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에 대한 통념

###이 질문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같은 질문이지만, 서강올빼미 내에서의 카테고리 분류가 잘 작동하도록, 서로 상이한 주제를 갖는 질문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키에르케고르를 공부하며 생각한 점이 과연 옳은 방향인지, 또 서강올빼미 회원분들의 생각을 여쭙고 싶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사상)에서 "용어"는 상당히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부분인것 같습니다.

가령, 저는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키에르케고르 내에서
"주관적", "나에게 진리인 진리" 등을 통해 키에르케고르를 "주관주의자, 또는 상대주의자라고 생각했으며,
"객관적 진리", 그리고 "부조리"와 "절대적 역설을 각각 "마음과 독립적인 의미", "논리적으로 모순된것" 쯤으로 생각했었습니다.

  1. 하지만 키에르케고르가 쇼펜하우어 (정확하진 않지만, 아들러까지도.) 등의 여러 사상가들을 비판할때, 오히려 키에르케고르가 비모순율을 인정하고, 이에 입각하여 비판을 전개해나감에 있어서 논리적 일관성의 부족을 근거로 삼는단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 즉 신에대해서는 이러한 비판을 하지 않습니다. 단지 책에 입각하여 해석하기로는,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는 비합리적인 믿음"과 "이성보다 높은 진리"를 명확히 구분하는것 같습니다. 또한 전적으로 저의 독해법에 있어서는 키에르케고르가 의도한 "부조리"란 후자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 불분명합니다.. 비합리적인 믿음과 이성보다 높은 진리를 구분한다면, 정말로 나의 믿음은, 완전히 합리적이지 않은것인지 헷갈립니다.
    즉, 믿음이 증명가능한것인지, 전적으로 의지에 의존하는 것인지에 대한 딜레마는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여쭙고 싶습니다.

  2. 어쩌면 첫번째 질문에 있어서 해답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키에르케고르의 "믿음의 도약, 신앙의 도약" 에서 임의적이거나, 상대주의적이거나, 의지에 의존한 해명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키에르케고르의 도약은 개인과 신적 권위 (또는 그러한 현상)과 마주함으로 이뤄집니다. (성경, 성령의 증거, 예수 그리스도 등등요..) 특히 키에르케고르가 그리스도와 동시대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성은 우리의 현상과의 관계를 불확정적으로 남겨두지만, 의지는 임의적으로 약동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도약은 신의 사랑을 받아드리는 이에게 그의 초이성적 인식이 비추어질때 발생합니다. 즉, 도약이라는 개념에 있어서 제가 지금까지 접해온 여러 키에르케고르 해설이 의지에 너무나도 큰 비중을 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계시 사실 자체가 이성적으로 증명될수 없다는 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역설적이란 수사를 사용한것 같습니다.

  3. 그렇다면 키에르케고르는 종교 상대주의자인가요?
    종교적 실존에서 종교성 A (자기 심화의 일환), 종교성 B (역설적 종교성)을 구분하고 후자의 중요성을 천명한것을 생각해본다면 그의 논리에서 모든 종교를 동등하게 유효하게 보는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안티클리마쿠스가 그리스도를 부정하는것, 자신이 주장한 존재가 아니라는것은 죄의 최고 강화라고 부르지만, 그부분은 과연 왜 그러한지 궁금합니다!


제가 철학에 대해서 다른 사람에게 질문을 함이 처음이라 매우 두서 없는 글이고, 가독성도 낮으며, 주제도 불투명합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읽어주신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여기에서 답변주신 내용을 학교 보고서에 참고해도 될까요...?

2개의 좋아요

(1) 키에르케고어는 비모순율을 인정하는가?

네, 키에르케고어는 논리학의 비모순율에 대해 특별히 비판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이 점은 헤겔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키에르케고어는 글을 꽤나 체계적으로 쓰는 편에 속합니다. 특별히, 『죽음에 이르는 병』과 같은 작품은 굉장히 체계적이죠.

다만, 키에르케고어가 다른 철학자들을 '비모순율'에 입각하여 비판한다는 주장은 다소 어색합니다. 케이스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키에르케고어는 특정한 사상이 논리적인지 논리적이지 않은지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습니다. 단지 우리 삶 속에 존재하는, 보편화될 수 없고, 예외적이고, 실존적이고, 개별적인 요소들을 특정한 사상이 제대로 포착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해 주목하여 주로 비판을 수행하죠.

(2) '논리/비논리' 혹은 '합리성/비합리성'이라는 도식이 적절한가?

위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저는 키에르케고어가 '논리적 모순'에 특별히 관심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삶에는 보편적 법칙으로 설명되거나 포착될 수 없는 실존적 진리가 있다. 그러나 헤겔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존 철학자들은 세상을 보편적 법칙으로 설명하려 한 나머지 실존적 진리를 놓쳐버렸다."

가 키에르케고어의 비판점이죠. 물론, 이런 실존적 진리를 '논리적 모순을 포함하는 비합리적 믿음'이나 '이성보다 높은 진리'라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굳이 여기서 '논리/비논리'와 '합리성/비합리성'이라는 대립을 강조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이 구분이 자칫 쟁점을 흐리게 만들 수도 있는 것 같아서요. 굳이 이런 도식을 도입해야 한다면, '보편/예외'라는 구분이 훨씬 더 키에르케고어가 말하고자 하는 대립에 적절합니다. 실제로, 오늘날 슈미트, 벤야민, 아감벤 등이 바로 키에르케고어에게서 이 개념 구분을 차용하여 '예외상태'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죠.

(3) '믿음' 혹은 '신앙'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믿음은, (오늘날 인식론의 용어를 약간 부적절하게 끌어들이자면) 일종의 '기초 믿음(basic belief)' 혹은 '토대 믿음(fundamental belief)'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체계를 정당화하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에는,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는 확신들이 놓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리고 그 확신들은 주체가 믿기로 '결단한' 것일 뿐, 더 이상 그 확신들에 대해 이유나 근거를 찾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키에르케고어의 주장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개념적인 논증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북극의 북쪽' 같은 말이 무의미한 것과 마찬가지죠. '북쪽'이란 어떤 지점이 북극 방향을 향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북극'에는 더 이상 '북쪽'이 존재하지 않죠. 개념적으로 '북극의 북쪽'이 말이 되지 않으니까요. 마찬가지로, 키에르케고어가 강조하는 것도 (혹은 키에르케고어의 주장을 이어받아 비트겐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이 강조하는 것도,) 우리의 지식의 게임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정당화'나 '이유' 따위를 묻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지적입니다. 삶의 가장 궁극적인 지점에서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는 거죠.

(4) 키에르케고어는 상대주의자인가?

'상대주의'라는 용어로 정확히 무엇을 지칭할 것인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논의의 맥락이 중요하긴 하지만, 대개 상대주의는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가 문화나 관점마다 상대적이기 때문에 참/거짓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거나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는 입장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 점에서 '상대주의'와 '회의주의'를 거의 동의어인 것처럼 사용하고는 하죠. 이런 의미의 상대주의라면 키에르케고어는 당연히 거부할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키에르케고어는 (a) 참/거짓의 기준이 주체마다 상대적이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b) 이 사실로부터 참/거짓을 논의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지는 않으니까요. 오히려 각자가 자신의 참/거짓 기준을 가지고서 삶의 문제에 대해 분명한 가치 평가와 선택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키에르케고어의 주장입니다. 모두가 각자의 신앙을 가지고 참/거짓에 대한 분명한 결단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거죠. 이런 입장을 표현하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지만, 적어도 키에르케고어에 대해서는 '신앙주의(fideism)'라는 명칭이 가장 많이 적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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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헙니다!! 어느정도 가닥을 잡은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