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대응론 논박: 칸트의 경우

두 분의 댓글이 재미있네요. 특히, 아래의 부분이요.

"왜 이렇게 진리대응론의 기세가 대단한가?"라는 물음은 저도 오랫동안 고민했던 문제였어요. 비트겐슈타인계열의 철학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왜 오늘날 분석철학의 주류가 반비트겐슈타인적 입장으로 회귀하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거든요.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칸트철학의 몇 가지 핵심 아이디어들을 계승하고 있기도 하다는 점에서, 왜 이렇게나 분석철학의 주류가 '비판 이전의' 스콜라철학적인 형이상학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도 어려웠고요.

그리고 실제로,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1950년대 무렵의 철학적 경향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개 비슷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예전에 올린 적이 있지만, 휴 프라이스는 "Metaphysics after Carnap"의 도입부에서 만약 카르납이 살아 있었다면 오늘날 일어난 형이상학의 부활을 목격하고서 깜짝 놀랄 거라고 적었죠.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완전히 무너진 줄 알았던 형이상학이, 오늘날 철학계에서는 너무나 의기양양하게 다시 부활해버렸으니까요.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왜 그렇게 부활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다소 미심쩍게 보이고요. (생각해 보니, 카르납도 잘 알려진 칸트주의자네요. 비트겐슈타인과 다소 결이 다르긴 하지만, 카르납도 기본적으로는 칸트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형이상학을 거부했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 현재까지 제가 분석한 잠정적인 결론은 세 가지에요.

(1) 직접적 지시 이론의 영향

가장 중요한 영향은 1970년대에 도넬란, 크립키, 퍼트남을 통해 일어난 직접적 지시 이론의 득세이지 않은가 해요. 기존 언어철학의 패러다임이었던 프레게와 러셀의 기술주의는 "의미가 지시를 결정한다."라는 테제를 내세웠던 반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등장한 도넬란, 크립키, 퍼트남의 지시주의는 "지시가 의미를 결정한다."라는 테제를 내세웠잖아요. 그리고 이 입장들이 소위 '양상적 논증', '의미론적 논증', '인식적 논증'을 통해 기술주의에 대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적어도, 그런 승리를 거두었다고 인정받으면서) 의미에 앞서는 직접적 지시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언어철학에서는 주류가 되었죠. 어떠한 의미 틀이나, 개념 틀이나, 언어 틀 같은 게 있어서 그 틀이 우리의 지시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적으로 대상과 직면할 수 있고, 심지어 그 대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가리킬 수 있고, 그 본질에 대해 '형이상학'을 성립시킬 수 있다는 생각 말이에요. 실제로, 맥도웰도 직접적 지시 이론이 이러한 식의 생각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지적하죠. (물론, 그는 이러한 식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지만요.)

There was a time when the standard view of reference was inspired by Russell’s Theory of Descriptions. The idea was that whenever a thought is directed at a particular object, part of its content is given by a specification of the object in general terms: conceptual terms, the equation I am considering would lead us to say. The trend is to recoil from this. There are kinds of object-directedness in thoughts that cannot easily be made to fit that mould. For instance, a perceptual demonstrative thought surely homes in on its object not by containing a general specification, with the object figuring in the thought as what fits the specification, but by virtue of the way this sort of thinking exploits the perceptible presence of the object itself. If the conceptual is equated with the predicative, this resistance to the general application of the Theory of Descriptions takes the form of saying that in the cases that warrant the resistance, singular reference is, or rests on, an extra-conceptual relation between thinkers and things. So the picture is that the conceptual realm does have an outside, which is populated by particular objects.

J. McDowell, Mind and World, 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p. 105.

(2) 형식적 의미론의 영향

다음으로는, 역시 1970년대 무렵에 데이비슨을 통해 일어난 형식적 의미론의 부활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데이비슨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비트겐슈타인과 오스틴의 영향으로 인해 소위 '일상 언어'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잖아요. 하지만 데이비슨이 타르스키의 '규약 T' 도식에 근거해서 의미론을 성립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일상 언어철학이 주류에서 밀려나게 되죠. 특별히, 우리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는 언어에 대해서조차도 기존 언어의 조합을 통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의미의 '합성성(compositionality)'이 일상 언어철학 및 사용 이론에 대한 아주 결정적인 반론으로 제기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언어의 의미가 일상의 사용 상황에서만 성립한다면, 어떻게 새롭게 합성된 언어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거죠. 반면, 형식 의미론은 몇 가지 유한한 언어로부터 무한한 언어 사용을 설명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적어도, 그런 설명의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크게 각광받았고요. 그래서 해커와 베이커 같은 비트겐슈타인주이자들도 합성성에 대해 언어철학에서 널리 퍼진 관점에 도전하는 것을 중요한 논의거리로 삼는 것 같더라고요.

We shall probe the seemingly clear notion of the truthconditions of a sentence, which is commonly taken to be the key to any cogent semantic theory. We shall place pressure upon the apparently obvious distinction, within every sentence, between its descriptive content (the state of affairs it describes, its sense) and its force (e.g. whether it asserts or orders something). We shall test the soundness of the supposition that a language is a system, a calculus consisting of a network of hidden rules tacitly employed whenever we speak or understand what is spoken. And we shall examine whether the question of how it is possible to understand sentences never heard before really is as deep as it is commonly taken to be. In general we shall resist by argument the theorists' habit of frog-marching the neophyte straight to a ceremony of initiation into the full mysteries of the modern science of language.

G. P Baker & P. M. S. Hacker, Language, Sense and Nonsense, Oxford: Blackwell Publisher, 1984, pp. 11-12.

또 데이비슨이 형식적 의미론을 성립시키기 위해 '규약 T'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진리 대응론이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하는 데 영향을 준 것 같아요. 물론, 타르스키나 데이비슨 자신이 고전적인 의미의 진리 대응론을 옹호한 것은 아니지만, "s는 참이다. iff p"라는 도식은 진리 대응론적인 직관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정말 많은 도식이잖아요. 실제로, 타르스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진리 이론에서 이 도식을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형식적 의미론의 부활과 진리 대응론적 아이디어의 부활이 함께 가는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형식적 의미론의 부활을 일으킨 데이비슨 본인은 정작 비트겐슈타인과 상당히 가까운 면이 많은 철학을 전개하였지만, 그 이후의 포도어나 르포어 같은 인물들은 비트겐슈타인적인 언어철학과는 결이 많이 다른 철학을 전개하게 된 것 같고요.

(3) 존재론적 개입 기준의 영향

콰인이 제시한 '존재론적 개입 기준'도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방식으로 해석되는 것 같아요. "존재하는 것은 변향의 값이다."라는 것이 콰인의 유명한 명제잖아요. 이 명제대로라면, 우리는 특정한 명제를 참으로 받아들일 때, 그 명제를 참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셈이죠. 물론, "페가수스는 존재한다."와 같은 명제를 누군가는 "날개 달린 말은 존재한다."로 해석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누군가는 "페가수스화하는 것은 존재한다."로 해석해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어떠한 방식으로든 각각의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존재한다고 상정하는 것들을 가지게 되죠.

물론, 존재론적 개입 기준이 그 자체로 고전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함의하는 것은 아니죠. 실제로 콰인 본인조차 존재론적 상대주의자였고요. 하지만 직접적 지시 이론과 타르스키의 진리 이론이 득세하는 상황에서는, 존재론적 개입 기준이 상당히 무건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참'으로 받아들이는 문장들과 그 문장들을 '참'으로 만들어주는 개체들이, 단순히 우리의 개념 틀이나 우리의 언어 사용 속에서만 성립하는 사물이 아니라, 그 바깥 실재의 영역에 존재하는 사물이어야 한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이죠.

(4) 주제 넘는 형이상학과 겸손한 형이상학

그래서 오늘날 형이상학을 탐구하는 학자들은 많은 경우 자신들이 실재의 구조에 대해 탐구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 같아요. 정리하자면, (a) 콰인의 존재론적 개입 기준을 따른다면, 우리가 특정한 문장들을 '참'으로 받아들이는 이상, 우리는 특정한 존재자들이 존재한다고 개입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b) 직접적 지시 이론을 따라, 우리가 후험적 필연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물은 H2O다."와 같은 참인 문장들이 존재하고, (c) 타르스키나 데이비슨적인 진리 이론에 따라, 그 문장들의 의미는 일종의 진리 대응론적 도식에 따라 설명되어야 한다고 상정하면, 우리가 개입하고 있는 존재물들이 우리의 개념 틀이나 언어 틀 바깥의 존재물이라는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 같아요. (적어도, 수많은 형이상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다만, 아주 전형적인 분석 형이상학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일련의 생각들을 너무 과장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하는 분류들도 꽤 있는 것 같더라고요. 그 중 제가 가장 놀랐던 케이스는 프랭크 잭슨이었어요. 로티는 크립키, 루이스, 잭슨을 싸잡아서 "부끄러운 줄 모르는 물리주의적 형이상학(unabashed physicalist metaphysics)"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아주 맹비난을 한 적이 있는데, 정작 잭슨의 책을 읽어보니 자신이 수행하는 작업의 함의를 그렇게까지 과대평가하지 않더라고요. 잭슨은 분명히 강한 형이상학적 실재론자인데도, 자기가 하는 모든 언어적 분석이 결국 더 근본적인 용어와 덜 근본적인 용어에 대한 분석이라고 담담하게 인정하더라고요. 그러면서 형이상학이 실재에 대해서 '주제 넘는' 주장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도 지적하고요.

We now have an example of conceptual analysis in what I call its immodest role. For it is being given a major role in an argument concerning what the world is like.

[…]

I think that we should be suspicious of conceptual analysis in its immodest role—it gives intuitions about possibilities too big a place in determining what the world is like. However, the role for conceptual analysis that I am defending in these lectures is the modest role: the role is that of addressing the question of what to say about matters described in one set of terms given a story about matters in another set of terms. Conceptual analysis is not being given a role in determining the fundamental nature of our world; it is, rather, being given a central role in determining what to say in less fundamental terms given an account of the world stated in more fundamental terms.

F. Jackson, From Metaphysics to Ethics, Oxford: Clarendon Press 1998, pp. 43-44.

그래서 저는 잭슨의 논의를 읽고서 분석 형이상학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좀 바뀌게 되긴 했어요. 그 이전까지 저에게 잭슨은 '보편자'의 존재라든가 '감각질'의 존재 같은 것들을 강하게 주장하는, 전형적인 '비판 이전적' 혹은 '스콜라철학적' 형이상학자였거든요. 그런데 정작 제가 전형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리고 실제로도 그 분야의 전형인 사람이) 자신의 작업을 담담하게 '겸손한 분석'에 한정짓는 것을 보고서, 어쩌면 분석 형이상학자들도 '실재의 구조'에 대해 아주 나이브한 입장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매번 '보편자'나, '감각질'이나, '가능세계'나, '4차원주의' 같은 아주 특수한 주제에 대해 한정해서만 글을 써서 그렇지, 어쩌면 그 사람들도 '존재론적 개입 기준'과 '직접적 지시 이론'과 '타르스키적 진리 이론'이 반드시 개념 바깥의 실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나름대로 잘 자각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잭슨의 사례를 모든 분석 형이상학자에게로 확장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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