?”라며 철학연구의 이유 자체를 상실할지 모른다. 설령 논문을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논문은 (동일 주제를 다루는, 매년 쏟아져 나오는 다른 논문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움과 독창성을 결여하게 될 것이다.
  3. 따라서 "긴급한 것"은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찾는 것이지 2차 문헌에서의 논의를 캐치하고 팔로잉하는 것이 아니다. 후자는 전자가 이루어진 뒤에 해도 늦지 않다. 같은 이유로, 학부생이더라도 2차 문헌을 봐도 된다. 그러나 2차 문헌이 주는 명료함의 착시에 빠져 원전과 문제의식을 등한시할 경우, 결국 길을 잃게 된다. 이 유혹이 너무 달콤하므로, 차라리 학부시절에는 2차문헌을 보지 말고 원전과 씨름할 것을 권한다.

물론 이 잠정적 결론이 실천적으로 명확한 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다음과 같이 반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골방에 틀어박혀 원전과 씨름하다가, 내가 가진 이 문제의식이라는 것이 사이비철학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문제의식 가지려고 원전과 씨름하며 학부 4년을 보냈더니, 이것이 철학의 기초도 결여한 사이비 문제의식이었다면?”.

물론 이러한 참사를 막기 위해서는 교수님들 및 철학과 동료들과 서로 의견을 교류하며 토론하기를 권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2차문헌을 동료/교수님 삼아서 공부하는 것과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요? 여전히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의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남겨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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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여기서 일단 철학을 입문할 땐, 처음부터 비판적으로 글을 읽으려하기보단, 최대한 그 철학자의 편에 서서 읽어야 한다는 내용을 본적 있습니다.
개인적 경험과 더불어 심히 공감이 갔고요.

수업 교재인 2차 문헌이 아닌이상 페이퍼를 쓸 때, 직접 스스로 고른 문헌들은 취사선택을 알게 모르게 저지르게 되는 것이 있는 것 같았어요. 느낌상 사실 많이 그랬긴 했습니다. 흐린 눈 하고 거른 행위 같은걸요.

갠적으로는 학부때 원전 중심으로 읽으라 하는건 안 그래도 복잡한 철학 문장을 하필 내 생각과 다를 땐 왠지 모르게 반감이 들게 되고 그래서 일단 글 자체를 받아들이지못해 독해 자체가 진척이 안되는 경험을 종종 했었는데,

물론 개인의 성향이며 똥고집 때문이라면 할말은 없겠다만, 일종의 훈련인 셈인걸로 전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근데 실시간으로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사실 제가 말한 문제는 굳이 원전이 아니고 이차문헌으로 수업해도 이 문제는 마찬가지긴 해서 왜 이차문헌이 아니라 원전을 강조하는가에 대한 직접적 대답은 안되겠네요.

근데 어차피 원전이나 이차문헌이나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면 그래도 대가의 원전이란게 대게 이차문헌보단 이게 권위의 측면에 기댄 대답이긴하다만 그나마 좀 더 공신력있는 글을 읽는것이니 어찌되었건 양적??인 이득은 있는 셈은 되겠네요 ㅋㅋ

근데 이 논지에 따르면 결국 충분히 훈련되면 원전을 무시해도 무방하다는 의견에 대해 딱히 반박은 못해서.. 제가 학부 졸업한지 얼마 안되서 당장은 잘 모르겠다는 모호한 결론으로 귀결이 결국 되네요 ㅠㅜ

암튼 왜인지 명확히 정당화는 못하겠다만, 철학하는 훈련으로써 원전을 왜 읽는지는 공감을하는게 전 이런 경험을 가져서 인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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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는 1차문헌을 읽어서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말도 하나의 신화같습니다. 결국 태어나서 처음 읽는 텍스트가 1차문헌이 아닌 이상 결국 이 텍스트, 저 텍스트 뒤섞이는데, 그것만 읽어서 생긴 문제의식이 자기만의 것인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독창성이라는 것은 역사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으니 2차문헌을 포함한 연구사를 더 신경써야 나올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고요.

오히려 하나의 텍스트에 대한 밀도 있는 집중의 경험을 얻는다는 측면에서 학부에서 권장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복잡한 텍스트에서 벗어나서 정돈된 2차텍스트를 보는 순간 복잡한 텍스트와는 유리된 채로 논지만 손에 얻게되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포인트를 잡는 능력의 향상은 1차문헌과의 독대로만 향상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로제 샤르티에(Roger Chartier)라는 대가급 역사가는 자크 데리다와의 라디오 대담을 위해서 데리다 사상을 안내한 초등학생용 만화를 봤다고 얘기를 하더군요. 자기는 그 전까지는 데리다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면서요. (<사회학자와 역사학자>, 2019.)
여러 가지 조건이 있었겠지만 제 말과는 또 다른 얘기가 있을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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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대가 자신이 내세우는 입장과 관점에 읽는 이가 지나치게 매몰되지 않기 위해서, 즉, 관점의 relativization을 위해서라면, 이차 문헌을 읽는 게 많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대가들의 말도 오늘날 구도에서 돌이켜보면 뻘(?)소리도 많을 것이구요. 원전을 어떤 성전 처럼 여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위 말하는 대가들, 이들이 훌륭한 학자이고 이론가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유가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절대적 진리가를 지닌 그러한 것은 결코 아니니까요. 그런데 원전만 읽으면 자칫 이들의 말을 은연 중에 숭배하는 경향으로 빠지기도 쉽다고 생각해요.
맑스나 헤겔이나 하이데거 같은 대가의 글도, 무엇보다 이들의 본래 의도를 편견 없이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하는 것이 읽는 이에게 일차적 우선 순위가 되겠지만, 이러한 저자들의 기본 논지를 바르게 파악한 연후에는, 이제 (대가 자신의 의도나 목적과는 다를) 다른 관점들에서 이 대가들의 글을 바라볼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대가들의 사유는 다른 이들에게 풍부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고, 또 생산적 비판을 통해 또 다른 사유들을 낳아 오기도 했지 않겠어요. 철학과 학생도 이 과정의 참여자로서, 이차 문헌을 많이 읽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철학과 학생이 리포트나 논문을 쓸 경우에, 무작정 이차 문헌들을 많이 읽는다고 그가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핵심 논의가 집중 없이 중구난방으로 갈 위험도 있겠지요. 그저 내가 이런 저런 논의들을 많이 안다는 것을 과시하는 ego-shooting이 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첫 번째는, 해당 원전을 읽고 자신의 고유한 문제 의식을 찾는 게 1번인 듯해요. 그것이 저자의 논지에 대한 동의이든 비판이든요. 이미 Herb님이 잘 정리해 주셨듯이요. 자신의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제 이 문제 의식을 뒷받침해줄 수 있을 관련 이차 문헌들을 찾아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애초에 원전보다 이차 문헌들의 논의들만 계속 살펴 보면서 거기서 문제 의식을 찾으려고 하면, 뭐랄까 결국 거기 덧붙여서 제 자신이 할 말 쓸 말이 이미 한정되는 것 같아요. 그보다는 원전을 읽으면서 찾은 내 고유 문제 의식이 출발점이 되고, 이것을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 학계에 있는 논의들을 또 참조하는, 이차 문헌을 말 그대로 세컨드, 보충이자 보조 역할로 쓰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예컨대, 제게 하나의 선명한 문제 의식이 있다고 하고. 그런데 이걸 학계의 최근 논의 동향과 관련 짓는다든가, 어떤 구체적 이론적 프레임 안에서 위치시켜 볼 깜냥은 제가 아직 안 될 수 있잖아요. 그럴 경우, 이차 문헌이나 아니면 원전 연구가들의 논의와 프레임을 빌려와서 제 문제 의식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전개 및 발전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몇 년 전에, 세미나에 선생님이 석사 졸업생 한 명을 데려와서, 이 친구가 석사 논문에 레퍼런스를 80개를 썼다고 자랑하시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레퍼런스는 무조건 많으면 좋은가 보다 했지요. 그런데 이번에 그 선생님께 상담 받으러 갔더니, 이차 문헌은 '이차'일 뿐이니까 하면서, 너의 분석과 논의를 잘 보여주고 그리고 이차 문헌은 이거랑 이거랑만 참고해서 쓰라고 딱 줄여 주시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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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경우, 수업에서 교수님이 2차문헌을 읽지 못하게 하신 적은 없었어요. 다만, 제가 수강했던 대부분의 수업이 1차 문헌 강독에 집중하기는 했어요. 또 확실히, (@PSB 님이 댓글에서 써주신 것처럼) 1차 문헌이나 1차 문헌에 버금가는 연구서 등을 다소 숭배하는 경향이 주위에 좀 있었기도 하고요. 확실히, 저는 학부 시절까지는 일단 1차 문헌을 충실하게 독해하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제 자신도 그렇게 훈련받았고, 그런 훈련을 좋아하기도 했고, 또 그런 훈련에서 얻은 성과도 꽤 많았어요. 문제는 대학원에 올라와서까지 1차 문헌을 다소 과하게 신성시하는 분들이 많다는 점... 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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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 님이 말씀해주신 원전을 읽어야하는 이유에 전체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래서 반론들에 조금 답을 해보자면 이렇습니다.

만일 제대로 된 철학 커리큘럼을 밟지 않는다면 충분히 생길 수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하지만 결국 철학 전공을 하게 된다면, 철학의 기초를 쌓으면서 원전을 읽기 때문에 말씀하신 사이비 문제는 나올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사이비적 문제의식을 한 두 개는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철학과 학생은 단 한 두가지의 문제의식만 갖고 원전을 읽지는 않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의식을 갖고 그것을 전개시키겠지요. 그리고 2차문헌을 읽으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여러가지 생각 중 어떤 것이 학계에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찾아나가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교육을 받은 좋은 철학과 학생이라면, 자신이 제기한 문제의식 모두가 사이비일 확률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이 경우에는 2차문헌이 정확히 뭔지 생각을 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단어 자체만 보면 우리는 2차문헌이 마치 원전이 아닌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2차 문헌을 읽지 말고 원전을 읽어라"라고 말을 할 때, 우리는 '2차문헌'을 단순히 '원전이 아닌 것'이 아닌 '원전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전개시킨 글'이라고 해석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교수님들 및 동료들과의 토론을 생각해봅시다. 아마 토론을 할 때 전 제 주장을 전개시키고 교수님들 및 동료들의 의견을 듣고 그에 맞춰서 저도 답을 하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때 저는 저의 주장에 대해서 토론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저의 주장에 대한 반론들을 듣고, 저의 주장를 변호하는 것이지요. 이는 2차문헌을 읽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2차문헌은, 앞서 말했듯이, 다른 사람의 주장을 이해하고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과의 토론과 2차문헌의 독해는 구분돼야할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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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난 2차문헌은 아예 손도 안 대고 원전만 읽을거야!" 라는 분들을 칭하는 것이라면 동의합니다. 어찌됐든 수년간 연구에 발전이 있어왔고, 그 발전에 맞춰서 학계에 기여를 해야되는 것이니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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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조금만 더 보충 설명을 하자면, 저는 1차 문헌을 '신성시'하는 여러 가지 케이스를 봤습니다. (a) 말 그대로 2차 문헌을 등한시하면서 원전만 읽으려 하는 케이스, (b) 원전과 몇몇 고전적 2차 문헌 이외의 다른 모든 연구들을 무시하는 케이스, (c) 직접적으로 2차 문헌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논문에 인용하기는 꺼려하는 케이스, (d) 유럽권 학자가 영어권 2차 문헌을 무시하거나, 영어권 학자가 유럽권 2차 문헌을 무시하거나, 유학파 학자가 국내 2차 문헌을 무시하는 케이스, (e) 1차 문헌을 1차 문헌의 표현과 문장으로만 해설하려는 케이스, (f) 원문 독해를 강조하면서 번역어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무시하는 케이스... 할말하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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