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로티 간단 정리

예전에 Youn님과 같이 로티에 대해 공부를 하자는 얘기를 잠시 나눴는데, 언젠가 같이 공부할 때 누를 끼치지 않도록 개론서를 이리저리 훑고 있습니다.

제가 읽은 것은 이유선의 <로티의 철학과 아이러니>, 김용준 외의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의 일부 , 김경만의 <진리와 문화변동의 정치학>의 일부입니다. 여러 선생님들이 입모아 말하는 것들이 비슷해서 마지막 책만 정리했습니다. 해당 책의 3장이 로티에 대한 요약이고, 이어지는 4장부터에서 하버마스-로티 논쟁이 다뤄집니다.


김경만은 자신 책 3장에서 로티 철학의 핵심을 <반표상주의>로 규정하고 개괄적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로티의 철학은 <경험주의 비판>과 <다윈적 관점>을 수용하며 구성되었다.

여기서 <경험주의 비판 수용>은 콰인과 셀라스의 경험주의 비판 수용을 의미한다. 콰인과 셀라스의 경험주의 비판은 전통적인 인식론의 토대가 되는 표상주의 비판으로 이해된다. 핵심은 <우리의 언어는 외부 세계와 떨어져서 존재하며 그것을 그대로 비추는 거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언어 공동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대응론을 비판한 두 철학에 찬동하며 로티는 주체/객체 이원론을 거부한다.1)

순수한 거울로서의 언어를 거부한 로티는 다윈주의를 받아들여 자신 주장을 더욱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의 언어는 거울이 아니라,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우리가 잘 조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여기서 다시 한번 로티는 주체에 의한 객체의 표상 문제를 거부한다.

언어의 완벽한 표상적 기능이 허구임을 폭로한 로티의 철학은 결국 <우리의 이해와 인식은 인식론적 근거에 의해 정초되고 비판되고 변화될 수 없다. 오히려 우리 실천과 문화에 다른 해석에 의해 바뀌고 수정될 수 있다>로 이어진다.

여기서 로티는 전통 인식론과 단절하고 해석학과 손잡는다. 그에 따르면 진리가 언어의 함수일 뿐 외부 세계와의 대응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면, 세계의 모든 것은 언제든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고 재기술될 수 있다. 이렇게 로티는 철학의 자리를 <객관적 진리를 위한 비판>이 아닌 <대화를 통한 새로운 인식 지평의 확장>으로 옮긴다. 이제 철학은 <체계적이고 구성적>이지 않고 <교육적이고 치료적>이어야만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사회적 실천은 <체계에 대한 보편타당한 이론적 기반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당연시해온 실천에 대한 비판적 사고>이다. 달리 말해, 철학은 제1학문의 위치를 포기하고 만인을 구원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이제 중요한 것은 <자신을 억눌러왔던 권위를 자신의 어휘로 재서술하는 행위를 통해 미학적이고 사적인 만족을 얻는 것>, <미학적이고 개인적 기준을 창조함으로써 자신을 지배하던 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것>을 돕는 것이다.2)3)

물론 그렇다고 해서 로티가 나치와 같은 것을 옹호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로티는 단지 <차이를 극복하게 돕는 중립적이고 공통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도르노의 이념에 따를 것이냐 나치 이념에 따를 것이냐>라는 선택은 열려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나치 이념에 동조하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버마스-로티 논쟁의 핵심이다.

  1. 콰인은 논리 실증주의·환원주의·경험주의자를 비판한다. 비판의 핵심은 "어떤 이론적 단어도 그 단어가 위치 지워진 이론 전체를 떠나서는 외부세계와 대응하는 ‘단일한’ 경험적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122). 이에 분석명제/경험명제 구분도 해당 명제를 구성하는 이론적 단어들의 짜임 속에서만 가능함이 밝혀지고, 이제 '분석명제가 갖고 있던 외부세계를 나타내는 특권적 지위'는 포기된다(123). 셀라스의 주장도 콰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핵심은 "모든 경험은 그것이 어떤 '특정한 경험'으로 인식되기 위해서는 이 경험을 그러한 경험으로 인식하게 해주는 '개념들'을 이미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123). 그리고 개념들을 갖고 있다는 것은 곧 이미 어떠한 언어 공동체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 로티에 따르면 '자신을 억눌러왔던 권위' 또는 '자신을 지배하던 힘'으로부터 자신을 구하는 것에 일조하는 것이 철학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을 미학화하고 아이러니화하는 작업 자체가 이미 사회적이고 공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 아닌가? 내가 보기에 로티가 말하는 "사적인 만족", "개인적 완성", "자기 창조"는 공적인 성격을 가질 여지가 크다(153).

  3. 김경만은 아름다움과 숭고함에 대한 로티의 말을 인용하며 로티가 말하는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로티에 따르면 철학자(지식인, 이론가)는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숭고함을 추구하는 탓에 아이러니스트가 되기 힘든 존재이다. 아마 이 논리를 베이스로 로티는 니체가 완벽한 아이러니스트가 되는데에 실패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8개의 좋아요

김경만 교수님의 책을 읽으셨군요!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김경만 교수님의 학부 수업을 통해 로티를 처음 접했어요. (그나저나, 종합시험 결과가 나오는대로 바로 일정을 잡아보겠습니다. 왜 이렇게 결과가 늦게 나오는지 불안하네요;;)

4개의 좋아요

김 선생님의 책을 두권째 읽고 있는건데, 복잡한 내용을 상당히 깔끔하게 꿰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다른 학자들의 기에 안눌리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한다고 해야할까요? 그런 기세가 느껴져서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유선 선생님의 로티 개론서도 상당히 내용이 좋습니다. 로티를 말 그대로 처음 접하게 해준 책인데, 정말 술술 읽히고 압축적으로 잘 쓰여져 있어서 도서관에서 빌린 후에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도 읽고 길 걷는 내내 읽었네요.

Youn님께 여쭤보고 싶은게 있어서 메세지를 보낼까 싶었는데, 다른 분들과 공유해도 상관없는 내용이라 댓글로 질문드릴게요.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을 읽으려고 하는데, 혹시 영어 원전과 함께 읽는게 권장되는 책인가요?

4개의 좋아요

저는 '어둠의 경로'로 책을 자주 읽다 보니, 번역본을 꼼꼼히 살펴보지 않았어요. 다만, 김영건 선생님에 따르면, 번역이 본래의 내용과 반대로 되어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영건 선생님이 로티의 철학에 동의하시진 않으셨지만, 『철학과 자연의 거울』만큼은 현대철학의 고전이라면서 항상 극찬하셨는데, 번역에 잘못된 부분이 있었다고 하시는 걸 보면 영어판과 같이 읽는 게 좋을 것 같아요.

3개의 좋아요

지금으로선 장담할 수 없지만, 만약 두 분께서 하시게 되면 공개적으로 말씀 한 번 주실 수 있으실까요? 로티 말만 많이 들어봤지 한 번을 읽어본 적이 없네요. 배워가며 읽어보고 싶어요.

5개의 좋아요