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전에 실수로 엔터키를 눌러서 충분히 수정되지 못한 글이 올라갔습니다. 동일한 내용입니다.)
매번 서강올빼미에 접속할 때마다 선생님들의 감사한 정리글들을 통해 다양하고 중요한 철학적 주제들을 접하게 되고 배울 수 있어서 기쁘지만, 동시에 매번 위압감이 듭니다. 제 자신도 서강올빼미에 '적어도 내가 공부한 것은' 원숙히 정리해서 소개하고 피드백도 받고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음에도 불구, 선생님들에 비해 저 스스로의 수준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정말 이루 말할 수 없게 크게 들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이는 비단 제가 '경험'이 없기도 하거니와, 제 스스로 느끼기에는 '내가 제대로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학에 재학 중이지만 사실상 텍스트들과 대단히도 친해지게 된 것은 군 생활동안 혼자 공부하면서였고, 그래서 스스로의 강독과 글에 대한 결핍을 느끼면서도 도저히 ‘함께 공부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어 갑갑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에 선생님들께 질문드립니다.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철학 텍스트 강독/연구/탐구를 해야하는 것입니까?
ㅡ 이런 피상적인 질문은 자체로 실례가 될 수밖에 없으니, 아무 밑천도 없이 맨 땅에 헤딩하고 있는 제 현재 '보잘 것 없는 공부 방식'을 조금 적겠습니다.
현재 레비나스의 <전체성과 무한>을 이전보다 조금 깊게 탐구하고 있습니다. 저희 학교 교수님의 강독 방식을 흠모하여서 학부생의 신분으로 어깨너머 배운 그 방식을 따라 해본답시고 뱁새 가랑이 찢기 합니다만... 교수님의 강의 계획서에서 그 방식이 조금 소개되고 있습니다.
논점point을 잡아내고 논점을 중심으로 논증argument을 재구성해 보는 것, 숨겨진 가정들assumptions을 찾아내고 논증의 타당성validity 혹은 건전성soundness 혹은 설득력persuasiveness을 검토하는 것, 논증과 논증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 나아가 텍스트 전체의 흐름을 일관하면서 저자가 명시화할 수도 있었지만 명시화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던 것"을 다시 "불러내는" 시도를 해보는 것, 그렇게 해서 이 모든 시도들을 통해 철학적 사고라는 게 무엇이고 왜 중요한지, 왜 소중한지, 왜 파워풀한지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에 제가 교수님의 빼어난 방법론을 엉성하게 활용하는 방식은 대체로 아래와 같습니다. : 예컨대 [2부_B_5.요소의 신화적 형식]에서 레비나스는 '요소적인 것'에 관해 이런 서술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소에 의한 감각의 이 넘쳐흐름은 순간적 의미를 가진다. 이 넘쳐흐름은 무규정성 속에서 드러나는데, 요소는 이런 무규정성과 더불어 나의 향유에 주어진다. 향유 속에서의 성질은 어떤 것의 성질이 아니다. 나를 떠받치는 땅의 견고함, 내 머리 위 하늘의 푸르름, 바람의 숨결, 바다의 넘실댐, 빛의 반짝임은 어떤 실체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도 아닌 데로부터 온다. 어디도 아닌 데서, 있지 않은 ‘어떤 것’에서 온다는 이 사실, 나타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채 나타난다는 사실, 그래서 결국 언제나 오지만 그 원천을 내가 소유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이 감성과 향유의 미래를 그려낸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김도형 외 2인 옮김, 그린비, 2018, p.205)
이에 대하여 제가 최대로 평이하게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를 위해서’)쓴 정리 글입니다.
이 요소의 넘쳐흐름은 ‘무규정성’에 의한 것이다. 요소의 이 무규정성이 향유에게 주어진다. : 여기서 <향유>라는 단어가 보다 이해를 돕는 역할, 아니 그 말 자체가 굉장히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나를 떠받치는 땅의 견고함, 내 머리 위 하늘의 푸르름, 바람의 숨결, 바다의 넘실댐, 빛의 반짝임”의 저 모든 서술들은 하늘과 바람과 바다를 ‘즐기기 위한 감각적 표현들’이지 그것들을 ‘대상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다. 때문에 “향유 속에서의 성질은 어떤 것의 성질”, 즉 실체의 속성과 같이 이성의 엄명한 파악으로 이해되어야할 종류의 것이 아니다.
또한 “그것들은 어디도 아닌 데로부터 온다. 어디도 아닌 데서, 있지 않은 ‘어떤 것’에서 온다는 이 사실… (후략)”라고 레비나스가 쓰고 있는 이 지점에서 ‘어디도 아님nowhere’ ‘있지 않은 어떤 것something that is not’이라는 표현들에 얽혀있는 것은 어쩌면 <형상>의 문제는 아닐까? 후설의 지향성이 필요로 하는 ‘형상(Eidos)에 대한 직관’의 방식과 다르게 나아가려는 것이 아닌가? - 이러한 의문에 관해.. 나는 후설의 이론을 아직 충분히 숙지하지 못한바 후설을 토대로 무얼 말할 수가 없음.
다만 적어도 『존재에서 존재자로』에서 레비나스가 ‘그저 있음il y a’의 그 본질적인 익명성에 관해 “정신은 파악된 외재적인 것(un exterieur)과 대면하지 못한다.”(E. Levinas, 『존재에서 존재자로』, 서동욱 옮김, 민음사, 2003, p.94)라고 말했던 것을 이와 관련해 상기해볼 수는 있겠다. 즉 본질적인 ‘있음’ 일반에 대하여 이성적 사유 혹은 노에시스의 지향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어떤 명확한 구분을 가능케 하는 외면이 가능하지 않고, 요소에 대한 향유로써의 접근 때문에 지시적 특칭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이에 확실히 ‘요소적인 것’은 ‘il y a’에서 향유-감성의 사유가 추가되면서 발전된 개념으로 보인다.
“결국 언제나 오지만 그 원천을 내가 소유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이 감성과 향유의 미래를 그려 낸다.” 『전체성과 무한』에서는 “현재”를 어디까지나 “재현”에 의한 것으로 이야기한다.(“재현한다는 것, 그것은 단지 ‘새롭게’ 현전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현행의 지각을 현재 자체로 되돌리는 것이다.” 『전체성과 무한』 p.182) 반면 감성과 향유는 주체에게 실재를 현재적인 것으로 사유할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의 불안정성을 대면케 한다. 그러나 이러한 서술은 감성과 향유를 부정적인 것으로, 재현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째서 요소적인 것을 향유하는 주체가 재현을 통해 요소를 ‘대상화’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 추적하며 서술해내가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글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잘못들을 보게 됩니다.
(1) 다른 사람이 읽기 기꺼운 글이 아니다. (2) 철학 개념이나 사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3) 설명어들이 모호하고 위태롭다.
그렇다면 선생님들, 철학 텍스트 탐구와 그 정리 글을 쓰는 것에 있어서 무엇을 목적해야하며, 어떤 준칙들을 지켜야합니까? 서강올빼미 포럼의 목적이 ‘작업물의 오픈소스화 및 공유’라는 것도 그렇고 저 또한 꾸준히 타인이 읽기 좋은 글을 쓰고 그것을 서강올빼미를 통해 감사한 피드백들을 받아가며 실력을 키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위의 제 정리 방식이 가진 문제점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실 수 있으신가요?
모든 부족하면서 갈망만 큰 사람이 그러하듯이 저 또한 추상적으로 여쭙고만 싶은 것들이 많아 이렇게 두서없고 포괄적인 질문만 드리는 글이 되었습니다. 이런 질문밖에 못하는 것도 글쓴이의 부족함의 반영이겠거니 하고 너그러이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공부해야 준수한 연구자로 거듭날 수 있는지... 어디 마땅히 여쭐만한 곳이 없어 이렇게 간절히 질문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