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껏 궁금했던 것들을 올려봅니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가다듬는 시도는 좋은 시도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는 족족 다른 분들이 비판적 코멘트를 남기니 당황스럽고 그 이유를 알고 싶어도 계속 다른 글들을 보라고만 하니 답답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주장을 남기실 때마다 비판적 코멘트가, 그것도 "질문과 주장의 모호함"에 대해 달리는 상황은, 질문자 님이 소위 말해서 "철학적 감수성"이 부족하신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자님 스스로 보기에는 명확하고 정교해보이는 표현과 주장들이 남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모호하고 혼동된 것들이라면, 질문자님이 가지고 계신 철학적 사고의 틀이 정교하게 가다듬어지지 못한 상태라서, 이러한 사고의 틀에서 그 어떤 주장이 새롭게 나와도 똑같이 모호하고 혼동된 것들만 나오게 되는 것이죠. 믹서기의 날이 무뎌지면, 아무리 새로운 재료를 넣어봤자 잘 안갈아지는 것처럼요. (맞나? ㅡ.ㅡ)

그러면 철학적 감수성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일반적으로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는 예술작품을 직접 만들기 보다는, 거장들의 좋은 예술작품들을 많이 보라고 합니다. 언어적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도, 좋은 글들과 좋은 연설 등등을 많이 접해보라고 하죠. 철학적 감수성을 키우기 위해서 역시, 다른 철학자들의 좋은 글들을 많이 봐야 합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다른 분들이, 철학자들이 쓴 해당 주제의 책들을 보라고 권하시는 것입니다.

즉 질문자님께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의 주장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논변을 읽어나가면서 그 세밀한 철학적 감수성을 느껴보고 그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정리/비교해보면서 나의 사고틀을 가다듬는 과정, 소위 "다른 사람의 주장을 소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거 그냥 철학 좀 안다는 놈들이 지들끼리 카르텔 만들려고 짝짝쿵 하는 거 아녀?"

예시를 들어보겠습니다. 한국어 화자로서, 한국어를 배우는 어떤 외국인의 한국어 작문을 첨삭해준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외국인은 한글 이라는 기초 글자체계만을 알 뿐, 한국어 문법을 전혀 모릅니다. 이 상태에서 이 외국인이 한국어 작문이랍시고 써온 글을 우리가 첨삭해주는 것이 가능할까요?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이 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한국어 문법을 배우고 오세요".

마찬가지로 철학에서도 "문법"과 같은 기능을 하는 어느 정도의 규칙이 있습니다. 최소한 철학적/논리적 증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특정한 개념(행복, 자의 등)이 철학연구에서 통용되는 의미 등을 알아야겠죠. 단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싶을 뿐인데 이러한 것들을 요구하는 것이 너무 과도한 것이 아니냐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모든 "학문"은 학문적 담론과 엄밀성을 재생산하기 위해서 이것들을 initiation process로서 정당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대학 수준의 학습을 하기 위해서 "수학능력시험"이 요구되듯이, 철학적 담론을 생산하기 위해서도 그에 걸맞는 노력들이 요구됩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물리적 사건(유리병이 떨어져서 깨짐)을 내가 머릿 속에서 고찰한다고 해서 물리학적 연구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철학적 개념들에 대해 생각한다고 해서 곧바로 철학적 주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에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납니다. 초보자일수록 소위 "첨삭"이나 "비평", "코멘트"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제한됩니다. 오히려 기초적인 부분이 탄탄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의 코멘트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이 많아집니다. 아까 외국인의 사례를 생각해보세요. 첨삭자의 입장에서, 한국어 문법을 30분 배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보다 ( 이 경우 "포괄적"인 조언만이 가능하겠지요; "문법 책 ~ 떼고 오세요"), 한국어를 2년 배운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훨씬 "구체적"이고 "실질적"이게 됩니다 (ex "~~에는 수동태를 쓰지 않습니다").

요약: 자신의 생각으로 소위 "이론"을 만드려는 데에 조급해하지 마시고, 다른 철학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나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 한 번 탐독하고 점검하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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